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어느날, 카이킬라니(Kaikilani)라는 이름을 가진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공주'와, 유럽과 미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명 화가 휴버츠 보스(Hubert Vos)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왔다.
굴뚝이 두개나 있는 18,000톤급 증기선에서 내린 두사람은 몇 달전인 1897년 11월 초순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였고, 신혼여행차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들르던 도중에 우리나라에 온 것이다. '마지막 공주'의 어머니는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왕인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여왕으로, 유명한 하와이 민요 '알로하 오에(Aloha'Oe)'를 만들었다.
하와이 왕조는 1893년, 'Dole 파인애플'로 유명한 Dole 가문이 주축이 된 쿠데타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미국과의 합병을 원하는 '하와이 공화국'이 들어섰다. 그 과정에 깊숙히 개입했던 미국으로서는 하와이 왕조에 '빚'이 있었다. (1993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당시 미국이 '하와이 왕국 전복'에 개입했던 사실을 인정하고 원주민들에게 사과하는 내용을 담은 `사과 결의문'에 서명했다.)
미국공사관에서는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W. F. 샌즈를 시켜 신혼부부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샌즈는 두 사람을 공사관 안에 있는 자신의 한옥에 머물게 했고, 신혼부부는 그의 안내로 우리나라의 산천을 유람했다. 그리고 화가는 "언덕과 골짜기, 고요한 강가나 꿈같은 호숫가에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하와이 '마지막 공주' 의 남편인 화가가 우리나라에 장기 체류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자, 1등 서기관 샌즈은 미국 영사관 안의 방 하나를 화실로 꾸며주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사실이고, 관계 자료들은 글의 맨 마지막에 첨부했음을 밝힌다.)
화가는 아침마다 공사관 안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이젤에다 캔버스를 올려놓고 시내 풍경을 스케치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화가는 팔레트에 물감을 개면서 캔버스에 붓질을 했는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샌즈가 봐도 훌륭했다. 며칠동안 붓질을 하던 화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캔버스 오른쪽 귀퉁이에 서명을 했고, 1898년이라는 연도도 써넣었다.
▲ 휴버트 보스 <서울풍경> 캔버스에 유채 31 x 69cm 189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c 휴버트 보스 | | 지금으로 부터 111년 전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미국공사관에서 바라본 서울풍경>이다. 당시 미국공관은 정동,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덕수궁 뒷길에서 이전하기 전의 경기 여중고등학교 옆 언덕에 있었다. 지금 대사 관저로 사용하는 곳이다.
보스는 미국공사관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그렸기에, 당시 서울의 중심지였던 경복궁과 당주동, 신문로, 태평로 일대를 모두 담을 수 있었다. 그가 세로 31cm 가로 69cm의 작은 화폭에다 이렇게 넓은 풍경을 세밀하게 담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림 실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대단한 화폭 구성 능력을 갖고 있고, 세필(細筆)에 능숙한 화가였기에 이렇게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어린시절 벨기에의 '브뤼셀 왕실 학원'에 들어가 정통 회화를 공부했고, 그 후에는 파리와 로마에서 회화 수업을 받았다. 1886년 '파리 살롱전'에서 실내 풍경화로 금상을 받았고, 1887년에 암스텔담의 '세도시 연레전'에서도 금상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해부학과 조각도 공부한 덕분에 초상화에도 탁월한 능력을 나타냈다. ('1911년에 쓴 보스의 자전적 편지' 참조)
보스는 이런 성공을 배경으로 영국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영국 왕립 초상화가 협회(The Royal Society of Portrait Painters 1891년 창립)의 창립회원이자 정회원이 되었다. (당시 영국 평론가 Walter Sickert의 책 <The Complelete Writing on Art> 9쪽 참조.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에서 2002년 재출판) 그리고 그의 명성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 1895년 10월 1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보스 관련 기사 부분 c <뉴욕타임즈> | | 이 기사는 당시 보스의 화가적 위치를 잘 보여준다. 기사와 인용에서 생략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카고 만국박람회 네덜란드관의 왕실 커미셔너이자 화가인 휴버트 보스씨가 어제 유럽에서 증기선을 타고 도착했는데, 영부인 클리블랜드 여사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계약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보스씨는 자신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영부인이 자신이 그린 법무부 장관의 초상화를 보고 경의를 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서너 명의 미국 부인들 초상화를 그리기로 계약했기 때문에, 8개월 동안은 다른 초상화를 그릴 시간이 없고, 그 작업이 끝나면 다시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시 그로버 클리블랜드 영부인은 31세로, 2번째로 백악관에서 생활할 때였다. 보스는 그런 영부인에게 정식으로 계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상화를 그릴 수 없다는 기자회견을 했으니, 그림 실력도 대단했지만 화가로서의 자존심 또한 매우 강했다고 할 수 있다.
