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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오늘날 성도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 기록한 성경 본문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였을 때 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응답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모습에서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하면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경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여 들은 말씀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상고하고 확인하는 것은 결코 말씀을 전하는 자를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온전한 확신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이 없는 신앙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아서 고난을 당할 때 좌절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다루고자 하는 안식일은 오늘날 성도들이 아무런 생각도, 확인도 하지 않고 선입관에 의해서 쉽게 아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다른 주제는 물론 특별히 이 안식일은 베뢰아 성도들이 취했던 자세를 가지고 성경을 잘 상고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은 매우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안식일에 대한 성도들의 생각은 여러가지로 나뉠 수 있지만, 대개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안식일이 신약 시대에 와서 주일로 바뀌었으며, 구약 성경의 안식일에 대한 모든 규정들이 수정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주일 성수에 힘을 쓸 것입니다. 둘째는 구약 성경의 안식일이 많이 개혁되었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미 복음주의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제 7일 안식일교가 이러한 주장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구약 성경의 안식일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다르게 변화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두번째 견해는 정통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이미 배척한 견해이지만, 첫번째 견해와 세번째 견해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많이 혼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쩌면 앞서 밝힌 것처럼 첫번째 견해가 교회에서 지배적인 견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안식일에 대한 성경 말씀을 상고함으로 밝혀지겠지만, 오늘날 성도들이 성수하는 주일이 단순히 구약의 안식일에서 전이된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에서 강조된 주일 성수에 대해서 아무런 자각이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주일 예배를 참석하는 것으로 주일성수를 다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맹목적으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주일성수를 잘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일성수나 안식일의 문제는 어느 예배를 참석하고,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안식일은 무엇이며, 그 안식일에서 주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지켜야 할 참된 주일 성수의 모습은 무엇인가?
* 제 1 강 : 창조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안식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을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1-3).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하신 제 7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한 유명한 신학자는 - 이 사람의 이름은 폰 라드(von Rad)입니다 - 는 천지 창조에 나타나는 일주일의 개념, 그 중에서 특히 마지막 제 7일은 안식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천지창조를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2장 어디에도 안식일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셨고 제 7일에는 쉬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안식일이라는 용어가 창세기 1-2장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안식일과 관련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참조, 출 31:12-17).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지창조 기사에서 안식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엿새와 제 칠일 간의 관계입니다(창 1:1-2:3). 창세기 1장 1절 - 2장 3절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모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1-2:3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살펴보면 그것이 일정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지 창조의 엿새는 노래의 후렴구와 같은 구절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1:5, 8, 13, 19, 23, 31). 그런데 놀라웁게도 마지막 제 칠일에는 이러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지 창조의 7일간에 대한 시간 개념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엿새를 오늘날의 우리 하루 개념과 같이 24시간으로 규정하기도 하며, 혹자는 무시간적 요소로 이해하여 천지를 창조하던 엿새 동안의 시간의 길이를 규정지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엿새 동안의 시간 개념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루, 곧 24시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리가 규정지을 수 없는 무제한적인 시간 개념으로 보아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본문 연구에서 드러나 있듯이 엿새 동안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고 하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어 엿새를 정확하게 구분짓고 있지만(그것의 시간 길이와는 상관없이) 마지막 제 칠일에는 날을 규정하는 어떠한 문구도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창조의 엿새에서 하루의 시간을 24시간으로 볼 것이냐의 여부를 떠나서 어쨌든 엿새는 날의 길이가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저녁이되고 아침이 되어 하루가 간 것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칠일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지 않음으로 제 칠일의 하루가 제한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조는 엿새 동안에 완전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제 육일이 지나고 제 칠일이 되었으나 제 팔일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칠일과 관련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칠일이야 말로 무시간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제 칠일은 천지 창조의 엿새가 지난 후부터 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 칠일의 시간 개념이 끝나는 때가 언제냐 하는 것은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상관이 있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제 칠일은 영원히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칠일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끝났습니다.
