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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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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학원 이사장 김신옥 목사:1(역경의 열매) ◎고향서의 천진한 어린시절평남 강서군 백석지기 부잣집서 태어나.50리길 학교 걸어서 통학.개울서 물장구치 다 익사할뻔. 김신옥 목사는 1924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났다.평양정의여자고등학교 중앙 대학교를 졸업한뒤 미국으로 건너가 루터성서대학에서 공부하고 골든 스테이 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54년 대전에서 대성중학교를 설립,현재 8개중고등학교를 가진 대성학원으로 키우는 등 평생 교육사업에 헌신해 왔다. 대한예수교 복음선교회를 창립하고 교도소선교에 매진해왔으며 현재 청소년을 영적으로 훈련시키는 YMT운동에 헌신하고 있다.〈편집자〉 두고 온 내고향 평남 강서군 노남리 명산마을.동구 밖에는 호수가 있고 넓은 토지와 푸른 산,강이 아름다운 마을이다.지금은 추억만이 새로울 뿐 찾아가 볼수 없는 타향이 되었지만 티없이 맑고 고운 꿈을 키우며 천진한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평양에서 1백여리 떨어진 이곳에서 우리집은 백석지기의 촌부자로 불렸다.아 버지는 학자풍의 성실한 농부셨고 어머니는 인자하셨다.조만식선생 부친과 친 할머니가 오누이간이고 도산 안창호선생은 나의 8촌오빠이다.고향에는 학교가 없어 50리나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다.가파른 고갯길을 숨이 차 헐떡 거리며 넘어 다녀야 했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걸었다.그러나 어 린나이에도 배우는 즐거움,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에 통학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마을 어귀 호수가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사시는 덕보할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때면 “우리 명산마을 귀염둥이 학교갔다 오누만”하시며 언제나 머리 를 쓰다듬어 주셨다.할머니의 손길이 나의 어린동심에도 얼마나 고맙고 따뜻 했는지 모른다. 여름방학을 얼마 남겨두고 난 호수가에서 남자아이들과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아이들로부터 공격받던 나는 뒤로 물러서다 갑자기 몸이 허공에 뜨며 물속으 로 빠졌다.난 빨리 헤엄쳐 나가야겠다며 손을 저었으나 몸은 가라앉기만 했다 .갑자기 내머리채가 무엇인가에 꽉 감겨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정신 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희미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때 나의 손을 꼭잡고 있는 덕보할 머니의 모습이 보였다.“망할것,계집애가 대낮에 무슨 목욕이냐” 할머니 옆 에 있던 어머니는 나를 꼭 끌어 안고 울었다.그뒤 덕보할머니는 우리집과 형 제같이 지냈다.덕보할머니는 나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이야”라고 말했 다.<정리=이승한 shlee@kukminilbo.co.kr> 2 인생의 전환점된 첫 여름방학1등한 통신부 덕보할머니께 자랑. 하나님 덕택이라며 주일학교로 인도. 이때가 일생을 바꾸는 계기돼… 처음 맞이한 여름방학은 나의 일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그 촉매역할은 통신부 였다.4남매 가운데 내가 맏이였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음으로 학교 통신부 를 받아 본 것이다. “통신부,그래 어디보자.우리 신옥이가 꼴지나 면했는지”.통신부를 받아 든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놀라운 눈초리로 날 바라보셨다.“여보 우리 신옥이가 일등을 했구려,일등을”. 점심을 지으시던 어머니는 부엌에서 뛰어나와 통신부를 보시고는 눈물을 글썽 거렸다.세상에 태어나서 내힘으로 처음 부모님 마음을 흐뭇하게 해드렸다는 생각에 자랑스런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덕보할머니에게 보여드려야지’.난 곧장 덕보할머니에게 달려갔다.할머니는 손을 꼭 잡으시고는 “신옥이가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공부를 참 잘했구먼. 암 그래야지.그게 다 하나님 덕택이야” 덕보할머니의 그런 말씀이 못마땅했 다.그래서 따졌다.“할머니 하나님이 어디있어, 내가 열심히 해서 그런거지” 그때 할머니는 나에게 평생 잊을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신옥아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으면 다음 주일에 할머니와 함께 교회 에 나가자.그러면 하나님이 계신 곳도 알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 마운 분인지도 알수 있단다.그뿐이 아니다 노래도 부를 수 있고 춤도 배우며 새 친구도 사귈 수 있단다” 노래와 춤을 배울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설랬다.다음 주일날 덕보할머니의 손 을 잡고 산너머 큰 마을에 있던 교회당에 갔다.주일학교 여선생님과 전도사는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 했다.많은 아이들에게 소개도 했다. 선생님은 교회학교가 끝난뒤 선물을 주셨다.작고 노란 연필 두자루였다.“신 옥아 앞으로 주일마다 나와서 재미있게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렴” 나는 노란 연필을 더 받기 위해 열심히 교회에 나갔으나 선생님은 더 이상 연 필을 주시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 평생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가게 한 계기가 됐다.나를 항상 감동시키며 역사하시는 하나님 께 감사를 드린다. 부모님은 매일 오십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셨던지 나를 평양으로 보내셨다.보통학교 2학년 늦봄에 사촌형부가 선생으로 계시던 평양 정진여자보통학교로 전학했다.이 학교는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학교였다 .부모곁을 떠나 외로웠던 나는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찬송을 부르고 얘기 듣 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3 신기했던 평양생활외로움 달래려 교회 출석. 도시문명을 접하며 ‘하나님은혜’ 생각.3학년 가을 온가족 평양으로… 학교는 월요일 아침마다 주일날 교회에 출석한 사람의 이름꽂이에 튤립을 꽂 아 주는 제도를 만들어 교회출석을 권장하고 있었다. 찬송을 배우는 즐거움과 홀로 유학하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교회에 출석했 지만 튤립을 매주 받기위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사도신 경 주기도문 십계명 요한복음 3장16절 시편23편까지도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외울 수 있었다.성경암송대회에서는 늘 우승을 했다. 평양생활은 신기했다.고향에서는 남폿불 밑에서 공부했지만 평양은 전기가 들 어왔다.콧구멍이 까맣게 되면서 공부하던 고향과는 비교가 안되도록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었다.전차를 타는 재미도 남달랐다.이런 것들이 바로 주일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은혜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도시문명에 익숙해지면서 부모곁을 떠난 외로움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다.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끔 평양에 오셨다.그럴때마다 난 아버지의 넓은 가슴에 안겨 재롱을 떨었다.눈부신 백열등이 아버지의 까만 수염을 비추면 그 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하루는 평양에 오신 아버지를 붙들고 얘기했다.“아버지,아버지도 예수믿어. 우리학교는 넓은 강당에서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해요.예배시간에 나 는 열심히 기도해요.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좋은데 와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줘 고맙다고요” 아버지는 그 말에 “그래라.열심히 믿어라.