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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고등학교 학생시절 여러 교과 과목 중에서 국사과목을 특히 좋아하였다.
때문에 대학교 진학과정에서 전공학부 선정문제를 놓고 고민 한번 해보지 않고 역사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도 국내 여행이나 국외여행을 하려고 할 때 고고학과 같은 고대사 분야나 중세사에 유독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직업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끌림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고 기왕이면 여행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가물가물해져가는 세계사와 국사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것도 일정을 쫓아 촉박하게 여행을 소일하는 것보다는 즐겁고 생산적인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일주를 기어코 완주하겠다는 맹열파 교사들,
카파도키아에서 수피춤에 흠뻑 빠져있는
행복한 순간
교과서적이고 원론적인 이념이나 사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여행 현장에서 탐색한 새로운 문화와 역사적 사건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추적해 봄으로서 많은 민족들의 애환과 정취를 발견할 수 있디면 지엽적이었던 나의 인생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미 퇴직을 하였으나 과거의 수업시간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지도하였던 학습 내용들과 여행을 통한 현재의 경험을 가미한 교육이 바탕이 된다면 더욱 노련하고 완숙된 교사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이미 현직에서 물러나 역사의 뒤안길에 들어선 나로서는 이상을 향한 열정과 실현 불가능한 현실과의 사이에서 꿈을 꾸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여 보면서도 내가 좋아하였던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보고 싶은 욕망을 버릴 수기 없었다.
이 아름다운 여교사들 앞에서 사진 한 컫을 눌러보는 초보자 사진사
사진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나는 3개월 전부터 터키여행을 계획하였다.
내가 가장 가보고 싶어 하였던 여행지 중의 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세계사 교과서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될 것이다.
터키는 과거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가 위치하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고 히타이트인들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철제 칼을 만들어 정복전쟁을 일의킨 곳이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집트 람세스 2세와 충돌하기도 하였으며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저술한 페르시아 전쟁사의 주 무대이기도 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유적지와 유물이 산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평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또한 중장비보병 밀집전투대형으로 알려진 팔랑크스 전술을 전개하여 페르시아를 멸망시켰던 알렉산더 대왕의 발자취가 묻어난 곳이기도 하였고 헬레니즘 문화의 산실이기도 한 터키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이틀이나 숙박하였던 이스터 다이아몬드 호텔
5성급 호텔이라고 하여 자랑하고 있었지만
시설은 4성급처럼 느껴졌다.
이스터 다이아몬드 호텔
인류는 구석기시대부터 가족을 거느리고 동물의 이동 경로를 찾아 사냥을 하면서부터 삶은 더욱 향상되어 갔고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정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강가나 구릉에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면서부터 구석기인들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으며 씨족적인 마을은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부족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부족이 늘어나면서부터 초기 국가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기초적인 초기 국가라고 하는 형태가 갖추어지면서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언어와 문자가 사용되어 문화를 후대까지 전수할 수 있는 기틀이 갖추어졌으며 신석기 문화혁명이라고 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곳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이었다.
이러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서북쪽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곳이 오늘날 터키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있는 한국 공원
공원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지만 너무 행복하게 보였다.
형제의 나라 터키의 영원한 발전을 기원해 보았다.
터키는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 가볼 수 있을까하는 원거리 지역이기도 하였고 6.25 사변 당시 한국을 지원하였던 국제연합 16개국 중의 한 국가였기 때문에 항상 혈맹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방송이나 여행사를 통해서 터키의 현황을 수시로 접할 수 있었으며 세계사를 전공하였던 나로서는 우리민족과 처지가 비슷한 터키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꼭 한번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던 중 집사람이 20여 년 전부터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였던 교사들과의 모임에서 터키여행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여친들 끼리만 다녀오겠다는 것을 남자인 내가 굳이 끼어들어 동행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남자가 한사람도 없는 여자들끼리 여행에서 남자가 동행하는 것은 행동이 여간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으나 이번 여행과 같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터키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는 나의 인생에서 영영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불고염치하고 동행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그리도 궁금할까?
