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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불법과 귀의
<왜 부처님에게 귀의합니까?>
불교도들은 부처님에 귀의하여 자신을 청정하게 할 영감과 올바른 이해를 얻고,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확고하게 하거나 자기 마음에 부처님을 상기시킵니다.
불교도들은 그분이 신이나 신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갖고 부처님에게 귀의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 어떤 신성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깨달은 분이며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자비로운 분, 가장 현명한 분이고, 가장 성스러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진정한 구원의 길을 보여온 부처님에게 스승으로서 귀의합니다. 그들은 감사와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그분을 통해 물질적 은혜를 달라고 빌지는 않습니다. 불교도들은 부처님이 그들에게 상을 주거나 벌을 줄 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분에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간청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하여 더 많은 영감과 지침을 얻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확신을 계발하여 그들 또한 그분과 같아질 수 있도록, 그분의 위대한 덕성과 훌륭한 품성을 상기하는 수단으로 게송이나 경전을 암송합니다.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이런 태도를 비난하는 비판가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 위대한 종교적 스승에게 귀의하고 경의를 표하는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일부 사람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유일한 행위인 기도에 대해서만 배워왔습니다. 불교도들이 귀의처를 찾을 때에는, 이를 통해 자기들의 온갖 두려움과 기타 심적 혼란의 원인을 모두 근절시키는 수단으로 부처님과 진리의 가르침 그리고 승가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정령숭배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영혼 때문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자기들 주위의 특정 대상물들에서 보호를 구합니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자기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보호책은 자기들의 본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원초적 본능을 뿌리 뽑아 버리는 과정을 통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길에 확신을 가지는데, 이것이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탈과 자유를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처했을 때 언덕배기, 숲, 작은 숲, 나무와 사당에 의탁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런 데에 의탁하는 것은 어느 하나도 안전하지 않으며 최고가 아닙니다. 그런 피난처에 매달린다고 해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과 진리의 가르침 그리고 승가에 귀의해온 사람은 올바른 지식을 갖추고 네 가지 고귀한 진리―슬픔, 슬픔의 원인, 슬픔의 초월 그리고 슬픔의 소멸로 인도하는 팔정도―를 바로 봅니다. 실상 이것이야말로 안전한 귀의처입니다. 각자 그와 같은 귀의처를 찾음으로서 온갖 슬픔에서 벗어납니다. (『법구경』제188~192게송)
『당정경』에는 신들의 왕인 제석천이나 어떤 다른 신들에 귀의해서 그 추종자들이 자기들의 세속적 문제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신들은 그 자체가 탐욕, 증오 미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롭지 않지만, 부처님과 진리의 가르침 그리고 승가는 그것들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불만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서양의 불교학자 스토리는 부처님에게서 귀의처를 찾는 일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내놓습니다. “나는 귀의하기 위해 부처님에게 갑니다. 그분의 자비심으로 내가 윤회의 급류를 건널 수 있고, 그분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힘입어 세속적 사상과 욕망의 수렁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으며, 그곳에서 그분이 스스로 성취한 바로 그 수승한 열반의 평화를 보게 되는 고귀하신 스승님의 출현을 희구합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에는 그분에게 돌아가고 행복할 때에는 고요히 바라보시는 그분의 모습을 찾습니다. 꽃과 향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억누르고 진정시킬 수 있도록 내 불안한 마음의 타오르는 불길도 그분의 상 앞에 바칩니다. 내 자만심과 이기심의 짐, 내 집착과 반연의 무거운 짐, 쉬지 않고 되풀이되는 생사윤회의 지긋지긋한 짐도 내려놓습니다.”
인디아의 시인인 찬드라 바라티는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또 다른 이유를 의미심장하게 전해줍니다.
“이익을 위해서 그대에게 귀의하지 않네.
그대가 두려워서도 아니고,
명예를 좋아해서도 아니며,
그대가 태양족의 후손이기 때문도 아니고,
지식을 널리 얻으려 함도 아니지만,
끝없는 사랑과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견줄 데 없는 그대의 지혜와
널다란 윤회의 바다를 안전하게 건네 줄
그 힘에 이끌렸네.
오 세존이시여!
내 이제 그대에게 마음 다 기울여 그대의 제자가 되겠나이다.”
사람들이 매우 자주 제기하는 또 다른 질문은 “부처님이 신이 아니고 그분이 오늘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풀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만약 사람들이 종교적 삶을 영위해서 그분의 조언을 따르면, 그들은 틀림없이 은총을 받게 됩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은총이란 우리가 신심과 만족감을 계발할 때에 체험하게 되는 희열을 의미합니다. 언제인가 부처님이 “나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가르침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실천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잡아함경』)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기 자신들에게 반영된 부처님의 진짜 본성을 쉽게 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간직한 부처님의 상은 불단 위에서 그들이 보게 되는, 단지 상징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불상보다 훨씬 더 사실적입니다. “불법(올바른 생활 방식)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그 불법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장로게』) 불법을 통해 존재의 진정한 본성과 삶의 본래 모습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갖지 않게 될 것이고 조화로운 생활 방식을 확보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자기들에게 주어질 혜택을 간청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을 숭배합니다. 불교도들은 세속적인 혜택을 간청하려고 부처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룩한 최상의 성취 때문에 그분을 존경합니다. 불교도들이 부처님을 존경할 때, 만약 부처님이 되고자 열망한다면 언제인가 그들도 똑같은 깨달음을 얻어 인류에게 공헌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한동안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었기 때문에, 그분이 거쳐 온 체험과 성취는 우리 인간들 모두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고 범상한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능력밖에 있는 것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불교도들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존경합니다. 그러나 이런 존경이 그 스승에게 집착하거나 의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존경은 다음과 같은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입니다.
“승려들이여! 설사 어떤 승려가 내 가사 자락을 잡고 내 뒤를 바짝 좇아 한 발짝 한 발짝 걷는다고 할지라도, 그가 만약 탐욕스럽고 다섯 가지 감관의 욕망에 강렬하게 집착하며, 생각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과 목적이 타락해 있으며, 번뇌에 어지럽게 사로잡혀 있고, 산만하여 명상에 잠기지 못하며, 침착하지 못하고, 자기의 감각 기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소.”
“승려들이여! 어떤 승려가 100리나 떨어진 먼 곳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탐욕스럽지 않고 다섯 가지 감관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생각이 바르고 마음과 목적이 타락하지 않았으며, 자기 사유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주의 깊게 명상에 들며, 자기 생각을 예리하게 한 곳으로 집중하고, 자기의 감각 기능을 삼간다면, 그는 나와 가까이 있고 나는 그와 가깝지요.”(『잡아함경』)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노력과 자신감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불교는 평등, 정의와 평화를 종지로 여기는 관대하고 부드러운 종교입니다. 구원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소극적이지만,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것은 적극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지성과 노력을 방기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를 진보시키고 고양시켜왔던 것들은 모두 인간들 스스로 이룩해왔습니다. 그들이 해온 개선은 그들 스스로의 지식, 이해, 노력과 경험에서부터 온 것이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위대한 힘에게도 노예가 될 수 없는데, 그것은 비록 자연이 인간을 압도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이해 덕택으로 자연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그 진리를 더 확장시켜, 이해력을 통해 사람들이 주변 상황과 환경을 제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연에게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고, 스스로 정신력과 고귀함을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외부 역량을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목적 성취에 있어 초자연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지식과 노력에 의존해야 한다고 합니다. 진정한 종교는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의 착한 성품에 대한 신앙을 의미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단순히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존경받을 만한 생활 방식을 영위하여 평화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고귀한 방법입니다. 아주 초창기부터 불교는 교양을 갖춘 지성인들의 마음에 안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교양인들은 모두 부처님을 이성적인 스승으로 존경합니다.
부처님은 행복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그마와 이론들로 뭉친 종교가 아니라 우주적 역량에 대한 지식과 그것이 인과법칙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삶이란 단지 본성이 불완전하게 드러난 것이라는 원리를 온전하게 이해할 때까지는 어느 인간도 완전하게 해탈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우주에 대해 새로운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행복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며 완벽함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불교에 있어 인간 목적의 달성은 무상을 넘어선 영원한 경계이며, 변화하는 세계를 모두 넘어선 열반의 성취이고, 존재라는 번뇌에서 궁극적으로 해탈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악행을 단지 서투르거나 건전하지 못한 행동으로 여길 뿐 죄가 되는 행위로 여기지 않습니다.
불교도들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혹은 ‘신을 거역해 반란을 일으킨’ 죄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각기 안에 나쁜 습성과 더불어 방대하게 축적된 좋은 습성을 갖고 있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갖추어진 선인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늘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나쁜 사람에게도 착한 구석이 있고, 우리들 중 가장 좋은 사람에게도 악한 구석이 있다”는 말을 명심하세요.
불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선행과 악행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각 개인이 자기 운명의 틀을 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부처님은 말씀합니다.
“스스로 악을 저지르고 스스로 불결해지네.
스스로 악을 짓지 않으니 스스로 청정해지네.