아버지는 예수를 안믿지만 하나님 은 언제나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신단다.우리 신옥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예수도 열심히 믿으면서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예수를 믿어요.형부가 설교하는데 예수는 우산과 같이 믿으면 안된대요.비오는 날이면 필요하고 해나면 필요없는 우산처럼 믿으면 안된다고 했어요” 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했다.그때의 대화는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3학년 가을 우리집은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평양에 오셨던 아버지를 졸라 백 화점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길을 잃고 고아가 될뻔 했던 일이 있은뒤 아버지 는 명산리의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오신 것이다. 그해 겨울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데 옆집에서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 렸다.엉겁결에 밖으로 뛰어 나가보니 우리집이 불타고 있었다.집안식구들은 모두 나와 불길을 잡느라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지만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 았다 4 ◎“성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집에 불났을 때도 등교.여고 진학후 1학기말 시험서 부정행위.양심의 가책 느 끼고 휴학하기로….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번져 나갔다.부모님과 이웃사람들은 불을 끄느라 정신 이 없었다.무서움에 울며 발만 동동 구르던 나는 문득 ‘학교에 결석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생각은 집이 불타는 것보다 더 무섭게 다가왔다. 그 길로 책가방을 잊은채 학교로 달려갔다. 그날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모른다.학교에 들어서서 그저 엉엉 우는 나에게 사촌형부는 급히 책가방을 사다 주고 아이들은 공책과 연필을 가져다 주었다. 집은 까만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두려움에 떠는 나의 손을 잡고 집까지 바래 다 준 담임선생님은 나를 다시 사촌형부집에 데려다 주었다.그곳에는 아버지 와 어머니 동생들도 모두 와 있었다.사촌형부는 “하나님께서 신옥이네 가정 에 더 크고 좋은 집을 장만케 해 주시려고 시련을 주신 것”이라며 위로했다. 불이 왜 났는지,그리고 누가 불을 냈는지,화재원인은 결국 알아내지못했다.집 에 불이 난 것을 보고도 학교로 달려간 나는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수모 를 당하기도 했다. 세월은 흘러 나는 정진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정의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 초등학교에서 우수한 학생 두세명이 무시험으로 진학하는 곳 이었다.그런만큼 아이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승부심이 강한 나는 뒤지지 않기위해 열심히 공부했다.1학기말 시험이 다가오 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기말고사 마지막날 영어시험지를 받아들고 는 미소는 당황으로 변했다.내가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들이 수두룩 했다 . ‘그래 옆의 짝궁 답안지를 보자’.훔쳐보기로 마음 먹은 나는 옆 친구의 답 안지를 보고 몇 문제를 풀었다.그러나 더이상 시험을 볼수 없었다.부끄러움으 로 손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양심의 고통이 소용돌이 쳤다.난 문제지를 들 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아예 시험을 포기한 것이다.그 길로 난 아버지에게 한 학기를 쉬어야겠다고 말씀드리고 휴학하고 말았다. “사람의 성공이란 꼭 시험성적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네가 굳이 그럴 결심이라면 양심을 속인 죄를 속죄하는 수양기간이라 생각하고 뜻대로 하여라” 양심은 사람을 정화하는 용광로였다.난 이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헛된 욕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헛된 욕망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 온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 5 사범학교 졸업후 교사 발령불우한 아이들 돕고자 교사 선택. 의사 원하셨던 부모님과 갈등도.첫 발령지 대봉초등학교. 여학교를 졸업할 무렵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부모님은 내가 의사가 되길 바랐 으나 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교사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친구의 불행한 학 교생활 때문이었다. 인물도 좋고 공부도 잘하던 숙이는 어머니를 잃은지 얼마 되지 않아 계모를 맞았다.숙이네 집에 계모가 들어온 뒤 이쁘고 똑똑하고 천진난만하던 숙이는 기를 펴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아이로 바뀌어 갔다.그 모습을 보면서 불쌍한 아이들을 감싸고 어루만져 주고,그들을 위해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그렇 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았다.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호적등본이 필요했다.고향으로 내려간 나 는 면사무소가 있는 강서군 쌍영면까지 밤길을 걸어서 다음날 호적등본을 뗀 뒤 평양으로 돌아왔다.학교에서 일괄적으로 입학원서를 내줘 무사히 서울의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대부분이 일본 학생들이었고 선생님들은 모두 일본 사람이었다.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따라갈수 없었다.학교생활도 무척 엄격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나는 평양 대봉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학교에서는 한국 인 교사와 일본인 교사간의 알력이 대단했다.그 당시는 그럴수 밖에 없었지만 해방된지 53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과 한국은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로 인식되 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학년담임을 맡은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학생기록부의 조사였다.가정환경 성격 취미 등을 정확히 조사해야 지도할수 있기 때문이었다.학생 가운데 순영이란 아이가 있었다.그 아이는 계모 밑에서 살았는데 그렇게 명랑하고 밝을 수가 없었다. 여학교시절 계모밑에서 지내던 숙이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순영이의 표정이 나를 놀라게 했다.순영이의 집을 방문하고는 더욱 놀랐다.그 아이의 어머니는 “순영이는 내게 가장 귀한 존재이고 가장 사랑스런 아이이며 가장 아름다운 아이”라고 말했다.계모는 모두 나쁘다는 나의 생각이 편견이었음을 알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순영이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순영이 어머니는 바로 나사렛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그의 숭고한 모 성애에 감탄했다.그뒤부터 난 사랑은 세상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6 싹트기 시작한 사랑난생 처음 고아원 방문. 아이들 돌봐주던 청년 안기석과의 만남.그와 대화 나누며 서서히…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일제치하의 우리 국민은 비참하기 그 지없었다.식량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렸고 민심마저 흉흉해졌 다.부유한 가정에서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나로서는 모두가 가슴아픈 일이었 다. 어느날 옆자리의 양선생님이 나를 보고 “김선생,우리 고아원에 한번 가보지 않겠어”하는 것이었다.이때까지 고아원이라고는 한번도 가본일이 없는 나는 고아원엔 왜 가려 하느냐고 물었다.