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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3 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배병만
자고로 양반은 궁댕이가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야 하는데
가만 앉아 있으면 어디 병이 나는지
무슨 역마살이 끼인 건지...
유교 경전의 47만 자라는 글을 모르지만 또다시 머리에 갓을 얹어 놓고 앞으로 살짝 숙여 끈으로 움켜 잡아맨다
선비의 영원한 벗으로 여겨지는 문방사우( 文房四友 :붓, 먹, 벼루, 종이)가 궁댕이가 무거웠던 선비 곁을 지켰다면
선비로 살아감에 있어 갓이란 평생을 따라붙어 다니는 후광(後光)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조선의 과거길로 떠나며
김천역
신년들어 4대 총림을 하면서 안전산행을 기원드렸다면
이번 걸음은 그동안 눈여겨봤던 백두대간 황악산과 추풍령 사이의 괘방령에서 과거길로 떠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지도를 보고 살펴보니 충북 천안 방향이다.
괘방령 과거길은 영남 사람들이 문경새재로 가지 않았을 경우에 김천에서 충북 영동으로 넘어가던 고개가 바로 괘방령인데
괘방령은 부산에서 올라가면 -밀양-대구-가산-낙동강-구미-김천역 190km 지점이며
경남 통영에서 올라오면 -고성-함안-창녕-현풍-낙동강-고령- -성주-김천역 210km이다
이곳에서 영남사람들이 김천역에서 만나 괘방령-영동-옥천-대전-신탄진-세종-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행정리 구정 사거리 150km 지점까지 올라가면, 전남 해남군 땅끝-강진-영암-나주-장성-노령고개-정읍-전주-익산-논산-공주-차령고개 -행정리 구정사거리 349km를 올라온 삼남길과 만난다.
두 길이 만나 천안 -평택-오산-수원-과천-남태령-한강-숭례문(남대문)까지 122km를 더 이어간다.
그동안 영남대로 부산에서 문경새재 그리고 한양 446km
삼남대로 땅끝에서 차령고개 그리고 한양 471km
경남 통영에서 고성-사천-진주-원지-산청-함양-인월-운봉 백두대간 입망치-남원-임실-전주까지 233km
통영에서 경북 상주까지 올라가는 길은 고성-마산 진동-함안-창녕-영산-창녕-현풍-고령-성주-김천-상주까지 250km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건만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 운이 없어 떨어졌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번 과거시험은 글자만 알아도 합격할 수 있다는 운수대통, 더하기 만사형통 길이라는 괘방령고개로 향한다
이른 새벽이거나 혹은 아침이거나 대구에서 첫 기차로 김천역에 도착하니 6시 40분 무렵이다.
경부선은 1904년도 12월 27일 완공되어 이듬해인 1905년 5월에 서울역에서 개통식을 했는데
일제에 의해 철도가 만들어질 무렵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연결한 441km 인근에 사는 조선인들은 토지와 인력 동원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행(恣行)되다 보니 기력(氣力)이 남아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닭과 돼지가 멸종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경상도에서 문경새재를 거쳐서 한양으로 청운의 꿈을 품었던 선비들이나 상인들의 애환이 묻어났던 문경새재길은 교통의 발달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철도가 지나는 대전이나 김천이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서 크게 성장하였는데 반해 조선시대 약 200년간 경상 감영이 있었던 주요 교통의 중심지였던 상주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다.
지나간 경로
김천-영동-옥천-대전-신탄진-세종-천안
김천역에서 황악산 아래 직사사 방향으로 걸음 하며 영남 제일문으로 지나는데
어느 대가집 기와집인들 저렇게 높고 길쭉할까
직진하면 추풍령으로 올라가는 고개 마루이고, 좌측으로 진행하면 직지사나 괘방령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추풍령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기 위해 넘던 주요 관방(關防)으로서 교통의 중요한 몫을 했지만 과거객들에게는 좋지 못한 인상을 주던 고갯마루였다고 볼 수 있다.
