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기술법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사용한 기법으로 무의식적 자동작용, 자동묘법이라고도 한다. 자동기술 법은 초현실주의 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20세기 미술 및 문학 등에까지 영향 을 미쳤다. 즉 모든 습관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 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특히 잠든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가 좋은데, 여기서 자연히 표출되는 선이나 형태 또는 말은 무의식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의 초기에는 특히 '수면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자 동기술법, 꿈의 기술, 영매술적 실험등이 많이 행해졌다. 그들은 꿈과 우연, 원시적인 이야기 등에서 힌트를 얻어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를 자유로이 전개, 새로운 미의 세계를 펼쳐 예술계를 풍미했다. 에른스트에 의해서 시작된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등도 자동기술법 의 일종이며 오브제도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1930년경 이러한 비합리성의 강조란 결국 현실 도피의 데카당스, 독선적인 관념의 공전에 빠질 뿐이라는 비난이 자체 내에서 일어났 다. 그 후 자동기술법은 전용되어 마티에르의 처리나 필세에 있어서 무의식적인 취급이 예 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때, 그 우연의 효과를 가리키는 조형 일반적인 용어로 쓰 이게 되었다. 또 숙련된 기술이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낼 때에도 이 용어를 쓴다. 문학 사에서 제임스 조이스 등에 의해 시도된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도 이 자동기술법의 일조 이라 할 수 있다.
자동 파괴적 미술(Auto-destructive Art)
메츠거(Gustav Metzger)가 1960년 초에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 어. 그는 액션 페인팅의 테크닉을 다소 변형시켜 캔버스와 물감 대신 나일론과 산을 사용함 으로써 같은 시대의 팅겔리(Jean Tinguely)의 자기 파고적인 미술의 한 형태를 발전시켰다. 1961년 7월 3일 런던의 사우드 은행에서 실연하면서 메츠거는 나일론 천으로 된 시트에 산 을 뿌렸다. 산은 즉각 나일론을 부식시켜 그 시트가 완전히 없어질때까지 급속하게 모양을 변화시켰다. 즉 그 작품은 자동 창조적인 동시에 자동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파괴 를 이용한 것은 현대 여러 나라에서 진전되거 있는 거대한 병기에 대한 반항이었다고 주장 했다. 또 자동 파괴적 미술이 인간의 공격성을 사회적으로 수용, 발산시킬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
이 용어는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서독의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다. 피셔 루엑, 폴케, 게르트 리히터의 그림 및 그래픽은 현대의 인간성과 사건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1960년대 초기에 전개됐으며 팝 아트의 독일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자연주의(Naturalism)
'자연주의 미학'이라는 용어는 19세기에 실증주의로부터 나타난 철학 이론에 적용되며, 에밀 졸라의 문학 이론에서 정점에 이른다. 자연주의는 현실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실을 선입견없이 실험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예술에 적용한다. 플로베르의 소설<보봐리 부인>(1856)과 쿠르베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철학적 양상에 상응하는 예술적 양식이 사실주으다. 그것은 이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으며, 낭만주의에 의해 조장된 개인적 감 정의 득세에 의해 촉발되었다. 자연주의는 예술 비평에 있어서, 이집트의 예술과 같이 양식화되거나 '개념적인' 예술과는 반대로, 자연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예술의 유형을 지시할 샔 쓰인다. 이런 의미 에서 그리스의 고전기는 때로 최초의 '자연주의적'예술이라고 주장되기도 하며, 이탈리아 르 네상스의 예술은 자연주의의 부흥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러한 자연주의적 예술에서 아름다움 이 추구될 경우, 그것은 예술작품 자체에 내재한 아름다움은 아니다. 예술작품은 자연의 아 름다움을 비추는 거울로 간주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주의는 자연에 대한 이상화로 나타날 수 도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리얼리즘'과 불일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정한 화파와 연관하여 보면,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만프레디, 리베라, 발렌틴, 혼도 스트 등과 카라밧지오의 제자 벨로리(1672)였다. 충실하게 모사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자연 주의란 말을 썼다.
자화상(self-portrait)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해서 그린 초상화. 자화상은 두 가지 목적에 사용되었다. 즉, 화가들 이 스스로 가장 돈이 안드는 모델이 되는 것과, 또 나아가서는 자신을 불멸화하는 이상적인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에는 극히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화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화상이 나타난 것은 15세기, 즉 예술가의 사회적인 지 위가 향상되고, 일반적으로 인물의 묘사가 사실적으로 다루어지면서부터이다. 처음에는 주로 종교화나 스토리화 등의 넓은 화면의 한 구석에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렸었다. 피디아스, 얀 반 아이크, 마사치오 등이 그 예이다. 이 겨우 자화상은 서명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종 류의 자화상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도 존재했으며, 르네상스까지는 흔한 일이었다. 또 다른 형태의 그림 서명은 화가 자신이 그림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며, 파리스, 리퀴누 스, 기베르티 등이 그 예이다. 자화상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는 뒤러로 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대상으로 얼굴 표정을 연구하고 미와 조화의 법칙에 대한 시법을 보 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자화상은 회화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렘브란트는 초상 화에 심리적·예술적 차원을 부여한 화가로서 그가 남긴 약 60여개의 초상화와 20여개의 판 화는 객관적으로 기록한 감동적인 자기의 삶의 기록랬. 벨라스케스 같은 화가는 과시를 위 해 자화상을 그렸으며, 낭만주의 시대 이후 화가들은 자신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 을 보여주기 위해 별난 차림의 자화상을 그리곤 했다. 20세기에 와서는 이런 식의 고백은 양상을 달리하여, 야수파의한 화가는 자신을 아프리카 추장으로 나타내어 자기에게 영감을 준 원시 예술을 그렸고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발가벗겨 자화상 속에 정신분석가 의 진찰실의 소품들을 그려놓았다.
