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서인 『신당서』-발해전에 의하면, 당시 발해는 북쪽의 여러 말갈부족(우루, 월희, 흑수)을 쳐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쪽의 여러 부족 중에서 발해국과 직접적으로 대립해왔던 부족은 흑룡강 유역의 흑수말갈이었다. 흑수말갈은 선왕이 등극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당나라에 조공을 하는 등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선왕 등극 이후에는 다시 당나라와 조공관계가 단절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선왕 시기의 발해가 북쪽 영토에 대해 적극적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남쪽의 신라를 점령한 사실은 표면상으로 보면 신라를 쳐서 전승한 것 같지만 사서에 기사가 없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대인수 시대에 발해가 강성해져 신라가 감히 소란을 피우지 못하여 둘의 영역이 고정되었다고도 추측할 수 있다.
선왕은 당나라와의 관계도 매우 돈독히 하였다. 대인수가 왕위에 오른 뒤 당은 대인수를 왕으로 흔쾌히 승인해 주었고, 대인수의 확장 정책을 지지하고 격려하였다. 이것이 또한 그가 성공하게 된 중요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끊임없이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발해 사신은 상업성을 띠어 일본시장에 충격을 주므로 일본의 한상인은 “손님이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 뒤 일본은 12년에 한 번씩 선물을 교환하기로 규정하여 끊임없이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제한하였다. 이와 같은 발해의 적극적인 외교는 안정된 국제질서의 유지와 아울러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시기에 발해는 경제적으로도 대 발전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대내. 외적으로 판매하였다. 어렵. 채집. 목축뿐만 아니라 농업과 각종 수공업 생산도 이미 중요한 생산부분으로 되었다.
선왕 시대에 발해의 정복활동이 마무리되었고, 그 후 선왕은 내정에만 집중하여 발해의 전국 행정구역은 이때에 5경(京) 15부(府) 62주(州)가 되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선왕의 사후, '해동성국(海東盛國)'-바다 건너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 으로 칭송되는 번영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것으로 보이나 애초에 남은 기록자체가 희박하다. 삼국처럼 자체의 기록이 있는 게 아니라 당이나 거란, 신라, 일본 같은 주변국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할 뿐이다.
[발해의 역대 왕]
구 분
|
왕 |
이 름 |
재위기간 |
제1대 |
고왕(高王) |
대조영(大祚榮) |
698∼719 |
제2대 |
무왕(武王) |
대무예(大武藝) |
719∼737 |
제3대 |
문왕(文王) |
대흠무(大欽茂) |
737∼793 |
제4대 |
|
대원의(大元義) |
793 |
제5대 |
성왕(成王) |
대화여(大華璵) |
793~794 |
제6대 |
강왕(康王) |
대숭린(大嵩璘) |
794∼809 |
제7대 |
정왕(定王) |
대원유(大元瑜) |
809∼812 |
제8대 |
희왕(僖王) |
대언의(大言義) |
812∼817 |
제9대 |
간왕(簡王) |
대명충(大明忠) |
817∼818 |
제10대 |
선왕(宣王) |
대인수(大仁秀) |
818∼830 |
제11대 |
|
대이진 |
831∼857 |
제1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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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건황(大虔晃) |
857∼871 |
제1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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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석(大玄錫) |
871∼894 |
제14대 |
|
대위해 |
894∼906 |
제15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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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선 |
906∼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