경상도땅 포항, 울산, 부산, 김해, 마산, 고성, 창녕, 대구 인근의 사람들이 선산, 상주를 거쳐서 문경새재를 넘어갔거나
그러지 못했을 경우 김천에서 괘방령(과거시험 보던 과거길이며 상인들은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넘던 상로(商路) 길)이나,
혹은 추풍령(국가 업무수행에 중요한 관로(管路)를 넘어 황간, 옥천, 조치원을 거처 천안으로 향했다.
추풍령을 지나 과거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면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처럼 될 것을 염려하여 상인들이 주로 넘던 괘방령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어디까지나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하던 돌팔이 선비들의 푸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복을 가져다준다는 복전 마을을 지나
괘방령 아래에 장원급제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지난해 말 전국의 고3 수험생 부모님들이 엄청 다녀가셨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한다.
"탱자탱자 놀면서 공부한 문제는 다 나오게 해 달라"는 솔직한 마음이 녹아든 괘방령길
괘방령 올라가는 길에 주막집이 있건만
주인장은 어디 가셨나
마당에 구르마 한대만 덜렁 서있다
좋은 길이 바로 옆에 있건만
혹시나 옛길인가? 하여 찾아올라 가고
지나온 길과 김천의 덕대산이 지척에 반긴다.
해발 300미터의 괘방령에 도착하니
대간하시는 분들이 엄청 많으셨는데
모두 다 조심해서 산행하시길 빌어드리고
장원급제길이라...
이 길을 지나는이 장사치들은 떼돈 벌기를 바라고
과거객들은 모두 합격하셨기를...
조선 10대 도로길을 따르거나 그 외 다른길로 올라 한양 경복궁 앞에서 과거시험을 보는데
통틀어 800회 이상 치뤄진 시험중에 가장 많이 합격한 성씨(性氏)는 전주이씨 (약 850명 이상)가 가장 많고 그다음 안동 권씨,파평윤씨 남양홍씨,안동 김씨 청주한씨,밀양 박씨 순으로 300명 이상 합격하였고 광산김씨,연안이씨,여흥민씨가 200명 이상 이었다고 한다
물론 모두가 유교 경전의 47만 자 글에 능통하셨겠지만 그중에 권문세도가로써 부정부패가 있었는지 알 길은 없는데
시험지에는 집안 4대조부터 외가집까지 이름을 적게되어 있어서 어지간하면 집안보고 합격을 시켜 줬을듯하다
"아버지 뭐하시노" 아니겠나
요즘 같으면 노량진에서 공무원 10년간 해서 합격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3년에 1번 치르며 평균 500대 1의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비할바가 못된다
이렇게 힘들고 힘든 과거시험을 9번쳐서 모두 다 장원한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선생"이 있었고
한해에 치러진 모든 과거를 다 합격한 인조 때 최명길 선생도 계셨다
참고로 배 씨(裵氏)는 신라 천년의 터전을 이룩한 초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한 지부(漢祗部, 경주 백율사 부근) 사람인 지타공(祗沱公)을 시조로 하며, 왕건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을 중시조로 하며, 조선 건국의 원훈이신 배극렴이 계신다
조선시대 때 양반보다 노비가 많았던 시절에 저의 조상님들께서는 최소 노비의 신분은 아닌듯하다
백두대간길에 만나는 괘방령을 뒤로하고
이제 충북 영동군 매곡면땅을 밟아간다
영동군 매곡면
봄이 제일 먼저 찾아온다는 개춘리(開春里) 마을과 개춘산
개춘마을에서 어촌천을 건너면 해평 마을 앞을 지나는데
어촌천과 초강천이 만나는 곳에 예전에 장(場)이 섰다는 곳을 지난다.
조선시대 때 괘방령을 지나 250고지의 신우재를 너머 영동으로 가야 했기에
수동마을과 해평 마을사이에 장(場)이 섰고, 교통의 중심지다 보니 객줏집이 많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그 흔적이 없어진지 오래이며 그날의 웃음소리는 허공에 맴돌 뿐이다.
수동 마을의 모현대(募賢臺)와 마을 유래비
요약하면 서울에서 영동 신어재를 거처 괘방령으로 올라가기 전 교통의 중심지라 쓰여있다.
