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의 한국 사랑을 적은 책으로 자신을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항상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순천과 어릴 적 순천 친구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그는, 자신을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과 ‘강직하고 따뜻한 심성’이었다고 고백한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서양 사람의 것이지만, 속내에는 누구보다 더 징글징글한 한국인의 기질을 지닌 그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원형을 키워 준 순천 땅, 순천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 뜨거운 정(情)을 이야기한다.
광주의 아픔을 함께했고 한국의 응급구조시스템에 관심을 갖고 있고 북녘의 동포를 걱정하는 그는 나누어주는 사람이나 나눔을 받는 사람이나 서로가 더 커지는, 나누는 삶의 비밀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비록 실행에 힘이 들어도 보람과 기쁨으로 더 커지는, 실천하는 사랑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눔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부끄럽게 하는, 순정한 영혼을 지닌 한국인이다.
111년, 4대를 이어가는 린튼 가와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19세기 말에 시작된, 기독교 선교를 위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행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생의 한 시절을 이곳 한국 땅에서 보냈을 뿐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선교 사역지일 뿐이었고, 사역의 임무가 끝나자 이 땅을 떠났다. 그 많았던 선교사들과 한국과의 인연 중, 가장 오래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100년을 훌쩍 넘은 린튼 가와의 인연이다. 그 오래되고 특별한 인연은 1895년에 시작된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라 이야기되는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가 바로 그 해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이다. 목포를 중심으로 한 호남 선교 책임자로서 교육과 의료 사업에 힘쓴 유진 벨은 미국 조지아 주에서 온 청년 윌리엄 린튼(인돈)을 사위로 맞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 인요한의 친할아버지이다.
윌리엄 린튼 역시 호남 지역을 근거로 48년 간 교육 선교 사업을 벌였는데, 전주와 군산, 대전 지역에 수많은 중고등학교와 대학(한남대)을 설립했고, 자신의 네 아들은 모두 한국 땅에서 낳는다.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이 인요한의 아버지 휴 린튼(인휴)이다.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어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라 불렸던 그는 군산에서 태어나 불의의 교통 사고로 순천에서 죽을 때까지 전라도와 경상도 도서 산간 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지금의 광양 제철소가 들어선 지역에 간척 사업을 벌여 땅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의 아내 로이스 린튼(인애자) 역시 한국에 만연했던 결핵 퇴치 사업을 위해 35년 동안이나 헌신적 삶을 살았다.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인요한이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곧 순천으로 옮겨져 어린 시절을 순천에서 보낸 인요한은 영어보다도 먼저 전라도 말을 배운 전라도 토박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15년 째 일하고 있는 그는, 나눔을 통해 기쁨을 얻는 핏줄을 속일 수 없어,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남녘의 소외된 이웃들을 음지에서 돕고, 경제난과 결핵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북녘의 동포를 돕는 일에 힘쓰면서 그토록 오래된 린튼 가의 한국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나가 정(情) 빼면 뭐시 남겄소? 자신을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항상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순천과 어릴 적 순천 친구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그는, 자신을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과 ‘강직하고 따뜻한 심성’이었다고 고백한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서양 사람의 것이지만, 속내에는 누구보다 더 징글징글한 한국인의 기질을 지닌 그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원형을 키워 준 순천 땅, 순천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 뜨거운 정(情)을 이야기한다.
없이 살면서도 한없이 낙천적이었던 사람들, 내 것 네 것 없이 없는 살림을 나누어 쓸 줄 알았던 너른 인심, 서양인의 합리적 사고틀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서로를 보듬고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를 그는 한없이 긍정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이 말과 혀끝을 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반면에 한국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정을 나누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음을 누구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 인요한이다. 누구보다도 낙천적이고, 삶에 대한 경건한 애착을 가졌던 한국 사람들이 왜 이리 각박해졌느냐고, 왜 그렇게 나약해졌느냐고, 우리가 물질을 얻는 대신 순정한 마음을 잃은 것은 아니냐고, 그는 서글퍼한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한국인의 원형’을 놓칠라 움켜쥐고 살고 있는, 우리의 옛 모습을 담고 있는 거울인지도 모르겠다.
광주의 아픔을 함께 하다 인요한은 미국을 국적으로 두고 있는 외국인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더 한국인으로 살려고 노력해왔다. 어려운 공부 끝에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한국과 미국의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서양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80년 광주의 아픔을 직접 겪었다.
당시 의예과 1학년이었던 인요한은 광주로부터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을 듣고는 직접 광주의 한복판을 찾아 들어가 전남도청에서 있었던 시민군과 외신기자들의 회견을 통역한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진압된 뒤, 통역 일을 계기로 한국 정부는 미 대사관을 통해 그에게 추방을 경고한다.
일종의 유배로, 순천에 내려가 어머니의 결핵 진료소 일을 돕게 되었지만 한동안 사찰 요원이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광주의 일을 통해 그는 이중으로 마음의 고통을 겪게 되는데, 한국 정부로부터는 ‘빨갱이’로 지목되어 언제 추방명령이 떨어질지 몰랐고, 대학 내에서는 당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반미감정’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된 것이었다.
당시 언제 한국에서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마음에 두고 있던 치의대생 이지나와 결혼을 서두른다. 만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결혼식은 뒤로 미루고, 우선 혼인신고를 하고는 함께 살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광주는 그렇게 스무살 초반의 인요한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한국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 나눔의 삶은 나의 숙명이자 소망이다
그는 항상 말한다. 자신이 한국 땅에서 이만큼 자리 잡게 된 것이 한국 사람들과 더없는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부모님과 한국 사람들 덕분이라고 말이다. 그분들이 뿌리고 거두었던 사랑의 씨앗과 열매 덕분에 자신이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나올 수 있었고, 이렇게 큰 병원에서 일을 할 수 있었노라고.
그러고는 “한국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다”라면서 타인에게 열려 있는 자신의 마음과 의술이 쓰일 곳을 찾는데 열심이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휴 린튼 때문에 한국의 응급 구조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되어 지금은 전국 소방서와 병원에 약 3,000여 대가 보급된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했다.
1997년부터는 셋째 형 스티븐 린튼과 함께 북한 결핵퇴치 지원사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일곱 번 북한을 드나들며, 결핵 검진차, 의료지원 차량, 기초의료 장비를 제공하였고, 약 15만 명의 북한 결핵환자가 완치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나누어주는 사람이나 나눔을 받는 사람이나 서로가 더 커지는, 나누는 삶의 비밀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비록 실행에 힘이 들어도 보람과 기쁨으로 더 커지는, 실천하는 사랑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눔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부끄럽게 하는, 순정한 영혼을 지닌 한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