양선생은 그곳에는 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 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이란 말에 내 가슴은 뭔가 얻어 맞은 느낌으로 찡했다.“왜 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교사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던 옛날의 기억이 새 삼 살아났다.그제서야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느끼게 됐다. 다음날 우리가 찾아간 곳은 ‘평양고아원’이었다.2백여명의 남자아이들만 수 용되어 있는 큰 고아원이었다.위문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 나온 아이들은 몰 골이 말이 아니었다.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고 제대로 먹지 못해 앙상한 모습 들이었다.그러나 눈만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누가 이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는 것일까’ 생각에 잠겨 있을때 아이들을 한 곳에 집합시키는 건장한 청년이 보였다.큰 키에 눈이 반짝 반짝 빛나는 모습 이 한눈에도 위풍 당당해 보였다. 그는 안기석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했다.그리고 아이들에게 “위문 온 분들을 위해 우리 노래 한곡 부르자”고 했다.“달님이 둥글둥글,햇님이 둥글둥글 … ”.아이들은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의 노래소리에 깜짝 놀랐다.어디를 가더라도 일본 말만 쓰도록 강요받 고 있는 처지에 이렇게 우리말로 우렁차게 노래를 부를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아이들이 자랑스 러웠다.그리고 고아들을 돌보고 있는 청년이 너무나 숭고해 보였다. 고아들은 노란 좁쌀밥에 된장국만 먹었다.안기석 청년도 마찬가지였다.부잣집 딸로 호강하면서 컸던 나로서는 상상할수 없었던 그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그 뒤로 난 동료교사가 없으면 혼자서,동료가 있으면 함께 고아원을 찾았다. 안기석청년은 그때마다 “동지를 만난듯이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했 다.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의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싹트 기 시작했다 7 ◎일제 항복에 목놓아 “만세” 독립운동하던 안기석 평양감옥에 수감.그를 찾지 않고는 견딜수 없어.마침내 해방이… 고아원에서 알게 된 안기석씨는 가끔 우리집에도 놀러오게 되었다.그가 우리 집에 오는 날은 나보다는 아버님이 더 좋아하셨다.아버님은 안선생과 깊은 대 화를 나누곤 했다.자세히는 모르지만 민족의 장래에 대해 얘기하는 듯 했다. 여전히 대봉초등학교에 교사로 있었던 나는 시간이 날때마다 고아원을 찾는 일이 큰 즐거움이었다.일직이 없는 날은 고아원에 가서 청소와 빨래를 해주는 봉사자가 됐다.어느날 저녁때에 고아원을 방문했는데 안기석씨가 보이지 않았 다.고아원에서는 전날 저녁에 손님과 같이 나갔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때 아버지의 말씀이 머리를 스쳤다. “안선생은 참 훌륭한 청년이야.그러나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불안하 구나”.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주변에서는 그가 그동안 남몰래 독립운동에 가 담했는데 그만 일경에 발각되어 잡혀간 것 같다고 했다.안기석씨는 일경에 붙 잡혀 간지 일주일이 지나도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내마음은 허둥대기 시작 했다.“주님 그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나도 모르게 기도 가 나왔다. ‘내가 그동안 그를 사모해 왔는가’.난 그때 비로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한달 보름만에 겨우 그의 소식을 알아냈다.그는 평양감옥에 수 감중이었다.면회를 간 나에게 그가 한말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김선생님 고맙습니다.그러나 앞으로 오지 마시오.좀더 참고 내일을 기다리 십시오.김선생에게 까지 누를 끼치는 죄를 짓고 싶지 않소” 그럴수록 나는 그를 찾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1945년으로 접어들면서 일본 의 전세가 점점 악화됐다.교도소에서는 면회를 일체 금지했다.학교생활도 복 잡해져 갔다.마침내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출신 고향별로 소개한다는 명령을 내렸다.난 강서군출신 학생을 맡았다.모두 50명이었다.그들을 대리고 강서로 가는 날은 8월16일로 정해졌다. 내가 데려갈 학생들의 신상카드를 정리하고 있던 나에게 밖에 나갔던 아버지 가 뛰어 들어오시면서 소리쳤다. “해방이다.해방이야.신옥아 일본이 항복했다” 일제의 항복소리에 우리가족 은 부둥켜 안고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다 대성학원 이사장 김신옥 목사:8(역경의 열매) ◎안기석과 눈물의 재회해방된지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상봉.기쁨도 잠시 평 양은 다시 소용돌이로… 평양시내는 삽시간에 태극기의 물결로 넘쳐났다.태어나서 그때까지의 삶 중에 그처럼 기쁘고 감격스런 순간은 없었다. 그렇게도 극성을 부리던 일본이 하루 아침에 망하다니…,그러나 그것은 현실 이었다. 분노와 치욕의 36년.이름도 말도 빼앗긴채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긴 세월을 되찾았다.수많은 태극기들,그것은 모두 해방의 날을 위해 집안 장농속에 깊숙 히 숨겨 놓았던 것이었다.도도한 태극기의 물결은 한덩어리가 됐다.나도 하나 가 됐다.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환호성이 가라앉고 안정을 찾게 되자 감옥에 같 혔던 독립투사들이 하나둘씩 풀려 나왔다.나도 몇날 동안 해방의 감격에 도취 되었다가 독립운동가들의 석방 소식을 듣고는 안기석씨에 대한 소식이 궁금해 졌다. ‘그가 살아 있다면 제일 먼저 우리집으로 달려 올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된지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그의 소식은 없었다.평양 교도소에서 풀 려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난 것은 아니겠지’ 모두들 기뻐하는데 나혼자만 마 음이 무겁고 우울한 것 같았다.보름이 지났을 무렵,오매불망 기다리던 그가 돌아왔다. 문앞에 그가 서 있었다.그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평양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개천탄광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광부로 말할수 없는 고생을 했다고 말했다.조국이 해방 된 며칠후에야 소식을 듣고 달려 왔다고 했다. 해방의 감격도,안기석씨와의 재회의 기쁨도 잠시,평양은 다시 소용돌이에 빠 졌다.길거리에는 ‘김일성장군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가 내걸렸다.만주벌판 을 휘저으며 일본군을 공포에 몰아 넣었던 김일성장군이 돌아온다는 사실에 군중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환영회장에 나타난 사람은 60세를 훨씬 넘어야 할 백발의 김일성장군 이 아니라 30을 갓 넘었을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었다.군중들은 놀라 입을 다 물줄 몰랐다. 침묵이 흘렀다.그러나 침묵도 잠시,각본에 짜여진대로 여기저기서 ‘김일성장 군 만세’ ‘소련공산당 만세’라는 구호가 터져나왔다.북한땅은 이후 암담하 고 처절한 모습으로 변해갔다.<정리=이승한 shlee@kukminilbo.co.kr> 9 ◎안기석과 민호단서 활동 조만식 선생의 도움 얻어 조직. 난민들 구호하는데 앞장.소련군 진주한 평양 공포의 도시로… 해방된뒤 북한에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만주 등지로 떠났던 주민들이 줄을 지 어 들어왔다.그들은 굶고 병들었으며 지쳐 있었다. 안기석씨는 아버지와 상의,당시 북한지역의 통치를 임시로 맡고 있던 나의 친 외종숙(아버지의 외사촌형)이었던 조만식선생님의 협력을 얻어 민호단을 조직 했다. 민호단은 조국으로 돌아오는 난민들을 구호하는 단체로 평양에 있는 7개의 건 물을 접수,난민들을 수용했다.안기석씨는 조만식선생이 도와준 백미 2천석을 풀어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주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앞장섰다.나도 교사일을 하면서 그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 안기석씨는 난민들을 물질적으로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도와야 된 다며 교회를 설립했다.