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뉴질랜드 NZ Herald 2010-12-4 (번역) 크메르의 세계
인민의 적 : 사법정의 앞에서 갈등 중인 크메르루즈의 기록
Film-maker protects source in genocide c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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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캄보디아 언론인 텟 삼벗(우)이 크메르루즈 정권의 제2인자였던 누온 찌어(좌)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기록영화 <인민의 적>에 삽입된 장면이다. |
기사의 주제와 정보원(소스)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이러한 질문은 언론에 있어서 오랜 기간 봉착했던 하나의 딜램마이기도 하다.
캄보디아의 언론인 텟 삼벗(Thet Sambath: [역주] 프놈펜포스트 소속 기자)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기의 전쟁범죄에 관해 여러 해 동안 조사를 해오고 있다. 그는 폴 포트(Pol Pot)이 오른팔 격이었던 인물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대량학살"에 관한 고백들을 채증해오고 있었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이나 폴 포트 정권 당시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Nuon Chea)와 친해지며 그의 신뢰를 얻어냈다. 누온 찌어는 1998년 폴 포트가 사망한 이후, 생존해있는 인물로는 당시 정권의 최고위급 인사이다. 하지만 텟 삼벗은 누온 찌어에게 자신이 수집하는 회고들을 역사적 기록으로만 사용하겠다는 점과, 누온 찌어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란 약속을 하고서야 고백을 받을 수 있었다.
유엔이 후원한 "크메르루즈 특별법정"(ECCC)은 최근 텟 삼벗에게 160시간에 달하는 기록 동영상 제출을 요청했다. 이는 내년부터 시작될 누온 찌어의 대량학살 혐의에 대한 증거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영국 옥스포드에 근거를 둔 영화제작자 롭 렘킨(Rob Lemkin)은 텟 삼벗과 함께 기록영화 <인민의 적>(Enemies of the People)을 제작했다. 그는 심지어 유엔의 관리들로부터 예고없는 가정방문을 당하기도 했다. 렘킨은 "그들은 전화를 걸어서는 지금 마을에 있는데, 필름들을 가지러 갈 수 있냐고 물었다. 내가 거절을 하자, 그들은 언론에다가 내가 돈을 노리고 내놓지 않는다면서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다"고 밝혔다.
삼벗과 렘킨이 유엔 후원 법정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 것은, 그들이 테입들을 건네주지 않기로 하면서부터이다. 그들은 누온 찌어와의 약속을 존중키로 결정했다. 누온 찌어가 저지른 범죄의 잔학성을 생각한다면, 삼벗과 렘킨의 이러한 결정이 일부에게는 상당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더구나 텟 삼벗이 잔학한 크메르루즈 정권에 의해 가족을 잃은 경험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놀라게 될 것이다. 렘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어떤 다짐을 했다면 촬영을 한 후에 그 목적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이 언론인이나 영화제작자에겐 매우 본질적인 사안이다. 그들(정보 제공자)이 당신과 함께 촬영에 임했다면,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법정에서 맹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우리는 독립성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은 전직 크메르루즈 당원들이 우리에게 증언을 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법정에서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누온 찌어와의 인터뷰는 텟 삼벗과 롭 렘킨이 제작한 기록영화의 일부를 이룬다. 이 영화는 "수단 국제 다큐멘타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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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인민의 적>이 수단에서 개최된 국제 다큐멘타리 영화제에서 수상한 내용을 보도한 "미국의 소리"(VOA) 방송 크메르어판의 보도내용. |
이 영화에서 올해 84세가 된 누온 찌어는 인자한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캄보디아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목조 판자집에 앉아 있는 그는, 자신의 말에 주의깊은 무게감을 얹었다. 자신의 희생자들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사람들은 범죄자로 규정됐다. 그들은 죽임을 당해 없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살려두었더라면, 당의 노선이 강탈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인민의 적"(enemies of the people)이었다. |
자신의 정권이 실시했던 배신자 살해 정책에 대한 질문을 받자, 누온 찌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나는 동의했다. 나는 다만 문제의 해결을 바랬던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해법이었다. |
