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4월 10일 니체가 덴마크 문예평론가 기오 브란데스(Georg Brandes, 1842~1927: 오른쪽사진)에게 보낸 아랫편지는 니체의 자기소개서 또는 약력으로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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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에 동봉해드리는 나의 약력은 내가 생전처음 써본 것입니다.… 아쉽게도 나는 덴마크어도 스웨덴어도 모릅니다.
나의 약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1844년 10월 15일 뤼첸의 전쟁터[참조1]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기억에 남겨진 최초의 이름은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참조2]였습니다. 나의 선조들은 (니에츠키Niëzky라는 성씨를 사용한) 폴란드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특징은 독일인 모계(母系)를 3세대나 거쳤는데도 매우 잘 보존된 듯이 생각됩니다. 나는 외국에서는 흔히 폴란드인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이번 겨울에도 나는 니스의 외국인등록부에 “폴란드인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두상(頭狀)이 얀 마테이코[참조3]의 그림들에 묘사된 인물들의 두상을 닮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의 친할머니는 독일 바이마르(Weimar)의 ‘쉴러-괴테 동호회’ 회원이었습니다. 그분의 오라버니는 바이마르의 장관을 역임한 헤르더[참조4]의 자손이었습니다. 나는 독일 지성계의 (클롭슈톡, 피히테, 슐레겔, 랑케 등등을 포함한) 많은 유명인을 배출한 유서깊은 중·고등학교 포르타(Pforta)에 입학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포르타에는 여느 대학교에서든 존경받을 수 있던 (혹은 존경받던) 스승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본(Bonn) 대학교에 진학했고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전학했습니다. 그 당시 독일에서 으뜸가던 고전문헌학자 리츨(Friedrich Wilhelm Ritschl, 1806~1876) 교수는 나를 거의 처음부터 수제자로 삼았습니다. 나는 22세 때 (차른케[참조5]가 발간하던 학술지) 《독일문학논총(Literarisches Centralblatt für Deutschland)》에 논문을 처음 투고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활동하는 ‘라이프치히 고전문헌학회’의 창립회원이기도 합니다. 1868년에서 186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바젤 대학교가 나에게 교수직을 제의해왔습니다. 그때 나는 아직 박사학위도 받지 않았습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추후에 모든 자격시험을 생략하고 박사학위논문도 요구하지 않는 매우 영예로운 방식으로 나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1869년 부활절부터 1879년까지 나는 바젤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독일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기마포병대)장교로 전역한 내가 예비군소집명령에 응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빈발하면 대학교에서 맡은 책무에 소홀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 가지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데, 사브르(sabre: 군도軍刀)와 대포가 그것들입니다 — 그리고 어쩌면 세 번째 무기도 잘 다룰 것입니다 ……. 내가 바젤에서 지내던 시절은 비록 나의 청춘기였어도 만사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내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는 시험감독자(=니체)보다 나이를 더 먹은 수험자들도 이따금 있었는데, 그들은 주로 박사학위과정을 이수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나는 야콥 부르크하르트(왼쪽사진)와 절친하게 교우할 수 있는 대단한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런 교우관계는 은둔수도사처럼 고독을 즐기는 사상가(부르크하르트)에게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린 더욱 커다란 행운은 바젤에서 교수생활을 갓 시작했을 무렵 리하르트 바그너와 코지마 바그너를 알면서부터 그들과 아주 막역하고 친밀하게 교우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그너 부부는 예전에 맺었던 모든 인간관계를 잠정적으로 끊고 스위스 루체른(Lucerne) 호반의 트립셴(Triebschen)에서 마치 섬처럼 보이도록 건축된 호젓한 저택에 살았습니다. 수년간 우리는 스스럼없이 서로를 믿고 모든 대소사를 함께했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전집 제7권에는 《비극의 탄생》과 관련하여 바그너가 나에게 보낸 “편지” 한 통도 인쇄되었습니다.) 이런 교우관계들 덕택에 나는 저명인들(과 “여성들”)로 구성된 대규모 동아리를 알았는데, 실제로 그 동아리의 거의 모든 것은 프랑스 파리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장한 것들이었습니다. 