장르(genre)
예술의 종류를 의미하는 개념. 일정한 작품군이 외형·내용·표현 대상·표현 태도 등에 관 하여 공통의 특질을 지니며, 하나의 유형을 이룰 때 이를 장르라고 한다. 또한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하는 회화,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애호되었던 주제들을 다룬 회화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와틀레와 디드로 같은 비평가들에 의해, 꽃 이나 동물같은 유형의 회화나 어느 특수한 분야의 전문적인 화가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 었다. 1769년 프랑스 아카데미가 그뢰즈를 '장르 화가'로 인정했고 그의 작품은 그가 유행시 켰던 중류 계층의 '도덕적' 주제를 다룬 회화로 이해되었다. 이미 풍경화나 정물화처럼 다른 전문가들은 고유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 용어는 그 밖의 달리 분류될 수 없었던 회 화를 가르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용어는 추수하는 장면이 그려진 중국의 족자, 그리고 사회 주의 리얼리즘에서의 승리에 찬 트랙터 운전사 등 이질적인 대상들을 '장르'로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지만, 이 용어의 기원에 주목하여, 특정 유형에 국한시켜 사용하는 것이 보다 의미있을 것이다. 장르화는 로마 시대의 남부 이탈리아 회화에서 유행했는데, 이들은 귀적들의 삶과 서민 생 활, 가정 생활과 시장, 거리, 극장 등을 모두 다루었으며, 장르화의대중적 형태는 벽화 및 패 널화 그리고 모자이크로 표현되었다. 그 후 유럽 회화사에서 장르는 오랫동안 아카데미 비 평가들에 의해 빈축을 샀다. '장르'는 18세기 무렵 에르트센에서 라에르에 이르는 네덜란드 의 농부 화가들을 가리키는 낮은 개념의 명칭으로 간주되었다. 이탈리아 회화는 전통적으로 영웅적 내용에 관한 종교적·역사적 주제에 탁월성을 보여왔던 반면에, 사소하거나 하찮은 주제를 피해 왔었다. 16세기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목가적 연주회나 화장하는 여인들을 다루 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그림들 역시 대개 종교적이거나 우화적인 주제와 밀접하게 결합 되기 마련이었으며 16세기말 카라치와 카라밧지오에 의한 새로운 장르의 유입 역시 북유럽 의 도전에 대한 반응의 일환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에 반해, 일상 생활의 현실 장면들에 대한 북유럽 미술의 편애 성향은 중세의 전통에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현실적 (realistic)’이란 용어는 문학이나 미술에 있어서, 현실 생활에 대한 과학적 관심도, 혹은 후 에 '사회적 리얼리즘'이라고 알려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익살스러운 시골뜨기’를 재미의 대상으로 삼고 오직 궁정만이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장소라고 여겼던 군주나 봉건 영주의 유 머적 초연함이었던 것이다. 팛세 후기, 고딕 화가들의 회화적 사실주의와 교훈적 전통이 결합디뀯 작품으로는 히에로니 무스 보쉬의 그림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특수한 장르에 대해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 최초의 '전문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수수께끼 같은 많은 작품들은 인간의 악덕과 어리 석음을 상징하기 위해 농부나 영락한 인간들을 다룬, 하나의 풍자적인 설교라고 설명될 수 있다. 그 후, 종교 개혁으로 인해 종교화의 특권이 박탈됨에 따라 화가들은 초상화에서 벗어나 대 가의 예술적인 기교를 응용할 수 있었으며, 브뤼겔은 보쉬의 기묘한 형태를 일상적 삶의 모 습들로 바꿔 현실적인 농가의 장면들을 다루었다. 장르의 영역은 점차 넓어져서, 17세기 네 덜란드 장르의 역사는 이른바 네덜란드의 회화사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멖 17세기의 다 른 유럽 지역에서는 카라밧지오나 프랑스의 르 넹 형제들에서 볼 수 있듯이 네덜란드의 삶 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장르화의 풍부함과는 달리, 아직 종교화에 머물러 있거나 완고한 농 부의 상을 그리는데 그치고 있다. 18세기 초 네덜란드의 트로스트에 의해 풍자적인 장르가 부흥되며, 영국에서는 호가드에 의해 새로운 유형의 도덕적인 주젝 탄새오딘다. 한편, 디드 러의 찬사와 함께, 감상적 교훈조의 '장르'를 도입한 그뢰즈는 장르 개념의 기원을 환기시켰 다. 19세기 윌키 등의 일화적인 그림은 정감적이며 은밀하기도 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고 풍 자적인데 대부분 놀라운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일화적 묘사와 대조적으로, 밀레 및 쿠 르베는 농부나 노동자의 표상을 새로운 영웅적 면모로 제시했다. 이러한 당대의 삶의 반영 이라는 요청은 콩쿠르 형제 등에 의해 제기되었므여, 일본의 우키요에와 함꼐 인상주의를 낳는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전반, 영국에서는 시커트가 장르의 대가로서, 나이트부인은 서커스 장르화에 정통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 다음 세대에 와서는 잭 스미드 및 존 브래트 비의 '키친 싱크'파 등이 두드러지고 있다. 19세기 말 이후 장르에 있어서의 중대한 발전은 영화 예술에서 행해지고 있다.
장승업 - 張承業 (1843~1897)
조선의 화가. 호 오원. 화원을 지내고 벼슬은감찰에 이르렀다. 고아로 자라 어려서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글을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고, 술을 몹시 즐겨술자리에서는 아무 에게나 즉석에서 그림을그려 주었다. 꽃가지·골동품·산수·인물등을 잘 그렸고,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 기는 특징을 지닌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로, 안견·김홍도와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거장으로 일컬 어진다. 주요 작품으로는 〈홍백매십정병〉 〈군마도〉 〈청록산수도〉 〈수상서금도〉 등이 있다.
장식 예술(decorative art)
상징적, 표출적, 내면적 의도를 갖고 제작되는 회화·조각 등에 대해서, 공예품 및 건축의 세부 등에다 그 기능성에 덧붙여 순수하게 시각적인 미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응용되는 조 형 예술을 말한다. 복식, 장신구, 벽화 등이 거의 모든 공예품이 그 대상이 된다. 그 표현은 비재현적, 추상적, 문양적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건축, 정원 등에 부수되어 그 미술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되는 회화나 조각도 이 속에 포함된다.
장식(裝飾) ornament(영)
건축물이나 물건에 달린 개개의 장식, 그 형식이나 모티브를 말한다. 장식의 모티브는 다양하지만, 크게 나누어 기하학적 장식(직선, 방형, 원, 점 등을 주제로 한 것)과 자연적 장식(식물, 동물, 인간, 풍경 등이나 그 밖의 자연물에 의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외에도 문자, 끈 따위에서 유래하는 것 등 각종의 장식이 있다. 또 예를 들어 르네상스 장식, 로코코 장식이라는 식으로 , 나라와 시대에 따라 양식화(樣式化)되 것을 볼 수 있다. 근대 디자인의 발자취는 과거의 양식화나 장식성으로부터 탈피하는 일면을 지니고 있지만 유기적 장식을 주장한 아르 누보를 경계로 , 장식에 포함되어 있던 개념도 제품의 형태나 공간적 구성이라는 디자인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함에 따라 장식이 내포하고 있던 '의미'도 달라진 것이 되었고, 오히려 심리적인 효과라는 면에서 주시되고 있다 하겠다.
