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문수원(43)
<신해품(信解品)>, 오늘 <신해품(信解品)>이 끝나는 날이 되겠습니다. 전체가 28품(品)인데. 오늘이 제 4품(品), “믿고 이해하는 품(品)”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어떤 일이든지, 자기 확신이 있어야 그게 이제, 행동으로 옮겨질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이해도 중요하고, 이해가 제대로 되면은 확신이 서게 돼 있죠. 그 확신이라는 것이 없으면은, 사실은 바로 이해했다고 할 수가 없고. 그 이해와 믿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불교도, 바람직한 신앙생활이 될려면은 좀 이해해야 되고, 좀 알아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또 신심(信心)도 우리가 반드시 갖춰야 할 일이고. 또 신심(信心)에는 이해가 반드시 동반이 되어야 그 믿음이 잘못되지가 않는다, 하는 그런 이야기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정말 부처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길, 뭐, 그것이 불교다, 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그것이 결국은,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겠는가? 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유익하고 보람 있고 바람직한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면, 뭐, 누구도 거기는 반대를 못하죠.
뭐, 불교를 믿느냐, 뭘 믿느냐, 하는 그런 것은 차후의 문젭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삶을 어떻게 하면은 유익하고·보람 있고, 또 가치 있게 살 수 있겠는가? 부처님도, 태자의 지위라고 하는 것이 그게 보통 존귀한 자리가 아니고,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고 수도(修道) 생활로 떠났던 것은, 보다 더, 더 가치 있는, 더 값진, ‘인생에 있어서 태자 생활보다도 더 보람 있는 그런 삶이 없을까?’ 그 생각을 한 나머지, 사실은 출가(出家)했던 거죠. 뭐 꼭 출가(出家)를 해야만 그런 것은 아니로되. 그러나, 이제 그런 일을 통해서 자기가 추구하고자 하는, 훨씬 더 가치 있고 훨씬 더 보람 있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이, 1회적인 것이 됐든, 아니면 수~많은 생을 거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됐든 간에. 그건 또, 불교에 들어와서, 우리가 알 일이고. 일단은 공통성이 있는 결론을 우리가 내린다면은, 부처님도 결국은 ‘한 번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어떻게 하면 더 가치 있고·더 값지고·더 보람 있고·더 의미 있는, 그런 인생을 살까?’ 이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나머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성도(成道)라고 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정말 큰 성공을 거뒀고, 또 당신이 생각했던 목표를 달성했던 거죠. 또, 거기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당신이 달성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낱낱이, 그리고 아낌없이 일깨워 준 것이 말하자면, 부처님의 설법이고, 그 설법이 경전으로 이렇게 남아 있어서, 우리가 그 부처님의 진정한 마음이 무엇인가를, 고스란~히, 마음만 먹는다면은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그 나름대로 알고, 잘 믿어왔지마는. 그래도 또 우리가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자꾸 새롭게 접해 보고, 또, 알아보고·또 거기서 또 생각해 보고, 또 이해되는 거는 되고, 또 이해 안 되는 건 또 안 되더라도. 그 중에서 또 내 삶에 어떤 느낌과 감동으로 나를 흔드는 그런 대목에는,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또 거기서 감동을 하고 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또 말씀드릴 수가 있겠죠.
여기에 <신해품(信解品)>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아까 말씀드린,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유익한 길·유익한 삶·의미 있는 삶·보람 있는 삶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의 삶”이다. 부처님이 그런 경지에 도달했듯이, 우리도, 부처님이 도달한 그런 경지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보람 있는 삶이다, 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제시를 했고. 또 그 동안의 제자들은 미처 부처님의 제자로 있기는 했으나, 그리고 몇 십 년을 부처님 밑에서 공부를 하고는 했으나. 그러나, 부처님의 궁극적인 정신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이, <법화경>을 설하는 대목에 와서 비로소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는가를 알게 됐고, 그 아는 것을, 제자들이. 그 중에서도 아주 큰 제자들이죠,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아주 큰 제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부처님께 비유로서 피력을 하는 그런 과정이고. 또 그것이 저 앞에서 한 번, 산문으로 설명이 됐고. 여기서는 운문으로, 게송으로 그것을 재차 정리해 가는, 그런 과정입니다.
남은 것은, 결론만, 이 품(品)의 결론만 남았죠. 궁극적으로 무엇이 부처님의 진정한 정신이고, 무엇이 불교의 참, 최종 목표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은. 부처님의 정신과 아울러 불교의 최종 목표는 다름 아닌,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데 최고의 가치·기준, 또 최고의 어떤 보람, 최고의 어떤 의미를 여기서 이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는 그런 부분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68번, 126쪽에 68번부터 할 차롄데. 역시 제자가 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가섭(迦葉)을 위시한, 제자들이. 가섭 존자(迦葉 尊者)라 하면, 우리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님의 제일가는 제자다, 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정도의 제자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 또, 이 대목에 와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쭈욱 부처님 앞에서 고백하는 형식으로 말을 하고 있어요.
68.