청정함과 불결함은 자기 자신에 달려 있으니,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청정하게 해주지 않네.” - 『법구경』제165게송
우리 인류의 슬픔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지 가족에 유전되어 온 저주나, 신화에 나오는 식으로 조상들이 지은 원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불교도들은 ‘이 세계가 시험과 심판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최고의 원만성취를 획득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원만 성취는 행복과 동의어입니다. 부처님에게 인간은 다른 누군가가 창조했다가 원하지 않을 때에는 없애버릴 수 있는 생명의 실험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원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더 많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죄를 지은 사람이 외부적 역량의 은혜를 입어 자기 행위의 과보를 피해 도망칠 수 있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손을 용광로 안으로 밀어 넣는다면 그 손은 큰 화상을 입게 될 것이고 온 세계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고 하여도 그 상처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일이 악행의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모든 악행에 예견할 수 있는 반작용이 자동적으로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악행은 악한 마음 상태에 의해 촉발됩니다. 만약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면, 앞서 지은 행동의 결과는 줄어들거나 한꺼번에 근절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문제에 대한 부처님의 접근 방식은 가공의 사변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경험에 근거를 둔 것이며, 편견이 없는 공정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들에서 설명하는 ‘원죄’와 같은 것들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종교들에서 원죄란 신성한 법률 제공자가 제정한 법률의 위반입니다. 불교도들에게 죄는 서투르거나 불건전한 행동, 인간의 몰락을 만들어내는 불선업일 뿐입니다. 사악한 사람이란 처벌과 비난보다는 교육이 더 필요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신의 의지를 어겼거나 신의 인자함과 용서를 빌어햐 할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깨달음을 위한 지침뿐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누구든지 잘못돈 행동에 대해 그들 자신이 책임이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자기 이성을 사용하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비록 불교도들에게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고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상기시키기는 하지만, 고해에 대한 믿음은 불교에 매우 낯선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계에 출현하신 목적은 인간이 저지를 죄를 씻어버리려는 것이 아니고, 사악한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파멸시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악을 저지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에 대해 그들이 이해하도록 해주고 그런 악행의 과보에 대해 지적해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또 다른 사람의 정신적인 고양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불교에는 계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스스로의 이해력을 계발해 활용하라고 권장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길을 보여 왔습니다. 우리가 준수하기로 서약하는 계율은 강제적인 계명이 아닙니다. 계율은 자발적으로 준수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이 충고를 받아들여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만약 그대들이 내 충고를 실천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하면, 애써서 그것을 실천하세요. 그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적절한 확신과 이해 없이 어떤 계명을 맹목적으로 준수하는 데에는 아무런 종교적 가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기 위해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준 자유를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고상하고 예절 바르며 이해력 있는 사람으로 행동하여 종교적 삶을 영위하는 것이 우리 의무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계명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깨달은 스승으로서, 부처님은 계명을 부과하거나 벌을 주겠다는 공포를 쓰지도 않고서 어떻게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우리들에게 조언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이 일상수행의 일부로 삼고 있는 오계는 계명이 아닙니다. 오계는 각자가 영적인 계발을 위해 자발적으로 떠맡는 수련 규정임이 분명합니다.
<스스로 행하라>
자기 확신은 우리 인생의 모든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외부의 어떤 원천, 신앙이나 의식도 우리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자립을 통해서 확신을 얻습니다. 우리 금생과 내생의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만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해탈을 구해야 합니다. 해탈을 성취하는 것은 질병 치료에 비유할 수 있으니, 만약 아프면 의사에게 가야 합니다. 의사는 증상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합니다. 약은 아픈 사람 자신이 먹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대신 약을 먹어 달라고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 약에 대해서 그저 감탄하거나 처방을 잘 해 주었다고 의사를 칭찬하는 것만으로 병이 나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환자는 약을 먹는 방법과 횟수, 일상 식이요법과 기타 의학적 금기사항 등과 관련하여 의사가 해주는 지시사항을 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을 제어하거나 굴복시켜서, 해탈을 위한 처방을 해주는 부처님이 준 계율, 교훈이나 충고를 따라야 합니다. 간단하게 부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그분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만으로 해탈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부처님을 기리기 위해 특정의 중요한 축제일을 봉축하는 것으로 해탈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사람들이 단지 기도를 하거나 구해달라고 애걸해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완벽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감정을 뿌리 뽑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 자기 마음을 통제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인간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진실한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우리 모두 아무 두려움도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 삶에 대해 그들에게만 책임이 있으므로 자기 악운에 대해 비난할 대상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자기 인생을 더 좋게, 아니면 더 나쁘게도 만듭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우려, 곤란과 불운은 모두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슴과 마음이 완벽하지 못한 것 이외에 다른 어느 원천에서도 솟아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탐욕과 미망의 영향 아래서 과거에 저지른 선행과 악행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런 업의 결과 우리 스스로 태어났기 때문에, 악과를 극복하고 선업을 닦는 것도 우리 역량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동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가끔 동물적 본능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동물의 마음과 달리 인간의 마음은 더 높은 가치를 위해 갈고 닦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적절하게 수양하지 않으면, 그 수양되지 않은 마음이 이 세상에 아주 많은 혼란을 만들어냅니다. 동물의 행위보다 인간이 저지르는 짓이 더 해롭고 위험한 적도 가끔 있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종교 문제, 언어 문제, 정치적 문제, 사회적 및 윤리적 문제와 종족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먹을 것과 잠잘 곳 그리고 감각적 쾌락을 위해서만 서로 싸웁니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해 낸 수천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렇기 때문에,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이런 문제들 중 어느 하나도 풀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약점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며 자기들의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늘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그들의 자세입니다. 우리 행동에 대해 좀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된다면,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어 둡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다’는 주장에
어떤 진실이라도 있습니까?
인간의 자유에 대해 고려할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바에 따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진짜 있는지 여부를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안팎의 많은 조건들이 우리를 속박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제정한 법률을 따라야 하고, 특정한 종교적 규정을 따르게 되어 있으며,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도덕적 · 사회적 조건들에 부합해야 하고, 민족과 가족의 관습과 전통을 따라야만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인간은 무거운 압박감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현대적 생활 방식에 스스로를 적용시켜서 맞추어가라는 기대를 받습니다. 우리 또한 똑같은 에너지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 법칙과 우주적 에너지에 부합해야만 합니다. 살고 있는 지역의 날씨와 기후 조건에 따라 제한을 받습니다. 우리 생명이나 육체적 요소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서를 제어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앞서의 생각과 신념과 충돌하거나 밀쳐낼 수도 있는 새로운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맞추어 복종하고 활동해야만 한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에 우리가 속박되어 있는, 위와 같은 변화하는 조건들을 모두 고려해볼 때에,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다는 주장에 어떤 진실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왜 자기들의 손을 그렇게 꽉 묶어놓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 내부에 다양한 나쁜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요소들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위험하고 해롭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모든 종교들이 이러한 신뢰할 수 없는 태도들을 순화시키고 인간에게 고귀한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아무리 착하게 보이든지 상관없이, 그들이 아직도 신뢰할 수 있게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내부에 이런 나쁜 요소들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나쁜 힘들을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 위험성을 깨달은 뒤에는 그것들을 없애려고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다수 사람들은 잔인하고 교활하며, 사악하고 고마워할줄 모르며, 신뢰할 수 없고 파렴치합니다. 만약 그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살아가도록 허용된다면, 순수한 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을 침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경우 그들의 행위는 아마 다른 어느 위험한 동물들보다도 더 나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아가고 금생과 내생에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종교가 필요합니다.
종교적 삶과 정신 진보가 직면하는 또 다른 장애는 인종적 오만입니다. 부처님은 종교 수행을 할 때에 인종과 관련된 이슈를 하나도 제기하지 말라고 당신 제자들에게 충고했습니다. 불교도들은 인종의 계보와 카스트 혹은 계급 차별 등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일체 존재의 근본이 되는 하나됨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미망에 헤매고 있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이해하라고 배웁니다. 어떤 종교를 믿든지, 종교인들은 자기 자신의 생활 방식을 영광스럽게 함으로서 다른 어떤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종교 분야에서는 특히 그들이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불행하게도 서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다른 종교 그룹들에 대한 차별과 적대감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에 자기 자신의 전통과 관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해치면 안 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종교의 규정과 도덕률에 부합하는 전통과 관습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인종적 오만은 종교적이고 영적인 진보에 아주 큰 장애가 됩니다. 부처님은 인종적 오만을 버리라고 배워 온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조화에 대해 설명해 주기 위해 바닷물을 비유로 든 적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강들은 서로 다른 이름들을 가집니다. 각 개별 강물은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가 한 가지 맛, 즉 소금 맛이 나는 바닷물이 됩니다. 그와 같이 서로 다른 공동체와 카스트 출신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 사이의 차이점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만 해야 합니다.”