2. 하나님께서 제 칠일을 축복하신 내용입니다(창 2:1-3).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잘 상고해야 합니다. 첫째는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제 칠일을 다른 엿새와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엿새 동안 모든 것은 완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제 칠일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이 곧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의 목적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의 목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창조의 꽃도 결코 인간이 아닙니다. 천지 창조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제 칠일, 곧 안식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시거나 곤비함을 느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사 40:28) 사실상 안식이 필요없음에도 불구하고 제 칠일에 안식하신 것은 인간을 위한, 모든 피조물을 위한 모범이며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안식하셨다고 하는 안식의 개념을 온전히 이해할 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 곧 제 칠일을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을 향해 행하신 것은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입니다. '복주사'와 '거룩하게 하사'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복주사'는 하나님께서 그 날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거룩하게 하사'는 오늘날 성도들이 가장 잘 혼란을 일으키는 성경의 중요한 개념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룩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할 때 윤리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생활 방식이기 때문에 윤리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의 기본적인 개념은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욕하지 않으며 사기를 치지 않는 것과 같은 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거룩의 일차적인 기본 개념은 '분리'이며 '구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과는 무관하시며 분리되셨으며 구별된 분이심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성전에서 사용된 모든 것들이 거룩하다라는 것은 바로 세상과는 구별된,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구분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역시 그렇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신분상으로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 역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윤리적인 생활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과 이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늘 거꾸로 접근합니다. 일례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다보면 하나님을 잘 믿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참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고 알게 되며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교회 생활 그 자체가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배우고 알게 되어 교회 생활에 열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거의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경우 교회 생활은 이미 알고 교제를 나누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이고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입장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는 바로 시험이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배우는 것보다 먼저 교회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상처를 입거나 시험을 당할 경우 쉽게 교회를 떠납니다. 반면 먼저 새신자 교육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교회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시험을 당해도 자신이 배우고 알게 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신앙에 있어서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룩의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임을 인식한 사람들은 도덕 군자와 같이 윤리 그 자체에 얽매여 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윤리적인 삶은 먼저 하나님과의 기본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거룩하게 생활하라를 단순히 윤리적인 생활로만 이해한 사람은 어느 순간에 윤리보다 자신의 이익이 앞서야 할 때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여 이중적인 생활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 중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이중 장부를 만듭니까?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탈세도 착복도 하지 않는 훌륭한 시민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탈세와 거짓과 착취로 가득차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거룩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면 국세청의 눈을 가리고 사람이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중 장부나 착취와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거룩은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의 기본적인 개념은 하나님께로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제 2 강 : 파괴된 제 칠일의 회복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15, 2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나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이제 제 칠일의 안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의 범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제 칠일의 안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 칠일의 안식을 파괴하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언급한 바와 같이 제 칠일은 창조의 엿새와는 달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무시간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엿새는 하루의 개념(그것이 오늘날의 24시간인지 아니면 우리가 정할 수 없는 더 긴 시간인지는 모르지만)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제 칠일은 -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 여전히 해가 지지않는 영원한 하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칠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한 흡족함과 기쁨으로 쉬신 날이었으며 창조된 피조물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 날이었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 곧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잘 준수했다면 아마도 인류는 완벽한 창조인 에덴 동산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깨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을 더이상 창조주로서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이상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게 된 영원한 안식은 더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안식이 사라지게 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입장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더이상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장소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그 자체가 안식이 사라지고 불안과 고통이 연속되는 삶의 시작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아담은 노동의 고통을 당하여만 했으며,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또다른 피조물인 온 세상이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범죄로 인해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모든 안식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만 고통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범죄로 인해서 땅을 비롯한 모든 세상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 칠일은 본래 인간의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모든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제 칠일을 축복하심으로 쉬셨으며, 그 창조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인간의 타락,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과 안식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생겨난 안식의 파괴를 좌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를 타락한 그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여 타락한 그들을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비록 창세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지어 입히신 옷의 재료가 어떤 동물의 것인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양이든 소이든 간에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창세기 3장 21절에 나와있는 가죽옷은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 당하여할 죽음을 어떤 동물(그것이 양인지 소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할지라도)이 대신 당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동물의 희생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아무런 죄가 없었던 완벽한 피조물인 동물이 대신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엿새 동안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으나(안식을 누리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또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 2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 곧 구속 사역입니다. 