我等內滅코는 自謂爲足하야
아등내멸 자위위족
이제 아(我)라고 하면. 우리가, 우리들이, 우리들은, 부처님 제자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내멸(內滅)코는. 안으로 소멸했다. 무엇이 소멸했는고 하니 번뇌가 소멸했다. 뭐, 깝깝한 마음, 온갖 인간의 망상, 번뇌. 또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민·고통·괴로움··· 무엇 때문에 일어났든지 간에, 우리들 머릿속에서 들끓고 있는, 우리들 염념 속에서 들끓고 있는, 그 잡다~한, 먼지 같은, 거울에 낀 먼지와 같은, 그런 그 망념들·망상들·번뇌들. 이것을 다~ 소멸했다, 이 말이여. 내멸(內滅)이라고 하는 말은. 이거 밖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안 내[內]’자(字)를 썼어요. 안으로. 속마음이 들끓고 있는 거죠, 이거는.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거는 속에서 끓고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안으로 멸(滅)하고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위(自謂). 만족으로 여겼다, 이 말입니다. 깝깝한 마음, 정말 속상한 것·온갖 번뇌, 그야말로 거울의 먼지와 같은, 우리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사라졌다면은. 개인적으로는 참, 그 바람직하죠, 사실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바람직합니다. 그, 뭐, 속이 시원할 것이고, 조용할 것이고·편안할 것이고, 뭐, 어떤, 그 문제도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는 다 사라진 그런 상태죠. 그러니까 스스로 만족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번뇌가 많~던 사람들이. 아주 문제가 많고 속도 많이 상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그런 문제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사라졌다, 그게 멸(滅)이거든요. 다 사라졌다.
열반(涅槃)을 번역을 하면, 멸(滅)이라, 이렇게 합니다. 불어서 끄다. 불을 불어서 끄고 재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린 상태, 이걸 이제 멸(滅)이다, 열반(涅槃)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그 쯤 되면은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게 돼야 옳거든요. 모든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돼야, 그게 된다고요.
그래서 부처님은 사실은 안으로 다 번뇌가 없어졌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중생들이 번뇌가 많고 괴로워하고 가슴 아파 하고··· 그래 쌓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그런 번뇌와 고통을 소멸해 줄려고 그래서 부처님은 설법에 열중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기가 이런 경지에 오른 것은 당연한 거고. 어떤 경지에 올랐던 간에. 자기의 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어 주고, 딴 사람에게도 뭔가 번뇌를 소멸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것, 그걸 또 도움이 되도록 해 주는 것, 이게 이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그런 상태가 되고, 스스로 만족은 했다, 이거야.
唯了此事하고 更無餘事호이다
유료차사 갱무여사
그리고 오직 이 일만 료(了). 요달(了達)하고. 알고. 다시는 다른 일이 없었다, 이거여. 우리들, 내 개인의 들끓는 번뇌만 다 사라져 버리고. 그게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하고, 그 외는 아무 딴 생각을 안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증득한, 자기가 얻은, 깨달은, 그런 경지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 주려고, 딴 사람에게도 그렇게 되도록 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은 없었다, 라는 그런 말입니다. 갱무여사(更無餘事)라는 말이요. 다시는, 다른 일은 없었다, 라고 하는 말.
我等若聞 淨佛國土와 敎化衆生에는 都無欣樂호니
아등약문 정불국토 교화중생 도무흔락
그래서 우리들이 만약에 정불국토(淨佛國土). 이, 참 중요한 말입니다. 교화중생(敎化衆生). 정불국토(淨佛國土) 교화중생(敎化衆生). 이것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부처님 마음을 두 마디로 요약하면 정불국토(淨佛國土) 교화중생(敎化衆生). 이게 불교의 목표거든요.
내멸(內滅). 내멸(內滅)을, 안으로 번뇌를 소멸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안으로 번뇌를 소멸했다면은 그것을, 그 힘을 가지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해야 돼. 다시 말해서 사회 정화를 해야 되고. 우리가 사는 이웃을, 우리가 사는 국토, 이 땅, 이 사회를 어떻게 하더라도 좀, 좋은 사회,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노력. 그게 정불국토(淨佛國土)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한다. 이 세상을, 좀, 살기 좋은 그런 국토, 그런 나라가 되도록 한다. 이게 중요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는 어떻게 하더라도, 사는 사람들에게 뭔가 보탬이 되고 잘해 보겠다, 라고 하지만은. 그게 이제 사실은 안으로 욕심이 소멸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멸(內滅)이 안 된 상태에서 그렇게 하니까. 그건 뭐, 하나의 명분이고. 남 앞에 나서기 위한, 어떤 변명에 불과했지, 사실은 그게 안 되거든요. 옛날에는 “정치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보살 경지에 올라야, 정치를 한다.”, 그랬어요. 그건 이제, 보살은, 정불국토(淨佛國土).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거, 사회 정화를 하는 거. 다시 말해서 사회 정화, 말은 뭐, 아무 거나 다 씁니다마는. 사실, 진정, 사회가, 또 사람 사는 사회가 좋도록, 살기 좋은 국토로, 살기 좋은 사회가 되도록 한다는 데는, 상~당히 깊이 생각해야 되고 연구를 많이 해야 될, 그런 부분입니다.
그리고 교화중생(敎化衆生). 중생을 교화하는 것.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하더라도 가르쳐서, 가르쳐서 되게 하는 거예요. ‘가르칠 교[敎]’자(字), ‘될 화[化]’자(字) 거든요. 화(化)는 변화시킨다, 이거여. 오른 쪽으로 가던 사람을 왼쪽으로 가게 하는 거, 잘못 가던 사람을 바르게 가게 하는 것이 ‘화[化]’잡[字]니다. 그렇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 가르쳐야, 그렇게 돼. 이 교화(敎化)라고 하는 말이 참 좋은 말이예요. 가르쳐서 되게 하는 것, 만들어 가는 것. 그게 이제 교화(敎化). 가르쳐서 바로 잡아준다. 삐뚤어져 있으면 바로 잡아 주고, 잘못 가면 옳게 가게 하는 것. 그게 교홥[敎化]니다. 중생들을 그렇게 한다, 이겁니다. 그게 이제 부처님이 할 일이고· 불교가 할 일이고· 불자(佛子)가 할 일이예요, 사실. 정불국토(淨佛國土) 교화중생(敎化衆生).