<스스로 보호하세요>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복 받으신 분이 당신 제자들에게 다음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대나무 장대 위에서 곡예를 하는 마술사 두 명이 있었소. 어느 날은 마술사 스승이 견습생에게 말했지요. ‘자 이제 내 어깨를 밟고 대나무 장대 위로 로라가거리.’ 그 견습생이 그렇게 하자 스승은 ‘이제 나를 잘 보호해라. 그러면 나도 너를 지켜주마. 그런 식으로 서로 잘 보살펴주면, 사람들에게 우리 기술을 보여줄 수 있고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으며 너도 대나무 장대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단다.’라고 말했소. 그런데 견습생은 ‘스승님, 그게 아니예요. 스승님은 스승님을 보호하세요, 저는 제 자신을 지키겠어요. 그렇게 우리 스스로를 보호라면 무사하게 묘기를 부리고 서로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에요.’라고 말했소.”
복 받으신 분은 “이것은 참 올바른 방법이다”라고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마음 챙김의 기초도 견습생이 ‘제 자신을 지키겠어요’라고 한 말과 똑같은 식으로 실천하여야 하오. ‘다른 사람들을 보호해주겠다’는 식으로 마음 챔김의 기초를 실천하여야 하지요.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요.”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명상을 자주 되풀이하면 가능하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까요? 참고 용서하고 폭력을 쓰지 않으며 해를 끼치지 않고 자비심과 연민을 베풀면 되오.” (『잡아함경-사념처경』)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오.”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지요.”
이 두 문장은 서로 보완해주므로 따로 떼어 내거나 인용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사회봉사를 크게 강조하는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들 생각을 지지해주는 두 번째 문장만을 인용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어떤 부분만을 일방적으로 인용하면 부처님의 본뜻을 곡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부처님은,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게 보호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의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는 건습생의 말을 드러내 놓고 인정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스스로 궁지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서 빠져 나오도록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자기 보호는 이기적인 보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제어 그리고 윤리적 · 정신적 계발을 갈고 닦는 행위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이 말의 진실은 아주 간단하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시작합니다. 물질적 차원에서 이 진실은 너무나도 자명해서 그것에 대해 우리는 단 몇 마디만 덧붙이면 됩니다. 우리 자신의 건강을 지키면, 특히 전염병과 관련해서는, 우리 주변의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게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과 운동을 조심하고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 우리의 부주의와 나태를 통해 그들에게 올 수도 있는 폐해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운전을 조심하고 음주를 삼가며 폭력으로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자제하고 참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적 위치를 강화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더 좋은 입장이 될 수도 있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 진실의 윤리적 차원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도덕적인 자기 보호는 우리 자신의 절제되지 않은 열정과 이기적인 충동에 맞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지켜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악의 세 가지 뿌리인 탐욕, 증오와 미망이 우리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도록 내버려둔다면, 그런 악의 뿌리에서 자라난 것들이 마치 건강하고 귀한 나무를 질식사시키는 밀림의 넝쿨나무처럼 주위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와 같은 악의 세 가지 뿌리에 맞서 싸워 우리들 자신을 보호한다면, 동료 존재들 또한 우리의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소유욕 · 권력욕과 절제되지 않은 육욕과 호색 그리고 우리의 시기심과 질투심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증오와 적대감의 결과인 분열적이거나 심지어 파괴적이고 잔인하기까지 한 것으로부터, 증오가 폭발하는 것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적대적 분위기를 전파시키는 것으로부터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탐욕과 증오의 해로운 과보는, 그들이 우리 증오심의 단순하 대상이나 희생자가 되거나 혹은 그들의 소유물이 우리 탐욕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탐욕과 증오는 전염시키는 습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그 악의 과보를 증식시킬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 스스로 갈망하고 장악하려 하며, 얻어서 소유하려 하고, 잡아서 집착하려고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는 소유 본능을 불러일으키거나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나쁜 본보기들이 우리 주변 환경, 예를 들어 우리 아이들과 동료 등의 사이에서 행위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유혹해 탐욕스런 욕망을 함께 충족시키는 작업에 동참하게 하거나, 아니면 경쟁에서 우리를 짓밟고자 하는 다른 사라들의 원한과 경쟁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욕으로 가득 차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색정의 불에 부채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증오심이 다른 사람들의 증오심과 복수심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한 패가 되거나 그들을 자극해 증오와 적의에 가득 찬 행동을 함께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 스스로 구제해야 합니다>
실로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으니, 다른 어떤 구원자가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잘 제어하면 외부의 구원자를 찾는 문제도 쉽게 해결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려고 할 때에 그분을 곁에서 모시기 위해 곳곳에서 제자들이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계속 그분 옆에 남아 스승을 잃게 되는 것이 임박해 오는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아타닷타라고 하는 비구는 자기 방으로 가서 선정 수행을 하였습니다. 그가 부처님의 안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여긴 다른 비구들은 당황한 나무지 그분에게 그 사실을 보고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비구는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복 받으신 분인 세존께서 곧 돌아가시려고 하니, 저는 복 받으신 분을 영광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복 받으신 분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은 그의 자세와 행동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불교의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하며, ‘구제’는 각 개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는 것을 도와줄 외부의 힘이나 매개해 주는 대리자는 찾을 수 없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개념을 비판하고, ‘불교는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자기 자신만 벗어나는 관심사만 이야기하는 이기적인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이 모든 존재들의 영적 · 물질적 복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열반을 성취하겠다는 자기 자신의 목표도 부지런히 추구하여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이기심이 없는 무욕의 봉사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또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정신 역량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에게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열반을 추구하는 것이 나무랄 데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나 심지어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기들을 도와줄 외부의 역량, 어떤 신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불교도들은 궁극적인 해탈이 반드시 한 생애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탈의 과정은 여러 생애에 걸쳐서 긴 세월이 걸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차근차근 자립하는 힘을 길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적 ·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해탈의 과정을 시작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좀 더 능력 있는 사람들의 의무는 그들이 이 일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은 재가자들이 불법을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도와줍니다.
일단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각 개인은 천천히 자립하는 힘을 개선해 가는 쪽으로 스스로를 단련하게 됩니다. 자그마한 도토리가 자라서 어느 날인가 거대한 떡갈나무가 되겠지만,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험난한 과정에서 인내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희망과 기대에 맞추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온 힘을 쏟는지 경험으로 잘 압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성장하면 그들은 꼭 부모들이 그렇게 되길 바랐던 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길을 개척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각자가 자기 업을 짓고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끝까지 분석해 보면, 어떤 인간이나 신도 각 개인이 궁극적인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지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립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사람들에게 이기적이 되라고 가르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열반을 성취하고자 노력할 때에 살생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음행을 하거나 아니면 술에 취해 자기 감각에 대한 통제를 하지 못하게 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가르칩니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 그들을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도 기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이른바 ‘이기심’은 다른 사람들의 전체적인 복리를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닙니까?
좀 더 세속적인 수준에서는 ‘더 낮은 단계의 사람들은 단순하고 무의미한 존재의 순환고리로부터 어떻게 해야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는 확실히 그 위험한 사태에서 불운한 사람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어떤 자비로운 외부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진화론에 관한 우리 지식을 참고하여야 합니다. 생명은 물에 떠다니는 단세포에 지나지 않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에서 시작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수백만 년에 걸쳐서 이 기본적인 생명체들이 진화하여 점점 복잡하고 더욱 지능적으로 되었습니다. 생명체가 조직화, 독립적인 사고, 개념화 등등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처럼 더욱 지능적이 된 차원에 이른 다음이었습니다.
불교도들이 스스로를 구제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그들은 이처럼 높은 수준의 정신적 발달 상태에 있는 생명체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업력과 정신력이 잠재 상태에 있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윤회를 거치면서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 올렸고, 본능적 행위보다 이성적일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끝없는 윤회를 되풀이하는 것이 무의미함과 그에 당연히 수반되는 고통과 슬픔을 알게 되는 것은 이 단계에서입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은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해 윤회를 끝내고 행복을 구하겠다는 결정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은 이러한 수준 높은 지능 덕택으로 각 개인이 자기 발전과 자기 계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인간이 다양한 수준의 지능과 추리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재로 태어나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매우 낮은 지능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특히 자기들의 생존과 관련되어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구별할 능력은 갖추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존의 본능과 관련한 사실을 동물세계에까지 확대한다면, 살아남기 위해 선택을 하는 능력을 갖고서 고등동물과 하등동물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범위가 제한적이기는 하겠지만, 심지어 하등의 생명체라도 선업을 창출할 잠재력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업의 점진적인 증가를 위해 부지런히 노력함으로서 어떤 존재든 스스로를 더 높은 수준의 존재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장차 부처님이 되기로 되어 있었던 분이 맨 처음 ‘깨달음을 위해 온 몸을 바치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내리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옛날 이야기 중 하나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싯다르타로 태어나기 이전 헤아릴 수 조차 없이 많은 윤회를 거치는 동안 그는 보통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서 배를 뒤집어엎고 승객들을 성난 바다 속으로 빠뜨렸습니다. 이 용감한 젊은이는 자신의 안전은 하나도 생각지 않고 등에 어머니를 업고서 뭍으로 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헤엄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물이 너무 넓어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이렇게 곤란에 빠져 있을 때 여러 신들 중 하나가 그의 용기를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신이 육체적으로 그를 도우러 올 수는 없었지만, 가야 될 최선의 길을 그에게 알려줄 수는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그 신의 말을 들었고 그와 그의 어머니 둘 다 무사히 살아났습니다. 자기 어머니를 무사히 구해낸 다음에 그는 ‘단 한 존재를 구하는 데에서도 얼마나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 스스로 완벽해져서 모든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다면, 그 행복은 얼마나 더 클까?’ 그때 그 자리에서 그는 확고한 결심을 했고, 여러 생애를 거치며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삶을 계속해서 가꾸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불교도들이 자기들 일상생활에서 신들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고 또 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이란 위대한 공덕을 쌓은 덕택으로 다른 존재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을 갖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힘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한정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불행이 닥칠 때, 위로 받을 필요가 있을 때, 아프거나 두려울 때 등등에 신들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들의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아직도 물질적인 세계에 얽매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태어남으로 해서 우리가 육체적 욕망에 필요한 종속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 욕구들을 충족시키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중도의 가르침을 가려쳤을 때, 그분은 우리가 사치에 흠뻑 빠져들어도 안 되지만 기본 생활필수품까지 완전히 부정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의 태어남이라는 조건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우리는 또한 온갖 노력을 다하여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따름으로서, 물질적인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단지 고통과 슬픔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정신 계발 수준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애에 걸쳐서 우리 이해력을 계발하게 될수록, 우리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립하게 되는 것은 이 단계에서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애를 쓰지 않게 되기 때문에 신들이 우리를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상한 본성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불교도들은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자기들보다 불행한 사람들과 그 물건들을 자유롭게 나누어 가집니다. 그들은 관용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불교도들은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의 복리에 기여합니다.
