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시인과 홍성
섣달 눈 덮인 우리국토는 그리움이다. 제법 많은 눈이 내린 날 충남 내포지방의
지도를 본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비산비야의 지역이 내포다. 천수만이 인접한 홍성인근의
산과 들에는 만해 한용운시인의 발자취가 보일 듯 말 듯 아른거린다.
한용운시인은 홍성 출신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설악산의 백담사를 기억하며 그곳에서
시인을 찾으려 한다. 한용운시인의 고향을 찾아 가는 때는 겨울이 제격이다.
그는 평생을 겨울같은 삶으로 일관했으니 생가를 찾는 일은 시련에 동참하는 일의 시작이다.
문학기행은 일반적인 관광과 다르다. 각자 견해의 차이만큼 다양한 상상력에 현실을
접목 시킬 수 있는 것이 문학기행이기 때문이다.
관광과 다른점은 날씨에 그리 민감한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경치를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생가와 작품의 무대, 고향 언저리의 산과 들 강둑을 거닐면서
작가의 이력과 문학작품을 몸으로 읽는 행위다.
비가 내려도 되고 눈이 내리면 금상첨화다. 추위속에서도 작가를 그리워하며 그의 가난과
시련의 겨울을 생각하면서 한줄의 시를 읽고 암송하는 일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용운시인, 이 분의 생가와 언저리를 겨울에 탐방하는 행위는 가슴시리며 감동적인 행위다.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거리는 행위로써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은 그 분의 생가를
방문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용운시인 생가)
한 그루 나무가 자라 거목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토양과 기후를 비롯한
여러가지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하물며 위대한 사람이 태어난 곳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당대의 시대적인 상황을 비롯한 집안의 내력과 주변사람들의 영향은 지대하다.
한용운시인(1879~1944)은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이라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홍성은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고을이다. 한용운시인 외에도 최영장군, 성삼문, 보우국사
김좌진장군을 배출한 위인의 고장이다.
홍성의 이름은 1914년 부터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홍주라 불렀다.
홍성군청에서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홍성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감계비리국으로,
백제시대에는 결성지역을 결기군, 통일신라 시대에는 결성군이라 칭했다.
고려시대 초에 운주라고 했다.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경에 윤주를 홍주로
공민왕 7년인 1358년에는 보우국사가 태어난 고향이라하여, 홍주목으로 승격하여
3군11현을 관할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32년인 1895년에는 홍주부로 승격되어 지금의 평택에서 서천까지
22개 군, 현을 관할하는 홍성의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1914년 일제의 강점기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군으로 축소 되었다.
아마 홍성이 충청도에서 의병활동이 가장 강력하였던 곳이라 일제가 홍성을
미워하여 군으로 전락시킨것이 아닌가 필자는 추측한다. 홍성사람들은 1905년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홍주성에서 죽음으로 대항했다.홍성에 가면 가장 먼저 인사를 하여야 하는 장소가
'홍주의사총'이다. 1906년(병오년) 이 지역 출신인 민종식이 주축이 되어 일본군 50여명을
죽이고 홍주성에서 끝까지 항쟁하다 죽어간 수백명의 이름없는 민중들의 뼈를 거두어
만든 무덤이다. 눈덮인 무덤 앞에 서니 홍성군 사람들의 애국애족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눈이 내린지 이틀이 지났지만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잊혀진 역사가 슬프다.
(홍주의사총)
서울에서 홍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서해안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방법이 가장 수월하다.
부득이하여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21번 국도와 45번 국도를 번갈아 타야한다.
천안에서 예산을 거쳐 홍성으로 이어진 국도는 평일인데도 붐빈다.
그런데 이 길은 길고 지루하지만,오며 가며 볼거리가 많다. 예산의 '추사고택'과
홍복면 노은리에 있는 '최영장군사당'과 '성삼문탄생지'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과 들은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겨울 내포길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행복한 길이다.
성삼문(1418~1456) 탄생지를 탐방한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절개를 생각한다.