그런 것들을, 가섭(迦葉) 쪽에서, 지금 제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말 가운데··· 지금, 이야기해 가는 과정이죠.
그런 소리를 들으면 도무흔락(都無欣樂)했다. 도무지 기뻐하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사실, 요즘 불자(佛子)들, 대개 그래요. 뭐, 가섭 존자나, 이 소승(小乘)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선 뭐, 내 일이 바쁘니까 그렇기도 해요. 또, 내 일이 바쁘다고 ‘내 문제’만 가지고 자~꾸 생각하면 그게 자꾸 습관이 돼 버려요. 습관이 돼 가지고 ‘내 문제’가 없을 때도, ‘남 생각’하는 게 안 생긴다구요. ‘아이구, 내 문제 해결하면 남 생각 하지, 왜 안할라구···’ 하지마는, 아니야. ‘내 문제’가 있을 때도 ‘남 생각’을 좀 하는 그런 연습을 쌓아 놔야, 내가 ‘내 문제’가 있을 때는 남을 생각하는 게 좀 적고. ‘내 문제’가 없을 때는 백프로 남을 위해서 산다, 라고 하는 게 그게 가능하지. 평소에. ‘아이구, 나는 내 문제 다 해결하고 남을 좀 생각하겠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 얼른 듣기에는 옳은 생각 같애요. 옳은 생각 같지마는 그게 그렇게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안 돼요.
평소에 생각을 안 해 놨기 때문에. 시간이 있고, 모든 문제가 하나도 없을 때, 그 때는 어떻게 하겠어요? 평소에 배우지 아니했기 때문에 남을 생각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어 가지고, 남 생각 하는 게 안 됩니다, 그게. 그 때 안 돼요. 여력이 있어도·힘이 있어도 안 되고, 생각이 있어도 안 되고. 안 됩니다, 그거는. 그러니까 어려울 때. 나도 어렵고, 할 때. 그 때부터 자꾸 ‘남 생각’하는 것을. 나도 어렵지마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그런 훈련을 좀 해 놔야, 나중에 내가 힘이 막, 크면은. 그 때는 크~게 할 수가 있는 거죠. 크~게 남을 도울 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내 코가 서 발 이면은, 물론 ‘내 문제’부터 해결해야 되겠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생각’도 하면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병행을 안 하면요, 그 프로테이지는 상당히 차이가 있겠죠, 물론. 그래도 어느 정도라도, 쪼~끔이라도 병행을 하는 훈련을 쌓아야 그게 가능하지. 나중에, 병행을 처음부터 안 해 놓으면 나중에 힘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 가섭 존자(迦葉 尊者) 같은 이들은. 참 솔직한 이야기가. 그런 문제, 남을 위하는 문제. 정불국토(淨佛國土) 교화중생(敎化衆生). 여기에는 도무흔락(都無欣樂)이라. 도대체가 기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옛날 승단(僧團) 중심의, 또는 소승(小乘) 중심의 어떤, 생활 체제. 그것이 뭔가 많이 잘못됐었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안녕만을 생각하는 그런 일면들을 수행이라고 생각했지, 남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그런 일을, 잘 하지 않았던, 그런 단체, 그런 풍조를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그런 대목이죠.
여기는 가섭 존자(迦葉 尊者)의 입을 빌어서 스스로. 아등(我等)은 정불국토(淨佛國土) 교화중생(敎化衆生)하는 것을 들으면. ‘문[聞]’자(字).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처님은 그런 이야기를 권했지마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도대체 관심이 없었다, 이거야. 도무흔락(都無欣樂). 도대체가 관심이 없었다. 요즘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그런 뜻이거든요, 도무흔락(都無欣樂)이다.
부처님이 보시하는 문제를 가지고, <아함경>에는 보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보통 우리들 마음을 워낙 잘 아니까. 어떤 사람이. ‘아유, 나는 지금 생활이 어렵다. 그러니까. 돈을 좀 잔뜩 벌어 가지고 여유가 상당히 생기면, 그 때 내가 보시하겠다.’라고 이런 생각을 우리가 많이 하죠. 또 어떤 신도님들 보면 그래요. 열심히 돈벌이 할려고 하는 사람들 보면, 그래요. 제가 한번씩 물어요. “지금 그렇게 생활이 어려우냐.”“아유, 지금 어려운 건 아니지만 돈을 많이 벌어야 앞으로 절에 보시도 많이 하고 좋은 일 많이 한다.”, 그래. 그래 보면 사람들이 현재에는 별로 안 어렵다고, 사는 데는 별로 어렵지를 않애. 그런데, 이제 생각은 참~ 좋아요, 생각은 참 좋은데.