한국공원을 바라보니 눈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상념에 빠져버렸다.
전혀 알지도 못한 동방의 고요한 나라 조선은 산천이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이들이 아니었다면 일어설 수가 있었을까?
고맙고 반갑고 악수를 청하고 싶은 마음 정말 간절하였다.
터키여 영원하기를
특히 왕복 항공편이 모두 대한항공이라는 점에서 여행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친구가 안전 여행을 염두에 둔 것 같아 이번 여행은 편안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출발시간이 14:10분 터키 행 인천 공항발이라 출발 전 바쁘게 서두르지 않고도 여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마음에 들기도 하였다.
여행을 추진하는 친구는 현직 교사였다.
많은 지역들을 두루 여행을 하였던 탓인지 여행을 추진하는 과정이 매우 빈틈이 없어 보였으며 꼼꼼하고 세밀하게 몇 개월 전부터 여행 상품과 경비문제를 여행사별로 비교 조사하는 등 좀 더 저렴하면서도 실속 있는 상품을 주저 없이 선택 예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흡족하기도 하였다.
남자도 추진하기 힘든 여행 계획을 여선생님이 몇 개월 전부터 사전 조사를 하여 통보하는 것을 보면 대담성과 임기웅변이 남다름을 예감할 수 있었고 몇 개월 후에는 예기치 못한 사사로 일정상의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여행계획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잘하여 즐겁고 행복하게 터키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2014년 1월 12(일) 오전 11시 인천공항 대합실 3층 출국장 A카운터 앞 노랑풍선 여행사 테이블에서 미팅한다는 선생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후 터키 여행에 대한 부푼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였다.
시즌이 터키와 한국이 거의 같았고 4계절이 뚜렷하며 위도가 비슷하여 우리가 겪는 계절상의 문제는 생각보다 적을 것 같아서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투르크족의 족장인 오스만은 과거 몇 년 동안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였고 부족의 미래가 별로 밝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부족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목초지를 찾아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이동하여 오는 동안 넉넉하지 못한 식량을 줄여가며 부족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이동하느라 마음의 고통과 육체적 피로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초원지대에서의 반복적인 무료한 생활보다는 한결 행복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초원지대를 떠나 가축을 몰고 목초지를 찾아 헤매었던 생활이 답답하고 위험천만하기는 하였으나 부족의 생존과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오스만의 이러한 도전적인 행동은 부족들을 보다 나은 안정적인 지역으로 이주시킬 수가 있었으며 지도자로서 안목을 향상시킬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지루하였던 이동생활 중에서 현재가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생각이 들기는 하였으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들기도 하였다.
하늘을 쳐다보며 멀리 주변지형을 두리번거리는 오스만은 몸이 야위고 지친 듯 보였으나 헌칠하고 후리후리한 몸매는 날렵하고 예리함을 풍기고 있었으며 눈초리는 사자처럼 날카롭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미래의 상황을 미리 예측이나 하였다는 듯 일정에 따라 부족들을 날렵하게 낚아채며 이동시키는 행동은 천하를 호령하였던 알렉산더 대왕과 비견되기도 하였다.
가족과 부족들을 거느리고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남쪽으로 기수를 바꾼 오스만은 수백km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부족의 운명을 결정해야하는 순간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의지하며 따르는 부족들에게 때로는 실망으로 분열시키거나 큰 걱정을 안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때는 마음이 무거워지고 불안하기도 하였다.