1876년 즈음에 나의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그해 겨울에 나는 오래전부터 교우하던 친구 (《이상주의자의 회고록(Memoiren Einer Idealistin)》을 집필한) 마이젠부크(Meysenbug) 남작부인(오른쪽사진)과 호의적인 친구 파울 레(Paul Rée) 박사와 더불어 이탈리아 소렌토(Sorrento)에서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나는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극도로 괴로운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다가 완전히 탈진해버렸습니다. 그 후로도 수년간 지속되던 만성두통이 어느 해에는 극에 달해서 무려 200일간이나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두통은 완전히 지엽적인 원인들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고, 신경질환은 어떤 종류의 두통도 유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결코 정신혼란증세를 앓지 않았을 뿐더러 광증도 무기력증도 결코 앓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나의 맥박은 나폴레옹 1세의 맥박(1분당 60회)만큼 천천히 뛰었습니다. ‘연발하는 쓰디쓴 담즙구토를 동반하며 2~3일간이나 지속되는 옛 고통과 새로운 고통이 뒤섞인 극심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완벽하게 명석한 정신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나의 특기입니다. 내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실제로 내가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진실은 소문만 낳을 뿐이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나의 지성은 혹독한 시간에만 성숙했습니다. 이것은 《서광(아침놀)》이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1881년 겨울에 의사들과 친구들이나 지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제노바(Genoa)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견디며 《서광(아침놀)》을 집필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일종의 “역량측정기”로 활용합니다. 나는 최소한의 체력과 건강만 유지하면서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1882년부터 나는 다시,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실제로 전진합니다. 그렇게 위기는 지나갔습니다(나의 아버지는 아주 젊으셨을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아버지의 연령이 바로 내가 사경을 헤맬 때의 연령이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풍토와 기후를 규정하는 일정한 조건들은 나에게는 불가결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름에는 오버엥가딘에서 지내야 하고 겨울에는 니스에서 지내야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그래도, 하여간, 나는 나의 질병을 최대한 활용해왔습니다. 질병은 나를 해방시켰고 ‘나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나의 용기’를 회복시켜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의 본능들 덕분에 나는 용감한 동물도 될 수 있고 심지어 군인도 될 수 있습니다. 장기간 지속된 저항은 나의 긍지를 다소 과격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철학자인지 물어보셨죠? — 그렇지만 내가 철학자인지 아닌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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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1] Lützen: 니체는 실제로 독일 중동부의 라이프치히와 나움부르크(Naumburg)의 중간쯤에 위치한 작은 마을 뢰켄(Röken)의 목사관에서 태어났고, 뤼첸은 뢰켄의 북동쪽에 인접한 소도시이다. 뤼첸에서는 역사상 중요한 전투가 두 번 치러졌는데,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이 한창이던 1632년에는 스웨덴을 포함한 북부독일동맹군과 신성로마제국군이 격돌했고, 1813년에는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후퇴하던 나폴레옹의 군대와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이 격돌했다.
[참조2] Gustavus Adolphus(1594~1632: 1611~1632 재위):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로도 호칭되는 스웨덴의 국왕. “북방의 사자(獅子)”로 별칭되던 그는 30년 전쟁에 스웨덴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승전을 거듭했지만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다.
[참조3] Jan Matejko(1838~1893): 폴란드 화가로서 폴란드 역사상 귀족들과 관련된 정치적·군사적 사건들을 묘사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참조4] Johann Gottfried von Herder(1744~1803): 독일 철학자·신학자·시인·문예비평가이다.
[참조5] Friedrich Karl Theodor Zarncke(1825~1891): 독일의 고전문헌학자이다.
* 출처: 기오 브란데스, 《니체 귀족적 급진주의 니체론 브란데스와 니체가 주고받은 편지들》(까만양, 2013; 179~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