이러한 구속 사역은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 동산의 안식에서 쫓겨난 이후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 칠일의 안식과 반대되는 개념인 일, 곧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시작된 일을 강조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안식일 논쟁을 벌이신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된 병자를 발견하시고 그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이 이 사건을 목격하였다면 38년 동안 질병을 앓았던, 곧 거의 치유 불가능한 환자를 고쳐주었다는 것이 큰 화제가 되고 주목을 끌었겠지만,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아니라 치유한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을 할 수 없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치료하는 일은 분명히 일이었으며, 그것은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도 생명이 위독한 환자라면 안식일에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처럼 만성적인 환자라고 한다면 안식일이 지나서도 고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에 그를 고치는 것은 분명히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고의로 어기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셨을 때 예수님의 능력을 생각지 않고 안식일 규정을 어긴 일에만 몰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요 5:15).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만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음을 입은 병자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조차 일로 규정하고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치부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 5:10).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러한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예수님의 이 답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안식은 일을 하지 않는 정도의 저급한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율법에 대해서 해석해 놓은 것)에 따라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전혀 일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유전보다 더 위대한 권세를 지닌 하나님의 경우를 예로 제시함으로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식일이라고 해서 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안식일이 되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계속해서 일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안식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연유된 것입니다. 제 칠일에 복주시고 안식하신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습니다. 죄가 있는 한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참된 안식, 곧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기쁨과 평안, 그리고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 이것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참된 안식이 죄로부터의 구원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그것이야말로 참된 안식입니다.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엿새 동안 노동을 하고 하루는 쉬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참된 안식은 바로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행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타락 이후로 다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따지는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유대인들이 주장하듯이 얼마 이상을 걷지 않는다든가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사람을 치유하지 않는다든가와 같이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규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안식이었던 제 칠일이 인간의 안식을 위한 상징이었듯이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 또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본체, 곧 하나님의 구속을 통한 참된 안식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곧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지으셨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7-2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규정지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구속 사역입니다. 그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인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속 사역인 하나님의 일을 자신을 믿는 것으로 규정지으셨던 것입니다. 안식일과 관련된 제 칠일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었듯이 안식일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제 칠일에 나타난 안식일 개념은 종말론적이며, 예기적인 미래의 안식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지키려들지 않습니까? 주일만 하루종일 교회에 가서 살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식일의 의도가 참된 안식에 있듯이, 주일의 의도 또한 참된 구원을 통한 안식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한 어떤 목사님은 주일에 골프를 쳐도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골프를 치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기 레저 생활과 사업상의 이익을 위해서 주일날 골프를 친다면 다시 한번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불신자를 전도하고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레저나 사업상의 이익과 전도의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을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 개개인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내고 있습니까?
* 제 3 강 : 구원을 상기하라 *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 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안식일에 대한 율법은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모세 오경에 기록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치고 거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가치 기준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 중에서 가장 근본이며,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입니다(이 십계명은 신명기 5장에서도 다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사실 레위기를 비롯해서 모세 오경에 나타난 수많은 율법 조항들은 바로 이 십계명에서 출발합니다. 원칙적인 율법은 십계명이며, 이에서 세부 사항으로 발전한 것이 바로 레위기를 비롯하여 모세 오경에 기록된 수많은 율법 조항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은 안식일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에 적용되는 수많은 율법 조항을 이해하는 원리입니다.
먼저 안식일의 유래를 살펴보면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쉽게 알게 됩니다. 물론 안식일의 기원은 앞서 언급한 두 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창조 사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제 칠일을 제외한다 할지라도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규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은 사실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시내산의 십계명보다도 먼저 생겨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편안한 삶을 그리워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육일에 제 칠일, 곧 안식일에 필요한 양까지 이틀치를 거두고 안식일에는 쉬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출 16:22-30).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어쩌면 모든 율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일런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안식일 규례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십계명보다도 먼저 있었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과 관련된, 즉 십계명과 관련된 안식일의 개념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십계명은 모세 오경에서 두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보내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교육하기 위해서 율법을 재차 강조한 것입니다. 신명기는 시간적으로 비교를 한다면 출애굽기에 비해서 후기의 시각으로 쓰여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서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비교해보면 약간의 시각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모순이나 오류가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을 보다 점진적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것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을 비교해 봅시다.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은 각각 십계명을 기록하기 전에 십계명에 대한 서론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1-2).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신 5:6). 두 구절을 일견하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선포하시기 이전에 십계명을 선포하시는 자신에 대해 계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선포하시기 전에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십계명을 선포할 수 있는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십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로 신음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십계명을 지킬 것을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선포하고 지킬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통 가운데서 구원하신 분이시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십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을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이 선포하신 십계명은 강력한 힘과 효력,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십계명 중에서 제 사 계명인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타난 안식일 계명을 도표를 참조하며 비교해 봅시다.
