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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나문사) 원문보기 글쓴이: 동쪽임금_최동군
아빠 : 이 정자는 일반적으로 청렴결백한 관리를 뜻하는 청백리(淸白吏)의 대표로 잘 알려져 있는 황희 정승이 노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임진강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이곳 강변 솔밭 동산에 지어놓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시문을 즐겼던 곳이야.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으로 짝 반(伴), 갈매기 구(鷗)자를 써서 반구정(伴鷗亭)이라고 이름을 붙였어.
딸 : 예전에 아빠가 설명해 주신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과 글자는 달라도 뜻은 같네요?
그렇다. 압구정과 반구정은 글자는 달라도 <갈매기와 더불어 벗한다>는 뜻은 같다. 그럼에도 압구정자리는 권신(權臣)의 대명사인 한명회의 이미지에 걸맞게 서울 강남의 불야성 속에 들어가 있고, 반면 반구정은 청백리(淸白吏)의 대명사인 황희의 이미지를 충실히 반영한 듯 인적이 드문 임진강 가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기는 하지만 묘한 대조를 이룬다.
딸 : 황희 정승과 관련된 일화들은 꽤 많은 것 같아요. 교과서에도 나오는 <누런 소와 검은 소> 이야기도 있고,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고, 부인말도 옳소라고 한 <여종들의 싸움> 이야기도 있어요.
황희 정승의 일화는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다. <누런 소와 검은 소> 이야기에서는 비록 짐승앞에서라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겨서 <평상시 신중한 언행>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여종들의 싸움> 이야기에서는 <평소 남의 말을 경청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습관> 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또한 정승자리에 있으면서도 평소 집안 살람이 가난하여 관복이 하나 밖에 없어서 어전회의에서 무안함을 당했다는 에피소드 등 우리나라 <청백리의 대표> 소리를 들을 만한 이야기는 셀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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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유골(鷄卵有骨)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속담으로, 복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기회를 만나도 덕을 못 본다는 말인데 이 속담도 황희와 관련이 있다. 황희는 재상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세종은 아무날 하루 동안 남대문으로 들어오는 상품을 몽땅 국비로 사서 모두 황희의 집으로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런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하루종일 폭풍우가 몰아쳐서 아무 것도 들어오는 물건이 없다가 저녁 때가 되어서야 누군가가 겨우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오길래 그것이나마 황희의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황희의 집에서 달걀을 삶아 놓고 보니 속이 모두 곯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곯았다는 `곯` 음과 뼈 골(骨)의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와전되어 계란유골이란 말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뿐만이 아니다. 김종서와의 일화도 유명한데 김종서가 북방 6진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병조판서가 된 후 회의석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삐딱하게 앉자, 황희는 병조판서의 의자다리가 짧은 것 같으니 당장 수리를 하라고 호통을 쳐서 김종서의 무례함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한편 <어우야담> 에 등장하는 이야기로는 황희의 아들 황수신(黃守身)이 기방출입이 매우 잦아서 황희가 수신(守身)에게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히 꾸짖었으나 수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수신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자 황희는 관복 차림으로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다. 수신이 깜짝 놀라 엎드리며 그 까닭을 묻자 황희는 "그동안 나는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 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에 크게 뉘우친 수신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황희의 성품은 청렴하면서도 매우 강직하다는 것이다.
딸 : 청렴결백함의 모든 모범답안을 황희는 보여주고 있군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아빠 : 지금까지의 황희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이 민간전승이거나 야사의 기록이야.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정반대의 상황이 많이 기술되어 있어.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진 황희에 대한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많이 실려있다. 황희는 뇌물수수, 간통, 직권남용 등 수많은 혐의에 연루되어 여러차례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다만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무한대에 가까운 신임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되기를 반복했다. 도대체 세종은 왜 그랬을까? 결론만 간단히 줄여 말하면, 세종의 입장에서 볼 때, 황희가 너무나도 정치를 잘 했기 때문에, 세종은 황희의 허물을 그것도 노골적으로 눈감아 준 것이었다.
황희는 너그러운 성품 탓에 주위의 청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해서 매관매직 혐의로 수차례 탄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간통혐의까지 받았다. 또한 무고한 사람을 죽인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해 맹사성까지 끌어들여 살인사건을 축소, 은폐를 시도했고 심지어 직권을 남용해서 사건을 조작하기까지 하다가 사헌부의 조사로 들통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세종은 상소를 무시하거나 황희를 파직하는 흉내만 냈다가 1년도 안되어 다시 정승으로 기용하는 무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황희는 본인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희의 자식들도 사고를 쳤는데, 그것도 엄청난 대형사고를, 그것도 3종 세트로 쳤다. 게다가 그 내용이 실록에도 고스란히 실려있다. 황희는 황치신, 황수신, 황보신 이라는 세명의 적자 뿐만 아니라, 황중생(黃仲生)이라는 서얼자식도 있었다. 그 중 황중생은 조선시대 2품 이상 고위관료들에게 음식과 술, 안주 등을 대접하는 관청인 내섬시(內贍寺) 소속의 여종을 황희가 첩으로 삼아 낳은 자식이었다. (황중생은 신분이 천민인 여종의 자식이므로 서자가 아닌, 얼자이다.) 관청의 여종을 첩으로 삼았다? 황중생의 출생과 관련된 이 대목에서도 뭔가 석연치 않는 부분이 많다. 아무튼, 황희는 그런 자신의 얼자인 황중생을 자신의 빽으로 동궁(東宮)의 소친시(小親寺) 자리에 요즘 표현으로하자면 낙하산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것을 음서라고 한다.)