당신 스스로의 노력으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그분은 이 지식을 당신에게만 이기적으로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분의 최상의 깨달음 뒤에 당신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분의 자비심이 그분을 움직여 그분이 발견한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에게뿐 아니라 신들에게도 그분의 지식을 나누어주는 데에 45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종종 ‘부처님은 곤란을 겪고 있는 신자들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 등과 같은 기적을 행하는 식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행위를 통해 이런 일을 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키사 고타미라고 하는 여인이 죽은 자기 아들에게 생명을 되살리는 데에 부처님의 도움을 청하러 갔습니다. 그 여인이 너무 지치고 슬픔에 압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신도 그 여자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신 부처님은 그 여인에에 맨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에게서 겨자씨 한 움큼을 얻어 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반미치광이가 된 그 여자는 집집마다 뛰어다녔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여자에게 겨자씨를 기꺼이 줄 수는 있으나,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키사 고타미는 서서히 ‘죽음이란 태어난 존재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자연스런 일’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충만한 그 여자는 부처님에게 돌아와 죽음에 관한 진리를 자기에게 보여준 데 대하여 그분게 감사드렸습니다.
위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부처님이 아이에게 생명을 되살려 주어서 일시적 위안을 주기보다는 인생의 본질에 대해, 즉 아이가 자라서 결국 죽어야 한다고, 그 여인이 이해하도록 하는 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큰 깨달음으로 해서 키사 고타미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집착을 통한 슬픔의 원인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집착이 슬픔의 원인이 되며, 집착이 깨지면 그 다음에는 슬픔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한 개인이 일시적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신들과 같은 외부 대리자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지만, 세속적인 조건에 대한 집착이 끝나는 정신 계발의 후기 단계에서는 포기와 깨달음으로 향한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이 단계에서는 홀로 서야만 합니다. 해탈을 얻고 끝없는 생사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며 깨달음을 얻고자 할 때에는, 다만 자기 자신의 노력과 집중된 의지력에 의해서만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 말고 다른 어느 누구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간에게 위대한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들 스스로를 돕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말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정신 계발의 후기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경배를 드리거나 제물을 바쳐서 계속 기쁘게 해 주어야 하는 어떤 외부적 힘이나 대리자의 처분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10. 기도, 선정과 종교 수행
<신앙, 확신 그리고 귀의>
올바른 이해는 확신에의 길을 가리키고,
확신은 지혜로 가는 길을 내줍니다.
지혜는 결국 구원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스스로의 이해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유신론적인 관점에서의 신앙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유신론적인 신앙은 감성적인 마음에 진정제이며, 설명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지식이 신앙을 파괴하며, 이성의 조명을 받아 그 신비한 믿음이 검증될 때 그 신앙은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확신은 그것이 이성에 아무런 강조도 두지 않으므로 신앙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맹목적인’ 신앙의 성격과 관련하여 볼테르는 “신앙은 당신의 이성이 당신에게 ‘진실일 수 없다’고 말하는 무엇인가를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이성이 그것을 수긍한다면, 맹목적 신앙이라는 문제가 하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확신은 신앙과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확신은 알 수 없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경험해서 검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확실한 기대입니다. 확신은 교실에서 뉴턴이 서술한 ‘중력의 역제곱 법칙’을 설명해 주는 선생님에게 학생이 갖는 이해력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 선생님과 교과서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사실을 따져 연구하고 과학 논쟁들을 살펴보고 정보의 신뢰성을 평가해야 합니다. 만약 의심이 생기면, 스스로 그 정보의 정확성을 규명할 수 있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야만 합니다. 불교도들에게 확신은 이성과 지식, 그리고 경험의 산물입니다. 그것이 잘 계발될 때 확신은 절대로 맹목적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확신은 인생의 본질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됩니다.
자신의 저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월폴라 라후라는 말합니다.
“봄―그 말의 모든 뜻에서의 봄―이 없을 때에 믿음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대가 보는 순간 믿음의 문제는 사라진다. 만약 움켜 쥔 내 손바닥 안에 감추어둔 보물이 있다고 내가 그대에게 말한다면, 그대 스스로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문제가 일어난다. 그렇지만 만일 내가 주먹을 펴서 그 보물을 보여준다면, 그대 힘으로 그것을 보게 되고 믿음의 무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옛날의 불교 경전 중 한 구절에서는 ‘깨달음은 손바닥 안의 보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기도의 의의>
자연은 공정하므로, 기도를 해서 그것에 아첨할 수는 없습니다.
요청한다고 해서 자연이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피조물이 아니고 솟아오르는 천사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힘에 의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잠재적 지배자입니다. 단지 그들의 깊은 어리석음 때문에 자기들의 온전한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이 이런 감추어진 역량을 보여주었으므로, 사람들은 자기의 타고난 능력을 깨달아서 자기 마음을 갈고 닦고 그것을 계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이갸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독수리가 닭장 안에다 자기 알을 낳았습니다. 암탉은 제 알들과 함께 독수리 알을 품어 깠습니다. 어미 닭이 땅 위에서 먹을 것을 찾는 지점을 가르쳐주므로 병아리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새끼독수리는 자기가 닭인 줄로만 알고 똑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독수리가 보였고 똑같이 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다른 닭들은 그를 비웃었지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언제인가 아주 힘이 세져서 공중으로 치솟아 날아올라 하늘의 주인이 될 때까지 매일매일 계속했지만, 다른 닭들은 땅 위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독수리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불교는 인간에게 온전한 책임감과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불교는 인간을 그들 스스로의 주인으로 만듭니다. 불교에 따르면, 사람의 사건과 운명에 대한 심판석에 앉아 있는 높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즉, 우리의 삶, 우리 사회, 우리 세계는 여러분과 내가 그렇게 만들고자 원했던 대로이지 다른 알 수 없는 존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은 공정하므로, 기도를 해서 그것에 아첨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자연은 요청한다고 해서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기도는 자기 변화를 목적으로 삼는 명상입니다. 명상 속의 기도는 인간 자신의 본성을 다시 새롭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활동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세 가지 기능―생각, 말과 행위를 청정하게 해서 달성되는 내적인 본성의 변화입니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심리학에서 발견해낸 것들과 꼭맞는 “우리가 생각한대로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의 안정, 즉 우리의 신앙과 헌신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낸 심리적 효과를 경험합니다. 특정 게송을 암송하고 난 뒤에도 우리는 똑같은 결과를 경험합니다. 종교적인 호칭이나 상징들은 그것들이 헌신과 확신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까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부처님 당신 스스로 ‘성스러운 경전의 암송, 자기 고행, 땅 위에서 잠자기, 기도의 되풀이, 속죄, 찬송, 주문, 만트라, 마법과 간청 어느 하나도 열반이라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오직 자기 노력을 통해 마음을 청정하게 할 때에만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궁극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기도를 활용하는 것에 관하여 부처님이 언제인가 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을 비유로 든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저쪽 강둑이 그에게로 다가와 그를 건네다 주기를 간청하며 그 자리에 앉아 기도만 한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진짜로 강을 건너가고자 한다면, 무엇인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통나무를 찾아서 뗏목을 만들던가, 다리를 찾아보던가, 배를 만들던가, 아니면 헤엄이라도 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윤회의 강을 건너가고자 원한다면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종교적 삶을 살며, 자기 욕망을 제어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기 마음속에서 온갖 때와 번뇌를 말끔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그가 궁극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기도만으로 그를 궁극의 목적에 데려가는 법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기도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어야지 소득을 얻고자 구걸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시인의 다음 기도문이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불교도들은 이것을 마음을 닦기 위한 명상을 간주할 수 있습니다.
