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시다
불안하고 괴롭고 힘들었던 취직 준비기간이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입사 후에 더 큰 고난--환난과 질곡과 궁핍과 질병과 사망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아무도 모른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알 수 없는 가운데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흘러갔다.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자기의 앞날--미래에 대한 예측(豫測)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어려운 시험문제가 닥쳤으면 떨어질 게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군대에서--DMZ 최전방 부대에서 살아온 3년간의 긴 세월이 나를 완전한 촌놈--맹추--바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수습기자 12기로 출근하고 보니 서울대 출신(김진홍, 국흥주, 이영록, 유영숙)이 4명 고려대 출신(김동현, 임부섭, 이종욱)이 3명 외대 출신은 나 하나로 모두 8명이 합격했다. 편집국과 출판국으로 나누어져 3개월간의 현장 실습과 기사취재, 경찰서 근무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기사작성에 꼭 필요한 6하 원칙--(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을 잊지 말고 취재하라는 <동아핸드북>을 공부하였다.
일단 취직이 된 마당에 회사 일에 충실해야 한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신문사 월급(월급 4만원) 액수가 시중은행(월급 7만원)이나 무역회사의 절반 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일반 신문사의 평균적인 월급 수준이라서 어쩔 수 없는 박봉(薄俸)이었지만 발등의 급한 불부터 꺼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 5년 동안 우리 집안의 가정형편, 부모님과 어린 아이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 각종 사고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신문사에 들어간 때는 25살이었고, 남동생 둘이 10살, 12살로 국민학교에 다니고 여동생 둘은 15살, 18살로 중, 고등학교 학생이었고 <근래>는 나이 23살로 성균관대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군대에 입대한 상태였다.
<근래>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군대부터 때워야 하는 병역의무(兵役 義務)때문에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였고 여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 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했다.
1972년 3월 <경기여고>를 나온 <명희>는 광화문에 있는 <유남산업>이라는 작은 복사집(오세영 친구의 도움)에 취직했다가 5급 공무원 시험을 봐서 <불광우체국>과 <서대문우체국>에 근무하고, <덕화여상>(현재 해성여상)을 나온 <정희>는 <정건강 관리연구소> 베지밀 식료품 회사에 취직해서 열심히 돈을 벌었지만 어려운 가계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동생들이 모두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 일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명희>은 밀린 학비(學費)가 1년간 남아 있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졸업증이 있어야 직장에 이력서를 내는데 참으로 막막했다. 나는 담임선생을 찾아가서 먼저 졸업증을 떼어주어 취직이 되면 나중에 돈을 내겠다고 통사정을 하여 겨우 취직을 시키게 되었다.
우리 집은 경기도 고양군 진관읍 진관외동의 <기자촌>에 살았다. 아버지는 50세의 나이에 갑자기 지병이 악화되어 한영의원(오병근 의사)에 입원, 10일간 요양을 하였다. 병명은 결핵과 기흉(氣胸)이었다. 폐에 찬 공기를 빼고 안정을 취하여 퇴원했으나 <기관지 천식> 병이라 잘 낫지 않고 결핵 주사를 맞고 양약으로 견디게 되었고 하루는 어머님이 대청소를 하신다고 철 대문을 물로 끼얹고 닦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쓰러져 X-ray를 찍어보니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사지가 마비되는 뇌졸중(중풍)이 온 것이었다.
두 분이 모두 병상에 누운 상태였다. 아버지는 체중이 45kg--50kg이 나가게 몸이 쇠약해져서 매일 밤 기침을 심하게 하시고 잠을 못 주무시게 되었고, 어머니는 안방에 종일 누워서 침, 뜸을 맞으며 한약을 다려먹는 중풍환자가 되었다. 어머니의 혈압은 120--190으로 고혈압이 올라가서 정신이 깜박깜박 나가기도 했다.
이 해 8월에 우리 집은 <기자촌>에서 진관외동 479-179 번지 박석고개로 이사를 갔다. <근래>는 캐나다에 이민을 신청하기 위해 냉동기사 (冷凍技師)자격증을 따고, 사립학교인 <은혜국민학교>를 다닌 <순래>는 국비생으로 뽑는 <체육중학교>에 진학시키고, 막내 <덕래>는 1972년 12월 <중앙중학교>로 배정이 되어 <근래>가 자기 돈으로 동생의 입학 등록금을 납입하였다.
이때가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非常戒嚴令)을 발령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선되어 8대 대통령에 추대되던 해다.
1973년 군대를 막 제대한 동생은 <태극출판사>에 임시 취직이 되어 나가고 어머니는 혈압(血壓)이 계속해서 상승하여 <일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이후로는 밥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 도시락을 못 싸고 <근래>가 부엌일과 취사(炊事)를 담당하게 되었고 동생들은 몸이 아파서 학교를 결석하거나 때로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결식하곤 했다.
차비가 없어서 학교를 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굶고 울면서 지낸 여동생은 학교에 내야 하는 기성회비(期成會費)가 밀려서 창피해서 못 간다고 하고 결석한 것이었다.
<순래>의 경우는 주말마다 집 밥을 먹으러 왔다가 가곤 했는데 큰 형들이 둘이나 있는데 차비를 거절당해 하는 수없이 구파발 <기자촌>에서 불광동을 거쳐 홍은동--영천--서대문--율곡로 --창경원--혜화동을 거쳐--미아리--장위동--태릉 중학교 기숙사까지 눈물을 흘리며 몇 시간을 걸어서 갔다고 한다.
왕복 교통비와 간식대인 150원 때문에 두 형들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던 중 국비생으로 <체육중학교>에 다니게 되어 안심했지만 5월에 갑자기 학교에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와서 태릉(太陵) 산중에 있는 학교를 찾아갔다. 학부형이 와서 직접 반성문(反省文)을 작성하고 정학처분을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동생은 다른 학생의 가방을 훔쳐서 빵을 먹고 돈까지 훔쳤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랬나 싶었지만 부정할 수가 없고 잡아 뗄 수 없는 학교의 교칙에 의해 학교 징계위(懲戒委)의 처분만 바랄 뿐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며칠을 뒷산을 뒤지고 물증을 찾으려고 시도하였으나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후 몇 차례 방문하여 사정을 이야기하고 순간적인 실수를 인정하고 난후에 정학 처분을 면한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 집에서 프랑스 <빅토르 유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짠발짠>의 비극이 생긴 것이다.
한편 <근래>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인터뷰 연락이 오고 1973년 8월에 재정보증서가 도착해 신원조회, 신체검사와 여권(旅券) 신청을 했다. 곧 비자발급을 신청하고 8/8일에 KAl 비행기 표가 캐나다에서 도착했다.
이민을 꿈꾸고 결정한지 3년 만에 출국수속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1973년 10월 5일 김포공항으로 출국하였다. 작은 매형(이광균)의 차로 이동하여 오전 11시 반 출국수속을 마치고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을 거쳐 캐나다 <토론토 공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