침착성과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가짐과 부족의 행복한 삶에 자신의 운명을 걸오 보겠다는 다짐을 하여보기도 하였으나 이날따라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행동이 흔들리거나 의지가 무너지게 되면 곧 가족이나 친지들은 물론 전체 부족의 운명이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부족의 중지를 모아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으며 부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에게는 가까운 친족이라 할지라도 가혹한 처벌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족에게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서슴없이 연장자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였고 신에게도 도움을 청하여 어려운 결정을 처리해 나갔으며 적과의 일전을 목전에 둔 오스만은 오늘 따라 심기가 불안하였던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밤하늘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다운 별들은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저 하늘의 별들처럼 부족의 생존에 이상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고 앞길이 순탄하기만을 조상님들께 빌어보기도 하면서 부족 어르신들의 지혜를 빌리기도 하여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조상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징검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잎만 바라보고 질주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큰 변화가 없어 부족의 협동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아틸라와 같은 인간 사냥꾼을 만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조상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위하면서 희망과 행복을 찾아 남쪽으로 계속 이동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장차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분위기와 급박한 주변 정세 때문에 닥칠 수 있는 부족의 운명이었다.
더 나은 미래의 삶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목생활의 열악한 환경과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부족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였던 고통은 살을 깎고 뼈를 가는 듯 아픈 생사의 갈림길이었으나 더욱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던 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부터 멀리 이동해온 지금은 한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어딘가에서 정착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들면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를 정복하기 위하여 많은 홍역을 치르기도 하였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가 전사하는 등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였으며 이슬람교에 귀의하여 많은 우군을 얻기도 하였다.
좌절보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여 비로소 웃음이 나올 수 있었고 용기기 솟아오르면서 이제서야 사방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뒤를 돌아다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질주하였던 오스만의 앞에는 거대한 동로마제국이라는 기독교국가가 우뚝 버티고 있었지만 초원지대의 유목 기마병이라고 자처하는 오스만에게는 만만하게 보일뿐 두렵다거나 위협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중국의 북쪽 초원지대에서는 많은 유목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흉노족과 선비족 그리고 저족, 갈족, 강족 등은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키기도 하였고 역사의 흥망을 주도하였던 강한 민족들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고고원과 만리장성 북쪽을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 기마민족이었으며 5호라 하여 중국을 위협하기도 하였고 중국 북방을 장악한 민족들이기도 하였다.
흉노족의 인종에 관해서는 투르크계와 몽고계 그리고 아리안계 등 여러 학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투르크계(오늘날 터키)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서양에서는 흉노족을 훈족이라고 하여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특히 아틸라는 5세기~6세기경 게르만민족 대이동 시기에 지금의 루마니아인 트란실바니아를 본거지로 하여 주변의 게르만족과 동고트족을 굴복시켜 동쪽은 카스피 해에서 서쪽은 라인 강에 이르는 지역을 수중에 넣어 대제국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흉노족은 재빠른 기동성을 바탕으로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던 야만족으로 중국을 공포에 몰아넣기도 하였고 흉노족이 월지를 공격하여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으로까지 몰아 붙였던 사건을 한나라 무제가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하여 함께 흉노족을 토벌하려 하였던 중국 한나라 무제의 외교정책은 흉노족의 약탈과 살육을 묵과하지 않으려는 대 흉노 정책이었다.
흉노족은 가을 추수철이나 곳간에 곡식이 쌓여갈 때쯤이면 예외 없이 중국을 침략하여 약탈을 해가곤 하였는데 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사막이나 다름없이 옥토가 황폐화되어 갔고 인구가 격감하는 등 중국의 경제를 휘청이게 할 정도로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가 흉노족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수축하게 하였던 것은 흉노족의 침략으로 인한 파괴와 약탈을 예방하기 위한 강구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일시적인 예방책에 불과하였고 영구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었다.
한나라 무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하여 장건을 사절단으로 대월지에 파견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시도하였으나 성과 없이 장건이 귀국하였기 때문에 흉노족을 토벌하기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40만 대군을 결성하여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
기마병을 앞세운 날렵한 흉노족이라 할지라도 한나라 무제의 40만 대군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고 좌충우돌하다가 북부 유럽 쪽으로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흉노족의 북부 유럽으로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이동을 초래하였고 그 여파로 본래 북부 유럽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게르만족은 A.D.4세기에서 6세기 무렵 대거 남쪽으로 이동함으로서 유럽은 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결국 AD476년 게르만족에게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흉노족의 분파인 돌궐(Tou-Kie)족은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인구는 늘어나고 목초지가 줄어드는 등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되자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식량난과 목초지 문제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더니 동돌궐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와도 교역을 희망하였다.