그리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다.하루는 예배 를 드리는데 느닷없이 나에게 기도를 시켰다. 대중들 앞에서 한번도 기도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기 도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내 옆자리에 있던 당시 평양신학교 학생에게 대신 해달라고 부탁해 상황을 모면했다. 이때 받은 충격은 내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한 중대한 계기가 됐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소망을 간구하는 기도를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 었다.그 이후로 나는 기도생활에 열심이다.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 민호단은 모금운동을 해서 모은 돈과 외국에서 보내 오는 구호품으로 난민들 을 돕는데 최선을 다했다.단원들은 난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들은 난민들을 향해 “주권을 빼앗기는 힘없는 국민이 되어서는 안되며 내 일을 위해서는 오늘의 고생을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자”고 외쳤다.그들의 노 력은 역사에 크게 빛나지 못하고 뭍혀 있지만 그들의 헌신이야 말로 높이 평 가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민호단을 비롯,많은 애국인사들이 나라를 하나되게 하는데 노력하고 있을 즈 음 평양은 소련군들이 진주하면서 공포의 도시로 변해갔다.소련군은 어디에서 나 좋은 것만 보면 약탈해 갔다.짐승같은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말을 듣지 않 으면 살상도 했다.평양거리는 마음놓고 다닐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나마 나 는 민호단의 일원으로 절망속에서도 사람들을 도울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 렸다.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였다 10 병석에서의 특이한 체험 냉면먹다 장티푸스로 입원. 멀리서 흐느끼며 들려온 소리.기쁨 충만한 천사와의 만남. 사람마다 신앙이 성숙해지는 과정은 다르다.기독교가 체험의 종교이듯이 많은 사람들은 체험을 원하기도 한다.나의 체험은 특이한 방법으로 다가왔다. 민호단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던 45년 12월 23일,교회에서 환자를 돌보느라 밤 을 새다시피하고 일직근무를 위해 학교에 나왔다.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교장 선생님은 나와 다른 일직자를 데리고 학교앞 식당으로 가 냉면을 사주셨다. ‘겨울에 먹는 냉면이 별미구나’생각하며 맛있게 먹었던 냉면이 잘못된 것이 었다.갑자기 식곤증이 밀려왔다.교무실에서 잘 수도 없고 해서 마침 인근에서 맹아학교를 운영하던 안기석씨의 누님집에 가서 잠시 눈을 붙였다.그런데 이 게 웬일인가.심한 열이 오르며 온 몸에 붉은 반점이 쫙 퍼졌다. 급히 기독교병원에 입원했다.병원에서는 장티푸스와 발진티브스의 합병증이라 고 했다.열이 너무 심해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마치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 같 았다. 매일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다.병원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고 미쳤다 고 했다. 20일이 넘도록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눈에 헛것이 보였다.돼지가 침대에 올라 오는 것이 보였다.하루는 친구인 주선애(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가 문병왔다. 그녀는 천사처럼 보였다. 46년 1월16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멀리서 흐느끼며 나를 부르는 소리 가 들렸다.난 그 소리를 들으려고 발돋움을 했다.몸이 가볍게 하늘로 올랐다. 그리고 내몸은 아름다운 구름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모든 고통도 아픔도 사라 졌다.기분이 그렇게 상쾌할수 가 없었다. 내가 탄 구름은 계속 올라가다 멈추었다.그곳에는 별도 달도 없었다.그러나 밝은 빛이 반짝이는 잔디위로 내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아름다운 꽃들 ,단물이 흐르는 시냇가,꽃들이 움직이며 찬양을 했다.내 발걸음도 리듬에 맞 춰 가고 있었다. 잔디밭 한가운데였다.이름이 적힌 표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인자해보이는 40 대 가량의 사람이 서 있었다.그 분은 표를 하나 나에게 줬다.그곳에는 김신옥 이란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이름표를 들고 있는 나에게 녹색 잔디위로 광채가 나는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왔다.그들은 천사였다.사랑스럽고 평화로우며 기쁨이 충만한 얼 굴을 한 그들은 내곁에 다가와 인사를 했다.그리고 자신들과 똑같은 옷을 입 혔다.그리고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11 병을 통한 구원의 역사 찬양들으며 하나님 보좌 앞에. 부모님 불 신앙 꾸짖음.예수 환상본 아버지에게 기적이…. 어느 지점까지 왔을까.천사들은 나를 위해 손목을 마주잡고 손가마를 만들었 다.나는 그 가마에 올라탔다.손가마를 만든 천사들은 지상에서 천당까지 줄지 어 층계를 이루고 있었다.가마는 리듬에 맞추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리듬은 찬양이었다.‘영광’ ‘영광’의 찬양소리를 들으면서 도착한 곳은 분명 하나님의 보좌 앞이었다.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고 휘황찬란하여 바라볼 수 없었다.그의 우편에는 거룩한 손에 못자국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 셨다. 예수님은 크고 거룩한 손으로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그 순간 나의 입은 열려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듯 회개의 기도가 나왔다.눈알은 빠지는 듯 하고 머리는 파열될 듯이 아팠다.숨이 막혔다. 갑자기 고통이 멈추었다.그리고 장엄한 목소리가 들렸다.“너의 어머니와 아 버지는 어찌하여 나를 대적하며 싸우기만 하느냐” “그 분들이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나를 대적하는 것이요,싸우는 것이다.너는 지상에 내 려가 너의 부모님이 나를 믿도록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증거한뒤 오너라 ” 그 순간 나는 다시 천사들의 손가마에 이끌려 구름방석에 올라탔다.천사는 등 잔불을 내손에 가만히 쥐어줬다.천당으로 올라갈때처럼 기쁘고 황홀한 기분에 취해 있던 나는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면서 어딘가로 던져지는 것을 느겼다. “아악…” 깜깜한 동굴이었다.손에 든 등잔이 어렴풋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안개가 자욱 한 길을 걸으면서 속으로 천당에서 들었던 말을 되뇌이었다.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찌하여 나를 대적하고 싸우기만 하느냐”.갑자기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잠시뒤 신옥이가 깨어난다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병원에 입원한뒤 계속 의식불명상태에 있었던 것이다.아버지와 어머니,친 지들은 모두 내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아버지와 어머니는 의식을 회복한 나 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일이 있은후 5일이 지나서 아버지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어느 생일 집에 다녀 오신 후에 병환이 나서 입원한 아버지는 예수그리스도의 환상을 본 것이다.우리집은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다.환상 에서 깨어난 나는 ‘예수는 누구신고’라는 찬송가만 부르고 있었다 12 사탄의 골짜기 떠나 남으로 소련군 진주이후 상황 나날이 악화. 연금된 조만식선생 만나 안내자 없이 무 작정 남쪽으로…. 병상에서 체험한 천국여행 이후 병은 급속히 회복됐다.46년 3월13일 퇴원한뒤 3일동안 몸을 회복한 나는 월남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살고 있는 땅은 내가 태어나 자라고 부모님이 계신 곳이지만 날이 갈 수록 사탄의 골짜기로 바뀌어 가고 있지 않은가.