매곡면 수동마을
멀리 개춘산과 바로앞은 예전에 장(場)이 섰던 곳이며 교통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밭으로 변한 곳
신우재로 올라가기 전에
원촌마을(서원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앞 냇가에서
할머니 한분이 이 추운 날 빨래를 하고 계셨는데
빨간 고무 장갑도 없으시고...
어릴 때 할머니와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릴 때는 마을의 모든 어머니들께서 저수지 차가운 물에 빨래를 하시며
언손을 녹이고자 입으로 호호 불던 생각도 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당연히란건 애초에 없었는데
그때는 우리 집 남의 집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렇게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손시렸을까 ...
서원마을의 송계서원 유허비각
조선 18대 현종 7년에 창건된 서원으로 조위, 박영, 김시창, 박은훈 네 분을 봉안하였는데
봉안글은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쓰셨다고 한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
돈대 삼거리에서
직진해서 좌회전하면 질매재(백두대간 우두령)로 올라가고, 곧장 가면 도마령을 지나 무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250고지의 신우재로 오른다.
신우재
신우(시누아리라고개)라 적혀 있는데
이번 과거길은 김천의 괘방령, 신우재 ,삽재, 대전의 세천고개, 세종의 개미고개가 있다
비록 낮은고개라 하더라도 과거객들에게 있어서 낮에는 산적, 밤에는 호랑이(虎狼)를 조심해야 했는데
호랑이는 한문에서 보듯 범호(虎) 자와 이리랑(狼) 자를 쓰는데 범과 늑대, 이리 승냥이 즉 맹수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예전에는 길이 거의 없었으니 이런 산길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길이었으며 어지간한 담력이 아니면 넘지 못했을 길이다.
그러나 장사치들은 인원이 많았으니 산적을 만나면 한판 붙으면 될 것이요 산냥이(호랑이)가 나타나면 잡아 가죽을 팔면 되었을 것 같고, 과거객들이야 방구석에 틀어박혀 종일 공부만 했으니 산적이나 호랭이를 만나면 허연 다리로 도망이나 제대로 했겠나 싶다
높은 옹벽이 가로막힌 고갯마루를 오르고 내리는 동안 구르마 한대 다니지 않았으니 호랭이가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한적한 도로다.
신우재를 넘어와
옛길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지나며
명륜동 삽재 고갯마루에서
숯을 구워팔던 탄막(炭幕)은 예부터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나 보부상들이 지나가던 주요 고개로써
원님도 쉬어갔다고 적었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의 중앙지점이란 글도 보이고
김천역에서 신우재를 지나 이곳까지 잘 찾아온듯하다
경부선 철도 옆 국도 왕복 2차선 길을 걸으며 만난 국토종주하시는 여성분
서울에서 매일 20km씩 13일째 진행 중이며 1월 말까지 부산역까지 진행하신다고 하신다.
여러 날 걸어오면서 발바닥에 미더덕(물집)이 많이 생긴 듯하였으나 스스로 고통을 극복해 내겠다는 의지가 크니
꼭 성곡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힘내서 완주하시길 바랍니다.
영동역을 지나
영동 전통 시장 앞을 지나며
영동은 와인과 곶감 그리고 복숭아가 유명한데 영동읍을 중심으로 천마산 자락에서 흘러온 영동천이 흐르고
북쪽에는 삼도봉에서 흘러온 초강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아름다운 금강이 영동을 감싼다
그리고 영동읍을 가운데 두고 모두 9개 면이 있는데 동쪽에는 경북 포도나라 김천땅과 북쪽에는 곶감나라 상주땅
서쪽으로는 충북 향수의 옥천군, 남쪽으로는 전북 반딧불이의 무주군땅이다
또 산으로는 서쪽에는 천년 은행나무가 자라는 영국사의 천태산이 있으며 북쪽에는 암릉이 멋진 백화산 주행봉, 동쪽으로는 황악산이 있고 남쪽에는 삼도봉과 민주지산이 있어 산으로도 유명한 동네가 바로 영동이다.
영동에 왔으니 주막에 들러 밥은 먹어야겠는데 오늘 가야 할 길이 옥천군까지 70km가 될듯하여 그냥 지난다.
영동 관아를 지나서
영동읍을 벗어나며
영동천과 멀리 월이산 방향으로 해는 질듯하고
저녁 무렵이 되니 바람이 차가워진다.