하늘은 푸르고 태양빛은 눈빛에 반짝인다. 성상문 어머니 묘소앞에 차를 세우고 겨울산을 본다.
성삼문 탄생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정표가 제대로 없기 때문도 하려니와
산과 들이 모두 하얀 눈으로 덮여서 길을 분간하기 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근처에 있는 최영장군(1316~1388) 사당은 눈에 길이 막혔다. 언덕길에 차는 헛바퀴를 돈다.
아쉽고 답답했지만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홍성군 홍복면 노은리는 최영장군과 성삼문선생의
고향 마을이다. 이 작은 산골 마을에서 민족의 위인 두 분이나 탄생한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을은 작고 옹색하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던 최영장군의 말은 오늘까지도 유효하다.
성삼문선생이 태어난 자리에는 고증 안 된 생가 기와집이 번듯하다.
1676년 이량이란 사람이 생가 옆에 세웠다는 녹운서원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사라지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노은단'이 쓸쓸하게 산허리에 앉아 있다.
(성삼문 탄생지)
한용운시인의 생가를 찾아 가는 길은 눈발이 날려야 멋진데 서녁의 태양빛이 눈부시다.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나들목을 나와 40번 국도인 천수만 방향으로 5분정도 달리면
한용운시인의 생가표지판이 보인다. 13번 지방도를 바꿔타면 바로 김좌진장군 생가다.
이 길을 따라 곧장 약 5km 달리면 한용운생가에 닿는다.
길은 고즈넉하다.이 길을 달리면서 한용운 시인의 시를 한 줄이라도 암송한다면
겨울 문학기행의 묘미가 살아날 것이다. 이 길이 '만해로'다.
위대한 시인을 찾아 가는 길은 언제나 가슴설레인다. 산과 들에는
듬성듬성 잔설이 남아 있다. 차량이 드문 '만해로'를 따라 달리니 뇌리에서
만해의 대표시 '님의침묵'이 머리속에서 읽혀진다.
님은 갔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하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청소년시기에 이 시를 한 번이라도 읽지 않은 이 누구이겠는가?
읽는 이마다 다르고, 읽을 때 마다 다른 감정으로 바뀌는 이 시 한 편만 가지고도
한용운 시인은 위대하다.
시인이 한 편의 시, 아니 한 줄의 구절이라도 국민에게 알려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물며 그의 유일시집 '님의침묵'은 1926년 간행되었지만 오늘도 우리에게 살아 있다.
님의침묵'이 국민의 애송시가 된 것은 우리 민족정서가 결합된 사랑의 함축성 때문이리라.
당대의 한용운시인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혼을 잃지 않기 위해 언어로 투쟁했다.
일제의 총칼아래 신음하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한글로 시를 썼다.
결국 아름다운 우리글과 말을 만들기 위해 흘린 땀의 결실이 그의 시다.
시인의 생가는 외딴집이다. 왼쪽으로는 '만해사'가 있고 오른쪽으로 최근에 조성한
민족시비공원'이 있다. 이정표가 없다면 결코 찾아 가기 힘든 장소다.
초가삼간이란 말이 제격인 초라한 생가의 마루에는 방명록이 준비되어 있다.
방명록을 읽고 부엌을 기웃거린다. 뒤안에는 눈속에서도 싱싱한 시누대숲이 멋지다.
(한용운시인 생가)
한용운시인은 이 집에서 태어나 1885년 7세때 홍성읍으로 이사한다.
9세때 '기삼백주'와 서상기'라는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신동이었다.
1892년 13세에 홍성읍 학계리에 사는 전정숙과 결혼하였으며 1896년 홍주의병이 되었다.
의병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19세에 홍성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으로 길을 떠난다.
이후 만주및 시베리아를 기행하다가 고향 홍성으로 돌아와 잠시 몇 개월 머물다가
1904년 백담사로 출가하였다. 이 해 그의 아들 보국이 태어났다.