크메르루즈의 여러 건설자들과 마찬가지로, 누온 찌어 역시 몸을 낮추고 살았다. 그는 태국 국경의 마을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었다. "브라더 넘버 투"(Brother Number Two)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그는 이 영화에서 고문과 살인, 임의적 처형을 명령한 일에 관해 증언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1975-1979년 사이의 학정에 관한 하나의 전형적 모습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상당히 매료를 시키는 힘을 지닌 누온 찌어의 회고는 삼벗이 수년 간에 걸쳐 수집한 여러 증언들 중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삼벗에게 증언한 일반 병사 출신들 중 많은 이들은, 그러한 증언을 통해 자신들의 죄로부터 최종적인 부담을 떨쳐버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삼벗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온 찌어의 회고를 필름에 담음으로써, 나는 폴 포트와 누온 찌어 자신을 제외하고는 당시의 그의 역할에 관해 알게 된 3번째 인물이 된 것이다. 그를 인터뷰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10년 동안 나는 누온 찌어와 그의 가족들을 잘 알게 되었고, 우리는 친해졌다. 그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삼벗은 자신이 그 필름들을 유엔 법정에 넘겨주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복수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작업은 할 수 있는 한 킬링필드(Killing Fields)에 관한 설명을 완벽히 얻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 작업에서 복수가 차지할 부분은 없다. 내 생각으론 [국제]법정은 정의(justice)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것은 좋다. 하지만 나는 화합이 더 좋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진실이 필요한 것이다. |
누온 찌어를 기소할 공동검사들은 이 필름을 강제로 압류하는 방법도 고려했다. 대중적인 상연은 법률적 증빙자료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기를 놓쳐버렸다. 노온 찌어를 기소한 "크메르루즈 특별법정"(ECCC)의 한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사판사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요청했었다. 우리는 이 영화에 관심을 받아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은 기각됐다. 우리는 그 영황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기소장을 제출해버린 것이다. |
렘킨은 자신이나 삼벗은 법원의 "방식으로 가길" 원치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진실규명과 화합을 통한 절차를 선호했는데, 그것은 남아공에서 "인종차별주의 정책"(apartheid)이 끝난 후 실시됐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 사법적 심판을 하는 것보다 그러한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신적 내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 전모를 모든 이들이 함께 아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대규모 살인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수뇌부의 한두 사람만이 저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많은 가해자들이 지금도 캄보디아의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만일 그들이 증언을 할 수 있고, 희생자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한두 명을 감옥에 보내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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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개인적으로 삼벗이나 렘킨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뚜올슬렝 교도소장인 깡껙 이우 피고인에 대해서도
종신형으로 감옥에만 두는 것은,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도 있던 것이죠...
사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역사에도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전두환 씨나 노태우 씨 같은 사람들은 법정에 세워서
일단 당시로서는 의미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과연 무얼 얼마나 많이 얻어낸 것일까요...
혹자는 앞으로 쿠테타가 없을 것이다.. 하시는 분도 게실 것입니다만...
실은 그런 재판 안했어도 한국사회는
쿠테타가 쉽지 않은 수준으로
국민들 전체가
변해갔던 것이죠..
의식수준 면에서 말이죠...
하여간 그 재판 자체가 나빴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대체 단순히 <재판을 했다>는 사실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거둬냈는가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전두환 씨나 노태우 씨가 아직도 생존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이 사망하기 전에
보다 객관적 입장에서 드라이한 기록을 할 수 있는 역사가들이..
그들과 좀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삼벗이나 렘킨이 누온 찌어와 함께 작업한 것처럼 말이죠...
역사는 전개되고 변화되어 갔지만...
우리 사회의 밑바탕에 여전히 적개심들이
행위의 원동력이 되고 있고...
향후 그러한 심리적 잠재력이
우리 사회에 큰 해악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
잠시 코멘트를 해 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혹시라도 제가 이전에 공개했던 글
<다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우리들 (5)>
(http://cafe.daum.net/khmer-nomad/87jJ/28)
를 다시 좀 읽어주신다면
요즘 제가 느끼는 느낌에 대해
찬성이든 반대든.. 좀 함게 논의해볼 부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적개심과 정신적 내상의 치유....
이거를 실은.. 한국사회가....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는 사회라는 것을
가끔식 심각하게 들여다보면
아주 소름이 끼치곤 합니다...
저런 확고한 신념이 있어 누온 찌어의 마음의 문을 열게 했던 모양입니다.
적당한 심판과 적당한 변론이 아니라 정확한 실상과 유추된 것들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역사에 대한 후손들의 도리일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러했는데 우리보다 더 열악한 이 나라에서 얼마나 더 발전된 형태의 사실들이 밝혀질지 의문이 듭니다. 어쩌면 진실은 단체나 나라의 노력보다 한 개인의 신념과 목숨을 걸고 자기가 발견한 진실을 지켜내고 밝히려고 하는데서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