장우성
1912년 경기 여주에서 출생. 19세때 서울로 올라와 김은호의 문하생의 되어 그림을 시작. 육교한어학원에서 고전을 연구. 11회 선전에 첫 입선한 이후 41년에서 44년까지 연특선 4횔로 추천작가가 됨. 46년부터 서울대학교 동양화 교수로 61년까지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한동안 미국 워싱턴에 체류하면서 동양예술학교를 개설하여 실기와 동양미술 이론을 지도하기도 했다. 필자가 장우성 화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94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80회고전이었어요. 초기에는 채색화가 많은데, 이것은 스승(김은호)의 영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인화류그림도이 많은데, 소재는 주로 매화나 학등이예요. 80년대부터는 문이런 소재에서 많이 벗어나 주변 세계의 현실적인 것이나 자연을 소재로 해서 작업을 했습니다. 전시회 작품 중 아직도 인상이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노란 은행잎을 소재로 한 가을이었어요. 화실 (1943) 종이에 수묵채색 213*168cm 청년도 (1956) 종이에 수묵채색 212*160cm (1961) 종이에 수묵담채 134.5*117cm 일식 (1976) 종이에 수묵담채 91*74cm
장욱진 (1917~1990)
1917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서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 경성제 2고보를 다님. 이 때부터 그림에 대한 소질을 발휘함. 동경에 유학하여 제국미술학교를 다님.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 잠시 근무한 후 54년부터 60년까지 서울대 교수로 봉직한 외에는 줄곧 제작 생활을 함. 63년에 덕소에 아틀리에를 짓고 이어 명륜동,수안보, 그리고 용인에 화실을 지어 옮겨다님. 앙가주망, 2.9동인전 외 주로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 유화외에 먹그림, 도화,판화 등 다양한 매재의 작품을 시도하였으며 간결한 단상의 글들을 묶은 <강가의 아틀리에>가 있다. 여러권의 화집이 있으며 유작전 및 회고전이 열렸다. 1990년 작고. 독 1949 캔버스에 유화 45*37.7cm 자화상 1951 종이에 유채 14.8*10.8cm 차동차가 있는 풍경 1953. 캔버스에 유화 40*30cm 어부 1963 캔버스에 유화 45.5*33.4cm
재현예술(representational art)
눈에 보이는 세계를 묘사하는 예술. 물체의 모양을 재현하는 예술. 추상 예술과 대립되고 있 으나 양자를 뚜렷이 구분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그림 또는 추상에 가까운 그림 이라도 어느 정도 재현적이기 샔문이다. 순수한 추상미술조차 예술가의 상상의 재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통 재현 예술이란 자연의 외관을 재현하는 예술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이 점에서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로 분류된다.
전면균질회화(全面均質繪 ) all-over paintings(영)
화면에 어떤 중심적인 구도를 설정하지 않고 전체를 균질하게 표현하는 경향의 회화. 화폭 의 테두리까지도 그림으로 가득 채우며 화면 전체를 동일한 방법으로, 같은 강도로 칠한다. 주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적 드립 페인팅을 가리킨다. 이러한 기법의 대표적인 작가는 잭슨 폴록으로 그의 작품은 때때로 위 아래가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캔버스를 초월하는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은 외관상 되는대로 만든 것 같은 전면적 처리에서 유발된 것으로 폴록은 종종 캔버스를 방바닥에 뉘어놓고 여러 방향에서 작업을 하거나 캔버스 속에 들어가 작업을 하곤 했다. 후에 이 용어는 동일한 요소 혹은 거의 균일한 색의 바탕에서 전면적 디자인을 시도한 몇몇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도 적용하게 되었다
전위 예술
아방가르드는 전위, 선두, 선구 등의 뜻으로 프랑스의 군사 용어인 '전위(부대의 전초로서 선발된 소수 정예부대)'에서 나온 말. 정치적 의미로 오늘날에는 좌익과 같은 말로, 특히 예 술상으로는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반항, 혁명적인 예술 정신의 기치를 내걸고 행동하는 예술 운동을 말한다. 따라서 특정의 주의나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라기 보다는 신시대의 급 진적인 예술정신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는 말이지만,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중심으로 한 조형활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 활동의 배후에는 기계 문명의 발달, 무의식 세계으 규명, 원시 예술의 발굴, 사회 의식의 확대 등 신시대적인 여러 가지 요인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반자연주의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문학, 연극, 영 화 등의 분야에 있어서도 그 실험적, 혁명적인 행위에 대해서 쓰여진다.
절대영화
추상영화라고도 한다.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 추상회화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 1920년대 독 일에서 일어난 영화의 한 경향. 당시 프랑스의 순수 영화와 함꼐 영화에 있어서의 전위 운 동의 하나이다. 이것은 종래의 영화의 재현적 기능을 부정하고, 각본·배우·세트 등을 포기 하여 추상적 형태와 빛에 의한 율동적 움직임에 의해 보는 이로 하여금 직접적인 감각을 통 한 감동을 주려고 했다. 비팅에겔링, 한스 리히터에 의해 주로 연구되고 제작되었다. 에겔링 의 <대각선 교향악>, 리히터의 <리듬 1924>와 <1925년>,<경주 교향악> 그리고 <인플레 이션>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1942년<라이트 디스플레이, 흑색·백색·회색>을 발표하였 다. 절대영화는 그 후 토키 기술과 결합, 2,3편의 단편이 발표됐으나 실험적 흥미에 그치고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는데, 그 후 기록영화, 일부의 극영화에까지 응용되어 새로운 영화 시 각의 분야로 개척되었다. 그 대표적 작가에는 발터 루트만이 있으며, <베를린-대도회 교향 악>은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절대주의
지상주의라고도 번역된다. 러시아의 화가 말레비치에 의해 시작된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한 흐름. 원래는 입체파의 미학에서 파생한 것으로 말레비치는 1913년 흰 바탕에 검정의 정방 형만을 그린 최초의 절대주의 회화를 발표했다. 그 2년 후인 1915년에는 시인 마야코프스키 등의 협력을 얻어 기초된 '쉬프레마티슴 선언'이 발표되어, 절대주의에 대한 이론적 기초가 이루어졌다 그 선언의 첫머리에서, "쉬프레마티슴에 의해 나는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감상 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것은 추상주의 라 해도 단순히 현실적 감각 세계를 거부한 것이 아닌, 순수한 감성의 극점으로서의 추상, 즉 주관주의적 추상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보다 훨씬 앞서 기하학적 추상의 한 국면을 전개한 것으로서 의미가 깊다
절대회화(ultimate painting)
미국의 작가 애드 라인하트는 자신이 1960년∼67년에 제작한 회화가 절대추상회화(ultimate abstract painting)라고 주장했다. 이 그림들은 거의 같은 크기의 정방형의 조합으로 구성되 었는데, 그 캔버스는 150cm×150cm의 9개의 정방형으로 나뉘어졌고 회색이나 검정색이 살 짝 칠해져 있었다. 그는 추상회회의 가능성은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후기 작품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이젤 회화 전통의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절로묘(折蘆描)
수묵 도석인물화의 옷주름을 묘사하는 기법. 붓을 강하게 넣으며 운필을 하고 직선적으로 격렬하게 뽑아내려, 때로는 이러한 용필을 굴곡시켜 격렬하게 반전시키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묘선(描線)이 마치 날카로운 갈대의 잎이 꺾여 굽은 듯한 형태로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명 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량카이의 도석화에 전형적인 묘법이 나타나고 있다.