서 돌궐족 가운데 일부는 1세기경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여 이란, 아프가니스탄 경계선까지 진출하였고 남쪽으로도 이주하여 터기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더니 이슬람교에 귀의하여 많은 원군을 얻은 후 급기야는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협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 돌궐족이 터키를 일컫는 투르크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들을 일컬어 투르크족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다민족과 다문화의 양상을 띤 민족 구성을 이루기도 하였다.
투르크족은 셀주크와 오스만이 있었으나 셀주크 투르크족은 테무친의 손자인 훌라구에 의해서 무너져서 몽고 4한국 중의 하나인 일한국으로 편입되었으며 오스만 투르크족은 현재 터키의 전 왕조를 일컫는다.
오스만 투르크족은 주변 여러 국가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가더니 1453년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유럽을 짓밟기 시작하였으며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그리스와 발칸반도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대제국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732년 한 때 후 옴미아드왕조 압둘라만 장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을 침공하여 유럽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프랑크왕국을 구출한 사람은 메로빙거 왕조의 재상 카를루스 마르텔이었다.
이슬람세력이 유럽을 종횡무진 휩쓸고 있을 무렵 해성 같이 나타난 재상 카를루스 마르텔은 투르와 포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세력을 물리치는 등 큰 공로를 세웠지만 사실 이슬람 세력은 아바스왕조와 후 옴미아드왕조로 분열된 상황에서 유럽을 제패한다고 하는 것은 기우에 불과 하였을 것이다.
1571년에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에스파냐, 베네치아, 로마 교황의 기독교 연합 함대가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싸워서 크게 이기기는 하였으나 무패를 자랑하던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처음으로 격파하여 유럽인의 사기를 높이는데 그쳤으며 그이상의 의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 때문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역사를 만들어 나갔던 주인공이나 현장들을 살펴보고 가물가물하게 기억에서 잊혀 갔던 역사를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치매를 예방할 수 있는 뇌기능의 회복으로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학생들에게 새로운 역사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사라졌으나 목이 메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그동안 역사를 연구하고 지도하며 학생들과 동고동락을 하였던 세월이 30여 성상에 이르렀음에도 역사에 대한 관심을 돌릴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인 터키 땅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고 가슴이 벅차고 즐거움에 넋이 나갈 것 같은 느낌은 전에 느끼지 못하였던 감정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행하였던 곳은 지구상 4대 문명이 발생하였던 곳 중의 한 곳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일부였다.
이 지역은 역사의 변화 속에 부침하여 여러 민족들의 생활사를 살펴볼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 무대이기도 하였고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을 꿈꾸고 정복지 여러 곳에 세계 시민주의 사상을 전파하여 민주주의 사상을 싹트게 하였으며 헬레니즘 문화를 불지피운 곳이기도 하였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에 전도하기 위하여 성 바오로는 세 번이나 이 지역을 거쳤으며 과거 이오니아 반란의 중심지이기도 하여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낳게 하였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후한 광무제가 로마제국에 파견하였던 감영이 비단을 낙타에 실고 걸었던 실크로드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으며 카라반사리(숙소)가 곳곳에 있어 휴식을 취해 가면서 실크로드를 따라 낙양에서 로마까지 왕래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던 Great Silk Road를 버스를 이용하여 이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크로드는 요소요소에는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카라반 상인들은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고 비단을 팔아 경비로 충당하기도 하였으며 신기한 물건을 발견하면 비단과 교환하여 낙타에 실고 본국으로 돌아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던 길이기도 하였다.
실크로드는 동서를 연결시켜주는 국제 교역로로서 이 길을 통하여 중국 한나라의 비단과 차가 서방으로 수출되기도 하였고 제지술이 아랍에 전파되기도 하였으며 비단과 차의 수요가 폭증하면서 중국의 비단산업과 차 산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유럽의 새로운 지식과 과학기술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실크로드를 통해서였다.
