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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를 다녀와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를 위해 수고 해주신 여러분과 독도함 함장님을 비롯한 해군장병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 탐방기를
초중고교 학생과
손자와 자녀들
그리고 교육가족 여러분께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적으로 정리, 편집하였습니다.
이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 탐방기는 제가 운영, 관리하고 있는
#. 여기 - 한국화투연구소 cafe http://cafe.daum.net/koreahan66/8lmv/56
#. 자녀교육 Bank blog http://blog.chosun.com/koreaedu/6669203
#. 자녀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 cafe http://cafe.naver.com/koreahan77.cafe? 에
게재하여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왜 하필이면 한국화투연구소 cafe 에 올렸냐고 질문이 나올 것 같아 말씀드리면
컴퓨터 사용법이 미숙하여 쉽게 올릴 수 있는 곳에 올렸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도착해서 독도함 승선하기 까지
우연한 기회에 전북일보 광고란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에 대한 자료를 보고 나이 많은 사람이 주책없이 신청하는 것이 아닌지 하면서 한 번도 타보지 못한 군함을 탄다는 호기심과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를 한다는 것에 들떠 신청을 하였다.
이런 곳에는 ‘청소년들이 참여해서 현장을 통한 애국심을 길러야 할터인데...’ 하면서도 속으로는 선발되어 통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성웅 이순신 제독 승전지 순례 포스타>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 환영 비디오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을 읽어 보며 이충무공의 충성심과 인품에 대해 감탄하고 있는 가운데 선발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었다.
2012년 9월 21일부터 28일까지 8일간 전 국민을 대상으로 5개 광역권별로 인터넷 접수를 받은 결과 총 1,792명(개인 96명, 단체 1,696명)으로, 평균 경쟁률은 4.48대 1이었으며 지역별로는 경남·부산·울산이 1,358명(76%), 타 지역이 434명(24%)이었다고 하니 나도 4.38: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되었다는 것을 보고 기분이 더 좋았다.
나이가 많아서 혹시라도 주의를 게을리 하여 함께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참가자에 대한 주의와 함상에서의 예절을 마치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우리내외는 꼼꼼히 읽고 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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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차량등록 방법을 읽어 보고, 타고 갈 차를 홈페이지에 등록하였다.
10월 13일 오전 7시 30분에 도착해야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전날 오전에 전주에서 출발하여 진주에서 남강 유등축제를 보고 진해 해군사관학교 앞에 도착하여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 행사장의 위치를 확인하고 근처에서 1박을 하였다.
기다리던 13일 아침 7시에 해군사관학교 정문에 도착하여 임시차량운행증을 받고 정문을 통과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에 나오니 바닷바람이 우리를 조금은 쌀쌀하게 맞이하였다.
날씨가 춥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오리털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내서 끼어 입고 한참을 기다렸다.
주위에 있는 군함들을 보니 상상했던 것 보다 작았으며 그래도 좀 크다는 군함을 보고 우리가 탈 배가 저것일까 이것일까 하는데 모이라는 소리가 들려 우리들은 모여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독도함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우리 앞에 나타는 군함은 위풍이 당당하고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다.
그 이름도 당당한 독도함(獨島艦, LPH-6111)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자랑스런 독도함>
독도함 앞에서 팀과 조를 찾아 이름표를 받았고 행사 주최 측에서 주는 가방과 간식을 받은 후 전체가 모여 보무도 당당한 해군 의장대와 군악대의 공연을 보았는데 우리들을 매료시켰고 여기 저기서 사진을 찍느라고 바빴다.
<해군 의장대의 열띤 경영 동영상>
환영식이 끝난 다음에 그렇게도 보고 싶고 타보고 싶었던 독도함에 승선하였다.
이 곳에 오기전 ‘충무공 이순신 제독 승전지 해상 순례’에 선발되었다고 자식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혹시 배멀미를 할지도 모르니 귀밑에 붙이는 멀미약 ‘귀미테’를 사서 배에 오르기 전날 밤에 붙이고 잠을 자고 아침에 떼었다가 승선 직전에 다시 붙이라고 해서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독도함에 승선하고 보니 배가 움직이는 데도 전혀 흔들림을 느끼지 못하였다.
실제로 배가 커서 그런지 전혀 동요가 없어서 귀미테를 붙이고 간 것이 멋적었다.