그런데 과연. 현재에 훈련을 안 쌓고 그게 되겠는가, 하는 그런 뜻에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부처님은 그런 비유를 들었어요, <아함부 경전>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어떤 젖소를 키우는 사람이 하루하루 젖을 짜 가지고 자기들 식구만 먹는 것이 영 미안해가지고. ‘이걸 이제 모아 놨다가 한꺼번에 짜서, 동네 사람들, 한 50호(戶)되는 동네 사람들, 다 한꺼번에 공양을 올려야 되겠다.’이 생각을 하고서 그 이튿날부터 짜질 않는 거야. 소젖을 짜지 않고, 한, 한 달쯤 묵혀 놨다가 한꺼번에 왕창 다 짜 가지고 동네 사람들에게 공양을 올려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 한 달쯤 지난 뒤에 자려고 보니까. 한 방울도 안 나오는 거야, 소젖이. 매일매일 짜야, 그게, 소젖이 나오지 한 달만 안 짜면 그게 말라 버려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안 나오는 거야.
그 농부의 마음은 갸륵하지마는 방법이 틀렸다. 하루에 한 되를 짰으면은, 한 되 다 먹지 말고, 남을 꼭 생각할 그런 마음이라면은. 9홉만 먹고, 1홉은 옆집에 주고. 그러니까 하루에 1홉씩만 옆집에 주어 버릇하며는 1달이면 거의 돌아갈 거 아니냐, 이거여. 보시란 그렇게 하는 거지, 모아 가지고 한다는 사람은, 아직도 못 봤다. 또 그런 계획을 가지고 그렇게 해서, 성공할 리도 없고. 그리고 또 그 때까지, 지가 살지·안 살지,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인데 내일이 어떻게 될지·1달 후에 어떻게 될지·1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쪼끔이라도 마음이 나거든, 마음이 난 그 순간 하라. 그런 부처님 교훈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옛날 선비 이야기도 있죠. 어떤 선비가 12시가 넘어 가지고 일꾼을 두드려 깨우는 거라. 막 깨우는 거야. 아니 이 밤중에 왜 깨우느냐고, 하니까. 저어기 저 등 너머, 박씨 집에, 아주 어렵게 가는 박씨 집에 쌀 한 가마 져다 주라, 는 거야. 아니, 내일 아침에만 시켜도 내가 얼마든지 갈 텐데 왜 지금 그렇게 깨워서 사람을 못살게 구냐. 이 사람은 내일 아침 되면 내 이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까 내 마음 났을 때, 져다 주라는 거라.
그럼 그날, 그 밤중에 가든 안 가든 일꾼은 하명(下命)을 받아 놓으면 그건 그 사람건거라. 선비의 그 마음도 참 우리가 생각할 만한 이야기거든요.
요즘 그, 우리나라에 수재(水災)가 많이 나 가지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문 조금씩이라도 아마, 잘 했을 줄 믿습니다. 부산에는 그래도 금년에 별일 없으니까 힘닿는 대로 쪼금씩은 다 하셨을 줄 믿고, <법화경> 공부하는 분들은 여부가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만약에 안 했다면 하시고. 또 했더라도 또, 동네에서 거두거든 한, 돈 만원씩 더 하세요. 마음이 중요합니다. 내, ‘돈 만원’ 내는 게 얼마나 보탬이 되겠나, 그 생각 절대 하지 마세요. 내가 하고 싶은 그 마음. 또 내 마음을 좀 보탠다, 하는 그런 생각이 중요한거죠.
방학은 끝나고 아이들은 개학을 해서 학교는 비어줘야 되고. 집은 아직 못 세웠고. 올 데 갈 데 없고. 그렇더라고요. 참 딱해요. 알고 보면 굉장히 딱한 사정이야. 지금 개학 해 가지고 나가야 되는 거라, 벌써 나가고 있고. 청소 막 해 쌓더라고요. 지금 가건물 같은 거 세우고 그러는데. 오늘 또 노인당에서 푸대접해가지고 눈치 줘서 도저히 못 있겠다고, 그러고··· 그런 것도 당한 사람들,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 정불국토(淨佛國土) 교화중생(敎化衆生)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당장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불국토(淨佛國土)와 교화중생(敎化衆生)은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그런데 가섭 존자(迦葉 尊者)같은 이런 큰 제자들도 그런 일 하라면, 별로 신심(信心) 안 났다, 이 말이여. 도무흔락(都無欣樂). 선뜻 마음 안 내키더라.
69.
所以者何오
소이자하
까닭이 뭐냐. 왜 그렇게 했느냐? 남을 위하는 말, 남을 위하는 일, 거기에는 도대체 왜 그렇게 관심이 없었느냐? 그 말입니다. 소이자하(所以者何)오. 까닭이 뭐냐.
一切諸法이 皆悉空寂하야 無生無滅하며 無大無小하며 無漏無爲라하야
일체제법 개실공적 무생무멸 무대무소 무루무위
이 대개, 불교를 잘못 알면은. 세상만사, 인생만사를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전부 공(空)이야·아무 것도 아니야·무상(無常)이야. 무생무멸(無生無滅).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어. 무대무소(無大無小)여. 잘 사는 놈도 없고 못 사는 놈도 없어. 나중에 결국 가면 다 똑같애. 또 뭐, 지가 복(福) 못 지으면 못 살고, 복(福) 잘 지어서 잘 사는 거, 어쩌란 말이냐···, 이런 식으로 무대무소(無大無小). 또 무루무위(無漏無爲)라. 샘[漏]도 없고, 번뇌도 없고 하는 것도 없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또 하면 뭐하나? 결국은 허무인 것을···’ 이 생각만 전부 하는 거여. 이 생각만 하는 거여. 또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죠, 사실은. 있기는 있는데 그게 사람이 사는데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부정적인 면이죠.