딸 : 예나 지금이나 낙하산은 참 사회적 문제로군요!
그런데, 얼마후 궁궐내에서는 연이어 도난사고가 터졌고 대대적 범인 색출작업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제 범인은 황중생 이었는데, 설마 아무리 서얼출신이라도 황희정승의 아들이 그런 짓을 했겠느냐는 생각때문에 처음부터 용의선상에서 그를 제외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한편 세종 18년 또다시 궁궐 내 절도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문제는 이 절도사건이 그 동안의 절도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번 경우는 임금의 재산을 보관하는 내탕고에서 벌어졌고,또한 도난당한 물건이 일반인은 소장할 수도 없고 어디 가져다 팔 수 있는 물건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번에는 황중생도 용의선상에 올랐고, 결국 그에게서 자백과 증거물이 나왔다.
그런데 그의 자백 내용에 또 다른 이름이 거론되었다. 장물과 관련하여 튀어나온 이름이 바로 그의 이복형인 황보신(黃保身) 이었다. 황중생의 경우에는 황희의 아들이라하더라도 서얼출신이기에 어느정도 어물쩍 넘어갈 수는 있었지만, 황보신의 경우는 본처 소생의 적자 였기 때문에 차원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조선에서 첩의 자식은 사람취급을 안했다라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가문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세종도 이제는 어쩔 수 없어서 황보신에게 처벌을 내렸는데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황희의 아들 이름이 새롭게 튀어 나온다. 그것은 바로 황희의 장남, 황치신(黃致身)이었다. 원래 황보신이 받은 처벌의 내용중에는 녹봉으로 주어졌던 과전(科田)을 몰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호조참판(지금의 재경부 차관)으로 재직중이던 황보신의 맏형, 황치신은 몰수대상인 비옥한 황보신의 과전을 자기가 차지하고, 그 대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척박한 땅을 대신 벌금으로 내 놓은 것이었다.
황희의 세 아들들(황치신, 황보신, 황중생)이 벌인 막장드라마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들들을 둔 황희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 황희는 서얼이라는 이유로 슬그머니 황중생(黃仲生)의 성을 바꿔 이름을 조중생(趙仲生)이라 하였는데, 이런 것을 눈가리고 아웅한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봐야 실록에까지 기록된 내용을 어찌 바꾸겠는가!
딸 : 사실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황희는 어떻게 해서 청백리라고 소문이 났나요?
사실 <황희의 청백리 신화>를 만든 것은 황희 개인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이었다.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왕조가 출범한 중국대륙의 명나라에서는 기존의 <재상제>를 폐지하고 황제독재체제로 정부조직을 변화시켰다. 대대로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했던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재상제 폐지가 충격적인 뉴스였다. 만일 조선이 명나라의 체제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곧 양반집단의 기득권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관료집단은 재상제를 사수하고자 기득권 관료집단 안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청렴하면서도 또한 자기세력이 별로 없어서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을 대외 홍보용 재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이 바로 황희였던 것이다. 황희 자신도 실소득과 관계없이 청렴한 생활을 대외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양반관료집단의 기대에 부응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도 재상직을 오래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때문에 황희의 사후에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에 의해서 황희의 청백리 신화는 계속해서 확대재생산 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부패와 물의는 가려졌다.