승선 후에 넓은 광장의 의자에 앉아 해상왕 장보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영상, 우리나라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과 우리나라 해군의 역사에 대한 영상을 봤으며 독도함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독도함에 승선하여 이순신 제독의 승전기와 해군, 경상남도에 대한 영상을 보고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2. 우리의 자랑 독도함 이야기
<독도함 LHP 6111호의 모습>
<독도함의 위용>
독도함이 얼마나 큰지 우리들 일행이 들어가서 의자에 앉고도 공간이 많이 남았다.
이 배는 얼마나 크고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한 것이 많이 생겼다.
독도함(獨島艦, LPH-6111-Landing Platform Helicopter)은 해군의 강습상륙함으로 2007년 7월부터 취역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해병대 상륙작전을 지원하고 대형 물자 수송을 위한 목적이다.
2002년 10월 말에 한진중공업이 대한민국 해군으로부터 수주를 받아 건조를 시작한 뒤, 2005년 7월 12일 진수하였고 2006년 5월 22일부터 시운전을 시작하여 2007년 7월 3일 취역하였다.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고 수색구조 작전에 투입된바 있다.
제원을 보면 배수량: 만재 18,800톤, 전장: 199미터, 선폭: 31미터, 속도: 최대 23노트/시속이며, 독도함의 수송 능력은 독도함의 수송 능력은 헬리콥터 7대, 전차 6대, 상륙돌격장갑차 7대, 트럭 10대, 야포 3문, LSF-2등 고속상륙정 2척, 승조원 300명, 상륙군 700여명을 동시에 수송할수있다. 독도함은 2척의 고속상륙정 LSF-2 (솔개 631)등을 탑재한다. 독도함의 격납고 아래에 있는 함미부에는 배 밑바닥이 없어 바로 바다가 들어와 있는 길이 26.4미터, 폭 14.3미터의 작은 풀장이 있다. 이 풀장으로 공기부양정이 들락거리는 ‘배 안의 항구’인데, 이 항구를 도크(dock)라고 한다. 독도함 안에는 전차, 트럭, 장갑차등을 실을 수 있는 거대한 지하 주차장이 있다. ‘덤프(dump)’ 또는 ‘비클 스페이스(vehicle space)’라고 불리는 이 주차장은 배 안의 항구에 연결되어 있다.
<독도함의 강당에서 갑판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무려 300여명을 싣고도 거뜬히 올라가는 거대한 엘리베이터이며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장갑차, 탱크, 트럭 등을 옮긴다고 함.>
<독도함 갑판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승전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승전지와 어마어마하게 큰 독도함 위를 둘러보고 있는사진과 동영상>
체험장과 포토존에서는 거북선도 만들고 이순신장군의 갑옷을 입거나 해군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즐거운 시간도 있었다.
3. 손원일 제독
<손원일 제독 사진>
젊은시절 일제치하에 조선에서 일제에 고문당한바 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가 의사가 되기위한 공부를 하였으며, 그 아버지는 상해임시정부에 근무하였다.
손원일 제독은 상해시절 상해에서 본 각국 해군들의 모습에 해방된 한국에도 그러한 해군을 건설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손원일 제독은 조선에 건너온 뒤 민간인신분임에도 해군의 모태가 되는 해방병단을 만들었다. 이후 해방병단은 미군정에 의해 해군까진 아니지만 해안경비대로 공식적인 정부조직이 되었으며 미국에 직접 편지를 하여 도움을 요청하여 해군양성을 위한 미해군교관 15명을 한국에 모시기도 했다.
손원일제독은 푼푼히 모은 성금과 아낀돈으로 최초의 해군함 백두산호를 미국에서 구입해 마련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를 건설했고. 해병대도 창설 하였다. 해병대 창설식에 해병사령관을 빛내기 위해 해군참모총장이던 손원일 본인이 참가하지 않은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4. 한국 최초의 군함 백두산 호
한국 최초의 군함인 백두산 호는 해군이 생긴 이후 변변한 전투함 한 척 없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해군장병들과 민간인들의 모금액 1만5000달러와 이승만 대통령이 국고에서 지원한 4만5000달러를 합친 6만달러를 마련하여, 미국에서 백두산함을 인수했다.
2차 대전 때 사용됐던 미 연안 초계정에 구경 76㎜ 함포를 장착한 백두산함은 길이 52.9m, 배수량 450t에 40㎜포 1문, 20㎜포 5문을 갖추고 있다.