형산(210M)아래 자리잡은 생가 및 만해사, 민족시비공원, 만해체험기념관이
홍성의 자랑이 되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만해사의 영전은 사색에 잠긴 생전에 시인의 고뇌를 담아 방문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듯 미간의 주름이 깊다.
눈빛은 강렬하였지만 잔잔한 모습으로 방문자를 응시한다.
(만해사)
민족시비공원'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들의 시비 약 15개가 자연석에 새겨져
정갈하게 세워져 있다.
계단식으로 돌아볼 수 있게 만든 시비의 시를 읽다 보면 이 땅의 대표적인 현대시
를 읽을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일제식민지,분단,군사독재의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희망을 향한 시어들이다. 눈이 녹아 질척이는 흙계단을 왼쪽으로 올라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면서 시를 읽는 맛이 솔솔하다.
문학기행팀을 마중이라도 하 듯 시비의 시가 선명하다. 고인이 된 민족시인들의 시는 살아서
우리민족이 존재하는 한 조각된 돌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될 것이다.
민족시비공원의 시들이 살아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서정적인 그리움과 아름다운
민족의 숨결을 느끼게 되길 기원하면서 눈길을 걸어 산 중턱까지 올라가 생가를 내려다 본다.
(민족시비공원)
민족시비공원은 아마도 이 땅의 시인들이면 누구나 고인이 된 후
자신의 시비가 건립되길 희망할지 모르지만, 자격은 그리 녹녹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한용운시인 시비가 반긴다. 모두들 좋아 하는 시'복종'의 전문이 정갈하게 박혀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시비는 아름다우면서 힘차다.
시비의 시 '복종'을 읽는다.
(한용운시인 시비)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시인의 시세계와 그의 일생의 행적은 책을 몇 권 읽어도 부족하다.
하물며 필자의 우둔한 글로 그의 행적을 더 적는 일은 생략되어야 한다.
다만 '복종'이라는 이 시를 읊조리면서 진정한 복종의 의미를 가슴속에 담는다.
엄동설한에 찾아와 한용운 생가 뒷산을 오르면서 하늘을 본다.
소나무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였지만 겨울숲의 우듬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푸르다.
언대지를 밟으며 숲길을 걷는다. 내 잠든 영혼의 숨소리를 듣는다.
겨울숲은 수목의 생명이 잠시 수면을 취하는 듯 조용하다. 능선 비탈의 허리를 돌아
내려 오면서 잎을 떨구고 곧추선 참나무 등을 쓰다듬는다.
한용운시인의 생가 인근에 김좌진장군의 생가가 있다.
홍성 IC 인근에 위치하여 찾기가 수월한 그의 생가는 한용운시인의 생가와 비교 되지
않을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반긴다. 안채,사랑채, 광을 돌아본다.
안채는 앞면 8칸 옆면 3칸인데 서쪽을 향해 있으며 마루가 높은 것이 특이하다.
김좌진장군(1889~1930)은 민족의 선각자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다량의 일본군을 섬멸한 분이지만,
그는 이미 10대 때 가산을 물려받아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하고 호명학교를 설립한 분이다.
소작인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나눠줄 때 기쁨에 어쩔줄 모르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마당을 걸으며 담넘어 멀리 전답을 바라본다.
내포지방을 기행하다 보면 이 지방 사람들의 민족애에 고개가 숙여진다.
김좌진 장군 생가
김좌진장군의 기념관은 난로가 피어 있지 않아서 춥고 스산하다.
마당을 나와 비문을 읽는다. 청남색 겨울하늘이 눈부시다. 눈덮인 생가의 기와집 뒤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번지 김좌진장군 생가의 땅 밟기를 하 듯 서성거린다.
위인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지만, 땅의 서기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얼굴이 시려와
손으로 비비며 잔디밭에 서서 위인이 태어나고 자란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펴본다.
김좌진 장군은 일신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고향땅에서도 호시호강을 누렸을 분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고향사람들에게 분배하고 홀연히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향한다. 생가 마당을 서성이면서 당시 그의 고뇌를 생각해 본다.