“위험을 피하려고 기도하게 하지 마시고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두려움 없게 기도하게 하소서.
제 고통이 위로 받도록 해달라고 애걸하지 않게 하시고
제 마음이 그것을 이겨내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을 면하고자 열망하게 하지 마시고
내 자유를 얻을 때까지 참게 해주소서.”
<명상 수행>
명상 수행은 정신문화, 수련과 마음의 청정으로 가는
심리적 접근입니다.
기도를 하는 대신에 불교도들은 정신문화와 영적인 계발을 위해서 명상을 합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갈고 닦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열반이나 해탈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여하한 양의 선행을 하였다고 해도, 거기에 상응할 정도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것만 가지고는 궁극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도, 닦여지지 않은 마음은 매우 붙잡기 힘들며, 사람들을 꼬드겨 나쁜 일을 하게 하고, 감각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마음을 제대로 닦지 않으면 상상력과 감정이 사람들을 늘 잘못 이끌어 가게 됩니다. 명상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감각에 의해 잘못 이끌려가게 될 때에도 자기 마음을 제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난관의 대부분은 닦여지지 않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명상 수행이 숱한 육체적 · 정신 질병에 대한 치유책이라는 사실은 이미 확고합니다. 온 세계에 걸쳐서 의학의 권위자와 위대한 심리학자들은 정신적인 좌절감, 근심, 비참함, 염려, 긴장과 두려움이 위궤양, 위염, 신경질 그리고 정신질환과 같은 숱한 질병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잠재되어 있던 질병도 그와 같은 정신 조건을 통해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너무 초조해하고 너무 근심하거나 너무 오래 동안 너무 강하게 슬퍼하면, 몸에 문제가 나타납니다. 위궤양, 결핵, 관상동맥질환과 그 밖의 숱한 기능 장애는 정신적 · 감정적 불균형의 부산물입니다. 어린아이들의 경우, 충치와 시력장애는 흔히 감성적인 정서 장애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하루에 몇 분 동안만 명상수행에 시간을 쓸 수 있다면, 이런 질병과 장애들 중 상당수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거나 게을러 터져서 명상수행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은 오직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영적인 스승들은 모두 명상수행을 통해 인생의 최고 정점을 이룩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들은 명상수행을 통해 획득한 최상의 지혜를 갖고 인류에게 엄청나게 큰 기여를 해왔기 때문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명상은, 우리들에게 희열과 영감을 가득 채워주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억지로 ‘이빨을 갈고 주먹을 꽉 쥐게’ 하는 과업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를 끌어당기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억지로 그렇게 해야 한다면, 우리는 아직 명상을 할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명상을 하는 대신에 우리의 본성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풀어주고 자유스럽게 해주는 대신에, 우리의 ‘에고’에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명상이 야망과 개인적 성취 그리고 입장 강화를 노리는 게임이 되고 맙니다. 명상은 사랑과 같은 것이라, 자발적인 체험이며 억지로 시키거나 고생스러운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명상은 감각과 심리 대상을 통해 오는 온갖 장애로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그것을 바로 이 순간의, 완전히 깨친 의식상태 안으로 가져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의 계발을 통해 당신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당신을 도와달라고 신적인 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명상 수행을 하는 자기 노력을 통해 당신의 지혜를 성취하였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고 평화를 갖추기 위해서는 명상 수행을 어떻게 하는지 배워야 할 것입니다.
<현대 생활의 본질>
오늘날 우리는 육체적 · 정신적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고되게 일을 하지 않으면 현대 세계에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주 자주, 치열한 경쟁이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온갖 생활 국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려고 애쓰고 있으며, 인간들은 전혀 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삶의 핵심입니다. 마음속에 진정한 평화와 휴식이 없을 때에,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감각을 즐겁게 해서 자기들의 비참함을 극복하려고 애씁니다.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동안에는, 자기들이 인생의 진짜 행복을 즐기고 있다는 망상을 갖게 됩니다.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기분을 전환하는 진정한 길이 아닙니다. 관능적 쾌락을 통해 우리 감각을 즐겁게 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점점 더 그 감각의 노예가 되어갈 것입니다. 만족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에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기분을 전환하는 진정한 길은 마음을 다스려서 감각을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제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온전히 다스려지고 청정하게 되었을 때, 정신 혼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입다. 마음이 정신 혼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때, 다른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그 마음은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해탈을 성취하고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명상수행을 하려면 굳센 결단력과 정진,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의사, 법률가, 수학자, 철학자, 역사가나 과학자로 자격을 갖추려면 여러 해가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명상가가 되려면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다스리고 감각을 가라앉혀 고요하게 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명상 수행은 강의 물줄기를 거슬러 헤엄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단박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참을성을 잃으면 안 됩니다. 그와 동시에 명상가는 도덕성을 닦아야 합니다. 명상에 적절한 장소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입니다. 명상가는 명상에 맞는 목표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목표가 없으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마음을 가두어두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가 명상가의 마음에 탐욕과 분노, 미망 그리고 감정을 만들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명상을 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지리멸렬한 논증적 사고방식이나 습관적인 사고로부터 새롭고 장애가 없으며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명상을 하는 동안에 마음을 챙기며 숨을 들이 쉴 때, 우리는 우주의 에너지를 흡수합니다. 자비심을 품고 마음을 챙기며 숨을 내쉴 때, 우리는 대기를 청정하게 합니다.
우리는 먹이고, 입히고, 깨끗이 닦아주고, 예쁘게 꾸며주고, 기분을 전화시켜 주는 등 우리 몸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지만, 똑같은 목적을 위해서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씁니까?
무엇이 명상에 맞는 대상목표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불상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에 집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데에 집중합니다. 방법이 어떻든지 누구든 명상을 수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긴장 완화 방법을 찾는 것이 필수입니다. 명상은 어떤 한 사람을 크게 도와서 육체적 · 정신적 건강을 갖추게 하고 필요할 때에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나쁜 행위를 삼가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최고의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통해서 계발된 잘 닦여진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하게 기여합니다. 명상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명상가의 깊은 마음은 숱한 인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는 데에 매우 유용합니다. 명상은 이 현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갖가지 장애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돕는 데에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가 ‘광란의 군중에서 멀리 벗어나’ 상아탑 안에서 살기 위해 정글이나 숲속으로 은퇴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명상을 올바르게 수행함으로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곳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명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과 맞닥뜨리고 이해하고 정복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을 단련시키는 목적을 가집니다. 명상은 현대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숱한 장애들을 참고 견뎌낼 수 있게 우리 스스로를 적응시키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러분이 명상 수행을 한다면, 설사 다른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고귀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명상을 통해서 여러분은 몸을 편안하게 해 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또한 고요해져서 그 안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너무 오래 가동하면 과열되어 망가지며 그것을 막기 위해 냉각시켜 주어야 하는 엔진과 똑같이, 마음도 너무 오래 계속 쓰게 되면 혹사당하게 되는데, 그 기분은 전환하거나 냉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명상을 통해서입니다. 질투심, 분노, 오만과 시기심 등과 같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로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때에, 명상은 우리를 도와 인생의 일상적인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줍니다.
여러분이 명상 수행을 한다면,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 길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될 때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질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나 재산으로도 이런 자질들을 살 수 없고, 다만 명상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명상의 궁극적 목표는 마음에서 온갖 번뇌를 뿌리 뽑고 마지막 목적―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놓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명상 수행을 남용해 왔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즉각적이고 발빠른 결과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명상을 수행하고 자기 물질적 소득을 더 확장하기를 원합니다. 더 좋은 일거리를 얻기 위해 명상을 활용하고 싶어 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거나 자기 사업이 더 효율적으로 돌아기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것이 꼭 나쁜 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아마도 ‘명상의 목적은 욕망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감시키는 것’ 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적 동기는 적절한 명상에 맞추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명상의 목적은 세속사를 초월한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노력하기 위해 명상을 해야 합니다.
다른 동양 문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참을성이 매우 중요한 품성입니다. 마음을 차근차근 자기 통제 아래 두어야 하고 적당한 수련을 거치지 않고 더 위의 단계에 이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명상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채용했기 때문에 실제로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났던 너무 열성적인 젊은 남녀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명상은 마음을 더럽히는 번뇌를 정복하는 고결한 방법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저런 명상 수행의 수준을 얻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뽐낼 ‘성공’ 이나 ‘성취’를 원한다면, 그들은 정신문화의 방법에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성을 제대로 닦아야 하고 명상 훈련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세속적 성취를 영적 계발과 동격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상적으로는, 제자가 올바른 길을 따라서 계발할 수 있게 도와줄 경험 많은 스승 아래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대로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것을 성취하려고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송경의 의의>
송경은, 신도들을 축복하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들 중 일부를 암송하는 것입니다.