그러나 이제, 긍정적인 면이 또 있는 거예요. 모~든 게 공(空)하고·모든 게 무상(無常)하고·모든 게 평등하고, 하는 그런 속에서. 또 모든 현상은 차별적인 것이고, 또 어떻게, 할 수 없이 우리는. 아침에 잠이 깨서 일어나야 되고 일어나면 당장에 세수할 물이 필요하고··· 치약이 필요하고 칫솔이 필요하고··· 또 아이들 밥 해 먹여야 되고 출근해야 되고···모~든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야. 이건 뭔고 하니. 긍정적인 면이라, 긍정적인 면. 그런 면은 또 우리가, 그게 사실은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한 면이예요. 내면적으로 평등하고 공(空)하고 무상(無常)하고, 이거는 누구나 마찬가지야. 왕도 죽고, 뭐, 대통령도 죽고, 무슨 거지도 죽고··· 거지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왕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있는 사람·없는 사람, 배운 사람·못 배운 사람, 전~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하는 것. 그런 입장으로만 가지고 우리가 생각하기로 하면, 그건 똑같애요, 누구나. 사실은 똑같애. 그러나 그것만을 보고 있어서는, 그게 또 인생을 바로 보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모습 이대로예요. 이 모습 이대로···
그래, 열심히 움직여야 되고·열심히 살아야 되고··· 이게 우리 현실이고 이게 우리의 삶이라. 이번에 수재(水災)가 나서, 어떤 기자가 헬기를 타고··· 제가 이거 벌써, 세 번째 하는 이야긴데. 기자가 헬기를 타고 복구하는 작업을 주욱 이렇게 돌아보면서 이야기 하는데. 아주 멋진 활구(活句)를 하나 건졌어요. 활구(活句)란 말은 선가(禪家)에서 쓰는 말인데. 살아있는 말이라, 이 말이야. 말에 생명이 있다, 하는 그런 말을 선가에서는 활구(活句)라 그래. ‘살 활[活]’자(字), ‘글귀 구[句]’자(字). 활구(活句), 이렇게 하는데. 활구(活句)를 하나, 제가 거기서 건졌어요. 뭔 말인고 하면. 주~욱 이렇게 돌아보고 완전히 폐허가 된 동네가 많거든요, 폐허가 돼 가지고는 형편없는 거라. 그래도 그걸 어떻게 해. 넘어진 집은 일으켜 세우고. 없는 집은 말이지, 새로 터라도 닦고. 또 거기에 우리 논인지 뭔지. 위치상으로만 거기에 자기 집 논이지, 전~부 그냥 돌밭이 돼 버린 거예요. 그런 데서 선을 긋고 축대를 쌓고, 그래 쌓고. 아이들은 또, 철없이 물에 나가서 물장구를 치고. 그러다가 일을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고 하는 그런 장면을 헬기로 지나가면서 찍으면서 마지막 말이 그거라.
“아무리 수해가 나서 암담하고 처참해서 정말 다시는 인생을 더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했지마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안 죽었으니까·살았으니까 살아야지. 살려면 필요한 거, 최소한 뭘 자꾸 해야 되는 거야. 그래,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리 암담하고 처참한 상황이지마는 그래도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거라, 바로.
물론 허망하고 무상(無常)하고 모든 게 공(空)으로 돌아가고··· 그렇긴 하지마는 그래도 삶은 계속되잖아요. 삶은 이렇게 버젓이 있거든요. 버젓이 이렇게 삶이 있다, 고 하는 이 사실은 우리가 도저히 무시 못 합니다.
당장에 저녁을 준비해야 되고 돌아갈 집이 있어야 되고. 그런 상황입니다. 그게 이제, 우리들 삶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 아라한들은. 소승(小乘)들은. 그런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무상(無常)한 것. 그저 아무 것도 없는 것. 공적(空寂)한 것. 이런 것, 이런 것만 생각하고 있어.
如是思惟코는 不生喜樂이니다
여시사유 불생희락
여시사유(如是思惟)코는 불생희락(不生喜樂)이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내지 아니했다. 무엇에? 저 앞에서 도무흔락(都無欣樂)이란 말을 거듭 반복한 말입니다. 정불국토(淨佛國土). 불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그 일에는 희락(喜樂)하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내지 아니했더라,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아주 이 대목에, 이거, 자기 입으로 하는 거예요. 가섭 존자(迦葉 尊者)가 자기 입으로, “나는 그동안 그렇게, 참 부끄럽게도 그렇게 살아왔었노라.”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 앞에서, 그리고 대중 앞에서 하는 말이죠.
70.