각계 2리 마을 앞 300년 이상된 노거수가 자리한다
노거수 나무 노숙하기 좋은 아래 4각 정자가 있지만 아직 해가 남아 있어 생각만 해본다.
각계 2리 마을은 신라 진흥왕 시절에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옥천)을 침공했다가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다시 한번 더 최후의 격전을 하였는데 마을 뒷산인 핏골에서 전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굳게 지킨 땅이란 뜻과 불굴의 의지로 대성하리라 는 대길 운을 따 지계리(枝界里)라 부른다.
시인 김석환 님의 묘가 있는 고갯길을 지나며
옛날에 이런 나즈막한 고갯길에도 산군(山君)이던 산냥이(호랑이, 승냥이)나 탁월한 리더십을 보이는 산댕이(늑대)가 있었을까
동서고금의 주옥같은 수많은 명언들 중에서 최고의 명언이 있다면 당연 "밤에는 싸돌아 댕기지 말라"아니겠나
우리네 조상님들이 밤에 밖에 안 나가는 이유는 산냥이(虎)와 산댕이가 많았거나
간 빼먹는 여우가 많아 밤에 싸돌아 댕기지 말라하셨다.
그러나 한집안을 일으키고 명망 높은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양으로 과거 시험 보러 가는 길에 그까지 산냥이나 산댕이가
문제였을까
아무튼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세상에서 이불밖이 위험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듯하다
김한필 효자문
김한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영조 17년에 건립하였고
내용은 부친을 일찍 여의고 모친을 모시던 중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돌아가실 때까지
10년간 병간호를 하셨다는 내용인데 이후에 3년 시묘 살이를 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라면 분명 3년간 시묘살이를 했을 텐데... 산에다 움막을 짓고 부모 묘 옆에서 3년간 살았는데 어찌 살았을까?
호랭이 입장에서는 털도 뽑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사거리가 제 발로 찾아온 격이다
6cm 이상의 호랭이 송곳니에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었을까?
정신 차리면 더 아프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결국은 삶을 포기하며 "아프지 않게 잡아 잡숴..."
온몸이 난도질 당한채 호랭이굴에 끌려가면 살 수 있었을까? 아니면 호랭이한테 대들다 살아난 사람들처럼 개겨 봐야 하나
옛사람들이 길을 떠나며 수없이 했던 생각들... 이런 생각을 공감하다 보니 해는 저물어간다.
금강 너머 어류산과 국사봉 그 뒤에 마니산이 보인다.
영동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지점을 지나며 본 옥천땅의 월이산
조선의 직업 중에서 양반이나 아녀자들이 허연 다리를 드러내기를 꺼려하다 보니, 이러한 고귀한 분들을 업어 건너주던
월천(越川) 꾼이란 직업도 있었는데 요즘으로 본다면 관광 가이드 아니겠나
하천을 업어서 건너주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면 그때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맞아 죽어도 할 말 없었거나 10년간 무료 봉사를 했거나
어둠이 찾아온 영동군 심천면
이곳에서 때늦은 식사를 할까 했으나
요즘 시골면(面)은 초저녁이면 모든 식당은 문을 닫는 편이다.
심천역 앞을 지나
이곳에서 노숙을 할까 했지만 내일 일정도 있고 하니 옥천군 이원면까지 더 진행한다.
짧은 오르막길을 지나면 옥천군 이원면인데 조선시대의 극한 직업 중 하나인 보부상들이 이 길을 지났다면
이런 시간에는 넘지 않았을 것 같다.
조선시대 때 극한의 3대 직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보부상과 죄인들의 목을 치는 망나니,
그리고 호랭이 잡으러 전국을 돌아 댕기던 착호갑사가 있었는데
이 3대 직업 중에 짐승계의 최종 보스 격인 호랭이 잡는 직업이 최강이었을 것 같다.
그 당시 호랭이 가죽은 한양에서 기와집 한 채 가격이었다니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었던 꿈의 직업이 아니었을까
다만 호랭이한데 까불고 대들다 골로 가는 수도 있으니... 조심은 해야겠다
이원면
식당은 안 보이고 불 켜진 곳은 온통 매점뿐이다.
