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계토성:
http://blog.daum.net/glinhaus/12789144호로고루성: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9번지 참고:
http://blog.daum.net/dhk459/12621823
호로고루가 있는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ꡔ三國史記ꡕ에 보면 이 성이 접하고 있는 부근의 臨津江의 명칭은 Ꜣ川․瓠瀘河 또는 瓢河로 불리었으며,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 사이의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전쟁기록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임진강 하류방면에서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으로서 육로를 통해 개성지역에서 서울지역으로 가는 최단거리 해당하기 때문이다. 임진강은 호로고루 동쪽의 두지나루에서부터 크게 곡류하면서 이곳에 이르면 강심이 얕은 여울목을 이루는데,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의 깊이가 무릎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으며, 이곳에서부터 임진강하류쪽으로는 강폭이 넓고 강심이 깊어진다. 따라서 이 여울목을 통제할 수 있는 호로고루의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은대리성:
전곡읍 은대리 산80
은대리성은 당포성이나 호로고루와 같이 임진강일대에서만 발견되는 江岸平地城이다. 모두 강의 북안에 위치하여 남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임진강이나 한탄강이 사행곡류하면서 강심이 얕고 강폭이 좁아 강을 건너기 수월한 곳에 축성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포성: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82번지 (윗 사진)
당개나루
당포성은 양주방면에서 수철성과 아미성이 있는 감악산 동로를 지나 임진강을 건너는 최단거리에 있는 나루터인 당개나루를 瞰制할 수 있는 임진강의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마전지역은 개성으로 가는 주요 요로에 있는 지점임을 고려할 때 이 성은 임진강 남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서, 고구려가 신라나, 백제를 방어하기 위하여 구축한 성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성은 고구려의 군대가 평양지역에서 개성을 거쳐서 백제의 한성지역으로 남하한다고 가정할 때 장단까지 와서 동북쪽으로 다시 올라가서 내려오는 우회코스이다. 따라서 장단까지 내려온 고구려의 기병은 말을 타고 임진도를 직접도하할 수 없으므로 말을 타고 직접 도하 할 수 있는 임진강에서 가장 아래쪽의 여울목인 호로하 즉 고랑포 쪽이나, 적성부근인 칠중하를 주된 도하지점으로 선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미성: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산86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2년 392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개성을 빼앗았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백명을 사로잡고, 사로잡혀 있던 본국백성 1만명을 설득하여 귀국시켰다.
10월에 백제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20일 동안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다.
* 백제 아신왕2년 393년, 8월에 왕이 진무(眞武)에게 이르기를 "관미성은 우리 북변의 소매와 같은 요충지인데,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통석하는 바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라고 하였다. 드디어 병사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경을 칠것으로 계획하고 진무가 몸소 사졸에 앞장서서 시석을 무릅쓰고 석현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 하여. 먼저 관미성을 둘러쌌다. 고구려 사람이 성을 굳게 지켰다. 진무는 식량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위의 google earth 사진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현 파주시 교하(交河) 일대이다. 관미성으로 표시한 곳은 현재 오두산 통일 전망대인데, 한국전쟁 때 많이 파괴되었다고는 하지만 중요한 유적을 파괴했다고 생각된다. 내가 가보았지만, 삼국사기에 나온대로 사방이 가파지른 절벽이다. 물론 한강의 풍납토성에 있던 백제로서는 이곳이 상당히 중요한 요충지임이 분명하다. 반대로 이곳을 장악해야 임진강으로 통하는 수로를 확보할 수 있다. 관미성을 약간 각도를 달리하면 삼국사기의 서술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바다로 침공해 들어오는 수군이 보았을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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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진사왕3년 秋九月, 與<靺鞨>戰<關彌嶺>, 不捷.
백제 진사왕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이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와서 북쪽 국경을 공격하여, 석현(石峴)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싸우지 못했다. 한수 북쪽의 제 부락들이 많이 담덕에게 몰수되었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공격하여 뽑았다. 왕은 구원(狗原)에서 사냥하였는데, 1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아신왕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武, 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 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 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우리나라 북쪽 국경의 소매처럼 요긴한 곳이다.
고구려 광개토왕
즉위년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초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겨울 10월, 왕은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바닷물이 빙둘렀으므로, 왕이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마침내 뽑았다.
칠중성: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산148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