실크로드를 지나는 길에는 많은 도시들이 있었는데 이중 사마르칸트나 안티오크 에페수수는 대표적인 실크로드상의 교통 요충지로서 수많은 상인들이 활동한 흔적들이 묻어있는 상업도시였고 이러한 도시들의 흥망성쇠는 동서를 왕래하였던 상인들의 애환과 함께하고 있었다.
터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그리스 문명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문명권의 변두리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동양과 서양을 연결시켜주는 지형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 항상 전쟁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던 탓으로 피해를 비껴갈 수 없었던 지역이기도 하여 국민들의 정체성은 늘 양면성을 띄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또한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세력의 격전지이기도하였기에 많은 격변을 거쳐 왔던 지역이기도 하여서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여행 관련 정보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한 때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게 철기 문화를 보급하기도 하였고 모세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이집트 신왕조 람세스2세와 시리아 지방의 패권 장악 문제를 놓고 충돌하였던 히타이트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으며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이 이끈 군대가 잇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였고 동방의 패자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켰던 현장이기도 하여 이번 여행은 지대한 관심 속에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터키와 한국의 우호를 강조한 상징탑
삼층 석탑이다.
세계사 사상 최초의 동양과 서양의 충돌이라 할 수 있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도시국가들 간 전쟁을 유발시킨 곳도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이라는 것이 머리에 떠올랐으며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남하한 투르크족이 이슬람교에 귀의하여 세력을 확장하더니 바그다드를 공략한 후 술탄이란 칭호를 부여 받으면서 이슬람교 세력의 확산을 주도하였던 셀주크투르크족과 오늘날 터키 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투르크족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성 바오로는 터키 길리기아 주의 다소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대인 혈통을 유지하면서 열성적인 유대교 신자로서 신앙 활동을 하였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다마스쿠스에서 환상 중에 부활한 예수를 만나 회개하여 개종하였다는 주장은 널리 알려진 내용으로 나의 머리에 기억되어 있었다.
6.25 사변에 참전하였던 군인들의 명단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인원이 참전하여
약 3천명이 고귀한 희생을 치렀다.
참전 연인원:14,936명
한국 공원 정문
터키 사람들 정말 존경합니다.
일생을 기독교 전도에 헌신하였던 성 바오로는 3차례에 걸쳐 여행하면서 로마에까지 기독교를 전도하려하였으나 로마의 기독교 탄압이 상상을 초월하였던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2차와 3차를 경유할 때 지나갔던 곳이 유대의 예루살렘 ~ 시리아의 안티오크 ~ 터키의 에페수수 그리고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 코린트여서 터키의 에페수수가 여행일정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불교성지인 네팔의 룸비니와 인도 사르나트의 녹야원을 방문하였을 때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멈출 것만 같았는데 이번 터키 여행은 성 바오로가 전도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에페수수와 그의 탄생지인 다소를 들러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2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에서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던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슴을 억누르기도 하였고 가톨릭의 꽃인 성 소피아 성당의 호화롭고 고색창연한 돔형 입구는 신들의 작품일 것이라고 평소에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이슬람교 국가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하는 성 소피아성당은 콘스탄티누스 2세가 어머니 성녀 헬레나에게 봉헌한 교회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성 소피아 성당의 화려한 야경
가슴이 뭉쿨하고 경외감이 들었다.
A.D.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한 것도 어머니 성녀 헬레나의 충정 어린 고언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며 신앙심이 누구보다도 깊은 어머니의 신앙적 정체성을 보고 감격한 콘스탄티누스 2세는 하늘에서 하강한 천사를 보는 듯 마음의 동요를 느꼈을 것이다.
