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는 동지였는가
(사진/게바라 총상을 배경으로 연설하는 카스트로. 볼리비아에 갇힌 게바라 에 대한 지원을 철회해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게바라의 죽음에 카스트로는 과연 무관한가.
게바라 사망 30돌을 맞아 쿠바 정부가 그에 대한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준 비하는 가운데 “게바라의 죽음에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잇따라 나와 그 진위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게바라가 살해된 직후 카스트로 의장은 반드시 게바라와 그 부하들을 찾 아 쿠바로 데려 올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 약속을 지켰다 . 국내로 돌아온 게바라는 일정 부분 쿠바에서 ‘통합이데올로기’ 구실 을 했다. 아바나의 거리에서 쿠바인들이 외치는 “게바라와 함께”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을 추구 했던 게바라가 현재 미국의 봉쇄로 고통받고 있는 쿠바의 경제상황에 비 춰볼 때도 게바라의 상징성이 매우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멕시코 정치학자인 요르게 카스타네다는 최근 발표한 게바라 전기 <붉은 삶>에서 소비에트연방이 쿠바에 압력을 가해 볼리비아에 있는 게바 라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게 함으로써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카스타네다는 67년 소련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 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고 당시 국제정세를 설명한다. 이미 미국과 소련 은 62년 ‘쿠바사태’로 한바탕 전운을 피운 적이 있었으나, 소련은 그뒤 데탕트쪽에 무게를 두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소련은 미국이 텃밭 으로 여기는 남미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게바라를 곱지 않게 봤다는 것이다.
소련은 게바라를 구조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결성한 카스트로에게 압력을 넣어 이 부대를 해산하게 만들었다는 게 카스타네다의 주장이다. 결국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게바라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의 지휘를 받은 볼리비아군에 의해 사살된다.
이런 주장은 러시아로부터도 나오고 있다. 지난 9월4일 <모스크바 뉴스> 도 전 KGB 관계자의 말을 빌려 ‘게바라의 죽음과 소련의 관계’에 대한 보도를 했다. 당시 남미에서 활동하던 KGB 요원인 니콜라이 레오노프는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소련이 카스트로 뿐 아니라 볼리비아공산 당에도 게바라를 지원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쿠바 정부는 이런 주장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외신들은 쿠바 정부가 게바라 를 더욱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옛 소련 붕괴 뒤부터라고 지적해 이런 의혹에 무게를 실어주 고 있다. 만일 카스타네다와 <모스크바 뉴스>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미 지금의 카스트로 는 지난 59년 게바라와 같이 혁명을 논하던 그 카스트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의사에서 혁명가로, 게바라 격정의 39년
(사진/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게바라는 질병치료보다 세게의 모순 을 치료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해 안정된 의사직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이름은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단순한 이름 이상의 것이 된다. 혁명과 정에서 게바라 스스로가 붙인 ‘체’는 스페인 말로 ‘어이 친구’ 정도지만 바로 이 이름 이 ‘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한 완성된 인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 아들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등 엘리트 코 스를 밟았다. 하지만 당시 그가 두 번에 걸쳐 실시한 남미 전역 여행은 게바라를 크게 바꾸 어 놓았다.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이 세계 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권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한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56년 7월 피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 다. 게바라는 같은 해 11월 80여명의 ‘전사’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지만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에 발각돼 거의 전멸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전설적인 쿠바혁명의 신화가 창조됐다. 게바라, 카스트로 등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산맥에 숨어 게릴라활동을 벌이며 혁명군 을 모은다. 이들은 수만명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군인들을 상대해오다 58년 산타 클라라전 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는다. 결국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59년 1월2일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뒤 쿠바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 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 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그는 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 1년 뒤 게바라는 우루 과이의 비즈니스맨으로 가장해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게바라가 볼리 비아를 택한 것은 볼리비아가 5개국과 국경을 접하는 등 혁명의 불씨가 남미 전역으로 잘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해 게 바라를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줬다. 결국 게바라는 67년 10월8일 체포된 뒤 처형됐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생활은 다룬 다큐멘터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볼리비아 일기>에 따르 면, 그는 “왜 인텔리 의사가 자신을 이런 상황까지 몰아넣었느냐”는 볼리비아 여인의 질 문에 간단히 “나의 이상을 위해”라고 답한다. 다큐멘터리는 또 관계자의 인터뷰를 통해 “게바라가 처형된 뒤 반쯤 뜬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추구한 이상의 실현을 죽어서나마 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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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2년만에 유해로 귀환
‘돌아온 혁명 영웅 체 게바라’는 오는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기 념관에 매장된다. 지난 7월12일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옮겨진 게바라의 유 해가 이날 마침내 이 쿠바혁명 전적지를 안식처로 삼는 것이다. 게바라 군대가 정부군을 크게 물리친 산타클라라 전투 뒤 39년, 콩고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난 지 32년 만의 일이다. 이 날은 또 쿠바 정부가 정한 게바라 추모주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쿠바 정부는 게바라의 유해를 우선 수도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 11일부터 13일까지 전시할 예정이다. 그 뒤 14일에 아바나에서 3백km 동 쪽에 있는 산타클라라의 묘지로 옮긴다. 아바나에서 산타클라라까지의 행 진루트는 지난 58,59년 그가 산타클라라에서 아바나로 가던 꼭 그 길이다 . 방향만 반대일 뿐이다. 10월17일 매장행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영될 예정이다.
이렇게 게바라가 30년 만에 자신의 안식처를 찾은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처럼 보인다.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서쪽 240km 떨어진 바예그란데 공항 근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게바라 유해의 행방 은 지난 30년간 갖가지 추측만을 낳았다.
게바라의 유해를 찾기 위한 그간의 조사와 연구는 아주 어려운 조건에서 진행됐다. 우선 희생된 게릴라 대원들의 시체가 땅에 묻혔는지조차 확실 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볼리비아군이 게바라의 주검을 헬리콥터로 아마 존 밀림에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들은 따라서 이미 게바라 의 주검은 사나운 동물의 밥이 돼 버렸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렇게 게바라 유해 발굴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볼리비아 군대가 시체가 묻혔을 수도 있는 지역과 장소에 대한 정보 차단했던 탓도 컸다.
그러나 쿠바와 아르헨티나인으로 구성된 조사팀은 끈질긴 추적 끝에 처형 당시 게바라를 바예그란데 근처로 옮겼다는 운전사의 증언을 확보하고 이 지역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 6월 말 포르말린 성분이 들어 있는 그의 유골을 발견한 것이다.
발굴 당시 게바라는 두팔이 없는 상태였다. 지난 67년 볼리비아군이 게바 라의 죽음을 쿠바 당국에 확신시키기 위해 주검에서 팔을 잘라 쿠바로 보 냈기 때문이다. 조사단은 곧 관련자들의 증언과 과학적 조사를 통해 이 유골이 게바라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게바라는 마침내 머나먼 혁명의 여 정을 마치고 제2의 고향인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묻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