딸 : 그렇다면 황희는 전혀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비록 황희가 개인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있다. 황희는 도덕군자가 아닌 현실 정치인이었으며 누가 뭐래도 조선조 최장수 임명직 재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태종과 세종시대를 거치면서 세자가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바뀌는 등의 정치적인 격랑속에서도 무려 20여년을 재상직에 머물렀고, 그 결과가 세종연간의 태평세월이었다. 이는 조선왕조를 통털어 전무후무한 기록이며 독재가 아닌 한 있을 수 없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황희는 정치 일선에서 강직한 성품으로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베풀어서 조선왕조의 조기안정화에 기여했다. 현실정치란 원칙과 소신만이 능사는 결코 아니다. 때로는 반대파를 적절히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황희는 그런 강약조절을 매우 잘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황희는 맹사성이라는 훌륭한 정치적 파트너가 있었다. 황희와 맹사성은 정치적으로는 같은 견해를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 즉, 황희가 학자적인 인물로서 분명하고 강직함을 추구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서 정치일선에서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그런 이유로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정확성과 과단성이 필요한 관서에서 인사, 행정, 군사의 업무를 맡았고, 맹사성은 주로 예조나 공조 등 유연성이 요구되는 업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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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못지않게 맹사성 역시 청백리로 유명했다. 그는 공무가 아닌 일에는 결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시종 없이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녔다고 한다. 좌의정이던 맹사성이 고향인 충남 온양에 어른들을 뵈러 들린다는 소식을 접한 안성 현감과 진위 현감은 이 참에 맹사성에게 잘 보이고자 맹사성이 지나갈 길을 잘 닦아 놓고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하루종일 기다려도 좌의정 일행은 전혀 보이지 않고, 해질 무렵 한 노인만이 혼자서 소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현감일행중 한 하인이 나서서 좌의정이 지나갈 길에 웬 무지렁이 노인네가 지나가냐며 시비를 걸었고, 그 노인은 만들어 놓은 길을 못갈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인이 노인을 소에서 끌어내려 현감 앞에 내동댕이를 쳤고, 현감들도 웬 정신나간 노인네냐고 하면서 고개를 들어보라고 한 순간, 현감들은 깜짝 놀라 모두 도망을 쳤다. 그 노인네가 바로 맹사성이었기 때문이다.
아빠 : 현재 황희 정승의 초상이라고 전하는 것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잘못 된거야. 어느 것인지 한번 알아맞춰볼래?
딸 : 학교에서도 시험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데 저한테 너무 하시는 거 아닌가요? ㅠㅠ
두 그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관복의 가슴부분에 있는 흉배(胸背)의 유무이다. 흉배(胸背)란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 그리고 문무백관이 입는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表章)이다.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평상복인 곤룡포(袞龍袍)에는 용무늬(龍文)을 수놓은 흉배를 가슴과 등 그리고 양어깨에 장식하였다. 한편 문무백관의 평상복인 단령포(團領袍)에는 네모진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붙였는데 관리의 품계에 따라 무늬의 구별이 있었고, 시기별로 여러 차례 변경이 되었다.
조선왕조에서 처음 문무백관의 흉배 제정이 논의되기는 세종 때로, 하연, 정인지 등이 건의하였으나 당시 영의정이었던 황희가 검소한 기풍에 위배된다 하여서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그 후 1454년(단종2년)에 양성지가 제의하여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런데 황희는 문종2년인 1452년에 생을 마쳤기 때문에 황희는 살아생전에는 흉배가 있는 관복을 입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는 황희의 초상중 흉배가 있는 초상은 시기적으로 모순이 있는 그림이다. 모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던 "대왕 세종" 이라는 사극에 황희정승 역할로 출연했던 탤런트 김갑수 씨의 사진을 보면 흉배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증을 잘 했다.)
딸 : 아빠, 반구정 위에 정자가 또 하나 있는데 저건 뭐에요?
아빠 : 응, 원래 저 자리에 반구정이 있었는데, 반구정을 아래쪽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대신 세운 앙지대 라는 정자건물이야. 글자를 풀어보면 우러를 앙(仰) 그칠 지(止) 돈대 대(臺) 자를 쓰는데 평소 강직하면서도 오랜 기간 백성들을 위해 정치를 잘 하신 황희 정승의 높은 뜻을 우러러 보라는 뜻이지.
딸 : 하지만 중간에 그칠 지(止)가 있잖아요? 우러러 보는 것을 그만 두라는 뜻 아닌가요? 이름을 잘 못 지은 것 같은데요?
앙지(仰止)는 원래 `시경詩經` 에 있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라는 문구에서 발췌한 것인데, 원래 뜻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칠 지止 를 단독으로 쓰면 그치다, 그만 두다 라는 말이 되지만, 다른 동사와 함께 쓰면 ~에 이르다. 또는 반드시 ~하게 하다 라는 뜻이 된다. 예를 들면 폐지(廢止)는 `없애는 것을 그친다` 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상태에 이르다. 반드시 없도록 하다 라는 뜻이 된다. 똑같은 원리로 정지(停止)는 `멈추는 것을 그친다` 가 아니라, 멈추는 상태에 이르다. 반드시 멈추게 하다. 라는 뜻이다. 따라서 앙지(仰止)는 우러러 보는 지경에 이르다. 반드시 우러러 보게 하다. 또는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로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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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이지당 (沃川二止堂) 충북유형문화재 제42호,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 33
충청북도 옥천에는 이지당(二止堂) 이라는 서당이 있다. 이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는데 `고산앙지 경행행지` 의 끝 글자 지(止)’자 두개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또한 서울 도봉산 도봉서원 앞 계곡에도 고산앙지(高山仰止) 라는 바위 글씨가 있다.
딸 : 와, 반구정에서는 정말 반전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다음 행선지도 궁금해져요.
아빠 : 글쎄, 다음은 어디로 갈까... 그래, 서오릉으로 가서 숙종과 한때 그의 왕비였던 4명의 여인들 이야기를 들려 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