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님, 이 병은 어찌 견딜 만하십니까? 치료가 되어 좀 덜하십니까, 더하지는 않았습니까?
居士是疾,寧可忍不?療治有損,不至增乎!
보세요, 그는 정말 아주 훌륭한 외교관 아닌가요? 그는 이렇게 안부를 묻습니다. ‘거사님, 당신의 이 병은 견딜 수 있습니까? 치료해서 병 상태가 나아졌습니까? 좀 나아 지셨겠지요?’
세존께서는 특별히 저더러 대신 가서 정성스럽게 위문하고 부처님의 무한한 관심을 표시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世尊慇懃,致問無量。
‘부처님은 몹시 관심을 가지시고 저더러 대신 가서 안부를 물으라고 하셨습니다.’ ‘치문무량(致問無量)’이란 말은 무한히 관심을 갖고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장은 여러분이 편지 쓰는 데 활용해도 좋습니다.
거사님, 이 병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또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겠습니까?”
居士是疾,何所因起?其生久如?當云何滅?
문수보살이 여기서 묻는 문제도 우리 모두에게 묻는 것이니 참구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병이 있는데 왜 병이 날까요? 왜 늙을까요? 문수보살은 유마거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이 병은 어떻게 발생했습니까? 병이 나신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 병을 어떻게 없애야 합니까?’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도 젊은이들이 늙은이들보다 병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감기에 걸려 있으면서 머리가 아프지 않으면 콧물이 흐릅니다.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청년법사 여러분, 청년거사 여러분, 이 병은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일어난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어떻게 소멸해야 합니까?’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언제 좋아질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몹시 가련한 일인데, 자기 병을 자기가 치료하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화두요 커다란 문제입니다. 사람은 왜 병이 날까요? 왜 바람에 상하여[傷風] 감기에 걸리거나 암에 걸리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 생명은 왜 병이 날 수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중생이 병이 났으니 보살도 병이 났다
유마힐이 말하였다. “어리석음[痴]으로 말미암아 애착[愛]이 있기에 (생사의 큰 병이 있고, 생사의 큰 병이 있기에) 나의 병은 생겼습니다.
維摩詰言:從癡有愛,則我病生。
사람의 생명은 본래 바로 병태적인 생명입니다. 우주만유 현상도 병태적인 만유현상입니다. 문학과 예술적인 각도에서 보면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붉은 꽃, 푸른 잎들을 얼마나 아름답게 쓰거나 그립니까! 당신이 다 쓰고 다 그리고 나면 병이 납니다. 당신은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피곤함이 곧 병입니다. 우리는 피곤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피곤함은 바로 병의 원인입니다. 생명은 곧 이러한 생멸 현상입니다. 대단히 피곤합니다. 당신이 한번 반성해보십시오. 인생길 가운데에서 당신의 나이가 어떠하든 당신이 언제나 피곤함을 느낍니다. 아마 여러분 대보살들은 느끼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라는 이 범부는 언제나 피곤함을 느낍니다. 때로는 학우들이 저더러 많이 휴식하라고 권하지만 저는 신체적인 피곤이 아닙니다! 마음속의 피곤입니다. 특히 여러분들과 함께 있으면 몹시 피곤합니다.
생명에 병이 있는 것은 무슨 도리일까요? 유마거사는 대답하기를 모든 것은 ‘어리석음[癡]’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은 바로 정이 있는 것[有情]입니다. 불경에서는 중생을 유정중생(有情衆生)이라고 번역합니다. 제가 과거에 대학교에서 글을 가르칠 때에 많은 청년들이 저에게 애정철학을 물었습니다. 무엇이 정(情)ㆍ애(愛)ㆍ욕(欲)일까요? 저는 말했습니다. 이 세 글자는 어떻게 분류하든 간에 모두 바보라고요. 요컨대 모두 호르몬이 못되게 굴고 있는 것입니다. 호르몬이 승화되어 욕념(欲念)이 없어졌다면 애(愛)를 이룹니다. 애가 다시 변화하여 정(情)이 됩니다. ‘정’은 바로 ‘어리석음’의 근본입니다. ‘정’이 좀 진해지면 바로 ‘애’입니다. ‘정’은 포도주와 같아 아주 마시기 좋지만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애’는 달라서 브랜드와 같습니다. ‘욕’은 고량주나 보드카와 같습니다. 모두 술인데,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으로 갖가지 어리석음입니다. 생명은 바로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얼마전 세상을 떠난 그 노년 학우는 떠나가기 전에 그를 돌보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나는 아직도 12년은 잘 살 수 있네.’ 그러면서 자기는 선정의 힘이 있어 아주 자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것조차도 알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중음(中陰) 단계에서 자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두 허풍을 친 겁니다. 중국인에게 속담이 있습니다. ‘잘 죽는 것은 게으르게 사는 것만 못하다.’ 병으로 누덕누덕해진 이 몸을 끌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몹시 애착을 갖고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원스럽게 떠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오늘 오후에 또 한 노년 친구에게, 그는 이미 팔십 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이제 놓아버려도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직 한 가지 일이 있는데, 잘 처리하거든 놓아버리겠네.’ 제가 말했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 일을 다 처리한 뒤에 떠나간 사람이 있었겠소?’ 그는 말했습니다. ‘맞네. 나도 안다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알면 지금 놓아버려요.’ 그는 말했습니다. ‘아이! 이… 이 점은 다 처리하거든 그렇게 할 수 있을 걸세.’ 이게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마치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어리석음을 끝낼 수 있다면 거의 다 된 겁니다. 모든 것은 어리석음 가운데 있습니다. 당신은 백치를 어리석음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겠지요? 총명한 사람일수록 어리석습니다. 저 이상은(李商隱)의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봄누에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실이 다하고 春蠶到死絲方盡
촛불은 재가 되고서야 눈물이 마르네 蠟炬成灰淚始乾
실제로는 봄누에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실은 아직 다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옷을 만들어줍니다! 또 다음의 청나라 시와 같습니다.