밤길에 도움 되는 주막들이 보이는데
전국에 이런 편의점은 6만에서 7만 개 정도다
커피숍은 10만 2천 개이고, 치킨집은 대략 6만 개
조선 후기에 전국에 있었던 주막집이 12만 개 정도였다고 하니 한집 건너 한집은 주막집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다 1900년도에 들어서 철도가 생기면서 점차 사라진 주막집은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집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원중학교
조선시대로 본다면 서당(꼬마들)과 향교(16세) 사이의 교육기간이라 보인다.
효경과 시경, 논어, 맹자를 가르치던 곳
이원면에서 옥천읍으로 넘어가던 고갯길에서
시간은 대략 밤 10시 무렵이다.
인적도 없고 지나가는 차량도 전혀 없고
하얀 소복 입은 여자가 팔딱팔딱 뛰어와야 정상인데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평지를 걸으며 보폭 75cm 무릅각도 대략 30도 이렇게 하루에 60-70km를 걸어오면 무릅 굽히기도 힘든다.
가끔 길가에 꿇어앉아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귀찮아하지 않았더니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옥천읍에 들어와 어느 깨끗한 여관에 들어가 씻지도 않고 휴대폰 충전만 해놓고 퍼진다.
하루동안 70km를 걸으며 오늘은 뭘 먹은 건지 기억에 안 난다.
새벽에 나와 편의점에 들러 우유하나 사들고 나와
삼거리에서 본 좌측은 척화비가 있는 삼성산 삼거리 토성이 있는 곳이고 우측은 서산성이 있다
옥천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백제가 충북 보은 삼년산성으로 가기 위해 이곳에서 삼성산(관산성)에서 신라와 싸운 듯하고, 성왕이 아들 창을 보러 왔다가 이곳에서 약 2km가량 떨어진 구진벼루에서 매복 중이던 신라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곳이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와의 동맹 60년이 지나고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함으로써 동맹을 배신한 전투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성왕의 아들 창과 젊은 신흥 세력의 강건파와 전쟁은 다소 무리가 따르니 신중하자는 나이 드신 분들의 온건파로 나누어졌지만 성왕은 아들 창의 손을 들어준다,
전쟁 초반은 백제의 태자 부여 창이 승기를 잡아, 신라는 위기에 빠지고 한강 유역에 있던 김무력을 불러 전투가 더욱 치열해지는데, 그 당시 성왕은 아들 창을 격려하기 위해 부하, 기병 50명 정도 거느리고 무주에서 금강을 따라 금산을 지나 이곳 구진벼루에
도착했으나 매복 중이던 신라군에 의해 잡혔으니 하필이면 노비 출신의 군사에게 죽음을 맞이한다.
금산땅에서 서하천 따라 내려오다가 그랬는지 아니면 금강에서 역으로 이곳까지 올라오셨는지 뭐가 그리 급한 일이 있어
이런 협곡에 들어와 잡히셨는지 왕으로써 노비출신 군졸에게 죽음을 당하는 치욕이 억울했던지 노비손에 죽기 싫으니
높은 놈 불러라 했으나 끝내 성왕의 청은 거절 당하고 "하늘을 우러러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죽음을 맞는다.
이후에 몸은 백제로 돌려보내지고 머리는 신라로 가져가 왕궁 계단 아래 묻어 문무백관 모두 밟으며 다니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밤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데...
이 사건을 계기로 백제와 신라는 서로가 원수 대하듯
왕이 죽음을 맞이하자 아들 창과 2만 5천 이상의 백제 군사들은 대부분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아들 창은 겨우 살아 돌아가 백제 제27대 위덕왕이 되었다.
대원군 척화비
고종 8년에 흥선 대원군의 지시로 병인양요(1866 조선-프랑스 싸움)와 신미양요(1871 조선-미국 싸움)에서 승리를 이끈 후 백성들에게 서양 세력의 경계심을 알리기 위해 전국의 중요한 곳에 세우도록 한 비석이다.
이때만 해도 조선이 싸움을 좀 잘한 듯...
