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농구가 2012년 런던행 티켓 획득에 한 걸음 다가섰다. 숙적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짜릿한 승리를 거두고 유리한 결선행을 선점했다. 세대교체로 불안했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한 젊고 예쁘고 강해진 '여랑이'다.(사진=WKBL) |
“혼자 막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어찌나 시원하던지….”
2012 런던 올림픽 티켓이 걸려 있는 FIBA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일본 나가사키)에 참가한 한국 여자농구대표팀이 예선 첫 경기에서 2차 연장전 끝에 중국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생애 처음으로 인터넷 생중계로 지켜본 박정은(34, 삼성생명)의 말이다. 지난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결승서 중국에 아쉽게 패해 은메달에 그친 언니들의 분풀이를 동생들이 해냈다. “애들이 어려서 그런지 정말 잘 뛰더라고요. 120% 실력을 발휘한 것 같아요. 저도 뛰는 거 보니까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가고 싶더라고요.” 감동이 가시지 않은 박정은의 들뜬 표현이었다.
그리고 여자대표팀은 또 한 번 일을 냈다. 지난 23일, 중국보다 까다로울 것으로 예상했던 예선 3차전 일본과 경기에서도 편파적인 홈 텃세를 이겨내고 극적인 역전승을 거둬냈다. 경기 시작부터 노골적인 편파 판정으로 8대5의 경기가 진행됐지만, 선수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집중력과 투혼으로 이겨냈다. 베테랑이 빠진 여자농구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시키는 순간이었다.
감동적인 경기로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고 있는 젊어진 ‘여랑이(한국 여자농구대표팀의 애칭)’, 얼굴도 실력도 더 예뻐 보일 수밖에 없다.
3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국민여동생' 최윤아는 세대교체의 핵심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전 2차 연장 승리 이후 현지 취재진에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사진=WKBL) |
젊은 선수들만 코트에서 뒹군 것이 아니다. 신정자와 강영숙 등 베테랑들도 몸을 아끼지 않은 투혼을 보였다. 신구가 조화된 세대교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사진=WKBL) |
일본의 홈 텃세로 도 넘은 편파 판정이 나왔지만….(사진=WKBL) |
17점차로 뒤졌던 한국은 경기 종료 3분여전 57-57로 동점을 만들고, 김연주의 결정적인 쐐기 3점포가 터지면서 일본 열도를 침묵시켰다.(사진=WKBL) |
▶ 왜 젊고 강해졌나?
여자대표팀의 평균 나이는 28.1세다. 지난해에 비해 크게 젊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주축 선수만 놓고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확 젊어졌다. 지난해 아시안게임 당시 이미선(32)-변연하(31)-박정은(34)-정선민(37)-하은주(28)로 평균 31.4세였지만, 이번 대표팀은 최윤아(26)-김단비(21)-김정은(25)-신정자(31)-하은주(28)로 평균 26.2세에 불과하다. 1년 만에 평균 5.2세가 낮아진 것. 최고령 김지윤(35)과 김계령(32), 이미선(32) 등은 이번 대회에서 코트보다 벤치에서 후배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번 대표팀의 세대교체는 신구의 조화가 절묘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베테랑들은 위기 때 강했고, 젊은 선수들은 승부처에서 강했다.
신정자는 대표팀의 중심이었다. 정선민이 맡았던 자리다. 중국전에서 포인트 포워드로서 득점과 어시스트, 리바운드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일본전에서도 결정적인 공격 리바운드와 외곽포를 터트리며 운영의 묘를 살렸다. 김계령과 강영숙도 하은주가 벤치에서 쉬는 동안 포스트를 든든히 지켜냈다. 이미선 역시 일본전 초반 최윤아가 부상으로 빠졌을 때와 경기 막판 투 가드로 나서 노련하게 팀을 이끌었다. 베테랑들은 어린 선수들이 흔들리지 않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경기 중간 중간 선수들을 불러 분위기를 다잡기도 했다.
젊은 선수들의 활약은 말 그대로 눈부셨다. ‘국민여동생’ 최윤아는 그동안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빠진 3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았다. 중국전에서 29득점을 기록한 최윤아는 2차 연장전 승리의 주역이 됐고, 일본전에서도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가로채기를 여러 차례 성공시켰고, 고비마다 득점포를 가동했다. 결정적인 순간 자유투도 정확했다. 중국전에서 23득점을 기록한 김정은은 상대 수비를 뒤흔들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특히 신정자와 호흡이 돋보였다. 하은주 역시 중국과 일본전에서 2~3쿼터에 집중적으로 출전해 중국의 천난과 일본의 도카시키 라무를 상대로 막강한 높이를 앞세운 공격력을 과시했다.
