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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에서 인생을 이해하다 ꡔ춘추ꡕ를 읽어 보면,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는 공자가 ꡔ역경ꡕ 「계사전」繫辭傳에서,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시해하는 원인은 하루아침 하룻저녁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 유래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다.”(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 漸矣)라고 말한 대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가 ꡔ역경ꡕ 「계사전」을 쓸 때는 바로 춘추시대의 동란기였는데, 물론 지금처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지러운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런 어지러운 상황이 하루 이틀 사이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도가의 장자莊子는 “구풍颶風은 부평초 끝에서 일어난다.”(颶風起於萍末)는 말을 했는데, ‘구풍’은 오늘날의 광동성이나 복건성 말로는 ‘태풍’이라고 하고, 서양에서는 이 말을 음역하여 ‘타이푼’(typhoon)이라고 합니다. 잘 알다시피 태풍은 그 힘이 아주 강력하지만, 처음 시작될 때는 수면에 부평초 잎새 같은 것이 하나 떠서 미미하게 움직이는 듯하다가 곧바로 기류가 위로 솟아올라 점점 커지면서 태풍으로 변합니다. 도가의 이 말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천하가 다 마찬가지로서, 작은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이 작은 일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ꡔ역경ꡕ 「계사전」에서 한 말은, 천하사의 형성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우연이란 거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것은 정말 우연이야.” 하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전통 문화의 정수인 ꡔ역경ꡕ의 이치에 따르면 천지간의 일은 모두 다 원인이 있으며, 많은 요인이 상호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에서 동전 한 닢을 주웠다고 합시다. 이 얼마나 우연입니까! 그렇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조금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 이전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가 집에서 나와 걸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집에서 나왔다는 앞선 원인이 없었다면, 동전 한 닢을 줍는 나중의 결과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는, 그가 집에서 떨어져 있던 동전 한 닢을 주웠다고 합시다. 이것은 우연일까요? 이 역시 그 전에 이미 동전 한 닢을 떨어뜨린 일이 있었기에 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집에 있지 않고 외출했더라면, 떨어진 동전을 주울 수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었던 것도 동전을 얻게 된 원인이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그 유래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其所由來者, 漸矣). ꡔ역경ꡕ은 우리에게 천하의 일이란 갑자기 변하는 것이 없다고 말해 줍니다. 다만, 우리의 지혜가 미치지 못해서 어떤 일이 갑자기 변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그에 앞선 원인이 그곳에 이미 잠복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ꡔ역경ꡕ의 이 몇 마디를 통해서, 공자가 ꡔ춘추ꡕ를 쓴 것은 바로 당시 사회 현상을 만든 원인을 찾아 그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것이며, 그가 그처럼 교화에 중점을 둔 까닭은 바로 3,4백 년 동안의 사회 기풍이 너무 어지러웠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몇 사람의 말을 인용해 보면 춘추시대가 어느 정도로 혼란스러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마광은 말했습니다. “이제 진나라의 대부들이 그들의 군주를 능멸해서 진나라를 분할했는데도(진나라가 조․위․한으로 나누어진 것을 가리킴), 천자가 그들을 토벌하지 못하고 관직을 내려 제후의 반열에 들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들이 다 아는 명분도 지키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버린 것이다. 선왕의 예禮는 이로써 소멸되었다!” (今晋大夫暴蔑其君, 剖分晋國(指趙․魏․韓三家分晋), 天子旣不能討, 又寵秩之, 使列於諸候, 是區區之分不得守, 而竝棄之也, 先王之禮, 於斯盡矣!) 사마광은 또 말했습니다. “천하가 지혜의 힘으로 서로 자웅을 다투어, 마침내 성현의 후예로서 제후가 되었던 나라들이 사직이 끊어지지 않은 곳이 없고 백성의 무리가 거의 멸진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天下以智力相雄長, 遂使聖賢之後爲諸侯者, 社稷無不泯滅, 生民之類, 糜滅幾盡, 豈不哀哉!) 고염무는 말했습니다.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제사를 엄히 지내고 제후간의 친선 도모와 천자에 대한 공물 헌납을 중시하였으나, 전국시대에는 이런 일마저도 없었다. 춘추시대에는 종성 씨족을 논했으나 전국시대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나라에는 온전한 외교가 없었고 사대부에게는 온전한 주인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 133년 동안의 변화로서 역사에는 그 기록이 빠져 있지만, 후인들이 뜻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기 전에 문왕과 무왕의 도는 사라졌다!” (春秋時猶嚴祭祀, 重聘享, 而七國則無其事矣! 春秋時猶論宗姓氏族, 而七國則無一言及之矣! 邦無完交, 士無完主, 此皆變於一百三十三年之間, 史之闕文, 而後人可以意推者也, 不得始皇之倂天下, 而文武之道盡矣!) 위와 같은 기록은 춘추전국 당시 사회의 혼란과 변란이 심각했음을 말해 줍니다. 당시에는 모두 다 권력 투쟁을 중시하여 사회 질서가 어지럽고 문화가 쇠퇴했는데, 그 정도가 오늘날 우리의 지역 상황과 비교할 때 거의 같다고 하겠습니다. 공자는 이러한 동란을 목격하고 크게 근심하면서, 위정爲政에는 권력이 소용없고, 오직 ‘덕’德으로 해야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