이러한 도표를 만드는 것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언뜻 보기에도 두 장에 기록된 안식일 계명은 매우 비슷합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출애굽기 20장 11a절과 신명기 5장 14c-15a절입니다. 두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규례를 지켜야 하는 동기 내지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신 것을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동기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것을 그 동기로 삼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율법을 설교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록 연대와 상관없이 출애굽기보다 신명기가 시간대 상으로 후기의 내용임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는 천지 창조 때에 하나님이 제 칠일에 쉬신 것을 동기로 제시하는 반면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안식일 규례가 갖고 있는 동기에 대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천지 창조의 규례에서 출애굽의 구원으로 변화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계시하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앞서 한 제 1, 2 강에서 밝혔듯이 안식일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제 칠일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안식 뿐만 아니라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연관됩니다. 이러한 구원 사역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 중 안식일 계명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계시됩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며,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동기입니다.
창조 규례를 동기로 제시하고 있는 출애굽기 20장 11절과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신명기 5장 15절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더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신명기 5장 15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표현은 ‘너는 기억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제 4 계명인 안식일 계명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출애굽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종살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주며, 신음과 탄식 소리를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고난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셔서 출애굽시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안식을 주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에서 건져내어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서 안식일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시키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계명을 선포하시고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첫째 의도는 하나님이 출애굽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 주신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0장 11절에 언급된 제 칠일의 규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안식입니다(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제 1 강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두번째 의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주일)을 지켜야 하는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규례를 선포하시면서 ‘너는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동기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킬 때마다 상기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 사건이며,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이며, 은총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상기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능하신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과 감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 규례를 주시고 지키라고 명령하신 중요한 의도이며,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킬 수 밖에 없는, 마음 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감사에서 비롯된 동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의 구원을 체험한 이후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면서 제 육일에 이틀치 분량을 거두게 하심으로 안식을 맛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안식일 규례를 지켜야 하는 동기로 창조 규례의 안식과 출애굽의 구원을 강조하셨습니다. 출애굽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늘 상기해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킬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주신 그 은총의 감격을 늘 재연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로 주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죄악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 그자체에 얽매여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급급해 했을 때, 안식일 규례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을 고백하는 현장이 아니라 생활을 옭매는 족쇄로 작용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단순히 지켜야 하는 규정으로 이해된다면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규례에 얽매였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규례에 얽매였을 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책망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지킬 때에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격과 기쁨과 감사에 비롯된 자원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며, 주일을 성수하고 있습니까? 혹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규례에 얽매여 조목조목 조항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어긋난 삶을 살면 정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력 없는 삶을 본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채찍을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주일을 성수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라고 착각하며 지키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구원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자신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주일을 지키는 동기를 잘 살펴봅시다.
제 4 강 언약의 표지(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늘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출 31:12-17).
앞서 3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은 출애굽 사건,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사건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하나의 율법으로 지켜서는 안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자신을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격과 기쁨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순종의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안식일은 창조 규례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 규례는 필연적으로 구원 사역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나서 안식일 규례를 제정하시고 그것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규례는 단순히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사건 그 자체와만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에서 만족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압제에서 구원하여 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으시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안식일 규례를 지킬 것을 명령하시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13).
성경에서 언약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중요한 사건 때마다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언약을 일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노아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일가족과 모든 생물을 홍수에서 건지신 이후에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11). 하나님은 이 언약에 대한 표징으로 무지개를 약속하셨습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더이상 인류를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언약의 증거입니다(창 9:13).
둘째는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부르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며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1-8)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복을 주실 것을 언약하셨으며, 그 자손으로 인하여 인류가 복을 얻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창 17:9-14).