김단비와 이연화, 김연주는 이번 세대교체 선수들의 주역들이다. 김단비는 일본전에서 26점 7리바운드 3어시스트로 팀 내 최다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연화는 강력한 수비를 앞세워 궂은일을 도맡았다. 중국전에서는 11득점도 보탰다. 김연주는 일본전 깜짝 스타였다. 경기 종료 3분9초전 57-57로 팽팽히 맞서던 상황에서 3점 라인보다 한 발 먼 거리에서 깨끗한 쐐기포를 꽂았다. 3점슛 단 한 개를 시도해 성공시켜 3득점에 불과했지만, 이날 경기를 뒤집은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슈터 부재로 뒤늦게 합류한 슈터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
신한은행에서 신구조화를 통해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무적 신화’를 만들어낸 임달식 감독의 용병술도 빛났다. 임 감독은 일본전의 도 넘은 편파 판정에 항의하고 선수들에게 소리치느라 목이 다 쉬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임 감독은 일본전을 마친 뒤 예선 3연승의 승리 비결을 ‘젊음’이라는 한 단어로 일축했다.
“생각했던 대로 됐다. 마음이 편해졌다. 첫 경기 중국전에선 결선을 대비해 총력을 다 해야 했다. 결과가 좋게 나왔다. 일본전은 편파 판정을 예상했다. 그런데 진짜 너무 심하더라. 게임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전반을 끝내고 선수들에게 말했다. ‘어렵게 중국을 이겼는데, 일본을 상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면 안 된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젊은 선수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체력이 되니까 포기하는 것도 없었다. 중국도 일본도 끝까지 물고 늘어졌기 때문에 된 것이다. 젊음이 그래서 좋다. 선수들도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다. 하겠다’라는 마음이 강하더라.”
국내에서 여자대표팀의 선전 소식을 접한 정선민과 변연하(이상 KB국민은행) 역시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전과 일본전을 TV로 시청했다는 정선민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연승 행진을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잘해줘서 기쁘다. 애들이 너무 잘하고 있으니까 대표팀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더 안 들더라.”
이번 대표팀에 부상으로 제외된 변연하는 예선 경기를 보지 못하고 승리 소식만 들은 상태. “감독님이 마지막까지 기다려주셨는데, 부상 때문에 합류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잘하고 있어서 마음도 편해지고 미안한 마음도 많이 없어졌다.” 변연하의 빈자리를 채운 김정은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의 격려를 던졌다. 김정은은 일본전 외곽슛 난조로 아쉬움을 남긴 선수다. “정은이는 저와 포지션이 같아도 스타일이 많이 다른 선수다. 저 같은 슈터로 기대하면 안 될 것 같다. 중국전에서 굉장히 잘한 걸로 들었다. 정은이도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 만리장성에 이어 일본의 홈 텃세를 이겨낸 여랑이. 한국 여자농구의 감동은 2012년 런던 올림픽을 향해 대물림 되고 있다.(사진=WKBL) |
한국은 조 1위가 유력해졌다. 비교적 약체로 꼽히는 레바논과 대만에 승리를 거두면 예선 전승으로 4강에 안착해 중국과 일본을 피해 무난히 결승에 오를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아직 단 1장이 걸려 있는 런던행 티켓을 쥔 것이 아니다. 예선은 예선일 뿐이다. 결승에서 중국은 더 강해질 것이고, 일본의 텃세는 더 심해질 것이다. 누가 올라오던지 만만한 상대가 없다.중국과 국제대회 결승전에서 수차례 맞붙은 경험이 있는 정선민과 박정은, 변연하도 한 목소리로 우려를 표시했다. 박정은은 “중국은 예선과 결승이 완전히 다른 팀”이라고 밝혔다. 정선민도 “일본전 보니까 경기 초반 중국 애들이 관전하고 있던데, 우리도 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한다. 중국은 예선에 탐색전을 하고 결승에서 훨씬 강해지는 스타일”이라고 했고, 변연하 역시 “우리는 예선에서 모든 걸 다 쏟은 것 같은데, 중국은 탐색을 했던 경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예선 그 이상을 보여주려면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임 감독의 예상은 달랐다. 일본이 결승에 올라올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 그리고 일본이 더 까다롭다는 생각을 내놨다. 임 감독은 “일본이 이번 대회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무조건 결승에 올라오려고 할 것”이라며 “일본보다 중국이 결승 상대로 더 낫다. 결승 가면 편파 판정이 더 심해지는데, 그러면 우린 게임을 못한다고 봐야 한다”고 경기 외적인 요소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내비쳤다.
예선서 기분 좋게 런던행을 밝힌 한국 여자대표팀은 24일 오후 3시 레바논, 25일 오후 5시 대만과 예선 4, 5차전을 치른 뒤 26일 휴식을 갖는다. 이변이 없는 한 한국은 조 1위로 4강에 올라 4위가 유력한 대만과 27일 준결승전에서 만나 승리할 경우, 2, 3위가 유력해진 중국과 일본의 승자와 28일 런던행 티켓을 놓고 결승에서 맞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