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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
1) 그릇된 귀의
그렇다면 귀의란 무엇일까요? 귀의는 'Namo'에 대한 한역으로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엔가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돈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권력에 의지하는 이도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해야 한다면 참된 것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거나 가상적인 것에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과오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에 의해서 근심하며, 소있는 자는 소에 의해서 근심한다.진실로 의지함은 사람의 근심이다.
의지(依)가 없는 자는 근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부경전-경집)
여기서 '의지한다(依)'는 것은 'Upadhi'라는 산스크리트어의 번역으로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욕망의 대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의지해야 하지만 재산이나 자식, 또는 권력과 같은 것에 의지하는 것은 오히려 근심을 초래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궁극적 의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의(依) 가운데서, 견실(堅實)을 보지 못하도다." (경집)
2) 참다운 귀의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인 의지처는 무엇일까요? 붓다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진리(法-Dharma)라고 말씀하십니다.
(1) 자귀의(自歸依)
"진실로 자기는 자기의 주인(主)이며, 자기는 자기가 의지할 곳(依所)이다.그런고로 자기를 잘 다스려라. 마치 상인이 양마를 길들이듯이." (법구경 380)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뿐이로다.다른 곳 어디에 의지할 곳이 있을 것인가.자기가 잘 조어되었을 때 사람들은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는 것이다." (법구경 23권.)
여기서 '의지할 곳(依所)'이란 나아타'Natha'라는 산스크리트의 번역입니다. 나아타의 뜻은 '머물다',
'수호자(守護者)'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란 뜻입니다.
(2)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귀의하라(自歸依 法歸依) 올바른 귀의처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 아함부 경전에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눈앞에 두고도 이 가르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시기 직전에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여기에 스스로를 주(洲)로 하며 스스로를 의지할 곳(依所)으로 삼아라.
다른 사람을 의지할 곳으로 삼지 말며 법(法)을 주(洲)로 하며 法을 의지할 곳으로 삼아 다른 이를 의지하지말라.
" (장부경전17. 대열반경 2, 26)
여기에서 주(洲)는 Dipa의 번역어로 강변, 또는 뭍을 말합니다. 즉 모든 것이 변해 가는 세상에서도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뭍은 언제나 그곳에 있듯이 변함없이 영원한 삶의 발판이 주(洲)인 것입니다.
한역에서는 이러한 주(洲)를 '등을 밝히다'라는 의미인 등명(燈明)으로 의역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권력이나 돈에 의지하는 것은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혜의 밝은 빛을 얻게 되면 그와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주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또는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지해야 할 곳은 사람, 돈, 권력, 명예 같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 속에서도 흐르지 않는 주(洲)와 같이 자신과 진리에 머물 것을 당부
하고 계십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께는 세상의 상식적인 의지처를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부모, 자손, 재물, 권력 등에 의지하고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되는 줄 알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참된 귀의처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하고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귀의는 오히려 근심을 초래하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떠한 인격적인 존재도 궁극의 의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문이나 부처님 그 자신마저도 영원한 의지처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이나 사문들은 다만 우리들을 인도하는 스승(導師)일 뿐이지 그 자체가 궁극적 의지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스스로의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귀의불 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란, 두 다리(兩足)를 가진 존재 즉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분인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이지만, 흔히 복덕과 지혜 두 가지를 모두 구족하신(兩足) 존귀한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불보(佛寶)인 부처님을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이상적 인간상으로 생각하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귀의법 이욕존(歸依法離欲尊)이란, 욕심을 떠나 여읜 존귀한 부처님의 교법, 다시 말해 참다운 진리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교법은 객관성과 보편성, 세계성과 영원성을 지닌 진리여서 모든 사물과 존재에 두루 평등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사롭고 개인적인 욕심을 떠나 있다는 의미에서 이욕(離欲)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법보(法寶)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으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얻게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지이다. 욕심이야말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무시하고 역행하는 당체임을 상기한다면 부처님의 교법을
이욕존이라고 표현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귀의승 중중존(歸依僧衆中尊)이란, 수많은 중생의 무리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스님들에게 귀의한다 또는 수많은 집단과
단체 가운데서 법을 믿고 따르며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가장 존귀한 불교 교단(僧伽) 즉 불교공동체에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삼귀의는 삼보 즉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삼보라고 할까요?
다음 경전에 그 답이 있습니다. ******** 오백명의 장자들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왜 삼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귀한 보배에 비유한 것입니다. 진귀한 보배는 세계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합니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도 그와 같이 세계를 아릅답게 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데,
특히 열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마니보주(여의주)를 아무도 깨뜨릴 수 없듯이 부처님과 법과 승가라는 보배도 외도(이교도)나 악마가 깨뜨릴 수 없습니다.