가자 이남으로’ 소련 공산주 의가 들어온뒤 자유로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고 날마다 악하게 변해가는 북한의 모습에 이렇게 결심했다.며칠동안 동행자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46년 3월19일 남으로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조만식선생님을 뵙기 위해 그가 감 금되어 있던 고려호텔로 갔다.조만식선생님은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있다.조만식선생님은 매우 반가워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남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래 신옥아,조심해서 내려가거라.그리고 이남에서 다시 만나자”그는 내손 을 꼭잡으며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때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그때 조만식선생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 을수 없다. 그분은 이남에 내려와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펼수도 있었지만 공산주의 학정 에 시달리는 동포들을 버릴수 없어 끝까지 공산당과 싸우다 순교하셨다. 3월20일 밤11시 집에 있는 금붙이와 값나가는 패물,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집 을 나섰다.동행자는 고봉화선생님이었다.시골의 아낙네 처럼 보이기 위해 머 리에는 수건을 뒤집어 썼다.옷만 조금 넣은 보따리에는 호미도 들어 있었다. 우리는 안내자도 없이 길도 모른채 산길을 택해 무작정 남쪽을 향해 걸었다. 길을 잘못들어 다시 북쪽으로 향하기도 했다.다행히도 우리 일행은 또다른 월 남자를 만났다.그들은 나의 친구 순자의 부모님이었다.그들은 순자가 이미 열 흘전에 오빠와 월남했다고 말했다. 월남길은 멀고도 험했다.그때마다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을 상상했다.자유를 찾아 가는 우리의 모습이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민족과 다를바가 없었다. 불안하고 힘에 부쳐 앉고 싶을때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힘과 용기를 간구했 다. 3월29일,평양을 출발한지 아흐레만에 38선이 가까운 곳에 다달았다.조금만 가 면 이남이었다.그러나 지금부터가 더 어려운 고비였다.소련군들이 38선을 지 키고 있으니 38선은 사선이나 다름이 없었다.나는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주여 사선을 넘어서 자유의 나라로 가게 해주소서” 13 죽음의 사막서 끌어내 주소서 소련군 진주이후 상황 나날이 악화.연금된 조만식선생 만나 안내자 없이 무작 정 남쪽으로…. 3월의 밤은 추웠다.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무사히 남으로 넘어가게 해달라고 수없이 기도를 드렸다.들키지 않기 위해 몇시간을 산길을 돌고 돌았다.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자 눈앞에 어렴풋이 개울이 보였다.“아 이제 저 개울 만 건너면 남쪽 땅이다” 우리는 기슭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그런데 갑자기 개울 건너편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뒤이어 세파트의 ‘낑낑 ’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아뿔사 앞에 초소가 있는 모양이다.자 날따라와” 순자 아버님은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갔다.정신없이 올라가는데 고선생이 그만 황토비탈길에서 미끄 러져 내려가면서 “아버지”하고 소리를 질렀다. 불빛이 미끄러지는 고선생을 따라잡았고 이어 세퍼트가 그를 물었다.고선생은 끌려가면서 계속 “아버지”를 외쳤다. 고선생이 끌려간 뒤 순자 아버지는 우리의 탈출구를 알아보고 오겠다며 산을 내려갔다.한시간,두시간이 흐르고 오후가 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질무렵,개울가 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순자 아버지였다.그는 피투성이가 된채 죽어가고 있었다.그는 소련군인들에게 온몸을 짓밟혀 상처투성이었다.우 리는 그가 죽어가는 것을 볼수 밖에 없었다 “주여 불쌍한 아버지를 구원하여 주소서.죽음의 사막에서 끌어내 주소서” 순자 어머니와 나는 개울 옆의 모래를 걷어내고 순자 아버지를 묻었다.밤이 되자 비가 내렸다.우리는 그 비를 이용해 무사히 남으로 내려왔다. “하나님,자유의 땅을 밟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비명에 가신 순자 아버님의 영혼을 거두어 주소서,고선생의 생명을 지켜 주소서” 남한땅을 밟은 첫날,우리에겐 감격도 없었다.순자 어머니는 남편이 묻혀 있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걷다 쉬다를 반복하면서 얼마를 걸었 을까.큰 기와집이 보였다.그 집은 북한을 탈출한 수많은 사람들이 밥을 얻어 먹기 위해 들르고 있었다.우리도 그곳에 들어가 밥을 좀 달라고 부탁했다.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뒤에서 “김선생”하고 누가 불렀다.‘이곳에 나말고 또 김선생이 있는가’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거기에는 붙잡혀 갔던 고선 생이 있었다. 그는 붙잡힌 날 밤 화장실을 간다고 한뒤 부서진 벽으로 빠져나와 사생결단으 로 도망쳤다고 말했다.고선생과의 해후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었다. 14 안기석과 재회 그리고 결혼서울 영락교회에 몸 의탁. 남편은 중국으로 유학. 8개월후 혼자서 딸 낳아.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가진 것을 버리면 진정한 소유 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은 역경에 처한 나에게 둘도 없는 위안 이었다. 우리는 부르튼 다리를 이끌고 몇십리를 걸어 개성에 도착했다.개성역에는 월 남민들로 붐볐다.서울행 밤기차에 몸을 실은 우리는 “이제야 자유의 몸이 되 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실로 5년만에 다시 밟아보는 서울.서울은 평양에 비하면 낙원이었다.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우리 일행은 영락교회를 찾아갔다.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 들은 영락교회에 몸을 의탁하며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었다. 나는 영락교회에서 안기석씨를 만났다.안씨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뜻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평양에서 잠시 사랑이 싹텄던 그와의 만남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 다.그는 두달전에 월남해서 교회일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안씨도 나를 만난 것이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우 리는 서로의 믿음과 사랑을 영원히 나누기 위해 월남한지 반년만인 46년 10월 3일 YMCA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그때 남편의 나이는 스물여덟살,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결혼후 우리는 각자 자기발전을 위해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그 리고 각자 나름대로 공부를 계속했다.어느날 남편은 김구주석과 이범석장군의 권면으로 중국유학길이 열렸다며 좋아했다. 그를 중국으로 보내는 것은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그러나 신혼초의 약속 도 있고 그를 유학보내기로 결심했다.이범석장군의 부인은 남장을 하고 독립 운동을 하다 이장군의 청혼으로 결혼해 모진 고생을 했던 과거 얘기를 들려주 면서 우리의 결혼을 동지적 결합이라고 축복해 줬다.이장군의 부인은 “사람 이란 고귀한 희생이 있은 후에 참다운 행복과 보람을 가질 수 있다”며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47년 2월 남편은 마침내 유학길에 올랐다.남편이 떠나는 인천항은 찬 바람으 로 살을 에이듯이 추웠다.긴 이별의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한달 후에 남편으로부터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남편이 유학을 떠난지 8개월 후에 나는 혼자서 딸을 낳았다.