▲ 왼쪽 : 부분도. 오른쪽 : 사직동에서 바라본 경복궁(이사벨라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수록 사진) | | 이 그림의 가운데에 보이는 3채의 건물은 맨 앞이 광화문이고, 그 뒤가 근정전, 맨 뒤가 경회루이다. 광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하는 경복궁은 조선시대 정궁(正宮)으로 태조 4년인 1395년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때 불탄 후 300여년 만인 고종 2년(1865년)에 중건되었지만,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경복궁은 비어 있었다.
고종은 1895년에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후 경복궁에서 연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일본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래서 다음해인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에서 탈출하여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관에 몸을 의탁했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그렇게 경복궁을 떠나 1년동안 러시아 공관에 피신해있던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할 때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갔다. 경운궁 주변에는 외국공관들이 모여 있어, 일본이 함부로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그리던 1898년에는 경복궁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된 다음 해인 1927년, 삼청동 입구인 건춘문 북편(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으로 옮겨졌고, 한국전쟁 때 많이 파손되었다. 그래서 1968년에 다시 지었는데,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아 원래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옮겨졌을뿐 아니라 중심축도 틀어졌고, 시멘트를 너무 많이 사용해 웅장한 옛 멋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현재 광화문을 원래의 자리로 되옮기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2010년 복원공사가 끝나면 이 그림에서 보이는 위치로 되돌아 온다.
근대미술사학자들이 <서울풍경>에 대해 쓴 글은 3편 정도 밖에 없다. 우리나라 화가가 아니기 때문에 관심이 많지 않고, 보스에 대한 자료접근이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연구 결과가 많지 않다 보니, 그림에서 보이는 공터가 실제 존재하던 실경인지 아니면 보스가 화면 구성을 하면서 일부러 공터로 만들었는지, 오른쪽 아래 군인은 누구이고, 군인이 지키고 있는 한옥은 누구의 집인지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제작된 지도를 보면 왼쪽의 공터는 실제 존재했고, 오른쪽 아래에 군인이 보초를 서는 한옥은 영국공사관임을 알 수 있다.
▲ 1901년 9월에 제직된 '서중 중심 지도' 중, 정동 부분 (일본 도쿄 '동양문고' 소장) 당시 주 베이징 영국공사관의 육군 무관 콜로넬 브라운스 제작 | | 정동 부근의 지도는 꽤 많이 전해진다. 당시 정동이 외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스의 <서울풍경>과 비교하기 위한 1898년의 정동 부근 지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고, 위에 소개한 1901년에 제작된 지도가 1898년과 기장 가까운 연대의 지도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 근대건축사를 전공하고 보존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정동 교수가 지은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에 소개되었는데, 필자의 허락을 받아 재인용한다.
▲ 휴버트 보스 <서울 풍경> 캔버스에 유채 31 x 69cm 189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 이 지도와 <서울풍경>을 비교해 보면, 왼쪽 공터는 덕수궁의 후원이던 영성문 대궐 구역의 건너편 공터(훗날 덕수초등학교 자리)이다. 공터에 보이는 담장은 '영성문 대궐'과의 경계로 추정된다. 지도와 당시 기록을 보면 '영성문 대궐'터에는 야트막한 담이 둘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오른쪽에 보이는 초가집과 공터는 현 서울시의회당(일제강점기의 부민관, 광복 후 국회 별관) 자리이고, 그 오른쪽이 광화문에서 직선으로 뚫려있는 태평로다.
그림 가운데 군인이 있는 한옥은 영국공사관이다. 지도의 위치로 볼 때도 그렇고, 당시 영국공사관을 그린 삽화와 비교해도 거의 일치한다.
▲ 왼쪽 : <서울풍경> 부분도. 오른쪽 : 당시 영국공사관에서 보초 서는 군인 삽화 | | 그림과 삽화를 그린 위치가 달라 한옥의 모습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한옥과 군인의 모자, 총이 거의 같은 형태다. 그리고 한옥 건물이 외국 공관이 아니면 군인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설 이유가 없다. 당시기록에 우리나라 고관대작 집 앞에 대한제국 군인이 보초를 섰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J.E 호어가 지은 <영국대사관 소사>에 의하면, 영국 정부는 1883년 신석휘 혹은 신협희라는 사람으로부터 안채・사랑채・별채가 있는 한옥을 구입해서 공사관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훗날 이 한옥을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하다는 이유로 허물고 영국식 건물을 지었다. 훗날 영국 성공회 성당이 정동에 들어온 이유는, 자국의 공사관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위해서였다.
<서울풍경>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만약 보스가 웅장한 경복궁만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풍경화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흰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행인을 몇 그려 넣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 특징'을 화폭에 포함시키면서 그림에 생동감이 흐르게 했다. 이것이 화가의 화폭 구성 능력이고, 그림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보스가 이 부분에 흰옷 입은 사람들을 그린 건 우연히 그들이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1911년에 쓴 자전적 편지'에서 우리나라에 와서 흰옷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음을 밝혔다.
