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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는 [시민공동체]의 바다였다"
차량시위 분기점 민중봉기 "절정이뤄" 서울근교 주둔 3특전여단 광주투입돼
계림동·산수동·양동·대인동…남녀노소 모두 나와 시위참여"인심이 천심으로"
19일 저녁에 이어 20일 아침까지도 빗줄기는 계속되다 이내 그친다.
광주는 잠시 평온해보였으나 그것은 폭풍전의 고요, 즉 [폭풍전야]였음이 몇시간 지나지 않아 드러난다.
통금 이후도 시위계속
광주민중항쟁사에서 20일의 자리매김은 한마디로 차량시위를 정점으로 한, 다시말해 20일은 양동 대인동 계림동 용봉동 화정동 금남로 충자로등 광주전역에 거주하는 남녀노소가 너나를 떠나서 함께 일어난 [최대의 시민봉기]로 꽃 만발해버린다.
이날 오후 7시께. 유동삼거리쪽에 있던 시민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이들중 일부는 공수부대가 공격해오는 것으로 짐작하고 몸을 피하기도 하던 바로 그순간, 함성과 박수소리가 삼거리 주변 일대를 뒤덮어나가기 시작한다.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비상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거침없이 밀려오고 잇었기 대문이다.
오후3시께부터 무등경기장에 집결해 있던 차량들이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차량시위 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했던 수많은 시민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시인 김준태의 일기 (당시 중앙일보 [월간부]청탁에 의해 쓰여짐)를 같이 읽어보자.
[…잘은 몰라도 금남로 에만도 20여만명 이상이 이리밀리고 저리 밀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하늘 저멀리에서부터 광주 시가지를 내리 짖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충장로통이며 금남로 일대에는 가로등마저 꺼져있었다. 가로등 스위치를 계엄측이 일제히 내려버린 것 같았다. 통행금지시간 9시. 그시간은 가까워오고 있지만 사람들은 떠날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 시위군중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때 대형버스 5, 6대를 선두로 1백여대의 한성택시·개인택시 등의 영업용택시들이 라이트를 환하게 비추며 금남로 시위군중 사이로 밀려오고 있지않는가. 정전된 칠흑의 금남로. 금남로는 이미 돌아올수 없는 그런 바다로 가고 있었다. 학생을 포함한 시민들은 용기와 감격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애국가] [울밑에서 본선화] [선구자]등등의 노랫소리. 나도 어느새 엉엉 울고 있었다. 시가 9백40여만원 (한시택시의 경우 표찰값까지 포함해)을, 혹은 수백만원의 택시를 아낌없이 역사에 바치는 운전수들, 5월16일 이후 그 누구보다도 잔혹한 장면을 많이 보았던 목겨자들, 가난한 영세운수업의 택시기사들. 나는 그순간 방림동에 사는 누이동생의 남편을 생각했다. 새벽부터 밤늑게까지 영업용택시를 운전하던 매제를 생각하며, 엉엉 울었다.나는 그러나 자꾸 솓아져내리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개인의 일기를 다소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이 글이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던 바로 그때 기록됐던 몇 안되는 자료이며 특히 차량시위를 바라보던 당시 광주시민들의 항쟁적 정서와 의분넘치는 일체감이 비교적 정확하게 이입돼있다는 평때문이다.
김시인은 이 글을 월간중앙 80년 7월호에 게재키로 하고 원고를 건네줬으나 월간중앙측은 이 약속을 폐간 (80년 7월1일자로 전두환 정권은 [월간중앙]을 비롯, 70여개의 잡지를 폐간시켜버린다)이라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8년간이나 지키지 못하다 88년 6월 복간호에야 싣는다.
시민 궐기호소문 살포
이날 차량시위는 광주항쟁을 단순한 [시위]에서 드디어 [항쟁]으로 전환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에너지와 뇌관을 건드리고 또한 불을 당긴다.
시내를 누비고 돌아다니며 참혹한 살상을 수업이 목격한 기사들로선 내 형제, 내이웃이 이대로 계속 쓰러지는 것을 보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심지어 그들은 부상자들을 후송하던 기사들이 대검으로 찔리는가 하면 차에서 끌어내려져 무참히 짓밟히기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던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이제 다시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들로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형버스가 선두에 서고 끝이 안보일 정도로 많은 택시들이 군경저지선을 밀어붙이기 위해 계속 금남로로 밀고오자 연좌를 하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일어나고 박수와 환호성을 올린다.
각 차에는 어느새 학생과 시민들이 함께 타고 있다.
시민들은 길을 열어주며 계속 함성을 지른다.
김시인의 말대로 금남로는 바다로 출렁이며 밀려가고 있었다.
차량시위가 있기전 그러니까 20일 새벽부터 이날 저녁까지의 시위양상은 어땠는가.
19일 23시 08분. 서울근교에 주둔중인 3특전여단에 부대이동 명령이 하달된다.
이들은 명령을 접수한 즉시 천호대교와 마장동 등을 거쳐 청량리역에 도착한 후 20일 새벽1시 열차편으로 청량리역을 출발, 이날 오전 06시50분 광주역에 도착한다.
계엄군이 교체된 것이다.
전교사작전일지에 따르면 이날 새벽 4시께 시민궐기호소문 3만∼4만매가 시내일원에 살포된 것으로 돼있다.
실제로 19일 오후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유인물은 20일부터는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제작, 유통시키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완벽한 언론형태를 갖춰나간다.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시민들 스스로 생산해 낸 이같은 [또 하나의 언론]은 항쟁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또 그만한 역할을 해나간다.
오전10시가 조금 넘어서면서 시내 이곳저곳에서는 다시 시위대가 형성돼간다.
그러나 이들은 지난 이틀동안의 시위대와는 그 구성부터 달랐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은 물론이려니와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아주머니에서 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구성원이 다양해진 것이다. 이에맞서 새로 교체된 3여단의 진압방식도 이제까지의 7,11공수에 비해 조금 달라진다.
잠시나마 진압봉의 직접사용을 자제하는 듯 장갑차도 저지선에 버티고 있을뿐 시위대를 향해 돌격해들어오지 않는다.
7·11공수와 작전교대
이같은 진압방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진압책임자들이 21일의 공공연한 학살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도의 계산된 작전을 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일부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20일 상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밖에도 MBC와 KBS 등의 전소와 최초의 집단발포로 기록된 광주역전투 등이다.
이날 밤 9시40분께 MBC방송국은 전소된다.
시위대 끝까지 광주상황을 진실대로 보도하지 않았던 언론 모두에 대한 분노에서 함성과 박수갈채를 터뜨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실제 그 건물은 화염병으로 쉽게 불붙을 수 없는 구조라는 사실과 4층에서부터 불이 붙기 시작했다는 일부 진술이 방화는 적지않은 의문점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아무튼 20일 밤은 한 가냘픈 여성의 스피커 소리와 함께 광주역전투를 고비로 시민들에게 점차 승리에의 예감을 던져주면서 하얗게 지나간다. 이날 항쟁은 이미 밤낮없이 진행된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