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그건 아니다. 태종 임금 시절인 1406년 6월 19일 기사를 보면, 혜정이란 승려가 “내가 간직한 참서(讖書)로 보건대, 승왕(僧王)이 나라를 세워 이에 태평(太平)하게 될 것이다. 하윤(河崙)과 안노생(安魯生)이 죽으면 내 참서가 맞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참서는 예언서인데, 혜정은 예언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세조 임금 시절인 1467년 8월 1일 기사를 보면 이조 참판 신승선이 어느 승려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하여 의금부에 가두었는데, 그 승려는 "도선참기(道詵讖記)에 이르기를, ‘병정 연간(丙丁年間)에 난폭한 왕이 즉위하여 불법(不法)을 다 멸한다.’고 하였는데, 가만히 생각건대, 바로 북쪽을 정벌하였다가 군대를 철수시킬 때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이시애의 반란이 평정된 직후에 나온 말인데, 여기서 의금부에 갇힌 승려는 '도선참기'라는 예언서에 적힌 내용을 보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정감록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훨씬 전에도 이미 이 땅에는 예언서들이 있었고, 정감록은 그런 예언서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편찬된 책이라고 봐야 한다.
질문: 정감록은 한 권의 책인가?
답변: 아니다. 정감록은 각종 이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결을 비롯하여,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화악노정기(華岳路程記)·구궁변수법(九宮變數法)·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무학비결(無學秘訣)·도선비결(道詵秘訣)·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징비기(徵秘記)·토정가장비결(土亭家藏秘訣)·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삼도봉시(三道峰詩)·옥룡자기(玉龍子記) 등 수십 가지의 예언서들을 모두 한 데 묶어 부르는 말이다.
질문: 창세기와 출애굽기, 다니엘서 같은 여러 권의 책들을 한 데 묶어 성경이라 부르는 것과 같나?
답변: 비슷하다. 그렇게 보면 된다.
질문: 조선 시대에 정감록으로 불린 책들이 많았다면, 왕실에서는 어떻게 했나?
답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압수하거나 불태웠다. 태종 임금 시절인 1412년 8월 7일 기사에 보면, 사관 김상직에게 명하여 충주 사고의 책들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 그 중 "신비집(神祕集)"이란 책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고 하였으며, 태종은 그 책을 보고는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하고 불경한 말들이다.”하고 불태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조 임금 시절인 1457년 5월 26일 기사를 보면, 팔도관찰사에게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등의 문서들을 개인이 갖지 말고, 나라에 바치도록 명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책들은 조선 왕실이 망한다는 비방을 담고 있는 예언서이기 때문에, 조선 왕실에서 불태우거나 압수하여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자칫 백성들이 그 책들을 읽고,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서다.
질문: 조선 후기에 가면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지 않았나?
답변: 그렇다. 홍경래의 난이 대표적인 경우다.
질문: 현재의 나라가 망한다거나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다는 예언서는 조선 시대에 처음 생겨났나?
답변: 아니다. 고구려 말기, 당나라 시어사인 가언충은 "고려비기란 책에 말하길, 고구려는 9백년이 못가서 80세의 대장에게 망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당고종에게 말했다.
또한, 고려 중기의 술사인 김위제(金謂磾)란 사람은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와 신지비사(神誌秘詞)란 두 권의 책을 인용하여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보건대, 이미 고구려 말이나 고려 중기부터 예언서는 있었을 것이다.
질문: 정감록에서는 조선 왕조가 어떻게 망한다고 하나?
답변: 앞서 말했듯이 '정감록'으로 불리는 책들이 워낙 많다보니, 서로 말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대체적인 맥락은 조선 왕조가 5백년을 가다 망하고, 계룡산에 도읍을 정한 정씨(鄭氏) 왕조가 들어서서 8백년을 다스린다는 내용이다.
질문: 정씨 왕조는 누가 세운다고 되어있나?
답변: 정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나타나, 세운다고 한다.
질문: 진인은 누구인가?
답변: 진인은 원래 중국 도교에서 나온 말인데, 도교의 경전인 장자에 의하면 도의 참뜻을 깨달아 터득한 사람이다. 쉽게 해석하면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 즉 구세주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진인은 다른 성격이 추가되었는데, 타락하고 부패한 왕실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싸워 끝내 승리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워 백성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는 지도자이다.
질문: 그 부분은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요한묵시록에서 나온 백마 탄 구세주와 비슷하다. 요한묵시록에서 신의 군대를 이끈 구세주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의 군대와 싸워 이기고, 천년 동안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린다고 하지 않았나?
답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다 통한다고 봐야지.
질문: 그런데 왜 진인의 성이 하필 정씨인가?