절파(浙派)
명대(明代)의 화파. 오파에 대립하는것으로서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출신의 대진(戴進) 을 시조로 하여 명말의 남영(藍瑛)에 이르는 직업 화가의 계보에 부여된 유파의 명칭이지만, 유파라 부르기에는 화가의 사승관계(師承關係)가 매우 희박하다. 명말 동기창(董其昌)의 남북이종론, 행리가론(行利家論)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화법상의 포괄 범위는 광범하여 남송원체화(南宋院體畵), 이성(李成), 곽희(郭熙), 미법산수, 원말 사대 가에 미치지만, 공통되는 화법상의 특색은 필묵이 거칠고 자유분방하며, 사생(寫生)보다도 점경(點景)의 형식이나 묵면(墨面)과 여백의 대비, 율동감 등을 강조하는 것을 지향하는데, 절강 지방의 전통적 수묵 화법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대진이 화원에 들어오자, 화원 회화의 방향의 범위도 복건, 광동성으로부터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어 오파에까지 미쳤다. 대표적 화가로서 초기에 대진, 중기에 오위(吳偉), 후기에 장로(張路)를 들 수 있지만 종종 문인적 소양을 지닌 화가도 절파에 포함된다. 절파는 서서히 '광태사학'이라고 혹평받는 화 충으로 변모했는데, 가정 년간(嘉靖, 1522~1566)말부터 쇠퇴하여 오파, 문인화와 동질화되는 경향도 보였다.
점묘법
점 또는 점과 유사한 세밀한 터치로 묘사하는 회화 기법의 용어로, 점태묘법의 약어. 점묘라 고만 쓰는 경우도 있다. 자연을 인상적으로 해석하는 미법산수의 미점, 인상주의의 경우에는 프리즘에 의해 분해된 색의 병치에서 색점 배치의 묘법 등은 현저한 점묘의 보기로써 특히 신인상주의의 쇠라와 시냑에 의해 시도되었다. 회화의 구성 요소로서 선은 가장 중요시되어 왔는데, 선을 쓰지 않고 점으로써 형상의 실체를 나타내려는 시도는 형상을 시각적으로 다 룬다는 점에서는 비약적 진전이었다. 시각적으로 다루어지는 외계는 선의 실체가 보이지 않 고, 직접 색채에 덮인 양의 세계로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각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점묘법은 인상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번영했지만, 그후 외계를 단지 시각뿐만 아니 라 온갖 감관을 동하여 느끼는 방법이 취해진 뒤부터는 점묘법은 스스로 극복되게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점묘법은 일종의 화면 기법으로서 개인적 기호에 따라 이용되고 있다.
정면성(frontality)
덴마크의 학자 랑게가 만들어낸 용어. 그는 초기 문명의 예술은 정면에서 보는 시점으로 대 상을 표현한다는 '정면성의 법칙(law of frontality)'이라는 학설을 제창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조각에 적요오디는 이 용어에는 두가지의 특징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아주 고 풍의 조각에서는 상의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일직선으로 맞춘 중심선이 드러나며, 상은 이 중심축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다. 둘째, 얼굴의 생김새·복장·근육 등 내부의 세부 조항들 은 바로 앞에 서서 바라보는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으며, 원근법이 적용되어 있 지 않다. 이 두 특징은 고대 그리스 조각의 특징이기도 하며, 몇몇 헬레니즘적인 조각에서도 정면성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인습이 많은 원시 예술과 몇몇 중세 예술에서도 발 견되기는 하나 '정면성의 법칙'은 이제 랑게의 생각만큼 엄격하지도 않고 또 모든 것을 포 용하지도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성의 인습에 대해서는 여러 심리학적 설명이 시도 되었으나 모두 의문시되고 있다. 랑에는 정면성이 원시 예술에서 회상 이미지가 우세한 데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정면성을 직접적인 시각적 접근이라기 보다 '순수 이성에 의한' 접근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즉, 조각가는 이 각도나 저 각도에서 자신이 본대로 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가 존재한다고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그 상을 만든다. 두 번째 특징, 즉 정면이 관찰자를 향하게 하는 것은 조각가가 어떤 물체의형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윤곽이라고 지력으로 판단한 결과이다. 과거의 조각가는 가장 중요한 정면·후면·측면의 윤곽을 선택한 후 각각이 네 관점에서 본 정면의 모습을 만들었다. 이러한 조각가는 현대의 많은 조각가들과 비평가들이 매우 중시하는 능력인 물체 를 입체적인 유기체로 이해하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로마의 부조에서 정면성이 재미있 게 구사된 예로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세운 콘스탄티노플의 경주장 오벨리스크의 밑받 침에 조각된 부조를 보면 황제의 상은 권위와 위엄을 표혐하기 위해 보는 사람의 눈높이 위 에서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정물화(still life)
과일, 꽃, 집기, 소지품등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체들을 배열해 놓고 그린 그 림. 용어 자체는 네덜란드 어에서 유래했으나 17세기 중반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던 말로, 단 지 움직임이 없는 자연의 모습을 의미한다. 고대의 것으로는 폼페이의 벽화와 로마의 모자 이크에서 경탄할 만한 수준의 정물화를 찾아볼 수 있다. 중세 미술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정물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동양의 화가들은 식 물·새·곤충들의 가리워진 삶에 대한 아주 날카로운 이해를 보여주었다. 정물화는 네덜란 드에서 성행했으며 17세기의 루벤스, 브뤼겔, 렘브란트 등이 대표적이다. 독립된 정물화의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18세기 네덜란드의 학자 호우브라켄이 이름지은 것이 처음이며, 샤 르뎅에 와서야 정물화가 고유한 성격을 지닌 예술의 하나로 격상되었다. 정물화는 생활의 기록이며 그리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서민의 생활, 또는 왕후의 생활을 전할 수 있고 또 심상을 정물에 담아 표현할 수도 있다. 모네와 르노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 가들의 작품은 질감에서 오는 감각적인 매력에 의존했으며 회화 구성상의 주제로서 조형 이 론을 실천한 세잔느의 작품의 성과로 이 회화의 근대성이 발생했다. 정물화는 그림을 시각 적인 일화나 어떤 외부 자연물의 재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와 더불어 20세기 의 예술 사조에서 가장 특징적인 장르가 되었다.