我等長夜를 於佛智慧에 無貪無著하며 無復志願하고
아등장야 어불지혜 무탐무착 무부지원
우리들은 긴 밤. 장야(長夜). <법구경>에 그런 말이 있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은 멀고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 인생의 밤길은 길고 험해라.” 라고 하는 아주 기가 맥힌, 그런 <법구경> 구절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이, 장야(長夜)란 말, 잘 써요. 인생의 긴 밤이란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야말로 캄캄한 밤을 넘기는 거와 같은 거죠. 그래서 우리들은 그 긴 밤을. 부처님의 지혜에 무탐무착(無貪無著)이라. 부처의 삶. 불지혜(佛智慧)라는 건 뭡니까? 아까 이야기했듯이 인생으로서 가장 보람 있고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유익하고 가장 값진, 그런 삶을 불지혜(佛智慧)의 삶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거기에는 무탐무착(無貪無著)이야. 탐함도 없고 집착함도 없었으며. 무부지원(無復志願)이라. 다시는 뜻과 원(願)이 없었더라. 사람이 좀 거기에 욕심을 내고·거기에 뜻을 두고·거기에 원력(願力)을 좀 두고 살아야지, 무탐무착(無貪無著). 거기에는 집착도 없고 탐욕도 없고. 전혀 뜻도 없고 원력(願力)도 없었더라, 그런 이야기를 본인의 입으로 하고 있습니다.
而自於法에 謂是究竟이라호이다
이자어법 위시구경
그래서 법에 대해서. 열반이죠, 이것도. 스스로 열반에 대해서 이르기를 구경(究竟)이다. 여기가 최고의 경지다. 그만, 번뇌망상이 사라져서 편안~하니까. 옆에서야 죽어가든 말든, 죽든 살든 상관없이 내 혼자 마음 편안~하니까 이것이 최고다, 라고 이렇게 여기고 살아 왔었다, 부끄럽게도. 이런 이야기를 가섭 존자(迦葉 尊者)가 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참~, 인생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그런 가르침이고. 또 불교를 깊이 이해하는 마당에서 더욱, 이런 대목은 의미 있는, 그리고 중요한, 그런 대목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도리를 우리가 이해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게 바로, 신해(信解)죠.
그래 뭐,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의 삶이란 바로, 부처의 삶, 불지혜(佛智慧)의 삶이다, 그것이 가장, 인생으로 태어난 보람과 가치가 있는 삶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71.
我等長夜에 修習空法하야
아등장야 수습공법
또 나오네요. 우리들은 긴 밤에. 공법(空法)만. 텅 비었다고 하는 공(空)하다·무상(無常)하다···하는 그런 것만 수습(修習)해 가지고서
得脫三界 苦惱之患하고
득탈삼계 고뇌지환
삼계(三界)의 고뇌의 근심만, 삼계(三界)의 고뇌의 환(患)만 벗어나고. 자기 마음속에 들끓는 번뇌, 그게 고뇌지요. 그것만 벗어나고.
住最後身인 有餘涅槃하야
주최후신 유여열반
최후신(最後身)인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머물러서
佛所敎化에 得道不虛라
불소교화 득도불허
부처님이 교화(敎化)한 바에 도(道)를 얻은 것이 헛되지 않다, 라고 그렇게 여기고 살아왔었다, 이겁니다. 공법(空法)만 수습(修習)했고. 또 자기의 번뇌망상, 그것만을 벗어나고. 또 최후신(最後身)인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다른 건, 망상 다~ 사라지고, 번뇌 다~ 사라지고 최후신(最後身)이라고 하는 건. 이, 몸뚱이 하나. 몸뚱이 하나 남았다, 이겁니다. 몸뚱이 하나 남았으니까 그게 유여열반(有餘涅槃)이예요. 번뇌는 다 사라졌는데 몸뚱이가 하나 남았다. 그래서 아직도 몸이 남아있는 열반, 그래서 유여열반(有餘涅槃), 그래요. 최후신(最後身). 이, 몸뚱이 하나 남았다, 이겁니다. 다 해결됐어, 이제 번뇌도 없고 욕심도 없고 망상도 없고··· 거기까지는 다 됐다, 이거야. 그런데 이제 몸뚱이 하나, 이것만 처리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게 이, 소승(小乘)들의 잘못된 소견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상에 잘못 빠진 사람들끼리, 집단으로 서로 죽여주는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부처님 당시에 그랬답니다. 나무숲에서 이런 것만 공부를 계속 하고 있다가. 외국의 사교(邪敎)들, 서로 죽는 것, 그런 것도 소견이 잘못 들면 그리 되요.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요. 이 몸뚱이가 걸리적거린다. 여기 이제, 최후신(最後身) 유여열반(有餘涅槃). 번뇌는 다~ 사라지고 세상 욕심, 하나도 없다, 이거야. 세상 욕심 하나도 없는데 단, 이거 몸뚱이 하나 남았으니까, 이거 우리 서로 처리해주기 하자.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서 그 사람 죽이면, 칼로 그 사람이 죽인 사람 또 죽여주고···쭈욱 줄 세워가지고 서로 목숨을 끊어주는,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요.
그리고 또 여기하고는 좀 다르지마는. 부루나 존자가 수로나국이라고 하는, 서쪽에 어려운 나라에 가서 교화하려고 하니까. 부처님이 거기는 가지 마라. 거기 가면 위험하다. 그러니까 이 부루나가 아이구, 그래도 결국 가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여러 가지 대화를 주고받다가 마지막에 부처님이 그런 말을 해요. 만약에 그 사람들이 너를 구타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결국 네 목숨까지 빼앗으면 어떻게 할래, 그럴 수도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아주 막돼먹은 사람들이니까 그럴 수가 있다, 라고 하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이 대답하기를. “아, 이 허망한 몸뚱이, 스스로도 버릴 것인데. 딴 사람이 나를, 이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버리도록 죽여준다면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이런 말이 다 있어요. 인도의 그 당시 사회는 그런 것이, 허망하다고 하는, 이런 허무주의에 떨어진 그런 풍조가 상당히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허망을 말하고 무상(無常)함을 말하지마는. 그런 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그런 입장을 더 강조해요. 그래서 이 삶을, 좀더 적극적으로 살도록 가르치는 게 사실 불굔데. 그 뭐, 소극적인 삶, 자기 혼자만 편하려고 하는 삶, 고게 자기들 마음에 맞아서 그런지 어쩐지는 몰라도, 그런 것을 취하는, 그런 가르침만을 취하는 사람이 없지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이 제자들도 그런 데에 사실은 많이 젖어 있었다, 하는 이야기를 스스로 고백하는 그런 대목입니다.