셋째는 시내산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과 압제 속에서 신음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모세의 영도 하에 이적을 통해서 온천하에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며,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이스라엘이 지킬 규례와 율법에 대해 설명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증거판 둘을 직접 새겨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 증거판 둘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입니다(출 31:18; 34:28; 신 4:13; 9:9, 11, 15; 왕상 8:9, 21). 시내산 언약의 표징은 바로 안식일입니다(출 31:16, 17). 이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넷째는 새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셨고 모든 것을 다 공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명령하신 율법의 규례를 어겼습니다. 이스라엘의 배반과 하나님의 징계, 이스라엘의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시키심이 바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후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 오경을 제외한 나머지 구약 성경에서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특히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어기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돌판(십계명)에 새긴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언약을 지키신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이 어기면 그 언약은 파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언약을 맺으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새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1-34). 새언약은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비석에 새긴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위대한 구속 사역의 결과입니다.
앞서 언급된 네 가지 언약을 일견해보면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의 내용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에는 반드시 표징이 따릅니다. 표징은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할례이고 시내산 언약에서는 안식일입니다. 이 표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이 수행해야 할 의무이기도 합니다. 물론 시내산 언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한 국가로서 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전반적인 율례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특별히 강조된 것은 바로 안식일 규례입니다.
안식일 표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에 나타난 할례와 시내산 언약에 나타난 안식일의 관계입니다. 둘다 언약의 표징으로서 매우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때에 제시하신 표징인 할례와 시내산 언약 때에 제시하신 표징인 안식일은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거의 유사합니다. 이렇듯 어순이나 문체 등이 거의 유사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 언약을 맺으셨다고 할지라도 그 이전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이 그 효력을 상실하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물론 새 언약은 문제가 다릅니다. 새 언약 이전의 모든 언약들은 새언약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실체인 새 언약이 맺어진 이상 그림자 역할을 했던 그 이전의 언약들은 그 효력을 상실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도리어 할례와 안식일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관계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먼저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과 더불어 맺으셨던 언약에 입문하는 표징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월절 규례를 잘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가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너희와 함게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출 12:43-48). 유월절 규례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지킬 수 있는 절기입니다. 제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맺은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월절의 참여 기준을 혈통적 이스라엘에 두시지 않고 할례를 받았느냐의 여부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유월절 규례에 참예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할례는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었으며, 언약 공동체에 들어가는 기준이었습니다. 둘째로 안식일은 할례를 통해서 언약 백성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만 하는 지속적인 언약의 표징입니다. 양피를 베는 할례는 단 한번으로 끝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양피는 두 번 다시 벨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할례와 다릅니다. 안식일 규례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은 바로 ‘기억하라’ 혹은 ‘상기하라’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이전에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안식일의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주 안식일이 돌아올 때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비록 일주일 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다 할지라도,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계속해서 지속하기 위해서 안식일이 돌아올 때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상기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내산 언약의 표징이었던 안식일의 주요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안식일은 할례를 받아 언약 공동체에 입문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과 역사하심을 기억하고 참 하나님으로 섬기기 위해서 지켜야만 하는 지속적인 언약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의 목적이 온전히 실행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표징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이며 안식일입니다. 할례를 통해 언약 공동체에 입문함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작정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을 지속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례를 지켰습니다. 그러기에 안식일 규례를 지키는 일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은총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고백하며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안식일 규례를 어기고 안식일에 일한다면 그 사람은 언약 공동체에서 끊쳐지는 저주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도로 안식일(주일)을 성수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육체의 할례는 받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한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된 우리를 양자삼으신 하나님의 은총을 재연하며 감사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례를 어겼을 때 그 사람이 언약 공동체에서 끊쳐지는 저주를 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고유 권한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구원이 너무나 값싼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교회만 출석하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믿음은 행위를 낳으며, 삶 속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단순히 주일에 예배를 참석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을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섬기며, 모든 삶의 기준을 삼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백성을 원합니다. 이렇게 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태어날 수 있으며, 진정한 주일 성수가 가능합니다. 물론 신앙의 어린 아이여서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미약하게나마.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정말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재연하는 삶을 살며 그 구원의 감격을 재연하기 위해서 주일을 성수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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