정밀미술
연속적이고 수학적인 질서가 있는 도식의 시각적인 표현으로서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구성주 의 문맥의 한 발전 양상. 기하학적, 구조적 추상의 위대한 선구자였던 몬드리안, 말레비치, 모홀리 나기, 반 되스버그, 엘리시츠키, 엘반, 앨버스, 막스 빌, 바자렐리의 작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20년대 및 30년대의 기초적인 문제의 분석 후, 순수주의 적인 방향을 특수화시 켰던 정밀미술은 수학적으로 어울어진 어떤 일정한 문맥을 시각화하는 방법을 취하기에 이 르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일 빛 체코의 미술가들은 보다 과학화된 구성주의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바우하우스, 데 스틸, 절대주의의 전통에서부터 이념을 찾아내려고 한다. 기 술적으로 조각된 현대의 정밀미술은 빛과 운동, 색채와 공간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관찰을 시각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색채이론적인 색채추상(순수한 빛의 효과에 기초 하는 색채추상)과 같이 색의 발광력과 조직적인 결합법에 의해 시각상 뜻밖의 효과를 노리 는 동적·시각적인 옵 아트에로 합류하고 있다. 한편 정밀미술서의 창조성은 원래, 미적인 상태의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되어질 수 있는 조직화로서 표명된다. 즉, 특수한 통일적 도식 에 따라 기하학적인 색면과 입체적인 건축적 여러 요소 또는 윤곽선의 다양성을 구조화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이 창조적인 절차를 공식화하는 작업은 절대적인 정밀함을 통해 실행될 수 있다. 한스 피이터 리제는 그의 논문<체계적이고 구성적인>(1969)에서 리하르트 파울 로 제와 막수 빌을 정밀 미술에 있어서의 이들 두 방향의 대표자로 들고 있다.
정밀주의 화파(Precisionist Painters)
1920년대에 설립된 미국 미술가들의 그룹. 통일된 파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미술에 있어서 현대 추상주의의 경향의 일부를 형성했볾. 정돈된 윤곽, 형태의 단순화, 단조롭고 커 다란 색깔의 바탕, 유연한 마무리 그리고 고정된 정밀성이 특징이다. 주제는 대부분 미국 산 업과 건축에서 모티브를 얻고 있으나, 사회적 혹은 인간적인 언급없이 분석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그룹의 가장 탁월한 미술가로는 찰스 실러, 닐스 스펜서, 찰스 데 무스, 조지아 오키프 등이 있다.
정선 - 鄭敾 (1676~1759)
조선의 화가. 호 겸재. 김창집의 추천으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고 그 뒤 현감을 지냈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의 독창성을 살리는그 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경치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진경화를 주로 그렸는데,여행을 즐겨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 림을 그렸으며, 심사정·조영석과 함께 3재로 불리었다. 짙음과 옅음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로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열었 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끊어졌다. 그의 그림엔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만이 화폭의 구석에 있을 뿐 제목이 없다. 주요 저서로는 《도설경해》가 있고, 그림으로는 〈입암도〉 〈여산초당도〉 〈여산폭포 도〉 등이 있다.
정선파(鄭敾派)
조선시대 후기에 정선(鄭敾1676~1759)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랐던 일련의 화가들을 일컫는다. 이 파의 화풍의 특징은 정선의 '금강산도'에서 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수직준법(垂直 法) 과 미점의 능숙한 사용 등으로 강희언(姜熙彦), 김윤겸(金允謙), 최북(崔北), 김석신(金碩臣) 등 18세기 후반까지 많은 화가들이 이러한 화풍을 계승하였다. 19세기 이후 김정희파의 부상 등으로 인해 급격히 쇠퇴하였으나, 금강산을 소재로 한 민화 에서 그 잔영을 볼 수 있다.
정치 예술
정치참여적인 예솔은 다수 대중이 타자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며, 소비예술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적 논거를 무력화시키려는 동화과정의 책략으 로부터 벗어나고자 공격, 충돌, 또는 풍자와 같은 격렬한 어법을 구사한다. 비판적 리얼리즘 은 사회 경제적, 정치 구조와 직접적인 대립을 통해 참여적인 정치 예술이 된다. 정치예술의 대변자는 대부분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발, 풍자하고 신랄하 게 폭로하는 현상의 사회·정치적 모순의 제 요소에서 자신들의 주제를 선택하고 있다. 독 일에서는 무엇보다도 클라우스 슈텍에 정치 예술가로서 유명하다. 그는 특정한 이데올로기 적 프로그램과의 뚜렷한 연관없이 실효성이 영향력을 얻는 데 필수적인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플래카드나 포스터 혹은 피킷 등을 사용, 정치현실에 대한 선동적인 비판을 행사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의 정치예술은 파시즘이나 독재에 대한 투쟁이나 사회주의적 사회형 성을 위해 적극 개입하면서 활성화되었다. 라파엘 카노가르의 작품은 고문, 체포, 경찰의 폭 력 등을 실물크기의 부조로 표현했는데 얼굴이 없는 폴리에스터 인물 형태의 화면으로부터 조형적으로 이끌어 낸 것이다. 브레히트적 의미에서의 정치투쟁가는 레나토 구투소를 대표 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는 20세기 이래의 모든 회화적 양식, 이를테젰 표현주의나 입체파에 서 시실리안 국민예술과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파시즘을 비난했다. 70 년대 초에는 한스 하케, 빅터 버긴, 조셉 코수드 그리고 아트 앤 랭귀지 그룹의 회원들처럼 개념미술의 입장에 있던 예술가들도 정치참여적인 작품 활동으로 전향했다. 예술가들이 특 정한 지배체제를 지지하여 예술적인 현실참여를 행사하는 경우, 예술은 자체의 의식을 촉진 시키는 기능을 상실하여 정치의 시녀가 되고 개인을 무력화시키며 개인의 해방을 집단적인 규격화로 대치시켜버릴 가능성을 심어준다. 1920년대 표현주의자들과 다다이스트들의 탁월한 플래카드 미술은 공식적인 양식 요소들을 충격적인 자극으로 대치시킨 독특한 예술적 양식이다. 그래서 베를린 다다는 콜라주나 인쇄 술 그리고 포토 몽타주 드을 이용해 관객들에게 자발적인 영향을 낳도록 프래카드를 그 주 된 표현수단으로 삼고 있다. 혁명 후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도 역시 강렬한 표현의 기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표현력에 있어서 언어를 능가하는 플래카드 미술을 추진시켰다. 콜라 주 기법에 대해 플래카드는 애초부터 본질적으로 몽타주 재료로서의 기능을 지닌 것이다
