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사회를 지향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첫 걸음이 품질표시제도이다.
상품의 품질표시는 상품 선택의 기회를 부여하는 길잡이가 된다. 또한 품질표시제도는 제조자와 판매업자가 상품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상품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귀금속은 근본적으로 국가와 개인의 재화로서 화폐의 기능을 갖고 있다. 애초에 금 대신 거래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 화폐이다. 따라서 준 화폐인 귀금속 제품의 재질, 품위, 규격, 용도, 사용법 등과 제조자, 판매자 등을 표시함은 소비자의 자산을 보호하고 유통질서를 확립하는 길인 것이다.
Hall Mark 제도
금의 품질을 표시하는 마크가 처음 사용된 것은 고대 이집트 메네스 왕조(B,C 3100년경) 때 14g 금괴에 각인을 한 것이 효시이며 로마시대 금괴에도 각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대의 귀금속에 대한 품질검사와 보증제도를 일컫는 "Hall Mark" 제도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국민들을 악덕 금세공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300년 영국의 에드워드 1세가 공포하고, 금세공인 조합(Goldsmith Guild)에 관리자를 임명해 품위를 감정,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선 금이 상품거래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검사 합격품에 표범머리마크(Leopard's Head Mark)를 각인해주었는데 Marked at Goldsmith Hall 이란 말에서 홀 마크란 단어가 유래되었다. 영국은 이 홀 마크 제도를 오랜 세월 관습법으로 시행하여 오다 백금 등 타 귀금속을 묶어 1973년에 The Hall Marking Act 법을 제정하였고 런던, 버밍햄, 셰필드, 에딘버러 4곳에서 강제로 품질검사를 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 홀 마크가 없는 제품은 아예 진열, 수출, 수입을 금하고 있다. 여타 유럽 국가도 19세기부터 귀금속 제품에 대한 검정을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귀금속 품질검사를 의무적(강제)으로 시행하며, 국가 간 빠른 상거래를 위하여 국제협약 체제를 구축하여 시행하고 있다. 일본은 대장성 조폐국에서 원하는 업체에 한해 임의검사하고 합격품에는 일장기 마크를 각인하고 있다. 미국, 캐나다, 태국, 중국 등에서는 임의검사를 한다.
고대 중국에서도 도량형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BC 259~210)도 제일 먼저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시켜 통치 수단으로 삼은 바가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조선 때부터 통일된 도량형 제도를 시행하였다. 백제시대의 장신구에 보면 제조자 각인을 하였고, 중량도 표기 하였다.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에 와서도 엄격한 도량형 제도를 시행 하였다. 이 제도가 문란해지면 정치, 사회 기강도 문란해진다. 고려 멸망기의 문란했던 도량한 제도를 조선조 세종 임금은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세종임금은 놋쇠로 유척(鍮尺)을 만들어 전국 지방 관아에 내려 보내 그 기준을 통일하였다. 암행어사가 마패와 함께 유척을 가지고 다니면서 시중의 자와 됫박을 직접 단속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금과 은을 강제 공출하고 금의 유통을 금지시켰다. 일제는 국내 금 생산을 독려하여 전량을 수탈해 갔고, 심지어 종가집의 제사용 놋그릇도 몽땅 강탈해 갔다.
광복이 된 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금고에는 금이 한 톨도 없었다. 당시는 금태환시대여서 한국은행에 금이 없었으므로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인플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건국이후 정부에서 부지런히 금과 은을 사들였지만 6.25 사변 때까지 겨우 금 1,069Kg, 은 2,513Kg을 사들였을 뿐이었다. 6.25 전쟁을 치르면서도 정부는 금 생산을 장려하고 통화안정을 위해 민간인 금 거래를 자유화 시켰다.