해군 장병과 가족들이 모은 성금으로 1949년 10월 미국에서 구입했으며, ‘백두산 함’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당일인 1950년 6월 25일 대한해협을 정찰하던 중 북한의 무장 선박을 발견하고 이튿날 가라앉힌 대한해협 해전 승리의 주인공이다.
1959년 물러난 뒤 1966년부터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 함’의 돛대가 등록 문화재 463호로 지정되어 해군사관학교에 보존돼 오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군함인 백두산 호의 위풍당당한 사진임>
<사진 - 한국 최초의 군함인 백두산 함과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된 백두산 함 돛대에 백두산 함의 위용을 자랑하며 오늘도 보무도 당당히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으며 백두산함 돛대 앞에는 ‘필사즉생 필생즉사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비석이 서 있다.>
대한미국해군의 위용과 발전하는 해군의 모습을 영상과 ‘Navy 해군’을 통해, 그리고 전시된 사진을 통해 한눈으로 보아 기분이 매우 좋았다.
5. 성웅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
<성웅 이순신 장군 사진>
<이순신 장군의 탄생과 어린 시절>
이순신은 덕수 이씨 12세 손으로서 1545년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자녀 4형제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병정놀이를 좋아했던 꼬마대장 이순신은 청년 시절에는 문무를 겸비한 건실한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글 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하고 군사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하였으며, 21세가 되던 해인 1565년(명종 20년) 8월, 보성 군수 방진의 딸 상주 방씨와 결혼하여 22세가 되던 해인 1566년 10월에 무인이 될 것을 결심하고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장군의 무관활동>
1576년에 32세의 나이로 무과 병과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에 임명된 후, 1579년에는 훈련원 봉사, 1580년 발포 수군만호, 1591년에는 48세의 나이로 전라좌수사에 제수되었다. 이순신은 임란이 발발하기 4개월 전부터 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병선을 정비하고 군진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거북선을 건조하여 지자/현자 총통 발사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 즉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조선에 요구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7년간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벌에 실패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전투과정을 살펴보면 육전에서는 일본군이 유리했다. 왜냐하면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조선군은 활과 창으로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전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일어났다. 조선수군은 화포로 싸웠지만 일본수군은 조총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는가?>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 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우리나라와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 즉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조선에 요구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무찌른 일본의 도고헤이하치로가 말하기를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하였다.
당시 우리 조선은 상하가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귀담아 듣는 이가 없었다. 그 후 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조정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고니시 유게나가의 선발대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왜는 전쟁을 통하여 군대가 잘 훈련되었으며 특히나 조총이라는 최신식 무기까지 무장을 한 상태였다.
<선조대왕의 피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조선은 7년간 백성들이 왜군들에게 찔려죽고 조총 맞아 죽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고 논밭은 황폐화 되었으며 왕은 평양을 거처 의주로 피난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 지도층인 관리들이 부패하여 민과 관이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이 틈을 보고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통일 과정 중 일어난 자국 내 모순점을 해외 침략을 통해 해결하려는 데서 비롯됐다.
<이순신 장군의 대승>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이하여 이순신 장군은 탁월한 전략전술과 신출귀몰한 전투 지휘로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역경과 수난 속에서도 이순신은 끝까지 자기 사명에 대한 인식과 성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당당한 자기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은 마침내 외부와 내부의 적이 휘두르는 어떠한 검과 칼로도 벨 수 없는 견고한 리더십의 판옥선(板屋船)과 귀선(龜船)을 건조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7년 기간 동안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결국 23전 23승의 신화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출발했던 것이며 학자에 따라서는 30전 30승, 41전 41승이라고도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주요 해전>
흔히들 충무공 이순신을 연구하는 학자나 전략가들은 이 충무공을 영국의 넬슨 제독, 일본의 도고 제독과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어떤 의미에서 이 충무공과 이들 두 제독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넬슨 제독이나 도고 제독은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받고 전투를 준비하였지만, 이 충무공은 혼자의 힘으로 부하들을 독려하여 전투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장군의 승리는 넬슨 제독이나 도고 제독보다 자랑스럽고 뛰어난 승리라고 생각한다.
<거북선>
<판옥선>
<성웅 이순신 제독의 승전 해전도>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사용한 학익진(鶴翼陣) 전법>
한산대첩에서 장군이 쓴 전술은 “학익진(鶴翼陣)”이며 이 전법은 학의 날개 처럼 배들을 펴놓아서 공격하는 진법이다.