당시 일제에 항거하는 일은 감옥에 가거나 목숨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일제하에서 대지주로서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조국광복을 위해서
이 아름다운 고향의 집을 떠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고향집을 떠나 갔을 길을 바라본다.
홍성읍에는 서울의 남대문을 그대로 모방한 문이 있다. 조양문이다.
홍주성의 주문이 동문인 점이 특이하다. 성의 주문은 보통은 남문인데 이곳은 황해로 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동문을 주문으로 삼았다.
문루는 정면3칸에 측면 2칸인 팔작지붕 형태인데, 홍성읍의 상징건물로 손색이 없다.
일제가 이 문을 헐려고 했는데 홍성군민들의 반대로 헐지 못한 일화는 유명하다.
무엇보다 1906년 일제가 이 성을 점령하고 있을 때, 민종식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결사항쟁으로 일본군을 격퇴시킨 전투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조양문을 한 바퀴 돌아 본다. 화강암 벽돌에 총알자국이 선명하다.
조양문
홍성군청으로 길을 재촉한다.
홍주아문'이 반긴다. 이 문은 1870년 설립되어 대원군으로 부터 '홍주아문'이라는
사액을 받은 멋스런 문이다. 외삼문이라고도 하는데, 군청을 드나들 때 한 번은 꼭 보아야
하는 문으로 입구의 늙은 느티나무와 함께 홍성의 명물이다.
안회당'을 관람한다. 1678년 건립된 '안회당'은 형체가 잘 보존된 우리나라에서 몇 집 남지
않은 동헌이다. 홍성군청이 들어서기 전에 홍주의 동헌이었지만 '안회당'이란 편액을
대원군이 하사하여 이 이름을 오늘날까지 유지한다. 그 편액은 6,25때 망실되었다.
홍주동헌' 대신에 '안회당'이라 한 것이 특이하다.
안회당
홍성읍에서 수덕사 가는 길은 내포지방의 중심을 가르는 길이다.
아득하게 홍성의 주산인 용봉산이 아른거린다. 내포란 천수만과 아산만의 바다 위 아래에 두고
금북정맥의 가야산(677M)을 정점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열 고을을 합쳐 부르는 지명이다.
해미, 결성, 태안,서산, 면천, 홍성 덕산, 예산, 신창, 당진을 내포지방이라 칭한다.
"홍성에서 아는 체하지 말라"는 홍성이 내포의 행정과 학문의 중심지였음을 표현한 말이다.
홍성읍에서 수덕사는 그리 멀지 않다. 설산이 된 덕숭산이 가까워진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고승 '지명'이 세운 고찰이다.
특히 대웅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의 목조건축물로 그 건축학적 의미가 대단한
건축물로 불자가 아니더라도 수덕사에 가면 필수적으로 눈여겨 보아야 한다.
덕숭산자락에 터를 잡고 내포지방을 내려다 보고 있는 수덕사의 일주문은 예전처럼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환영한다. 일주문을 지나 바로 왼쪽 개울 건너 옛 수덕여관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이응로 화백이 잠시 머무르며 암각화를 그려 놓아 명소가 된 그 곳을
매표사무실에 부탁하여 어렵게 출입허가를 받아 몇 장의 사진을 찍는다.
천왕문과 금강문을 계단으로 올라서 근역성보관을 지나 대웅전의 마당에 닿는다.
마당에는 눈이 녹아 질척인다. 대웅전의 배흘림기둥에만 관심이 있어서 높은
계단을 올라 대웅전을 올라간다. 700년이 지난 기둥을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무수한 세월을
버티기면서 살아온 기둥에 기대어 내포의 산과 들을 바라 본다.
대웅전을 나온 한 사내가 '여승들이 보이지 않네'하고 중얼 거린다. 이 사람이 말한 사연은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로 유명한 김일엽(1896~1971)이 중년에 이곳에서 스님이 된 사연과
송춘희'라는 가수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랫말 때문이기도 하겠다.가사 일부를 적어본다.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여성해방과 자유연애를 부르짖다가 서른 한 살에 스님이 된 여인 김일엽을 생각했다.