제리코 Theodore Gericault (1791 - 1824 / 프랑스)
1791년 프랑스의 르왕에서 출생한 화가. 카를르 베르비 및 피에르 게람에게 배웠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교의에 불만을 품고 점차 대 담한 극적 표현을 겨냥하게 된다. 루브르 미술관에 다니면서 특히 루벤스의 작품을 연구하 여 많은 감화를 받았다. 1817년부터 1819년까지는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연구를 계속하였다. 귀국 후 대작 '메뒤사의 뗏목'을 발표하였는데, 그 힘 찬 리얼리스틱한 세부 묘사와 현실에 즉응한 뿌리깊은 정신으로써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즉 이작품과 함께 그는 그 이전의 화 가들에 의해서는 취급되지 않았던 인간 상황의 극한을 탐구하는 방법을 터득함으로써 새로 운 동향의 추진자로 간주되어 로망주의 예술과 동시에 현실주의 회화의 직접적인 선구자가 되었다. 이어서 영국으로 건너가서 특히 말의 묘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매년 더비 경 마가 행하여지는 영국의 서리주에 있는 엡섬 경마장을 다룬 '엡섬의 경마'는 특히 유명하다. 석판화에도 뛰어났었다. 고전주의를 신봉하는 다비드파의 울타리에서 이탈하여 19세기의 프 랑스 회화에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역할은 크다. 말에서 떨어져 생긴 병이 악화되어 1824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제리코 (Theodore Ger+E2049icault,1791~1824) 프랑스의 화가. 루앙에서 태어났다. 1816년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귀국한 뒤 〈메두사 호의 뗏목〉을 그렸다. 이 그림은 당시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낭만주의의 시 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1820년에는영국으로 건너가서 영국의 풍경을 석판화로담았으며, 특히 말을 좋아하여 말의 동작을잘 그렸다. 그는 그리스 독립 전쟁, 노예제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돌격하는 샤쇠르〉 〈부상당한 퀴라시에〉등이 있으며, 조각 작품도 있다.
조각(sculpture)
공간 속에서 입체성을 표현하는 예술로 건축, 회화, 공예 등과 함꼐 조형 미술의 한 분야를 이루고 있다 회화가 색이나 선에 의해 이차원적 화면에 평면적으로 표현되는 데 반해, 조각 은 공간을 점우하고, 현실로 존재하는 삼차원의 입체로 표현되며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서 감각에 호소하는 예술이다. 조각은 또한 조소라고도 불리는데, 의미상이나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녑으로서는 조각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조각의 재료로 서는 현대 조각에서는 철강, 알루미늄, 플라스틸, 유리등 점차로 새로운 감각을 수반하는 재 료가 제작에 이용되고 있다. 조각은 그 표현 양식에 의해 환조와 부조로 나뉜다. 환조에서는 다시 단일상과 군상, 또 인물의 자태에 따라 좌상, 반가상, 와상, 또 전신상, 반신상, 흉상, 두상으로 나뉜다. 부조에서는 새겨넣는 두께의 정도에 따라 고부조, 저부조가 있고 특수한 것으로는 이집트에서 볼 수 있는 음각이 있다. 건축 조각에서는 종종 이 부조가 쓰여지고 있다. 표현되는 주제는 신, 인간, 동물이 주가 되었으나 현대에는 비형상의 기하학적, 추상적 인 것도 많다. 조각에서는 소재가 갖는 질감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근대 이후에는 거의 착색하지 않았으나, 현대 미술에서는 채색된 다색 조각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서양의 조각은 르네상스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가 재현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 의 조각가의 태도는 회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적인 흐름에서 상징적·관념적인 방 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또 구성주의의 조각과 같이 순기하학적·구성적인 추상의 길도 열려 있다.
조맹부 - 趙孟旁 (1254~1322)
중국 원나라의 화가·서예가. 호 송설도인. 저장 성 우싱 현에서 태어났다.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 세조에 발탁되어 벼슬은 한림학사승지·영록대부에 이 르렀다. 당시의 대표적인 교양인으로, 정치·경제 및시서화에 넓은 지식을 지녔으며, 특히 서화에 뛰 어났다. 서예는 왕희지를 따르고, 그림은 산수·대나무·돌·나무·인물 등을 잘그렸다. 그는 또한 ‘조맹부체’라는 특유한글씨체를 이룩하기도 하였으며, 그림에서는오진·황공 망·왕몽과 더불어 원나라의 4대가로 손꼽힌다. 주요 작품으로는 그림에〈중강첩장도〉 〈사마도권〉 등이 있으며,글씨에 〈여중봉명본척 독〉 등이 있다.
조형 예술(plastic art)
예술 전반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음악·문예·연극·무용 등의 시간적 예술에 대해서, 회 화·조각·건축·공예 등의 공간적 예술을 총괄하는 개념. ① 물질적 재료나 수단으로 호소 하는 것이며, ② 직관 형식으로서의 시간과는 달리 공간 내에 성립하는 것이며, ③형서오디 는 공간 형상은 정지와 병렬의 상태로 있는 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에 관계되는 감각은 시각을 주축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 등이 그특성이다. 조형 예술은 또 형상 예술과 공간 예 술로 구분되어, 전자는 회화, 조각 등의 재현 예술을 가리키고, 후자는 건축, 공예 등의 추상 적 공간을 다루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재현적 조형 예술에 관해서는 페어보른(Max Verworn ; 1863∼1921)처럼, 자연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과 연상 등의 관념을 객관화하는 것을 대립시켜서, 이 두가지 유형의 예술을 각각 물체 조형적, 관념 조형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시 미술은 구석기시대에는 물체 조형적이었지만 신석기 시대 이후로는 추상화되고 이론화된 관념 생활의 발달과 함께 관념 조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문화 민족에게는 이 두 유형이 각각 의식적으로 추구된다.