임신했다는 소식 을 듣고 딸을 낳으면 ‘선이’ 아들을 낳으면 ‘중권’으로 이름을 지으라는 편지를 보내온 남편의 뜻에 따라 딸아이의 이름을 선이로 지었다.새로운 생명 이 태어나다니…“하나님 감사합니다.이 아이는 자유의 땅에서 믿음의 딸로 행복하게 자랄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15 50년 6·25전쟁 발발아이 낳은 후 중단한 공부 계속.중국 국공내전 피 해 남편 귀국.평화도 잠시 다시 전운이…. 아이의 출생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오묘함과 기쁨을 맛볼 수 있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장군의 도움으로 서울역 앞에 있던 3층집(일제때 후다미 여관)을 얻을 수 있었다.생활이 안정을 찾으면서 아기를 시누이에게 맡기고 한동안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했다. 그때 교파싸움으로 분쟁을 일삼고 있던 신학교를 그만두고 중앙대학교 경제과 에 편입했다.정원 30명 가운데 많은 학생들이 좌익계 영향을 받아 똘똘 뭉쳤 고 교수들까지 합세해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의 이론에 흔 들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3학년때는 전체 학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49년 4월 중국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었다.모든 외국인들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통해 매 시간마다 흘러나왔다. ‘남편이 무사히 귀국해야 할텐데…’.불안했다.하나님께 매달리는 방법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학교까지 결석하며 금식기도를 단행했다.금식기도를 시작한 지 5일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올 것이란 소식은 없었다. 그때 음성이 들렸다.“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욥 37:21). “그래 기다리자.하나님 기다리겠습니다.남편의 발자국소리를 듣기위해,그리 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겠습니다” 남편은 5월9일 귀국했다.아기를 안고 창밖을 내다보다가 택시에서 내리는 남 편을 볼 수 있었다.우리는 폭풍우가 지나간 뒤에 오는 지극히 맑고 조용한 행 복을 체험했다. 남편은 남경 중앙국립대학에서 공부하던중 남경이 공산군에 함락되자 상해 제 남국립대학으로 옮겼다가 1백66명의 교민과 함께 중국대륙을 마지막으로 떠나 는 미군용기를 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리셨 나이다’고 하신 시편 66편12절의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이라 생각 하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남편이 돌아온 뒤 가정은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공부도 계속할 수 있었다.세월은 빠르게 흘러 1년이 후딱 지나갔다.북한공산당은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선생과 당시 공산당의 거물로 남한에 구금되어 있던 김삼룡,이주하와 교환하자고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조만식선생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 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그러나 북한은 교환 날자인 50년 6월23일을 넘기 고 이틀뒤 무력침략을 감행했다 16 전란의 한가운데 서서인민군 수중에 떨어진 서울.폭격 속에서도 하나님 손길 힘입어 기적같이 무사해…. 전쟁이 발발한지 3일뒤 남편과 나는 새벽예배를 보러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지축을 흔들며 대로를 메우고 내려오는 탱크를 보았다.정부는 라디오를 통해 안심하라고 했으나 이미 서울은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인민군의 침략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는 것을 보면서 예레미아서 7장9∼10절 말 씀과 아모스 6장12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 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쫓으면서 내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집에 와 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 증한 일을 향하려 함이로다’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남편은 나에게 “북한은 공격해 왔고 우리는 함락을 당할 것이요,그러나 하나 님은 지지 않으시니 우리는 힘을 다하여 떠납시다”고 했다.우리는 길을 떠나 며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중지시켜 줄 것으로 믿었다. 길을 나섰으나 갈길이 막연했다.인파에 밀려 끊어진 다리 쪽으로 밀려갔다.남 편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간신히 인파에서 빠져 나온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그리고 벽장 밑을 뜯고 은신처를 만들었다. 남편과 나는 두손을 짝지어 몇시간이고 기도를 드렸다.그때 우리는 다시 성경 안에서 잃었던 힘을 찾았다.‘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 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역대하 7장14절). 폭격속에서도 남편과 나와 아기는 살아날수 있었다.위기때마다 하나님의 손길 이 우리를 건져내 주셨다.인민군의 수색에서도 우리의 은신처는 비켜 나갔다. 이웃에 살던 한 가톨릭신자가 ‘여성동맹’이라는 완장을 차고 들이닥쳤을때 그를 붙잡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설명하자 “당신 가족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며 우리를 보호해 줬다.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을 탈환한 뒤 북으로 진격할때 남편은 유엔군 을 따라 북으로 떠났다.그러나 남편이 떠난지 2개월 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 세가 다시 불리해졌다.북에서는 수많은 피란민들이 내려왔다.모두들 남으로 내려가고 50년 12월20일부터는 서울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다.그때 작은 소리가 나의 귀에 들렸다.“너희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편안히 인도함을 받으리라”(이사야 55장12절). 17 힘들어도 감사했던 피난길남편과 함께 부산으로.빵장사를 하며 피난 온 학생들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50년 12월26일 남편은 온몸이 얼어 붙은 채로 돌아왔다.선무공작대원으로 유 엔군과 함게 북진을 했던 남편은 평양에 들어가 과거 민호단으로 사용하던 건 물을 접수하고 그곳에 전쟁고아를 수용보호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그런데 전선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남편은 유엔군과 함께 후퇴를 거 듭했다는 것이었다. 예성강에 도착한 그는 아내와 아기가 기다리고 있는 서울에 가야만한다는 집 념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사력을 다해 건넜고 개성에서 기차로 서울에 왔다고 했다. 온몸이 얼었던 남편은 서서히 몸을 회복했다.모두들 남으로 피란을 떠난 서울 ,우리는 지난 여름처럼 서울에 남아서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할수가 없었다.겨 울의 혹독한 추위를 아이가 견딜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우리는 남으로 피란길 에 올랐다. 걷고 걸어서 남쪽으로만 향했다.어딘지를 기억할수 없는 작은 시골역.더 이상 걷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약화된 우리는 군수품을 실은 화물차의 지붕에 겨우 몸을 의지할수 있었다.사람이란 극한 상황에 놓이면 뜻하지 않은 용기와 힘으 로 그 상황을 극복해 나갈수 있음을 깨달았다. 화차 지붕위의 피란길.눈보라가 얼굴을 때리고 석탄연기에 숨이 막혀도 우리 에게 너무나 감사한 피란길이었다.기차는 가다가 서고 또 가다가 멈추었다.서 울을 떠난지 7일째 우리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우리는 미대교수 한사람을 만났다.그는 부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셋이서 빵장사를 하자고 제안했다.그렇게 해서 우리는 부산에서 먹 고 살기위해 빵장사를 시작했다.