수덕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이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수덕사엔 고승들이 많이 거쳐 갔지만 근세에 경허스님(1849~1912), 만공스님(1871~1946)
있다. 이 땅에 선사상을 확립한 분들이다.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일주문
철새도래지 천수만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일몰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남당리 바닷가는 횟집이 즐비하다. 일몰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다닥다닥한 횟집 때문에
남당리 해안가를 따라 간다. 이윽고 횟집도 없고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한다.
홍성은 축복 받은 땅이다. 바다가 있지 않은가. 서부면은 바다와 인접해 있다.
그러나 홍성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천수만은 알아도 홍성은 모른다.
바다 건너 보이는 곳이 안면도다. 아스라하게 보이는 안면도로 태양이 지고 있다.
황홀할 정도의 낙조에 넋을 잃는다.
궁리를 지나면 바로 천수만방조제다. 방조제 중간지점에는 철새를 탐조할 수 있는
탐조대가 조성되어 있다. 이날은 왠지 새들은 보이지 않고 회색빛 하늘에 뿌연 안개가
스멀거릴 뿐이다. 방조제를 건너 간월도 입구에 내려 천수만을 바라본다.
천수만 일몰
한용운시인과 홍성을 제목으로 내포지방을 기행하는 일은 살폿한 그리움의 시간들이다.
특히 겨울날 눈덮인 산과 들은 아름다웠고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필자가
서울 성북동의 한용운시인의 마지막 거쳐였던 '심우장'의 집을 찾은 것도 겨울이었으며,
몇 년전 외설악의 백담사를 찾아가 한용운시인의 발자취를 더듬거려 본 것도
눈 덮인 겨울날이었다. 한용운시인의 생가를 찾아 떠나는 기행을 겨울로 선택한 것은
한용운시인의 삶에서 느끼는 겨울같은 한기를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다.
이런 외적인 차가운 현실적인 삶들을 내적 사랑의 그리움들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가슴속에 흐르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시다. 이 시들은 때론 여름날보다 뜨겁다. 시집
님의 침묵'에 88편이 수록 되어 있다. 이 후기에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의 시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 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읍니다.
그 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봄의 꽃 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지 모릅니다'라고 겸손해 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서 대를 이어 당시의 독자의 자손에게 까지 읽혀
지는 애송시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많은 수필과 몇 편의 장편소설들은 잊혀 졌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1955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 서문에는 '군말'이 서문에 있다.
시집의 서문에 '군말'만큼 겸손하게 요약한 내용을 쓴 작가를 아직 필자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군말이 아니라 참말이기 때문이다.
만해사 만해 영전
한용운시인의 시집 <님의 침묵> 의 서문 '군말'을 읽는다.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안터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메는 어린
양이 그리워서 이 시를 쓴다.'
해저문 들판에서 길을 잃고 돌아가는 길 잃은 양'이란 표현이 너무나 시적이며
성경의 '길 잃은 양'의 표현과도 흡사한 명문이다.
길 잃은 어린 양'을 위해서 이 시집을 바친다고 한 이 표현 앞에 가슴이 찡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을 낭독할 때 그는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 말미에 행동강령인 공약3장을 직접 썼다.
그리고 '이제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라는 유언적인 연설을 했다고 전한다.
옥고를 치르고 나와 이 땅의 불교의 대중화와 외세를 배격하는 올곧은 정진을
거듭하면서도 문학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성북동 심우장은 조선총독부를 처다 보지 않기 위해 북향으로 집을 지었으며
죽는 날 까지 일제와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조국의 해방을 눈앞에 둔 1944년에 세상을 떠나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만해 생가
겨울날 한용운시인의 고향 마을 홍성을 찾아 나서던 살폿한 그리움들이 이제 천수만의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서해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리움은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되어 작가의 고향을 찾아 나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이 길을 나룻배같은 사람들과 함께 떠나고 싶다.
이제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을 읽으며, 겨울날 떠난 만해와 홍성의 기행을 마친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며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 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씌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