송경은 전 세계에 걸쳐서, 특히 독송에 팔리어를 사용하는 상좌부 불교 국가들에서 행해지는 잘 알려진 불교 신행 방법입니다. 이것들 중 많은 수는 그분의 제자들이 기록한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에서 뽑아 온 것입니다. 본래 이 경전들은 대략 2,000년 전에 오라 잎사귀에 기록되었습니다. 후대에 그것들이 『호지경』이라고 알려진 한 권의 책으로 편찬되었습니다. 이 경전을 뽑아 낸 원 책의 제목은 경장 중 『증일아함경』, 『중아함경』, 『장아함경』, 『잡아함경』과 『소부아함경』입니다. 불교도들이 보호를 받기 위해서 독송하는 경전은 『호지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호는 우리 스스로 갖가지 형태의 악령등, 재난, 병마와 별자리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고 여기에 더하여 확고한 신심을 갖게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송경을 하면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주위 환경의 분위기를 아주 편안하게 만듭니다. 송경을 하는 리듬 또한 중요합니다. 스님들이 이 경전들을 독송할때에, 서로 다른 장소에 어울리게 의도한 다른 경전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음조를 다르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음성의 어떤 리듬은 열성적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움과 차분함이라는 의미 있는 심리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의 영적 발달에 있어 매우 이른 시기에 발견하였습니다. 게다가 특정 단계에 있는 음조는 신들을 감응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음조는 동물, 뱀, 정령이나 유령과 같은 하등 존재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매끄럽고 부드러운 음조와 정확한 리듬은 경전 독송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이러한 리듬을 활용하는 것은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신자들이 자기 성서를 사용해서 기도문을 암송할 때에는 특정한 리듬을 따라 합니다. 무슬림들이 『꾸란』을 읽고 힌두 성직자들이 산스크리트 어로 베다 주문 암송을 하는 것을 들을 때에 이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특정 기독교 그룹, 특히 로마 가톨리과 그리스 정교회도 우아한 독경 의식을 행합니다.
경전을 독송할 때에는 세 가지의 위대하고 강력한 힘이 활동하게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과 불법 그리고 승가의 힘입니다. 이 ‘세 가지 보물’의 결합으로서 이들에게 함께 호소할 때에 독송자는 인류에게 아주 큰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1. 부처님 : 우리에게 당신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주시기에 앞서 그분은 온갖 위대한 덕성, 원만한 지혜와 깨달음 그리고 영적 역량을 발전시켜 왔었습니다. 그분이 육체적으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가르침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이제까지 남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기를 발견한 사람이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지만, 그의 지식을 활용함으로 해서 그가 가졌던 지혜의 결과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향유하고 있는 밝은 세상은 그의 지혜의 결과입니다.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한 과학자들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지식은 우리와 더불어 남아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지혜와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가르침은 거기에서 사람들이 영감을 이끌어내는 매우 효과적인 힘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을 존경할 때에 여러분은 그분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키워 나가게 됩니다. 그분이 설해 주신 말씀을 암송하거나 귀 기울여 들을 때, 여러분은 그분의 축복 역량을 청하게 됩니다.
2. 불법 : 이것은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 정의와 평화의 역량으로서, 신도들이 평화와 행복을 지켜낼 수 있도록 영적인 위안을 제공해줍니다. 여러분이 자비심, 헌신하는 마음과 이해력을 계발할 때, 이 불법의 역량이 여러분을 보호해 주고 여러분을 도와서 여러분 마음속에 더 확고한 신심과 용기를 계발하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 자체가 여러분을 보호하는 아주 강력한 힘이 됩니다. 여러분이 불법을 받들어 행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과 다른 중생들이 여러분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불법의 힘이 다양한 종류의 나쁜 영향과 사악한 역량들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게 됩니다. 불법의 힘과 그 불법에 맞게 살아가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스스로를 온갖 형태의 미신에 굴복시키고, 아무 의미도 없는 의식과 의례를 행하라고 요구하는 많은 종류의 신 · 정령과 신비주의적 세력들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들은 다만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두려움과 의구심을 더하게 될 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행하는 데에 엄청난 돈을 낭비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불법에 대한 확신을 계발하기만 한다면 쉽게 없애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자연’이나 ‘자연 현상’ , ‘우주의 법칙’ 이나 ‘중력’ 또는 ‘자석’ 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량의 본질을 이해해온 사람들은 그것들과 조화를 이룸으로서 불법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지식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질 때, 외부의 어떤 혼란도 두려움을 조성할 수 없습니다.
3. 승가 : 이 말은 영적 계발을 위해 자신의 세속 생활을 포기한 성스러운 승단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성인과 혹은 아라한과를 성취하기 위해 큰 덕행을 닦아온 부처님의 제자들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부처님 교단을 지켜온 관리인 혹은 2,500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불법을 보호하고 세상에 소개해온 사람들로서 승가 공동체를 존경합니다. 승가 공동체는 인류로 하여금 올바르고 성스러운 삶을 영위하도록 인도해왔습니다. 그들은 깨달으신 분이 설하신 말씀들을 암송하는 과정을 통해 그분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어 우리와 그분을 이어주는 살아 있는 연결 고리입니다.
축복해 주기 위해 경전을 독송하는 일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동안에 시작되었습니다. 후대에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같은 일부 불교 국가들에서는 하룻밤을 새우거나 며칠 동안 독송을 계속하는 의식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오늘날 지극한 신심을 갖춘 신도들은 경전 독송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서 송경 의식에 참여합니다. 부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천재, 기근, 질병과 기타 자연 재해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위로를 해 주기 위해 경전을 독송해 주었던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린아이가 사령의 침범을 받았다는 보고를 듣고 부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경전을 암송해 그 아이를 보호해 주라고 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경전 독송을 해서 축복을 해주는 것은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희생자가 어떤 강력한 악업을 지었기 때문에 경전 독송이 효과를 낼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소한 악업의 과보는 경전을 독송하는 성스러운 분들(스님들)의 덕행 및 자비심과 결합된 왕성한 힘에 의해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강한 악업의 과보는 잠시 늦출 수는 있지만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사에 지친 신도들은 경전 독송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난 뒤에 안도감과 고요를 체험하여 왔습니다. 그와 같은 경험은 음악이 제공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음악은 우리 마음속에 흥분을 생겨나게 하고 우리 감정을 이용할 뿐, 영적으로 신심과 확신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2,500년 동안 신심 깊은 불교도들은 경전 독송이 가져다 주는 좋은 효과들을 경험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까지도 부처님이 하신 말씀들이 축복을 해주는 목적에 어떻게, 그리고 왜 효과가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당신 전생에 부처가 되겠다는 원을 세운 이래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특별한 원칙을 강력하게 지켜왔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 말씀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고, 온화하게 말을 해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진리의 힘이 대자비심을 갖춘 부처님이 하신 말씀들 속에서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도의 신심과 이해력이 없이 부처님의 말씀이 가진 힘만으로는 축복을 담보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불교 경전과 명상을 통하여 자기들의 질병과 기타 갖가지 정신 장애를 없애는 데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초자연적인 효과는, 신심을 갖고 쓰기만 한다면 그것들이 아주 효과적일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교도는 우상숭배입니까?>
불교도들은 우상 숭배자가 아니라 이상 숭배자입니다.
설사 불교도들 사이에서 부처님 상을 모시고 부처님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라고 하더라도, 불교도들은 우상숭배자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일반적으로 형태와 크기로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신의 상을 세워놓고 그 상들이 바로 신앙라고 여기고 이 상들에게 직접 기도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신들에게 안내와 보호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건강과 재산과 번영을 내려 주고 갖가지 요구를 충족시켜 달라고 신들에게 요청하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합니다.
부처님 상에 ‘예배를 드리는 것’ 은 이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불교도들은 이 세상에 이제까지 살아 왔던 가장 위대하고 현명하며 가장 자비롭고 성스러운 사람에 대한 존경의 몸짓을 부처님의 상을 우러러 공경합니다. 이 위대한 종교적 스승이 이 세상에 실제로 살았었고 인류에 막중한 공헌을 해온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예배는 진정으로 그분과 그분이 대표하는 것(가르침 · 깨달음)에 대한 경의, 존경과 헌신이지 돌이나 쇠로 된 형상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상은 우리 마음속에 부처님을 떠올리게 하고 전 문명 세계에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그분의 위대한 성품을 기억하게 도와주는 가시적 보조자입니다. 그 상은 마음에 이 위대한 분을 떠올리고 신도들이 그분의 가르침과 몸소 보이신 자취를 따르도록 고무시킬 수 있습니다. 신심이 돈독한 불교도들은 마음속에서 스승님이 살아서 앞에 계신 것처럼 느낍니다. 이런 느낌은 그들의 예배 행위를 생기가 넘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부처님 상의 평온과 차분함은 그들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길을 가도록 영향을 주고 고무시킵니다.