답변: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조선 개국을 끝까지 반대하다 죽은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를 비롯하여 조선을 세운 천재였으나 왕자의 난에 휘말려 죽은 정도전, 선조 때 대동계를 만들었다가 역모 사건에 관련되어 죽은 정여립, 영조 때 밀풍군 이탄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은 정희량 등 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유독 조선왕조에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정감록을 쓴 사람들의 눈에는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결국 조선을 끝장낼 '진인'의 후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질문: 정씨 진인, 즉 정진인은 다른 말로 '정도령'이라고도 하지 않나?
답변: 맞다.
질문: 왜 하필 구세주를 어린 소년인 '도령'이라고 불렀나?
답변: 구세주는 새로운 세상을 열 사람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새 세상에는 낡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과 생명력의 상징인 젊음을 간직한 인물이 적합하다. 다 늙고 교활한 노인이 정도령이나 정진인이라면 어색하다. 그래서 소년인 정도령을 내세운 것이다.
질문: 조선이 망하고 나서 정감록이 갖는 영향력은 어떻게 되었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잊혀졌나?
답변: 오히려 그 반대다. 조선이 망했지만 이 땅은 외세인 일제가 지배했고,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매우 암울하게 여겨, 하루 빨리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랬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신비한 예언서로 알려진 정감록을 더욱 열심히 읽었고, 우후죽순 같이 생겨난 수많은 신흥 종교 교단들은 정감록을 경전으로 삼아 자신들의 권위를 높였다.
질문: 일제 시대에도 사람들이 정감록을 읽었나?
답변: 물론. 1915년에는 영남 지역의 부자들에게 정감록을 이용한 협박장을 보내 돈을 뜯어낸 민충식이란 사람이 검거되었다. 1921년 5월에는 계룡산 신도안 지역에 전국에서 무려 2,560명이나 되는 이주민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장래에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며, 또한 계룡산은 정감록에서 예언한 '큰 난리가 벌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안전한 터'인 십승지 중 한 곳이라 여겨 그런 것이다.
1922년 2월에는 역시 정감록에서 말한 십승지인 계룡산에 터를 잡고 독립운동을 한다고 주장하며 군자금을 마련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를 조사한 결과, 그는 정감록에서 영향을 받아 삼십육선교라는 신흥 종교를 만들고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1924년 4월에는 다른 신흥 종교인 태을교의 교주 차경석이, 계룡산에서 차황제로 등극한다고 선언했다. 역시 정감록의 영향을 받아 일으킨 일이었다.
1923년에는 각기 다른 두 권의 정감록이 새로 출간되었다. 하나는 일본인 나가다 멘치오가 편집한 이문당 판 정감록인데, 이 책은 정감록이 허황된 미신이며 전혀 믿을 것이 못된다는 내용의 견해를 책 곳곳에 넣어서 평가절하했다. 다른 판본인 조선인 김용주가 발행한 한성도서판 정감록은 정감록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일절 넣지 않고, 원문들을 모아서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조선 민중들은 한성도서판 정감록을 제일 많이 구입해 읽었다.
1925년 7월에는 자신이 정감록에서 예언한 정도령이라고 주장하며 이름을 정철통으로 고친 사람도 있었다. 그는 정감록에서 말한 "병인년 4월에 정철통이 계롱산에서 등극한다"는 내용을 그대로 믿었다고 한다.
1926년 5월에는 서울 종로에서 김종태라는 사람이 정감록을 팔면서, 천인제국부흥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철원군 산중에 천안궁을 건설하기도 했다.
1931년 4월 평안남도 덕천군 맹산에서는 정감록에서 말한 정도령을 숭배하는 신흥 종교인 정도령교가 등장했다.
질문: 조선인들이 저렇게 정감록을 열렬히 믿었다면,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불안했을텐데? 그들은 왜 정감록을 없애버리지 않았나?
답변: 정감록을 믿고 따르는 조선인들이 워낙 많으니, 일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정감록을 없애기보다는 차라리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
질문: 일본인들이 정감록을 이용했다고?
답변: 그렇다. 1910년 10월 신한민보의 기사에는 일본인들이 정감록의 구절 중 일부인 '성세추팔월 인부간야박천소 시사가지'라는 구절을 가지고 "일본 함대가 공자가 태어난 경술년 8월 21일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들어왔고, 그 이튿날 한일합병이 단행되었다."라고 풀이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가정삼년 진인출자해도중'이라는 정감록 글귀를 "대한제국 황제의 정사를 일본인 통감이 대신하고, 진인은 바다에서 온 일본을 말한다."라고 풀었다.
그러니 일본인들은 정감록의 내용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풀이하여 조선이 망한 것은 모두 정해진 운수라고 선전했던 것이다.
질문: 정감록의 내용이 어떻게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일을 정당화 할 수 있나?
답변: 본래 정감록은 예언서이고, 책의 문장이 애매모호하게 적혀 있다. 그러니 보는 사람들의 마음대로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다.
질문: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감록의 예언들이 허무맹랑한 미신 같다.
답변: 그런 기준에서 보면 성경이나 불경, 코란 같은 경전들에서 말하는 예언들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