참으로 고난의 시절이었으나 빵장사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일할수 있다는 것,노동으로 벌어 먹고 살수 있다는 사실이 우 리를 즐겁게 했다. 부산피란시절은 나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빵공장을 하면서 남 편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피란온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서로에게 물었다. 남편과 나는 이 문제를 놓고 기도를 드렸다.“하나님 동족상잔으로 고통을 겪 고 있는 민족에게 소망이 있다면 젊은이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학생들을 기독교정신 안에서 가르치는 환상이 보였다. 우리는 곧바로 교편을 잡았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그리고 지역 유지들의 도 움으로 1백평쯤 되는 허름한 창고를 얻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남편과 나에게 준 지식을 학생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51년 여름은 부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18 ◎기도로 학교 일궈내기독교 정신에 의한 교육에의 비전,마침내 어려움 뚫고 대성학원의 터 닦아. 부산에서 피난학생들을 가르치던 우리는 충북 부강이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로 올라가려다 부강에 머물게 된 것은 북한에서 섬기던 백인성목사가 계 셨기 때문이었다.그는 부강 고등공민학교 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학교를 맡아 열심히 가르쳤다.1백50 명이던 학생은 1년 사이에 4백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에 ‘대전시는 서울에서 피난온 학생들을 위해 종합중고등 학교를 설치하고 교사들의 등록을 받으라’는 공고가 났다.나는 공민학교의 일을 남편에게 맡기고 대전으로 가서 등록했다.얼마후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 았다. 교사를 하면서 기독교 정신으로 학생들을 가르칠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서 법인설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53년 한강인도 교도 복구되고 대전에 모여 있던 피난민들도 서울로 하나,둘 복귀했다.전시 종합중고등학교는 그해 3월1일 해산됐다. 학교가 해산되던 날 교무실에서 김희민이라는 선생이 말했다.“김선생 당신의 하나님은 죽었어” 갑작스런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그는 재차 “내 가 보기에 김선생은 불쌍할 정도로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 다면 왜 학교설립 인가가 나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나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내 방법이 서툴러서 그렇겠지요” 나는 그 자 리에 있을수 없었다.학교옆 숲속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한없이 울었다. ‘아니야,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분이셔.그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 리를 도와주고 계신다.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에게 반드시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어’.난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다시 교무실에 돌아왔을때 사건을 지켜보았던 학부형대표 인원식회장이 희망 을 가지라고 격려했다.그리고 도지사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나는 도지사를 찾아가 기독교 정신에 의한 교육사업의 비전을 설명했다.전쟁 으로 폐허가 된 이땅에,그리고 절망속에 빠져 있는 청소년들에게 기독교 정신 의 교육이야말로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며 학원설립을 눈물로 호소했다. 도지사는 나의 비전에 놀라워 했다.그리고 해산된 종합중고등학교 자리에 대 성학교를 설립할수 있도록 인가해 줬다.서울에 근거를 잃고 대전에 남아있던 학생 1백80명이 모여들었다. 비로소 대전시 용두봉 황토벌에 대성학원 대성중학교가 설립됐다 19 반신불수서 기적적 소생신앙적 이념 가지고 학생교육.학교운영 문제로 쓰러진 후 기도로 회생. 학교이름을 대성(大聖)으로 지은 것은 하나님의 참 가르침을 받아 학생들이 믿음위에 굳게 서서 나라와 민족을 구할 든든한 기둥이 되라는 뜻에서였다. 초라한 가건물이었지만 교육의 목표는 분명했다.‘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교훈으로 삼았다. 신앙적인 교육목표와 이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믿음의 일꾼으로 키워나갔 다. 그러나 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립학교였기 때문에 국고보조나 다른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재정적 지원이 없 었다. 더구나 대부분 학생들이 부모를 잃거나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실향민들의 자 녀였기에 학교재정이 말이 아니었다.주변으로부터의 질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가난도 가정을 괴롭혔다.남편의 생일날 퇴근길에 조기 한마리를 반찬으로 사 들고 간 적도 있었다.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 필요한 것만 공급해 주셨다. 60년 어느날,학교운영문제로 큰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반신불수가 된 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가 됐다.새천이라는 산간마을의 작은 교회로 거쳐를 옮겨 기도로 죽음을 극복하고 있을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이스라엘아 너를 조 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이사야 43장) 그 음성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그리고 그가 공급해 주는 생기를 느꼈다 . 하늘과 땅,꽃과 새들,지금까지 고난과 고통이 새롭게 보였다.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회복된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병에서 회복된 뒤 학교일은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대성중고등학교 성남중학교 대성여상 등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66년 나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42살의 나이에 외국에서 신 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일이 아니었다.66년부터 69년 말까지 시애틀 의 루터성서대학과 L.A의 L.I.F.E신학교를 졸업한 뒤 70년 8월 귀국했다. 어느날 새벽 교회제단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릴때였다.갑자기 하늘로부터 4만 명이라는 음성이 들렸다. 대성학원의 여러 학교를 통해 4만명을 복음화시키라는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 각했다. 20 환상을 통해 가르치심 미국 유학시절. 여러가지 환상 경험하며 교만· 독선 고쳐. 힘든 배움의 시간 마치고 70년 귀국 미국 유학시절의 이야기다.66년 3월6일 포클랜드에 도착해 그곳 형제교회를 담임하던 김관규목사를 만났다. 그는 나를 위해 한달에 25달러 짜리의 집을 구해 놓았다.그리고 교회에서 기 도할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 3일동안 교회에서 금식기도를 드린 뒤 짐을 챙겨 세든 집에 들어갔다.아늑한 침대,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시 눈을 감았다.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잠결인 듯했다.집주인 할머니가 들어와 “당신이 이 집을 나간다고 해 계약금 을 가져 왔다”며 침대시트에 돈을 넣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놀라 “무슨 말이냐”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보니 방안에는 아무 도 없었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어두운 밤공기만 나를 감쌀 뿐이 었다. 