둘째, 티없이 맑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뛰어난 보배가 청정하고 빛나서 오염되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과 법과 승가도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셋째, 즐거움을 준다는 뜻입니다. 보석이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듯이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중생에게 세간과 출세간의
즐거움을 줍니다.
넷째, 만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주 귀해서 얻기 어려운 보석처럼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업장이 있는 중생은 억겁이
지나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다섯째, 타파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의주가 가난을 타파하듯이 중생의 가난을 타파합니다.
여섯째, 위덕이라는 뜻입니다. 전륜왕이 지닌 윤보가 온갖 적을 굴복시키는 것처럼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신통력으로
모든 악마를 굴복시킵니다.
일곱째, 바라는 것을 충족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마니보주가 소원대로 온갖 보배를 내놓는 것처럼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중생이 실천할 좋은 소원을 충족시켜 줍니다.
여덟째, 장식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진귀한 보석이 왕궁을 장식하는 것처럼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법왕(부처님)의
깨달음의 궁전을 장식합니다.
아홉째, 가장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천신들의 훌륭한 보배처럼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중생들이 지닌 가장 뛰어나다는
보배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열째,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순금이 불에 넣어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과 법과 승가는 한량없는 신통력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데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이상과 같은 뜻으로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보배라고 합니다."
( 심지관경의 부처님 말씀 입니다)
1) 귀의불(歸依佛) :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삼귀의의 첫 번째 의지 대상은 바로 법의 구현자인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자신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삼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2) 귀의법(歸依法) :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존재의 참 모습을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의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러러보며 그 가르침에 대해 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3)귀의승(歸依僧) :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법을 믿고 따르며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승가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서로 화합하고 실천에 힘쓰는 이들입니다.
진정한 귀의처는 자기 자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께는 세상의 상식적인 의지처를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부모, 자손, 재물, 권력 등에 의지하고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되는 줄 알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참된 귀의처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하고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귀의는 오히려 근심을 초래하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떠한 인격적인 존재도 궁극의 의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문이나 부처님 그 자신마저도 영원한 의지처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이나 사문들은 다만 우리들을 인도하는 스승(導師)일 뿐이지 그 자체가 궁극적 의지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재가불자가 생활 속에서 읽을 만한 부처님 말씀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경전을 읽음으로써 여러 불자님과 더불어 부처님이 가르치신 참다운 삶의 길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먼저 삼귀의에 관한 경전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삼귀의는 삼보 즉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불교에 입문하려면 맨 먼저 삼귀의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삼귀의를 함으로써 불자(부처님의 자식)가 되는 것이지요. 삼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을 모든 고통에서 건져주고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누가 과연 내 귀의처가 되어 근심을 없애주고 행복을 줄 것인가?
온누리를 두루 찾아보아도 귀의할 대상이 없네. 하늘나라의 신들조차도 생사(태어나고 죽음)를 면치 못하고, 번뇌에 얽매여
한량없는 괴로움 속에 윤회하는데 하물며 다른 것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를 구해 줄 자가 없고
오직 부처님과 법과 승가뿐이네. 그러므로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리라. 그렇다. 부처님과 법과 승가를 제외하고는
중생을 구해 줄 이가 없으니, 중생이라면, 더욱이 깨달음을 구하는 이라면 마땅히 부처님과 법과 승가 -
삼보에 귀의해야 하리라. (육바라밀경 말씀이었습니다)
흔히들 '신'이라면 영원한 존재로 착각하기 쉽지만, 모든 것을 깨달으신 분(부처님)의 눈에는 그 어떠한 신도 생사윤회를
면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의 중생 가운데 천상의 중생일 뿐입니다. 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신들을 보면, 신통력이나 복력이라는 측면에선 인간보다 뛰어날지 모르지만 일반 중생과 마찬가지로
탐진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생사윤회를 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기독교의 바이블에 나오는 신은 영생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신은 구약의 말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으로서 그 민족을 선택된 백성으로 편애하고 인간들이 자기 뜻을
거스를 때에는 무섭게 분노하고 보복하는 신으로서, 중생이나 다름없는 감정과 번뇌를 지닌 신이 분명하므로 결코 영생할 없는 신입니다. 왜냐하면 탐진치 번뇌와 갈애는 곧 생사윤회의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사윤회하는 신이 중생을 생사윤회로부터 구원할 리 만무합니다. 그 자신이 고통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중생을 행복이나 영생으로 인도할 수는 없지요. 그렇듯 유한한 신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보편적인 귀의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깨달으신 분(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절대자'란 없습니다. 인간의 생사와 화복을 주관한다고 주장하는
유일신교의 창조주 유일신이란 허구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대표적인 사견의 하나로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하는 잘못된 견해를 비판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주관한다면, 도대체 인간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노력할 게 뭐가 있겠는가.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사람들이 살생을 하는 등 온갖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신의 뜻이란 말인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