<“학익진(鶴翼陣)” 사진>
그 당시 왜군 연합함대의 규모는 110척이 넘었고 수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다. 만일 이 전쟁에서 왜군이 이기면 그들의 육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전라남도 해안을 통하여 한양과 평양까지 단숨에 수송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은 분초를 다투게 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한산 바다에서 왜군을 초토화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상황에서 장군은 그때까지 아무도 사용한 일이 없는 낮선 전술인 “학익진”을 파격적으로 채택했다. 유인-포위-집중타격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학익진 전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장군은 수 백 번의 훈련을 거쳐 휘하의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필승의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사용한 일자진(一字陣) 전법>
이순신이 탁월한 전술가라는 사실은 단 13척의 배를 가지고 130척이 넘는 왜군함대를 전멸시킨 명량대첩의 “일자진(一字陣)” 전술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은 130척이 넘는 세키부네 휘하의 대규모 함대가 전라도 쪽을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비장한 각오를 한 장군은 조선 전 함대에 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당시 동원된 아군의 배는 13척 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고초>
이순신 장군이 한창 왜적을 무찌르며 큰 공을 세우던 와중에 큰 곤욕을 치렀으니, 오호통재로구나! 원균은 출중한 공적을 세우는 순신이 미웠던지 시기 질투하여 그에게 억지로 죄를 씌워서는 선조임금에게 고자질하는 장계를 올렸다. 헌데, 현명치 못한 선조 또한 싸우기만 하면 왜군을 무찌르며 백전백승하는 이순신 장군을 칭찬하고 표창하기는커녕 원균의 장계에 속고 궁궐에 서식하는 간신배들의 농간에 놀아났다. 올바른 판단을 결여한 선조는 한시가 바쁜 전쟁터에서 열심히 적의 목을 베던 충무공을 서울까지 압송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슆>
근자에 이순신의 리더십이 빈번히 회자된다. 이순신은 외유내강, 겸손, 희생, 용기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지모와 전술의 사람이었다. 그의 비상한 지모와 전술은 깊은 사색의 삶에서 나왔다. 그는 말을 아끼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색형(思索型) 리더였다. 고고(孤高)한 수루에 올라 넓게 펼쳐진 한산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그걸 가슴으로 느꼈다.
<이순신 장군의 어록>
1.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則死 必死則生)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則死 必死則生)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이 말은 충무공께서 1597년 2.26일 서울로 잡혀갔다가 7.23일 원대 복귀하여 겨우 배 12척으로 9.16일 명량해전에 임할 때 부하들에게 한 말이다.
2. 상유십이 순신불사 (尙有十二 舜臣不死)
임진왜란 시 큰 공을 세웠음에도 원균의 시기와 질투로 형옥에 갇혀있다 소인배의 전사로 다시 전장에 투입된 이순신 장군은 겨우 12척 남은 거북선을 가지고도 ‘상유십이 순신불사 (尙有十二 舜臣不死)’라 하며 기꺼이 나라 구하기에 나섰다.
3. 이외에도 많은 어록을 남기었음.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말라.
◆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이순신 장군의 글>
(1) 난중일기
① 임진일기(壬辰日記):27매, ② 계사일기(癸巳日記) : 30매, ③ 갑오일기(甲午日記) : 52매, ④ 병신일기(丙申日記) : 41매, ⑤ 정유일기(丁酉日記) : 27매, ⑥ 속정유일기(續丁酉日記) : 20매, 겉장이 없고 첫장에 '丁酉'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일기 내용은 정유에서 무술 정초에 이르고 있고, ⑤의 정유일기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2) 서간첩 : 충무공의 서간집이다.
(3) 임진장초 : 표지에 '임진장초(壬辰狀草)'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오른쪽 위에는 '만력이십년(萬曆 20年)'이라고 써 있으며, 지면(紙面)에는 여러 곳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인(全羅左道水軍節度使印)'이라는 주인(朱印)이 찍혀 있다.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제승당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시>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제승당은 한산 바다를 향하여 정 중앙에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쪽 앞에는 한산 넓은 바다를 향하여 수루(戍樓)가 우뚝 서 있었다. 수루 중앙에는 큰 북이 보였고, 앞 벽에는 장군이 읊었던 시(詩)가 고즈덕이 걸려있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만약에 일본군이 해전에서 이겼다면?>
저는 임진왜란은 정말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찔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때 만약 일본이 수군까지 준비해서 전쟁에 임했더라면 조선은 100% 패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한일합방 훨씬 이전에 일본의 속국이 되어 지금도 일본말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이 충무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배운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오늘 승전지 순례를 통해 얻은 이순신 장군의 국가관과 애국심을 거울삼아 각자의 위치에서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에게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강하고 자랑스러운 조국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점을 명심 또 명심해야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교훈을 본받아 죽기 살기로 즉 사생결단하는 마음으로 온 국민이 위기 극복에 임 할 때, 더 좋은 대한민국, 부강한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다.