종합주의
고갱 및 나비파의 화가들에 의해 고안된 기법 및 그 이념. 종합은 인상주의의 색조 분할· 병렬에 대한 반대어로서, 처음에는 순기법적인 의미로 쓰였으나, 뒤에 상징주의 시의 영향을 받아 의미, 내용이 확대·심화되었다. 즉 빛이 눈에 미치는 인상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인상 주의의 색조 분할·병렬 기법이 자칫하면 대상을 모호한 안개 속에 매몰하고, 화가로 하여 금 그 주체성을 잃게 하는 위험이 있는데 대해 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을 강 력한 운곽선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으로 종합하고, 화가의 주체성에 바탕을 둔 형태나 색 채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런 사고 방식을 이어 받은 나비파에서는 종합주의를 명확한 술로 건으로 내걸고, 예술작품은 눈(감각 기관)의 소산이 아니라 마음(상상력)의 소산이어야한다 고하여 자연에 대한 예술의 우위를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의 예술(그 중핵을 이루는 포에지)은 단지 감각을 위안하는데 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과학의 중요 한 부분으로서 위대한 종합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상의 데포르마 숑과 평탄한 색면의 장식적인 구성을 특색으로 하는 종합주의는, 나비파의 이념과 더불어 아르 누보를 거쳐 반인상주의적인 20세기 회화의 저류를 이루고 있다.
중세 미술
중세 미술의 핵심을 이루는 주제는 기독교 사상이다. 광범위하게 보자면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르네상스를 예견하는 국제 고딕 양식이 확립된 시 기, 즉 대략 기원 2세기에서 14세기초까지의 천년이 넘는 긴 역사를 이루어 낸 단 하나의 문화가 기독교 문화였다. 유럽과 지중해 연안 각 도시에는 대성당이 세워졌으며, 중세의 모든 사람은 경건한 신자로 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생을 영위하였다. 교회와 수도원은 기도와 의식을 위한 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공식적인 행사 모임 의 집회소였으며, 기독교적 윤리관에 입각한 교육을 베푸는 학교이자, 또한 세례식과 혼례 식, 장례식 등의 통과의례를 치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음악이며 연극과 미술이 교회를 주체로 한 신앙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 졌다. 중세 미술은 '그림 성서'혹은 '문맹자를 위한 교리서'라고 일컬어질만큼 설명적인 표현 방 식을 통해 신앙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이름도 없는 직공의 신분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집인 성당을 건축하고 조각과 벽화 등 을 제작하였다. 실상 그들은 위대한 예술가였으나, 예술가이기 이전에 중세적 신앙생활에 봉사하는 경건한 신자로서 간주되었다.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 로마제국의 서구 세계 지배는 기원 392년 로마가 동로마, 서로마로 나뉘게 되면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5세기 동안 유지된 로마제국에는 여러 피 지배 민족, 국가마다의 풍습과 종교가 산재해 있 었는데, 이중 기독교는 로마의 전성기 동안 그 세력을 차츰 키워 나가 5세기 경 로마가 쇠 퇴하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카타콤으로 대표되는 초기 기독교 미술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땅밑 동굴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공동 집회장소자 묘소인 지하 교회 속에서 볼 수 있는 미술을 말한 다. 초기 기독교도들의 관심은 신의 영광과 내세에 대한 기원에 있었기 때문에 미술로서의 표현 기술의 사실성 추구보다는 일종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상징성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초기 기 독교도들의 회화는 카타콤 내부 벽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성서의 일화나 예수의 행적을 신 약성서에 나오는 대로 설명하고 있으며, 십자형의 구도나 포도송이, 양치는 목동과 그 밖의 기독교적 상징물을 이용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신앙심을 고취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기독교 박해 시대의 숨은 카타콤 미술 세계는 4세기 때 로마 국교로 기독교가 인정 받자 지상으로 나와 권력과 재력에 힘입어 화려한 예술로 발전하게 된다. 기원 392년 로마제국은 동로마, 서로마로 나뉜다. 이중 동로마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 (비잔 틴)로 옮기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기원 4,5세기에서부터 14세기까 지 동방 정교의 기독교 문화를 이룩한다. 비잔틴 미술의 두 원류는 첫째 헬레니즘적 문화와 둘째 지금의 아랍 문화권인 동방 고유의 전통이었다. 이 두 원류가 적절히 섞여 독특한 동, 서양의 특징을 한 화면에 보여주는 비잔틴 미술이 성 립된다. 비잔틴 예술은 초기 기독교 때의 것인 모자이크와 바실리카 형식의 건축양식으로 대표되는 데, 그 예로서 유스티아누스 대제의 성 소피아 성당을 들 수 있다. 건축 외부는 간결하고 힘찬 구성 으로 종교와 황제 권위의 엄숙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내부 의 화려한 금색 모자이크는 신과 황제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신성한 정신적인 신앙 심과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서 종교예술과 궁전 예술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비잔틴 미술의 또 다른 형식중 하나로 이콘화 를 들 수 있는데, 예수나 성모 마리아, 성자의 인물상을 그린 이 독특한 회화는 후의 로마네스크 회화예술의 근간이 된다. 로마네스크 미술 로마제국 멸망 후 점령 민족들은 유럽 각 지역에 퍼져 정착 생활을 시작하 면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본토의 켈트 게르만 전통과 비잔틴 문화를 토대로 각 나라 나름의 기독교 문화를 형 성하는데 이 기독교 문화는 유럽 전반에 기반을 두고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다. 기독교 지 배 사회의 유럽은 모든 사회생활 양식이 종교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며, 성당과 수도원이 그 중심적 활동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말에 이르는 이 시대의 건축은 공통적으로 바실리카 형식을 기본으 로 궁륭(voult)을 얻은 형식이 유행했다. 두터운 벽과 궁륭 지붕, 내외부에 장식된 부조 등이 로마네스크 건축술의 특성이다. 속세적인 미를 죄악시하고, 신앙의 정신적 체험과 감명에 초점을 맞춘 이 시대의 미술은 유 럽 본토의 켈트 게르만민족의 전통적 추상문양과 식물무늬양식이 겹친다. 동방의 영향을 기 초로 조각에서는 길게 늘여진 인체에, 순종적인고 정적인 자태와 표정들이 신에 의한 인간 구원이라는 신앙 최고의 목표를 상징적인 의미로서 표현하고 있다. 프레스코 벽화와 채색 사본에서 보여지는 여러 가지 삽화는 사건의 사실적 재현이라기 보다 는 그 이야기가 전달하는 신앙적 의미를 극대로 표현하기 위한 비현실적인 화면구성을 보여 준다. 고딕과 국제 양식 '고딕(Gothic)'이라는 말은 원래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오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건축에 관한 글을 쓴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저술가들이 자기네 선조들의 작품을 경멸적으로 회고하면서 이 용어를 썼다. 