326년, 성녀 헬레나는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예수 행적의 발자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콘스탄티노플 궁전에서의 고요하였던 날씨는 항구에 도착하자 바람에 거칠어지기 시작하였고 파도는 넘실거리며 춤을 추는 듯 보였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특별히 명령하여 마련한 깨끗하고 잘 정비된 선박이 부두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바다의 심한 풍랑 때문인지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파도가 선박을 더욱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겉 모습은 멀쩡하였으나 내부는 벽이 덧칠하여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랍문자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오스만 왕조시대에 헐리지 않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고
아타튀르크(무스타파 케말)의 세속주의 개혁정책에 의하여 겨우
현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다.
선박의 난간을 잡고 바다를 지켜본 성녀 헬레나는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산들이 중첩 되는 것처럼 넘실거리는 너울을 바라보고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호흡이 멈출 것 같은 공포가 온몸을 엄습해와 과연 성지를 순례할 수 있을 것인가가 걱정스러웠을 것이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겠거니 생각하며 선실로 들어가 기도에 전념하였을 것이다.
맹호의 포효가 으르렁대는 것처럼 파도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움 증세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더니 갑자기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여 선실로 들어가 침실을 찾았으나 붕 떴다가 떨어지는 순간의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연상하게 하였다.
성스러운 벽화를 뜯어내고
그자리에 시멘트로 발라버린 몰상식한 오스만왕조 술탄들
현재의 벽화 모습으로 보아
과거 오스만왕조시대 술탄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였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끄러지듯 파도를 가르며 바다 위를 달리던 선박은 내해로 들어섰는지 평정을 되찾더니 잔잔한 파도 위를 질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여인들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햇살이 바다를 비추고 있었으며 은빛 파도 위를 나는 갈매기 부부 새들이 하늘을 비행하면서 이방인의 출현을 반기고 있었다.
바다 멀리서 보이는 에페수수는 풍요롭고 여유 있어 보였으며 부두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상주인구만도 10만이 넘듯 느껴졌을 것이다.
배에서 보이는 원형극장의 위용은 장관이었고 연극을 공연할 때처럼 번영의 상징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스 이오니아인들이 한 때 거리를 누볐던 거리답게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었으며 비잔틴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기도 하였고 원형극장 안에서는 연극이 진행되고 있는 듯 고성과 함성 소리가 천정을 들썩이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성 바오로가 원형극장 관중석에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느껴졌고 예수 부활 환상을 경기 종료에 맞추어 관중들에게 연설하기 위하여 원고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기도 하였다.
선박에서 내린 순례 객들은 에페수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들러본 후 안티오크를 향하여 걷다가 마차를 빌려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아야 소피아 하기야 소피아의 모습을
연필로 데셍해놓은 것처럼
어둡고 고난의 한시대를 상징하고 있은 것 같았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성녀 헬레나는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와 예수의 시신이 3일 동안 매장되었던 무덤을 발견하고 성호를 그은 다음 기도를 하였다.
순례를 마친 헬레나는 예수의 무덤에 작은 기념성당을 건축하도록 그동안 모았던 은화를 헌금하고 십자가는 로마로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녀 헬레나의 헌신적인 예수 사랑이 없는 성 소피아 성당 교회는 상상할 수도 없었고 헬레나가 앉아 기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성 소피아 성당 내부의 위치를 꼭 찾아보고 싶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틴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대표적 건축물이라고 하였으며 세계 건축물 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역사적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성 소피아 성당을 관람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염원이 담기고 건축가들의 혼이 담긴 예술적 가치를 만끽하면서 본래의 기독교인들에게 성전으로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2세의 어머니였던 성녀 헬레나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흔적들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간절하여 성 소피아 성당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돔을 만져보기도 하였으며 성 헬레나가 앉아 미사를 보았던 자리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기독교 건물인 성 소피아성당을 덧칠하여 변형시킨 흔적을 보고 가슴이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고 오스만 왕조의 기독교에 관한 부정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상실하여 가고 있음을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슬람국가인 터키에서 성 소피아 성당은 위대한 존재감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이스탄불에서 묵언의 침묵을 통하여 외롭게 예수의 사상인 사랑을 펼치고 있는 듯 보여서 더욱 더 위대하게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