“...그곳(조선)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중의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시 '유령처럼' 흰옷을 입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무 말 없이 걸어 다녔다...”
당시 보스가 우리나라에 와서 남긴 작품은 <서울풍경>외에도 두 점이 더 있고, 이 그림들의 존재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1979년 겨울이다. 크리스틴 팜이라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진작가에 의해서 였다. 그녀는 1979년. 자신이 살고있는 코네티컷 주 스탬포드 박물관에서 열린 보스의 ‘유작전’을 둘러보다가 우리나라 소재 작품 3점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크리스틴 팜은 보스의 '유작전'을 취재해, 같은 해 겨울 서울에서 창간된 영문잡지 <코리아 쿼터리>에 '휴버트 보스는 누구인가... 1898년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라는 글을 발표했다. 아울러 <서울풍경>, <고종황제 초상화>, <민상호 초상화> 세 점의 그림 도판도 소개했다.
그녀의 글과 작품 사진을 본 국내 미술사학계는 깜짝 놀랐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보스의 한국 소재 작품 전시회를 추진해 3년 후인 1982년에 성사되었다. 보스의 세 작품은 이후에도 몇 번 더 전시되었고, 그 중 <서울풍경>은 유족과의 오랜 교섭 끝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되었다.
보스가 백여 년 전에 증기선을 타고 우리나라에 와서 그린 그림들의 회화적, 사료적 가치는 높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서울 풍경>을 소장하고 있던 보스의 손자를 설득해 소장품 목록에 오르게 한 국립현대미술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아래는 글의 시작에서 언급했던, 휴버츠 보스와 하와이 왕조 '마지막 공주'의 결혼과 신혼여행 그리고 미국공사관에서의 생활에 대한 자료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읽지 않아도, 그림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 보스의 결혼식을 소개한 1897년 11월 17일 자 <뉴욕타임즈> c <뉴욕타임즈> | | 위의 기사를 요약하고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초상화가 보스가,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유일한 여왕이었던 릴리오우칼라니가 (하와이와 미국과의 합병을 반대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할 때, 수행원으로 따라왔던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공주'를 보고 반해서 3일 만에 청혼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지난 금요일 결혼식을 올렸다. 보스는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갔다가 세계 여러 나라로 (신혼)여행을 한 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엑스포)에 참석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 미국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나라들을 운행하던 미국 증기선 1868년 사진 | |
당시 미국에서 우리나라를 오는 증기선은 신혼여행 부부가 타도 좋을 '호화 유람선'이었다. 나는 당시 미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는 배의 규모가 궁금해 오랫동안 사진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화물선에 사람이 묻어가는 정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진을 구한 다음에는, 당시 미국의 조선기술과 여행업이 생각보다 훨씬 발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하와이, 일본의 요코하마, 고베, 나고야를 거쳐 우리나라에 온 다음, 중국의 상하이와 홍콩 그리고 마닐라로 가는 정기항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증기선이 우리나라로 오는 정기항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가 하와이 '마지막 공주'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이런저런 근대의 자료를 찾았더니, 보스가 부인과 함께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 있었다.
1898년에 서울주재 미국공사관의 1등 서기관으로 부임한 W. F. 샌즈가 훗날 저술한 <조선비망록>(신복룡 번역, 집문당) 115쪽에 보면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머물고 있는 네덜란드 예술가와 그의 아내"라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 화가가 휴버트 보스라고 134쪽에서 밝혔다.
따라서 보스는 위의 배를 타고 '하와이 마지막 공주'인 부인과 함께 우리나라에 왔고, <조선비망록>에는 그의 '임시 스튜디오'가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보스는 단순히 신혼여행을 즐기기 위해 우리나라와 아시아 여러나라를 방문했던 것일까? 그리고 1900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엑스포)에 참가한다는 건 무슨 말인가?
▲ 휴버트 보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01년 | | 보스는 위에서 언급했던 ‘자전적 편지’에서,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그림 중 세계 여러 민족을 볼 수 있는 초상화가 너무 없음을 느끼고, 자신이 그 작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동안 세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생각을 했고, 결혼 다음 해인 1898년 부인과 함께 하와이를 떠나 우리나라에 들른 것이다. 그가 2년 동안 방문한 나라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중국, 티벳, 자바(인도네시아), 인도 등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서울풍경>뿐 아니라, 고종황제의 전신초상화(어진), 순종의 초상화(예진), 민상호의 초상화를 그렸고, 고종황제 어진은 미국에서 전시된 후 파리만국박람회의 미국관에서 다른 아시아 사람들의 초상화와 함께 전시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순종의 초상화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보스가 그린 <고종황제 전신 초상화>와 <민상호 초상화>는 다음 기회에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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