전국에는 약 40여 개의 척화비가 있는데 내용은 모두 동일하며
주요 내용은"서양 세력이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나의 자손만대에 깨우쳐 주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런 내용이다.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치를 한 배경이 1866년 독일 상인이 홍성군 덕산면 상가리 흥선 대원군 부친이셨던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서양에 대한 배척과 천주교 탄압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군북면을 지나서
옥천군 군북면 증악리의 증약 찰방 비석 군
조선시대 때 전국에 537개의 역이 있었는데 이곳은 그중의 한 곳이며
인근의 옥천 보은, 영동 회덕(대전) 10개의 역말(驛馬)을 관리하던 증약 찰방 역이 있었던 곳으로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의 주요 교통 통신의 요충지였다
당시에 이곳을 관리하였던 찰방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들인데
찰방이란? 역참을 관리하던 종 6품 벼슬(요즘으로 본다면 소령쯤 되겠다.)
역(驛)의 기능은 관(官)주도의 숙박시설로써 공문서,세공의 수송,마필공급,숙식제공 기능을 함
좌측부터
이언순 불망비, 허지 선정비, 김대곤, 신택하, 이사관, 이사휘 불망비
그 뒤로 황종림, 심이신, 이기주, 신후명 불망비가 각각 서있다
길가에 서있으나 그냥 지나치기 시운곳인데 낮이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증약 마을을 지나면서
옥천땅과 대전땅의 경계인 증약고개를 넘으면 철도 교통의 중심지인 대전시땅이다.
예전이라면 산적들 꽤나 살았을 것 같은 증약고개나 세천고개
조선시대 때 양반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길이 바로 과거 급제길이며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선택권이 없던 과거급제길이니
오로지 빠른 길을 찾아가며 올라가는 길뿐이다.
수많은 선비를 한양으로 올라오게 했던 그 길은 고려 광종 때 수나라로부터 도입된 과거시험 때문이다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하기 위해 4대째까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어야 했으니
선비로써 부담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대전의 산줄기 보만식계 종주시에 지나는 세천고개
도로길 따라 평지를 걷다 보니 대미지가 쌓인 무릎은 부서질 듯 아파 잠시 스트레칭 삼아 성재산의 새물고개를 넘어간다
산꾼에게 무릎이 가장 편안한 곳이 있다면 바로 산이다. 그와 반대로 평지는 곧 죽음이다.
평지를 몇 날 며칠 동안 걷는다는 건 골빙을 스스로 자처하는 길인데 결코 쉽지 않다.
국토종주 하시는 분들의 유튜브를 보다 보면 하루에 60km를 걷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곧잘 나오는데
첫날은 어떻게 던 60km 걸을 수 있는데 이틀 사흘 걸어보면 불가능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만큼 힘든다는 말이다.
우송대학교 앞을 지나
신탄진으로 올라가는 17번 도로를 찾아가며
유성 신탄진 방향으로
대전시 대구 법동의 석장승
고려시대 때 만든 남, 여석장승 한쌍인데 여자 석장승에는 지하여장군이라 쓰여있다
반대편에도 석장승이 서 있는데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세워 마을의 무사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내오다가
18세기 초에 돌장승으로 만들어 세웠다고 전한 석장승 가슴팍에는 천하대장군이라 쓰여있다.
제월당 오옥제
조선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규렴이 숙종 2년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건물이다
회덕향교
조선 초기에 세웠는데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 대원군때 조선 사원 1천 개 중 살아남은 서원 47개 중 하나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문은 굳게 닫혀있고 좌측으로 돌아가면 낮은 담장너머 안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선비들이 공부하던 명류당이 보이고
명륜당 뒤에는 솟을삼문으로 된 내삼문(內三門) 지나면 대성전이 있다
향교 맨뒤에 자리하는 대성전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오성사현(공자,맹자,안자 증자)과 우리나라 18현(설총, 최치원, 이황, 이이 외)의 위패를 모셨다.
회덕향교를 보고 향교 뒤 우술산을 넘어 회덕역으로 향한다.
1부는 이것으로 마치고...
조선의 선비들은 길을 떠나면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무안 비행기 사고에서 보듯 비행기는 땅에 있으면 가장 안전하지만 날아다니게 만든 것이고
배 역시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거침없는 파도를 넘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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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3 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배병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