그 다음날 밤,침대에 누워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는데 45세쯤 되어 보이는 중 년신사가 들어오더니 “독기를 제거하라”고 말했다.독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사납고 나쁜 성질’이라고 일러줬다.이것도 환상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나에게 보이지 않는 독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이후 이 상하리만치 여러 환상을 경험했다.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나의 교만과 독선을 깨뜨리시고 장차 나의 사역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며 겸손을 가르치셨다.이 것은 나의 일생에 전무후무한 축복이었다. 루터란 신학교에 다니던 때 일이다.한 남학생이 나를 찾아 왔다.그의 아버지 는 목사님이셨고 얼마전에 소천해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학생이었다.그 는 어머니가 불면증에 시달리는데 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하나님은 영어로 기도할수 없는 나에게 방언으로 기도할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기도를 마쳤을때 그의 어머니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유학생활은 어려웠지만 세계에 대해 눈을 뜨는 좋은 기회였다.많은 사람들도 사귈 수 있었다. 동서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미국교회도 배웠다.돈이 넉넉치 않아 화장실 아 르바이트를 하는 등 생활은 고달펐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루터란 신학교를 졸업하고 6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1년동안 간호사교육을 받았 다.그리고 70년 1월 로스엔젤레스의 라이프 바이블 칼리지에서 목사안수를 받 고 귀국했다. 귀국한뒤 학교일은 그런대로 풀려갔다. 기독교정신으로 설립된 학교,교사들이 정성껏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 면서 학생들이 늘어갔다.새벽기도를 하다 4만명이란 환영을 본뒤 나는 남은 인생을 모두 주께 바치리라고 결심했다 21 금식기도로 찾은 영적 비전대성학원 날로 번창.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 남아의 복음화와 청소년의 영적 훈련 추진. 나의 인생을 주께 바치리라고 결심한 뒤 그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기도했다.기 도의 해답은 즉각 다가오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세운 대성학원은 그동안 많은 발전을 가져와 8개의 중·고등학교 를 운영하게 됐고 5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또 1만여명의 학생과 교직원을 가진 이남에서는 가장 크다는 학원으로 발전했다. 졸업생들은 모두 국가와 사회에서 필요한 인물로 성장해 가고 있다.제자 가운 데 오웅진 신부는 버려진 이웃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 있으며 대성학원 출신 의 목회자 대부분이 전국 도시와 농어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주여 감사합니다.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이 사업 을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에 맞춰 나가야 하느냐’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이후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기도했지만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엄청난 과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였다.송곡리 대성산기도원에 들 어가 40일간 금식기도를 시작했다.“주여 당신께서 허락해주신 이 영적 비전 의 실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옵소서” 40일간 금식기도를 마친 나에게 하나님은 구체적인 영적 비전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첫째 이 시대의 마지막 선교대상지인 동남아시아지역의 복음화였다. “그렇다.아시아의 복음화는 아시아인이 담당해야 한다.그리고 우리 대성의 청소년들을 영적으로 훈련시켜 이 복음화운동에 앞장서는 아시아인이 되게 하 자.바로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와 남편을 사용해 대성학원을 일으켜 세 운 것이 아닌가” 두번째는 이 청소년들을 어떻게 영적으로 훈련시켜야 하는가였다.이 두번째 문제도 하나님이 해답을 주셨다.그것은 1학년 학생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2학년때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안에서 참된 영적생활을 하도록 양육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3학년 때에는 사명자로서의 소명감을 갖도록 훈련하는 단계였다. 이 영성훈련을 청소년 선교훈련이라고 명명하고 영문 머리글자를 따 ‘YMT’ 라고 이름을 지었다.훈련을 위해 복음교회옆에 훈련장을 지어야 했다.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을 짓는 큰 공사였다. 그러나 예산을 준비해 놓지않은 상태에서 시작된 공사는 엄청난 시련을 가져 왔다.그때마다 외쳤다.“하나님은 누구십니까.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 님,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신가요.주여 도와주소 서” 22 ◎오늘도 주의 역사하심 고백 89년,아직 건물이 완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하실에 임시 시설을 마련해 놓고 1천58명의 청소년들을 훈련시켰다.골조공사만 마친상태에서 시작된 훈련은 많 은 학생들을 변화시켰다. 변화된 학생 가운데는 대전지역에서 알아주는 어깨도 있었다.학교에서 문제만 을 일으키던 그 학생은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으로 일주일 동안 훈련을 받은뒤 완전히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었다. 6억원이 들어야 하는 마무리공사는 무거운 짐이었으나 하나님은 이것도 감당 하게 해주셨다. 결혼한 뒤 나는 3가지의 기도제목이 있었다.하나는 자손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영적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고,둘째는 목사가 되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셋째는 내가 운영하는 모든 기관들이 기도하는 기관이 되는 것이다.그 러나 3가지 모두 이루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70년 8월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귀국,그해 10월 복음교회를 개척했다.당 시 공동묘지였던 산 언덕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했다.그 교회는 지금 1천 5백명의 중형교회로 성장했다.그리고 대성학원은 기도하는 기관으로 성장했으 니 두가지의 기도제목은 나름대로 달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자손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영적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갈때까지 나의 기도제목이 될 것 같다. 청소년영성훈련은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교육이라 믿는다.배금주의,음란· 퇴폐문화,각종 범죄들이 청소년의 심성을 황폐화 하는 오늘의 환경속에서 청 소년 영성훈련이야말로 우리사회의 미래를 밝게 하는 길이라 확신한다. 청소년영성훈련을 받는 학생들은 초대교회의 제자들처럼 놀라운 체험을 하곤 한다.하나님은 이 훈련을 위해 공주군 반포면 송곡리에 땅을 마련해 주셨다. 반포면에 훈련원을 건립하고 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죽으면 죽으리라 는 각오로 헌신할수 있는 80명의 영적 스탭들이 필요하다.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하신 주님,오늘도 그분은 살 아서 역사하심을 고백한다. “여호와여,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여호와여,주의 일이 이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하박국 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