6. 즐거운 점심시간
점심을 먹으러 계단을 내려가는데 급경사였다. 계단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우리가 식사를 한 곳은 장병식당 이었다. 식판을 들고 밥과 국과 세 가지 찬을 담고 테이블에 앉으니 따로 김치 두 종류와 김과 게장이 있었다. 해군들이 직접 요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맛이 매우 좋았다. 특히나 게 요리는 일품이었다. 많은 탐방객을 위해 수고해 주신 해군장병들께 감사드린다.
7. 경상북도 소개
한국관광공사 추천 국내여행지 100선에 경남 하동군과 합천군이 포함되는 등 유명관광지가 많은 도이며 하동군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있으며 박경리의 토지가 있고 녹차가 유명하며, 합천군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있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경상남도는 통영항, 합천 해인사, 창원 진해 군항제, 진주성, 창녕 우포늪, 남해 금산, 거제도 해금강, 함양 상림, 하동 십리벚꽃길, 지리산 둘레길이 100선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전주로 오는 길에 경남의 유명 관광지인 진주성, 합천 해인사 등을 관광을 하고 돌아왔다.
8. 즐거운 오락시간
순례객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서 여흥을 즐기는 시간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 일, 이, 삼하며 않는 게임, 유명가수의 노래, 해군장병의 경쾌한 노래는 우리들을 매료 시켰었다.
특히 두사람의 해군의 노래는 유명가수를 방불케하여 우리들을 감동시켰다.
<장기자랑을 위해 나온 대표 선수의 모습>
<유명 가수가 노래하는 사진과 동영상>
<강남스타일 춤을 추는 동영상>
< 해군의 경쾌한 노래 사진과 동영상>
10. 성웅 이순신 제독 순례 기념 도전 골든벨 시간
1팀에서 2명씩나와 도전 골든벨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학생부터 70대의 고령까지 참석하여 팽팽한 접전이 이루어 졌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질문을 하는데 이순신장군의 업적과 동떨어진 ‘이순신 장군이 화살을 어느 쪽에 맞아서 전사했느냐?’는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해온 출연자들에게 다소 실망을 주었으며 특히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진행 중에 최후 1인을 가리지 않고 마친 것은 참으로 아쉬었었다.
<성웅 이순신 제독 승전지 순례 퀴즈대회 모습>
11. 맺는 말
'성웅 이순신 제독 승전지 순례’는 나이가 든 나로서 이순신 장군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역사를 뒤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며 해군에 대한 이해와 해군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많은 희생을 치룬 임진왜란의 교훈이 더 강한 대한민국, 더 위대한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넘겨주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많은 가르침과 사명감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순례를 마치고 돌아와서 순례에서 받은 감명과 이순신 장군과 해군에 대한 이야기를 자라나는 청소년과 교육가족과 시민여러분과 손자와 자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이 자료를 교육용으로 편집하고 작성하였습니다.
‘성웅 이순신 제독 승전지 순례’를 위해 수고해주신 여러분과 독도함 함장님을 비롯한 장병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아름 다운 설악산의 단풍 사진과과 떠오르는 밝은 해의 사진을 보냅니다.
설악산의 단풍이 한잎 두잎 떨러져 가듯, 한해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낙엽과 함께 보내시고 밝아오는, 떠오르는 태양처럼 2013년에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설명자료출처: 강사님들의 강의 내용과 ‘Navy 해군’ 책자와 유용원의 군사세계와 naver 지식in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
작성자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우성아파트 105-703 한 기택
첫댓글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 탐방기 잘보았습니다.
우리 해군 독도함 대단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ㅏ.
예쁘게 잘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가족과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해군의 자랑 독도함과 이순신장군 승전지 순례글 잘 보았습니다.
아주 잘 쓰셨네요.
하이팅!
하이팅해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일이 가득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