이해력 있는 불교도들은 절대로 그 상에게 세속적인 혜택을 달라고 간청하거나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세상의 재난을 소멸하고 해탈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불교도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불교도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다. 만약 사람들이 그분들을 기억하기 위해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의 사진을 간직하고 왕, 왕비 · 여왕, 수상 · 대통령, 위대한 영웅, 철학자와 시인들의 사진을 간직할 수 있다면, 확실히 불교도들이 그분을 기념하고 존경하기 위해 스승의 사진이나 상을 간직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스승의 위대한 품성을 찬양하면서 게송 몇 구절을 암송한다고 해서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덤에 꽃을 놓을 수 있다면 불교도들 또한 고통 받고 있는 인류를 돕느라 당신이 생애를 바치신, 경애하는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꽃이나 향을 바친다고 해서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사실은 살인자였으며 죄없는 사람들 수백만 명을 죽인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할 특정의 정복자 영웅의 상을 만듭니다. 권력을 위해서 이들 정복자들은 증오심과 탐욕심을 갖고 잔인하게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나라들을 침략하고 다른 사람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만들어냈으며 엄청난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이들 정복자들 중 많은 수는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어서,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무덤에는 꽃을 바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위해 세속의 쾌락을 모두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탈의 길을 보여주신, 세계에서 존경받는 자기들 스승에게 불교도들이 존경을 표시한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상은 잠재의식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으신 분의 상은 종종 우리 마음속에 완벽함(부처님)의 화신을 만들어 줍니다. 그 상은 잠재의식의 마음속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서 만약 그것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본능적인 충동에 대항해서 자동 브레이크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다. 부처님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기쁨이 생겨나고, 정신적으로 활기를 주며 초조, 불안, 긴장감과 좌절의 상태에서 벗어나 기운을 차려 명랑해집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기도가 아니라 명상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가 아니라 ‘이상’ 숭배입니다. 그리하여 불교도들은 자기들 생명의 신당을 세울 수 있는 신선한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마음 깊은 곳의 신당에 상을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느낄 때까지 자기들 마음을 맑게 합니다. 불교도들은 그 상으로 대표되는 위대한 분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고귀한 성품에서 영감을 얻고 그분을 닮으려고 애씁니다. 불교도들은 부처님 상을 나무나 쇠나 진흙으로 된 죽은 우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려 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청정해진 사람들에게는 그 상이 생생한 무엇인가를 나타내줍니다.
부처님 상은 그분의 위대한 성품의 상징적 표현일 뿐입니다. 이 세상이 이제까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술과 조각의 행태로 부처님을 향한 깊은 존경심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성스러운 종교적 스승을 나타내는 상에 예경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요하고 평온한 부처님 상은 전 세계에 공통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개념이 되어 왔습니다. 부처님의 상은 아시앙 문하의 가장 고귀한 공유 자산입니다. 부처님의 상이 없다면, 우리가 그 어디에서 평온하고 눈부시게 빛나며 영적으로 해탈한 인격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시아 사람들과 불교도들만 부처님의 상의 진가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톨 프랑스는 자선전에서 “1890년 5월 1일, 파리에 있는 미술관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거기에 아시아의 신들이 조용하고 꾸밈없이 서있었는데, 고통 받는 인류에게 이해력과 자비심을 계발하도록 권했던 부처님의 상위에 내 시선이 향하게 되었다. 만약 이제까지 이 땅 위를 밟고 걸어 다녔던 신이 있었다면 그분이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나는 구분 앞에 무릎을 꿇고 마치 하느님에게 하듯이 그분에게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느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한 번은 어느 장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부처님의 상 하나를 윈스턴 처칠에게 유산으로 냈습니다. 그 장군은 “혹시라도 그대의 마음이 불안에 빠지거나 혼란스럽게 되거든 이 상을 보고 편안해지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메시지가 자기 지성을 닦아온 사람들을 그렇게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답은 아마도 부처님 상의 평온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과 인자한 그분 가르침을 색깔과 선으로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재능이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손은 쇠와 돌을 가지고 작업을 하였습니다. 스리랑카의 아바야기리에 있는 유명한 상이나 사르나트의 부처님 상, 아니면 보르부드르의 유명한 부처님 상을 직접 가서 보십시오. 눈은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고, 양쪽 손은 무외심 혹은 선의와 축복을 나타내거나 어떤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주지 않으면 진리에 대한 당신의 위대한 탐구를 직접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손짓해 부르기도 합니다. 불법이 가는 곳은 어디이든지 위대한 스승의 상도 예경의 대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명상과 존경의 대상으로서 그와 더불어 갔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형상보다 더 기품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은 눈으로 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영성을 절대 완벽하게 구현해낸 것이다.” 라고 키서링은 말합니다.
삶이 그렇게 아름답고, 가슴이 그렇게 청정하고 친절하며, 마음 씀씀이가 그렇게 깊고 열려 있으며, 성품이 그처럼 감동적이고 이타적인 분―그처럼 완벽한 일생, 그같이 자비로운 가슴, 그처럼 고요한 마음 그리고 그같이 평온한 성품은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고 예경할 가치가 있으며 헌공을 드릴 가치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인류가 이룩할 수 있는 최고의 완벽함입니다.
부처님 상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극히 일부만 행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성취할 수 있는 불성의 상징입니다. 불성은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과거의 부처님들, 아직 오지 않은 부처님들, 현재의 부처님에게 겸손하게 매일 예경합시다.”
그러나 불교도들이 불교 수행을 하기 위해 부처님 상을 모시는 것이 의무는 아닙니다. 자기 마음과 감각을 규제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상으로서 상을 모시지 않고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확실합니다. 만약 불교도들이 진실하게 그분의 이상적인 풍모가 풍기는 경이로운 광채와 아름다움으로 부처님을 간직하고 싶다면, 자기들의 일상생활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들이 그분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고 그분의 불멸의 지혜와 자비심의 놀라운 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분의 고결한 가르침을 따르지는 않고 그저 상을 존경하기만 하는 것은 해탈을 구하는 길이 아닙니다. “불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본다”.
우리는 부처님의 정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이 혼란스런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가져온 엄청난 이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혼란스런 세상을 위한 치료약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발견됩니다.
<절식의 종교적 의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어서 때가 되기 전에 죽습니다.
불교에서는 절식을 자기 다스림 수행을 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인정합니다. 부처님은 스님들에게 정오 이후에는 고형 식품을 먹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음력 보름에 팔관재계를 지키는 재가신도들도 정오 이후에 어떤 고형 식품이든지 먹는 것을 삼갑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수행 관습들을 종교적으로 까다롭다고 여깁니다. 이해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들이 종교적 까다로움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통찰에 바탕을 두는 수행입니다.
불교에서는 자기 다스림을 달성하기 위한 자기 훈련의 첫째 단계가 절식입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절식을 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하루 혹은 며칠 동안 한 끼씩 절식하고 희생을 함으로서, 우리는 굶주리고 있거나 매일 단 한 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먹는 사람들은 게으름을 이겨내려고 노력할 수 없으며, 먹는 것에 게걸이 들고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성적인 탐욕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도덕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기 다스림을 위한 노력은 과식에 대한 탐욕에 맞선 투쟁 즉 절식과 함께 시작되고, 훌륭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절식이다”고 레오 톨스토이는 쓰고 있습니다.
방탕한 임금의 명령으로 한 고행자를 발로 걷어차고 고문을 한 다음에 손과 발을 잘랐습니다. 그런데, 불교 설화에 따르면, 그 고행자는 아주 작은 화도 내지 않고 침착하게 그 고문을 견뎌냈습니다. 그와 같은 종교적 인물들은 우리들이 흔히 갈망하는 감각적 탐닉을 억제함으로서 정신력을 계발시켜 왔습니다.
<채식주의>
단순히 그들이 무엇을 먹는지 살펴보고서 단순하게
사람들이 ‘청정하다’, ‘청정하지 않다’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아마간다경』에서 말했습니다.
“고기로도, 절식으로도, 온 몸을 발가벗어도,
빡빡 밀어낸 머리도, 묶어서 딴 머리도, 더러운 행색으로도,
거친 피부도, 불 숭배도,
바로 이 세상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참회해도
찬송으로도, 시주로도, 희생 제의로도
절기마다 축제를 올려도
의심이 가득 찬 사람을 청정하게 할 수 없다.”
생선과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편협한 행위, 속임수, 질투, 자화자찬, 비방과 다른 나쁜 의도들 때문에 그들이 부정해집니다. 자신의 사악한 생각과 행동을 통해 그들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불교에는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선이나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엄격한 규정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이 해 준 유일한 충고는, ‘의도적으로 죽이는 일에 관련해서는 안 되며 자기들을 위해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을 죽여 달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승려들에게 채식주의를 권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분은 스스로의 자긍심과 보호를 위해 열 가지 종류의 고기를 먹는 것을 피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 열 가지는 인간, 코끼리, 말, 개, 뱀, 사자, 호랑이, 표범, 곰, 하이에나입니다. 어떤 동물들은 자신들과 같은 종류의 고기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제자 중 한 사라인 데바다타가 거룩한 승단에 채식주의를 도입하자고 부처님에게 요청했을 때에 부처님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불교는 자유로운 종교이므로, 그분의 충고는 채식주의에 관한 결정은 개별 제자들이 내리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이것을 매우 중요한 종교적 준수사항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부처님은 그분의 가르침에서 불교도들에게 채식주의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의사인 지바카가 부처님과 이 논쟁점이 되는 이슈를 토론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수행자 고타마를 위해서 일부러 동물들을 잡았으며, 자기를 위해서 일부러 죽인 줄을 알면서도 수행자 고타마는 그 고기를 잡수셨다고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수행자 고타마를 위해서 일부러 동물을 잡았으며, 자기를 위해서 일부러 죽인 줄을 알면서도 수행자 고타마는 그 고기를 잡수셨다’고 수군대는 사람들은 부처님을 잘못 비방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가르침이나 보충 가르침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게 되어 있습니까?”
