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세계 어디든 찾아간 도산 안창호.
민족의 심금을 울린 연설가이자 애국 청년을 길러낸 교육자며 평생을 다 바쳐 희생한 독립운동가다. 그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멀리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와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있고, 가까이는 서울 강남 도심에 ‘도산공원’과 ‘도산안창호기념관’이 있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오직 대한의 독립을 위해 살다간 도산 안창호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자.
취재 이은아 리포터 identity94@naeil.com 사진 이현준
도움말 이승민 연구원(도산안창호기념관) 참고 도서 <웅진생각쟁이인물 20 안창호>
독립투사 부부의 아름다운 희생
도산대로 근처에 볼 일이 있어도 약속하는 장소만 들를 뿐, 도산공원 안까지 들어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MBC TV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보고 도산공원에 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의 합장묘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간 무심히 지나침에 대한 반성이 밀려왔다. 드디어 처음 방문한 도산공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직진해 두 분의 합장묘에 머리 숙여 참배부터 올렸다. 합장묘는 1973년 11월 10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던 안창호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는 동시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모셔와 만들었다.
도산안창호기념관 이승민 연구원은 “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늘 집을 비우다보니 부부가 함께 산 날을 합치면 겨우 2년 남짓이라고 한다. 미국에 홀로 남은 이 여사는 삯바느질 같은 궂은일로 생활비를 벌어 자녀를 부양하면서도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안창호 선생도 그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첫머리에 항상 ‘나의 사랑 혜련’ 이라고 쓰며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고 설명한다.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댕기머리를 자르다
도산안창호기념관은 안창호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생생한 사진 자료가 많아 당시의 상황과 인물을 살펴보기에 매우 유용하다.
안창호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황폐해진 평양을 보며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고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홀로 한성에 내려온 그는 구세학당에 입학, 하루라도 빨리 신학문을 배워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결심에 댕기머리도 과감히 자른다. 학당을 졸업한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한다. 1898년 평양 쾌재정에서 정부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연설로 명성을 얻는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 회고록에서 “안창호 선생의 연설에 감동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고 할 만큼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인 스승이다.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는 해산되고 안창호는 학교 사업을 시작한다. 이 연구원은 “안창호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 사립학교인 점진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신식 공부를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교육 방식에 부족함을 느꼈다. 게다가 친일 정부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 학교 운영에 위기가 닥쳤다. 이때 문명이 개화한 나라에 직접 가서 문물과 제도를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혜련과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독립운동을 위해 지구 한 바퀴를 돌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인삼 장사꾼의 싸움을 목격한 뒤흩어진 한인 동포를 결집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공립협회를 설립해 동포의 권익 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에 귀국한 안창호는 양기탁, 이갑, 이동휘 등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태극서관을 운영하는 등 다방면의 구국 운동을 전개한다. 1909년 안중근 의거로 체포됐다가 풀려나지만 계속된 감시에 안창호는 중국으로 망명.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재러 한인 사회를 지도하고 북만주 독립운동 기지를 돌아본 뒤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이후에도 안창호는 북미와 하와이·멕시코·쿠바·만주·시베리아 등 곳곳의 한인 사회를 결집하고 민족운동을 지도한다.
이 연구원은 “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닌 거리를 합하면 지구 한 바퀴 4만 km가 나온다. 이는 국외에 있는 한인을 하나로 모아서 힘을 키우기 위해 교육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려는 이유에서다.
또한 독립운동 중심지를 만들자는 의미의 이상촌 건설을 위해 여러 지역을 답사 다니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심한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심하게 악화된 안창호는 “일본은 자기 힘에 버거운 전쟁을 시작했으니 결국 이 전쟁으로 패망할 것이오. 절대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난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의 독립을 열망했던 안창호의 애국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