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표트르의 개혁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근대화’ ‘서구화’는 반쪽 짜리였다. 유럽의 앞선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정, 산업, 교육 제도는 열심히 모방했지만 정치적 자유와 사상적 자유는 외면했다. 그의 개혁으로 구시대에 머물러 있던 귀족제도가 합리적으로 재편성되고, 그 위에 황제의 절대권력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되지도 않았고,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인 농민과 농노는 여전히 중세적인 속박에 묶여 있었다. 아니, 인두세 도입 등은 그들의 생활을 더욱 괴롭게만 했다. 그것은 표트르의 개혁 목적이 애당초 “러시아를 부강한 나라로 만든다”는 데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루아침에 오랜 전통문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서구문화 추종에 급급해하는 일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단지 보수파들의 시대착오적 항변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런 항변을 가장 뚜렷하게 제시했던 사람, 그가 공교롭게도 황태자 알렉세이였다. 아버지 표트르와 달리 유약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알렉세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닮으라며 시키는 교육 방식이 몸에 맞지 않았다. 장성해서는 아버지의 정책에 대한 의문까지 생겨났다. 마침내 계속 말을 듣지 않는다면 황태자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선언이 표트르에게서 나왔다. 그 후 황태자가 쿠데타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나돌았고, 알렉세이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얼마 후 그는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귀국했지만, 표트르는 그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재판소에 넘겨 버렸다. 재판소는 그에게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했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알렉세이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여러 의혹이 있었다. 아버지 표트르가 독을 썼다고도 하고, 심지어 술에 잔뜩 취해서 아들을 매질하다가 그만 때려죽였다는 말까지 있었다. 아무튼 모두의 눈에 분명했던 것은 표트르가 아들의 장례식에서 보여준, 황제에게도 저런 것이 있었나 싶었던 것, 뜨거운 눈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