1960년대 들어와 조금씩 산업이 발전하고 생활형편이 나아지면서 금, 은 장신구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결혼예물로 금반지와 금목걸이가 주종이었고 비녀, 브로치 같은 장신구는 은이 주종이었다. 그 무렵 대명광업의 구봉광산과 무극광산의 금 생산으로 금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서서히 금은상가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때 거래된 금 장신구는 순도가 96~98% 이였다. 당시 광산에서는 금과 은의 분석제련 기술이 미흡하여 겨우 순도 98 ~ 99% 정도밖에 못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상공부 산하 장항제련소(삼성제련소)의 정제금도 99.2 ~ 99.5%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님으로부터 매입한 옛날 고금제품(평균 95%)을 섞어 쓰다 보니 금제품은 96~ 98%가 평균이었다. 특히 K18이나 K14제품은 더욱 심해서 심지어 순도가 5%이상 떨어지는 예가 다반사였다.
한국산업표준과 (사)한국귀금속보석감정원
우리나라는 정부 수립 후 일본의 “귀금속품위증명규칙”을 원용하여 귀금속 순도검사를 한국은행에서 시행하였다. 한국은행에서는 국제적인 검사법인 큐펠레이션(Cupellation, 파괴분석법) 방식으로 국가에서 매입하는 금괴, 은괴를 시험 분석하였다. 본격적으로 귀금속 장신구에 대한 규정을 만든 것은 1974년 2월 18일 상공부령 제422호로 “귀금속가공상품 품질표시규정”을 공표하면서 부터이다. 이 규정에는 순금제품 99%, 허용오차 -0.3%, 중량오차는 10g이하일 경우 -1%, 10g 이상 제품은 -0.8%로 정하였다. 합금제품(18K,14K)은 구리, 은의 합금 량까지 규정하였다. 이 당시에는 그나마 아쉬운 대로 이런 규정이 있어서 다행인 셈이었다.
이 규정을 1982년 6월 30일 공업진흥청이 고시 82-15호로 새로 만들었고, 벌칙 규정도 엄하게 정하였다. 이 법에 의거 1984년 9월 4일에는 귀금속 품질검사기관으로 (사)한국귀금속보석감정원을 설립허가하고 본격적인 품질검사를 시행하게 하였다. (사)한국귀금속보석감정원에서는 각인 표장을 육각형 도형 안에 태극문양을 함으로서 일본의 일장기 마크에 대항하는 의미도 담았다. 현재 귀금속품질표시규정은 행정규제 철폐의 일환으로 폐기하고 새로이 한국산업표준(K.S)으로 재 지정하였는데, 이 규정에서는 순금 제품을 99.9%로 엄격하게 규정하여 금 함량 부실 여지를 없애 버리고, 제품 규격을 세분화 하였으며 반지 사이즈도 새로 정밀하게 규정하였다. 허용오차도 없애 버려서 이 산업 표준은 완전히 국제 규격과 동일한 규정이 되었다.
<80년대 말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이 되는 봉황당에도 태극마크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 (사)한국귀금속보석감정원은 서울 3곳과 전국 6곳에서 감정 업무를 수행하고 있고, 광물시험분석소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우리나라의 금 품위 질의 향상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러한 태극마크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나라 귀금속 제품의 질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 되었는데 단적인 예가 지난 1998년 외환위기 때 국민들이 모아준 금의 양이 227톤이나 되었고, 평균 금의 품위가 99.2% 수준이었다. 이러한 금 품위의 수치는 귀금속 장신구에 불가피하게 땜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매우 우수한 품질이다. (사)한국귀금속보석감정원이 설립된 이후 10여년 만에 귀금속업계의 금 순도는 크게 향상되어 마침내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사)한국귀금속보석감정원이 출범한 이후 오랫동안 우리나라 금은방에서는 태극마크를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요즈음은 굳이 태극마크를 붙이지 않아도 소비자와 판매상 간의 금 품질로 인한 시비는 거의 없어진 것만 보아도 귀금속 업계의 신뢰는 탄탄해진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귀금속 업계의 신뢰가 매우 높아진 것을 보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여기고 보람 또한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