정이 많으면 예로부터 부질없이 한을 남기고 多情自古空遺恨
좋은 꿈은 원래부터 가장 쉽게 깨 버리네 好夢由來最易醒
다정(多情)은 남녀 사이의 정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어리석음의 표현입니다. 나쁜 꿈은 깨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꿈은 조금 더 꾸고 싶어 합니다. 뒷날 어떤 여학생이 두 번째 구절을 ‘좋은 꿈은 원래부터 깨고 싶지 않네[好夢由來不願醒]’이라고 고쳤는데 정말 좋습니다. 정말 잘 고쳤습니다.
한참 얘기했는데, 온갖 중생은 모두 어리석음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정토종을 배우는 사람이 있는데 서방극락세계에 가서 뭘 하고 싶어 합니까? 소본(小本) 아미타경에서는 말합니다. 당신이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곳은 부처님을 잘 배우고 먹을 밥이 없을까 걱정도 하지 않고, 거주할 집이 없을까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장가들 마누라가 없을까 걱정하지 않으며, 여자는 또 시집가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녀상(男女相)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녀상이 없고 지방이 또 좋고 칠보(七寶)의 보배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그러므로 당신은 가고 싶어 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탐욕부릴까요? 탐욕부리지 않을까요? 어리석을까요? 어리석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발원하는 자는 탐욕 아니면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은 크나큰 어리석음이요 크나큰 탐욕입니다. 이러한 크나큰 어리석음과 크나큰 탐욕을 없애버릴 수 있다면 반드시 왕생하고 정토가 앞에 나타납니다. 밀종을 배운 사람은 어떤 불국토에 왕생하고, 또 신통을 구족하고, 장생불로…하고 싶어 하는데, 역시 어리석음입니다. 저는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는 다시 한 번 오지 않도록 아예 5백 년 동안 살기를 발원한다고 합니다. 엄마 뱃속이란 여관 속에서 10개월을 머물러도 일생동안 그 감정의 빚을 다 갚지 못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오랫동안 사는 것도 몹시 번거로운 일입니다. 노년 친구들은 다 떠나가 버리고 젊은이들은 얘기를 해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게 되는 것을 볼 것인데, 이것은 하기 쉽지 않습니다! 백 살에 이르면 또 사람들에게 웃음거리 인물이 되어서 어떤 곳에 놓여 전람이 될 테니 그 세월도 지내기 좋지 않습니다. 장생불로를 닦아 뭘 할까요? 아들과 손자가 다 떠나버리고 증손자는 저를 보고 ‘이 늙은이가 왜 아직도 안 죽지?’ 할 겁니다. 아, 이런 생각들은 모두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이 있으면 애(愛)가 있습니다. 애(愛)가 있으면 곧 병이 생깁니다. 이것이 유마거사의 답변입니다.
여기에 이해해야 할 중점이 하나 있습니다. 유마거사는 ‘어리석음[痴]으로 말미암아 애착[愛]이 있기에, 나의 병은 생겼습니다[從癡有愛, 則我病生]’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겸손하게 말했는데, 자기를 가지고 공연함으로써 중대한 도리를 하나 말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생명은 바로 어리석음[癡]이 있고 정(情)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애(愛)가 있다는 것입니다. 12인연 속에는 애(愛)가 중간에 있습니다. 애가 있으며 취(取)가 있어 모두 움켜쥐고 싶어 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는 비로소 생(生)이 있습니다. 생이 있으면 병이 있습니다. 중국 문자는 묘하기도 한데, 우리가 ‘생병(生病: 병이 나다. 병을 앓다/역주)’이라고 말합니다. 생이 있으면 곧 병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 존재한다면 곧 병태(病態)가 있습니다. 병과 병나지 않음 사이는 하나의 대 철학입니다. 문수보살이 병이 어디로부터 오느냐고 묻자 유마거사는 애(愛)로부터 온다고 답했습니다. 애는 어느 곳으로부터 올까요? 어리석음으로부터 옵니다. 부처님을 배우면서 모두들 탐(貪)ㆍ진(瞋)ㆍ치(癡) 세 글자를 알지만 제가 보기엔 모두들 3생(三生)을 닦더라도 끊어버리기 어렵습니다. 탐욕하지 않고 성냄이 없으며 어리석지 않고자 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어리석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제가 며칠 전 오랜 두 친구와 옹동화(翁同龢)가 쓴 한 폭의 글씨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8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값이 싸다! 고 즉시 말했습니다. 저는 듣고 말했습니다. ‘됐습니다. 여러분 더 이상 얘기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가지고 놀면 품덕을 잃고, 물건을 가지고 놀면 큰 뜻을 잃는다[玩人喪德, 玩物喪志]고 했습니다. 저는 애를 쓰고 이 방면의 기호를 경계 하고자 하니, 당신들 둘은 좌우에서 마구 떠들어대지 말기 바랍니다.’ 서화를 수집하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시중에서 사들였던 서화들은 모두 앞 시대 사람들이 어리석은 마음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후대의 불초한 자손들이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 위에는 또 전인들의 도장이 찍혀있거나 하는데, 당신은 지금 사들여서 장래에 누구에게 넘겨 줄 것입니까? 모든 것이 어리석음 속에 있습니다. 애욕이 없고 어리석은 정이 없을 수 있다면 정말로 해탈합니다. 그러므로 병은 어느 곳으로부터 올까요? 어리석음이 있고 애(愛)가 있음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도리입니다.
유마경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