주최후신(住最後身) 유여열반(有餘涅槃). 최후신(最後身)인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머물러서. 최후의 몸. 이 몸뚱이 하나만 남은 그 입장. 그래서 남음이 있는 열반에 머물러서. 부처님의 교화에 도(道)를 얻은 것이 헛되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야.
위에 보면 장야(長夜)에 공법(空法)만 닦았다, 했잖아요. 모든 것이 공(空)하고 허망하고 아무 것도 아니다. 무상(無常)하다. 삼계(三界)는 고뇌 덩어리다, 이런 것만 생각했다는 거예요.
則爲已得 報佛之恩이라호니
즉위이득 보불지은
이미 여겼다. 무엇을? 부처님의 은혜를 이것으로 다 갚은 것이다, 라고, 이미 갚았다고 그렇게 여겼다, 이거여. 그러니까 자기 번뇌 소멸하고, 이 몸뚱이 나중에 다 처리해 버리면, 그걸로써 부처님이 가르친 것을 우리는 다 받아 들였고. 또 그러므로 부처님의 은혜도 갚은 것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라, 하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한 걸 지금 이야기한 거예요.
72.
我等雖爲 諸佛子等하야
아등수위 제불자등
그래서 우리들은 비록 여러 불자(佛子)들을 위해서
說菩薩法하야 以求佛道나
설보살법 이구불도
보살법을 설해서 불도(佛道)를 구하기는 하나. 부처님이 이제 그런 걸 가르치시기는 하지마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而於是法에 永無願樂호이다
이어시법 영무원락
그 도리. 말하자면 보살법(菩薩法). 보살로서의 어떤 삶을 살아가는 도리가 보살법(菩薩法)입니다. 그걸 부처님은 많이 말하거든요. 보살법(菩薩法)을 설해가지고서 불도(佛道)를 구하는데 있어서는, 이 법에 대해서는 뭐라고? 영무원락(永無願樂)이라고 했어요. 영원히, 길이. 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없었노이다. 없었다. 그런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거여. 정말 관심 있어야 할 것이 보살의 삶이거든. 진짜 관심 있어야 할 게 보살의 삶인데, 또 그것이 불도(佛道)인데, 거기에는 영무원락(永無願樂)이라. 영원히, 길이, 원하거나 즐거워하는 바가 없었다, 라고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거는 정말 잘못된 것을, 그동안 잘못된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導師見捨하사 觀我心故로
도사견사 관아심고
그러니까 도사(導師)가. 도사(導師)는 부처님이죠. 부처님께서 견사(見捨). 내버려 둔다, 이 말이여. 버림을 보이사, 라고 하는 말은 내버려 두사. 나중에 가르치려고. 아심(我心)을 관(觀)한 까닭에
初不勸進하사 說有實利하시니
초불권진 설유실리
처음에는, 애초에. 실다운 이익[實利], 참다운 이익이 있다고 설함을 권진(勸進)해서. 실다운 이익이 있다고 말하지 아니했다, 이 말이여. “참다운 이익이 따로 있다.”라고, “참다운 인간의 가치, 그것이 있다.” 라고 하는 말을 초기에는 아니했다,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우리가 너무 거기에 관심이 없으니까, 보살행 하는데 너무 관심이 없어 놓으니까 일단은 내버려 두셨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다음에 73번부터가 말하자면 부처님의 진정한 마음을 전하는, 그런 대목이죠. 그 비유를 이제, 다시 이끌어 옵니다.
73.
如富長者가 知子志劣하야
여부장자 지자지열
장자(長者)가, 부자인 장자(長者)가 예컨대. 자식의 뜻이 용렬함을. 못난 것, 아주 저열하다·비열하다, 이거예요. 자식의 뜻이 아주 비열함을 알아서
以方便力으로 柔伏其心하고
이방편력 유복기심
방편으로서 그 마음을 유복(柔伏)이라. 달래고 부드럽게 하고 또 항복하고.
然後乃付 一切財物이라
연후내부 일체재물
그렇게 한 연후(然後)에 어떻게 했죠? 일체재물을 부(付). 줬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 부잣집 마당에 이르러 가지고서 기겁을 하고 졸도를 했죠. 그러다가 나중에 일꾼들 두 사람을 보내 가지고, 그 사람을 꼬아 가지고서 똥치는 일·거름치고·청소하는 일을 시켜 가지고 차츰차츰 이 사람의 마음을 키워 가지고 나중에 그 집에 마음대로 출입하게 하고 끝내는 그 집 재산을 다 물려 받는, 그런 지위에까지 올라간 거예요. 그게 이제 연후(然後)에 내부(乃付) 일체재물(一切財物)이란 말이 그 말입니다.
유복기심(柔伏其心). 그 못난 아이, 아들의 마음을 유(柔), 부드럽게 하고 또 항복하고. 그래 가지고서 그러한 연후(然後)에 일체재물. 그 집에 있는 모~든 재산을 전부다 물려주게 되었더라.