그러나 현재는 그 명칭의 기원과는 상관 없이 고착되었으며, 19세기 이후 중세미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됨과 동시에 더 이상 이 미술양식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의미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12, 13세기 유럽은 도시의 성장으로 '하나님의 집'이자 생활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성당이 대 규모 건축물로서 세워졌다. 우선 게르만 고딕 예술의 두 가지 특징을 보자면 스테인드 글라 스(색유리)와 첨탑 건축양식을 들 수 있겠다. 고딕 양식의 교회는 궁륭과 창으로 된 온실 모양을 하고 있는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투박함 에서 벗어나 고도로 발달된 건축술에 힘입어 얇은 벽과 많은 창, 가는 기둥으로 높이 세워 졌다. 고딕 양식은 프랑스, 독일, 영국등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유럽을 하나의 예술 양식으로 통합 시켰으며, 특히 프랑스에서 그 첫 발단을 보게 됨으로서 지리적으로 유럽 중심지에서 사방 각지로 퍼지는 양상을 보인다. 고딕 양식의 특징은 조각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의 자연스러운 묘사인데, 종교적 이상주의 와 사실성이 결부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는 특히 그리스도 상과 마리아 상이 많이 제 작되는데, 그 전 시기의 상징적이며 비사실적인 표현과는 다른 인체 비례와 표정의 자연스 러움이 나타난다 이 시대의 건축이 골조 즉 기둥을 중심으로 구성하게 된 결과 벽화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 고, 대신 많은 유리창에 스테인드 글라스라는 새로운 채색화가 등장하게 된다. 색유리창을 채색화라고 하는 이유는 비잔틴 미술이 모자이크화에 영향을 받아 검은 윤곽선 사이에 여러 가지 색 유리조각을 끼워 빛에 의한 아름다운 채색효과를 거두어, 보는 이로 하여금 벽화를 볼 때 이상의 감동과 이야기 전달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고딕시대의 첨예형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조각과 필사본, 세공작품 안에 등장하는 섬 세한 인물표현은 인간이 좀더 신에 가까워 지려는 노력을 나타내며, 인간적 감정 표현이 다 시 살아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북유럽이 고딕양식을 확립해 나갈 즈음,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계속 로마네스크 예술이 지속되다가 르네상스로 넘어 가게 된다. 그러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제 고딕 양식 시대에는 남북을 가릴 것 없이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듯한 움직임이 미술계 안에서 서서히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고딕양식의 건축의 쇠퇴에서 스테인드 글라스의 제작이 줄고 채색삽화, 벽화 가 다시 활발 하게 그려짐에 따라 원근법과 화면구성이 현실적이 되어간다. 이에 따라 14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회화가 예술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 고, 서구 각 나라의 궁정에 '국제 고딕양식'이라 불리우는 공통의 회화 양식이 전개된다. 고딕 말기의 궁정사회에서 활발히 진행되는 이 양식은 정확 한 자연관찰에 의거하는 세부묘 사와 화려한 궁정취미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변화는 조각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성당 안 팎을 장식하는 수많은 인물 조각상에서 현실적인 인체비례, 표정의 생동감 등이 그 예이다. 12세기 후반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플랑브와이앙(flamboyant-화염식)' 양식은 고딕건축 의 최종 단계로 나타난 것인데, 물결치는 듯한 불꽃같은 형태가 직선적이었던 고딕양식에서 화려하고 복잡한 구조로 변화함을 보이고 있다.
지우기 Verwischung(독)
데콜라주 기법의 하나. 화학적인 부식제(腐蝕劑) 또는 색(물감)을 덧칠함으로써 인쇄물의 사 진이나 그림을 부분적으로 말소하는 행위. 그렇게 말소 함으로써 생기는 언어의 단편(斷片)이나 문자의 중복 등에 의해 예기치 않은 신선감이나 흥미있는 효과를 노리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기법은 베를린 다다, 특히 볼프 포스텔에 의해 형태 파괴의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사진의 경우에는 산성(酸性)의 수정액을 사용하여 말소한다 채도(saturation) 색의 선명한 정도를 말한다. 선명한 색의 채도는 높고, 탁한 색의 채도는 낮다. 예를 들면 노란 색상 중에도 진한 것과 연한 것이 있는데 이 경우 진한 것을 황색 채도가 높다고 하 고, 연한 것을 채도가 낮다고 한다. 채도는 색의 세 가지 속성 중의 하나이다 채색 조각(polychrome sculpture) 다색 조각. 20세기, 특히 1950년대 이후 부쩍 나타나기 시작한 경향으로서, 색채가 있는 재 료를 써서 만든 조각이나, 채색을 한 조각, 이런 채색 조각은 현대 조각의 큰 특징으로 르네 상스 이래의 긴 전통을 뙾고, 금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금세기 초 입체파 의 영향을 받은 조각가들, 특히 알렉산도 아르키펜코에 의해 시도된 이래, 여러 조각가들이 제작에 열중했다. 1930년대 이후 채색 조각은 주로 미국의 데이비드 스미드, 알렉산도 콜더 등에 의해 제작되었다. 채색 조각의 뚜렷하고 새로운 운동은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러한 동향이 전개된 이유로는 현대 회화가 색채의 중요성 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옵 아트, 미니멀 아트와 같은 경향의 회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과, 조각과 회화의 결합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조각 재료가 개발되었 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새로운 재료란 채색 효과를 직접 창조해낼 수 있는 본래부터 색 채를 지닌 것(플라스틱 등)과 페인트나 아크릴, 합성수지 도료 등으로 도장된 산업적 완제품 들로 이에 손질을 가해 작품에 이용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조각이 재료의 자연색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은 르네상스기에 확립된 것으로서, 그 이유는 그들이 모범으로 삼는 고전 고대의 조각들이 자연색이었다는 것이지만, 사실 당시 고대 조각의 대부분은 원 래는 채색 조각이었다. 구·신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도 주로 적·황·토 등으로 채색이 되 었던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조각상을 보면 남성은 적갈색, 여성은 연한 노랑 색 등으로 채색되어 있다. 헬리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는 채색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약 화되었던 듯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채색 조각은 조각의 전 역사를 통해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주된 경향이었다. 현대의주요 채색 조각가들로는 부서진 자동차의 색깔있는 금속판을 조합하여 만드는 존 체 임벌린, 색 네온으로 작업을 한 크리사, 반투명이지만 뚜렷한 색을 지닌 플라스틱을 이용하 는 데이비드 웨인리브, 다색채의 점토 조각을 제작한 피터 불코스, 표면에 패턴이나 형식을 첨가함으로써 환상적 공간 관계를 창조한 로버트 허드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