“지바카여, ‘수행자 고타마를 위해서 일부러 동물을 잡았으며, 자기를 위해서 일부러 죽인 줄을 알면서도 수행자 고타마는 그 고기를 잡수셨다’고 수군대는 사람들은 내가 가르친 대로 말을 하지 않고 나를 잘못 비난하는 것입니다. 지바카여, ‘승려를 위해 일부러 죽이는 것을 보았거나, 그랬다고 들었거나 그렇게 의심이 갈 때에는 그 고기를 쓰면 안된다’고 가르쳤지요. 세 측면에서 아주 청정한 고기들은 승려들에게 허용하지요. 그것은 승려를 위해 일부러 죽이는 것을 보았거나, 그랬다고 들었거나, 그렇게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이오.”(『지바카경』)
특정 국가들의 대승 계통의 불교도들은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입니다. 채식을 하고 육식을 삼가는 사람들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이름 아래 그네들이 준수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우리는 그들이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는 불교도들이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계율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교는 중도로 알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닏. 불교는 자유로운 종교이며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극단으로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충고였습니다.
채식주의만이 사람들이 인간미 있는 품성을 가꾸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비채식주의자들 가운데도 친절하고 겸손하며 예절바르고 종교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정하고 종교적인 사람은 꼭 채식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을 묵과하면 안 됩니다.
한편 어떤 사람이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육식을 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강하고 건강한 수백만 명의 순수한 채식주의자가 전 세계에 걸쳐 있으므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따라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부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고기를 먹는 불교도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음식물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은 영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들은 자신들을 건강하게 하고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기 위해 필요한 음식을 육체에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산이 증가한 결과, 특히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들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자기들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어댑니다. 만약 어떤 종류의 음식을 갈망하거나 고기에 대한 자신의 탐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생을 한다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아무런 탐욕심 없이 그리고 살생 행위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다만 육체를 지탱하기 위해서 적당하게 먹는다면, 그 사람은 자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목적은 탐욕심을 부숴 버리는 것이지 먹는 음식 종류가 아닙니다.
<달과 종교 행사>
부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일은 보름날에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력 보름과 초하루의 종교적 의미를 알고 싶어합니다. 세존이신 부처님의 생애와 관계된 중요하고 두드러진 일들이 보름날에 일어났기 때문에, 불교도들에게 특히 보름날에는 특별한 종교적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보름날에 태어났습니다. 그분의 출가는 보름날에 일어났습니다. 그분의 깨달음, 첫 번째 설법, 열반에 들어 돌아신 일 그리고 그분의 80 생애와 관계있는 여러 가지 다른 중요한 일들이 보름날에 일어났습니다.
전 세계에 걸쳐서 불교도들은 보름날에 대해 높이 평가합니다. 그들은 계율을 지키고 명상을 수행하며 관능적인 세속의 삶을 멀리하면서 종교적 열정을 갖고 이 날을 기념합니다. 이 날에 그들은 영적인 계발에 주의를 집중합니다. 불교도들과 별개로 아시아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달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단계와 관련된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도 보름날에는 절식을 하고 기도를 하는 등의 특정한 종교적 수련의 관례를 지킵니다.
인디아의 고대인들은 달이 물의 통제자로, 이것은 우주를 순환하면서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을 지탱해 주며 신들이 마시는 ‘암라수’, 천상의 음료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슬과 비는 식물의 수액이 되고, 수액은 암소의 젖이 되며 그젖은 피가 됩니다. 암라수, 수액, 젖, 피는 똑같은 한 가지 정수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불멸의 액체를 담는 그릇이 달입니다.
다른 행성 · 위성들과 마찬가지로 달은 인간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믿어집니다. 정신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보름날에는 변함없이 자기들의 열정과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관찰되었습니다. ‘달’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미친, 미치광이’라는 낱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며, 인간의 삶에 미친 달의 영향력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알려줍니다. 다양한 형태의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음력으로 특정한 기간에는 자기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예외 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연구자들은 달이 변화하는 단계가 사람과 동물들뿐만 아니라 식물의 삶과 다른 요소들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실을 발견해 왔습니다. 밀물과 썰물은 압도적인 달의 영향력이 미치는 직접적 결과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약70%의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사들은 보름날이면 우리 몸속의 유동 액체가 더 활발하게 흐른다고 인정합니다. 천식, 기관지염 그리고 심지어 일부 피부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은 달의 영향을 받아 자기들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5,000년 전보다 훨씬 앞서 이미 사람들은 경작에 미치는 달의 영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자기 작물에 미치는 달의 영향력에 대해 매우 민감했습니다. 그들은 만일 보름 기간 중에 개화가 이루어지면 논과 밭작물이 영향을 입게 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의학 또한 인간에 미치는 달의 영향력 때문에 달이 차고 기우는 여러 단계에 따라 어떤 의약품은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달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고려하여 고대의 성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특별한 날에는 온갖 잘못을 저지를 만한 이들을 삼가고 그날 동안에는 편안히 머무르라고 권하였습다. 사람들은 이런 특별한 날에는 마음을 편안히 하고 영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데에 시간을 바치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일정 정도까지 자기 마음을 계발해온 사람들은 모두, 이런 날에 뇌가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수행을 통해 자기 마음을 닦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달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오랜 기간 동안 마음을 계발하고 올바르게 조율해 왔기 때문에 보름날에 당신의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불교국가들에서는 보름과 초하루를 공휴일로 선포하였고 사람들에게 영적인 계발에 시간을 보내라고 권장하였습니다. 남아시아 불교 국가들에서 휴일이 일요일로 바뀐 것은 식민지 시절뿐이었습다. 이 점에 비추어 지금 일부 불교국가들에서는 예전의 음력 공휴일 시스템을 다시 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관을 고요하게 해서 평화와 행복에 마음을 집중하는 종교적인 날로 보름날을 지키는 것은 권할 만합니다. 많은 불교도들이 보름날이면 팔재계를 준수하여, 이런 저런 책무에서 자유로워지고 세속적 쾌락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영적 계발을 위한 마음의 평화를 갖고자 합니다. 우리 삶과 이 땅에 달이 미치는 효과는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져왔습니다.
어떤 작가는 “나는 최근에 미국의 한 과학 잡지에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의 필자는 ‘하늘의 이 오래 된 물체가, 특히 그것이 28일 주기로 통과하면서 거치게 되는 네 단계마다, 우리 삶에 얼마나 정확하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증명하려고 달을 주제로 한 현재의 연구들을 여기에 모아놓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일, 듀크와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이 연구를 행하였는데, 그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달이 우리의 일상생활 그리고 실은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의 삶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놀랄만한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 현상에 그다지 신비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달의 여러 변화 단계들이 사실은 신진대사의 조절, 전기 충전과 혈액의 산도와 같은 이런 저런 육체 활동을 자극한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런 사실을 확정하기 위해여 수행된 중요한 실험들 중 하나는 꽃발게, 생쥐와 일부 식물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 실험 대상들을 모두 기후 조건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통제 하에서 공기압, 습기, 빛과 온도가 조절되는 방에 넣었습니다. 수백 차례 관찰한 결과, 범상치 않은 사실, 다시 말하면 모든 동물과 식물들이 28일 주기로 활동한다는 데에 주목하였습니다. 초하루쯤에는 떨어진 것으로 발견되었던 신진 대사가 보름 무렵에는 20%정도 높아져 있었습니다. 이런 차이는 현저한 변화로 서술되었습니다.
한 번은 미국 플로리다의 한 간호사가 의사에게 “달이 꽉 찼을 때에는 더 많은 출혈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믿음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의사도 이 보고서를 비웃었습다. 그러나 그 간호사는 ‘보름날이면 수술 뒤의 과도한 출혈 때문에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환자들이 수술실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외과 수술 기록부를 작성하였습다. 이 의사도, 자기 생각이 옳았음을 확실히 해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따로 기록부를 작성하기 시작해서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고려해볼 때, 우리 조상들이나 종교적 스승들이 왜 우리들에게 보름날과 초하루에는 일상적인 일과를 변화시켜 육체적 · 정신적으로 편하게 하라고 권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실천은 사람들이 정신의 평화와 육체의 휴식을 체험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방법입니다. 불교도들이 초하루와 보름날에 영적인 본성을 추구하는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비칠 때에, 그들은 단지 옛날의 지혜를 깨쳐서 지키는 것입니다.
청안심 사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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