佛亦如是하야 現希有事하사
불역여시 현희유사
비유가 그렇듯이.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애. 희유(希有)한 일을 나타내서. 희유(希有)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처님의 경지. 희유사(希有事)를 나타내 가지고서.
知樂小者하시고 以方便力으로
지락소자 이방편력
락소자(樂小者). 작은 거 좋아하는, 적은 거 좋아하는 것을 아시고서. 사람들은 너무 큰 거, 너무 큰 법, 별로 안 좋아해요. 참 그게 문제라. 자꾸 마음을 키워야 되는데. 키워가지고 아주 그 높은 경지도, 우리가 마음을 좀 한 번, 내 봐야 되는데. 그렇게 안 하죠, 작은 법만을 좋아하죠, 사람들이.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맞도록 방편력으로서
調伏其心코는 乃敎大智니다
조복기심 내교내지
그 마음을 조복(調伏)하고는. 이에 큰 지혜를 가르쳤으니. 큰 지혜. 이거 부처님의 지혜죠. 너는 잘하면, 너 속에 부처의 소질이 있으니까 그걸 잘 개발하면 부처가 될 거야, 라고 이렇게 가르치시니
74.
我等今日에사 得未曾有호니
아등금일 득미증유
우리들이 금일(今日)에사 미증유(未曾有)를 얻어서. 참~ 신기한 걸 이제 얻게 됐다, 이거여. 그건 뭐, 다른 데서 얻는 게 아니고 정말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내는 그런 일이죠.
非先所望을 而今自得이라
비선소망 이금자득
앞에서 소망하지 않던 것, 바라지도 않던 것을 어떻게? 지금은 저절로 얻게 됐다, 이거여. 부처님처럼 산다고 하는 것은 전혀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저절로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게 되었다.
사실 우리 불자(佛子)들이 불교를 믿고 불교 좋아하고 부처님 좋아해도 ‘부처님처럼 산다.’고 하는 생각은 안 하죠.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부처님처럼 살게 돼. 저절로 살게 된다, 이 말입니다.
비선소망(非先所望)이야. 앞에서 먼저는 바라지도 않던 것. 부처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은 전혀 바라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금자득(而今自得)이야. 저절로 부처님처럼 살게 된다, 이 말입니다.
如彼窮子가 得無量寶니다
여피궁자 득무량보
예컨대. 비유하자면. 저 이야기에서처럼, 저 못난 아들이 한량없는 보물을 저절로 얻은 거와 같습니다. 저 앞에 이야기에서 그렇게 했잖습니까? 못난 아들이 집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나중에 자기 아버지 집에 당도하게 되고. 그래서 그 못난 것이 차츰차츰 말하자면, 마음이 커져 가지고서 나중에는 결국은 그 집 재산을 물려받을 때는 눈도 깜짝 안 하고 그 재산을 다 물려받는다, 그 이야기거든요. 그건 이제 결국은 비유고. 우리들 마음에 정말 부처의 삶이 갖춰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자각하고·확신을 하고·잘 이해하고, 그래서 그렇게 살게 된다는 그런 줄거리의 이야깁니다.
75.
世尊我今에 得道得果하며
세존아금 득도득과
세존(世尊)이시여! 우리는 지금에 도(道)를 얻고 과(果)를 얻었으며
於無漏法에 得淸淨眼호이다
어무루법 득청정안
샘[漏]이 없는 법에, 번뇌가 없는 그런 법에. 청정한 눈을, 깨끗한 눈을 얻게 됐습니다.
我等長夜에 持佛淨戒나
아등장야 지불정계
여기 아등장야(我等長夜), 세 번째 나오네, 벌써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캄캄하고·무지몽매하고·그저 내일이 어찌될지 모르고·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그것이 장야(長夜). 우리의 미혹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의 길을 밤이다, 라고 “한밤”이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청정한 계(戒)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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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我等今日에사 得未曾有호니 非先所望을 而今自得이라..... 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_()()()_
淨佛國土 敎化衆生...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 _()()()_
부처님이 도달한 그런 경지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보람 있는 삶...가을햇살 님!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_()()()_
그래도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_()()()_
고맙습니다...()()()
가을햇살님. 잘 읽고 갑니다. ()^^*
'공법만 수습했다, 그리고 보살의 삶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불교가 무엇인지 생각케 하는 말씀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보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지극히 적은 양의 보시라도 꾸준히 계속하라! 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 _()()()_
我願往生,,, 淨佛國土 ! 我願精進,,, 敎化衆生 !
고맙습니다._()()()_
_()()()_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정불국토(淨佛國土) 교화중생(敎化衆生). .............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장 보람있고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석가모니부처님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시고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결국 부처의 삶이 가장 보람있고 유익한 삶이란 것을 확인하셨다
법화경이 설해질 당시 승려들은 번뇌가 사라지는 內滅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그것외에는 다른 데 뜻이 없었다
-淨佛國土,敎化衆生에는 관심도 없었고 도무지 기뻐하지 않았다--가섭의 고백
자기 문제 있을 때 남 생각하는 훈련을 쌓아두지 않으면 자기 문제가 없을 때도 남 생각하기 힘들게 된다
非先所望 而今自得
--부처님처럼 사는 것은 이전에 바라지도 않았는 데 이제 그렇게 살게 되었다
無上寶聚 不求自得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