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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안의 천국(천년왕국) 관련 세 가지 쟁점들
1.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은 '오르지 못할 나무'에 불과한가?
마태복음 5-7장을 읽어보고 우린 깊은 절망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 또한 대립됩니다. 하나는 산상수훈을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보아 제 껴 놓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반드시 지켜야 할 행위규범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상반 된 두 주장 중 하나만 맞을 것입니다. 둘 다 일리가 있다는 식의 반응은 사람 눈에는 사려 깊어 보여도 하나님 보기엔 악합니다(마5:37).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대부분 충분한 이해가 없을때는 매우 실현불가능한 저 언덕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고나면 바로 우리 세대에, 우리 시대에 매우 유익하고도 필요한 말씀으로 믿어지게 됩니다. 예를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원수를 사랑할수 없는 너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임을 알고나면 그 말씀이 자기 자신의 죄를 먼저 깨닫게 하시고, 다음에는 그 죄를 예수님께 갖고가서 고백하며 십자가에서 그분이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그 죄값을 지불하신 것을 깨닫고 나면 성령님의 새인격이 들어옴으로 거듭나서 새생명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차츰 깨달아가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저 언덕의 말씀으로 들렸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테판은 과연 그 시대에도 그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 라고 위대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차츰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이루어나가는 것임을 깨달을 때 바로 우리시대에 적용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1) 박윤선 박사의 견해- 실천 불가능하다
박윤선 박사는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다만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실천 불가능한 윤리적인 법조항으로만 주어졌다"고 보았습니다(박윤선, <산상보훈 구원론>, "성경 신학", 서울 :1971, 138-146쪽, <성경주석 공관복음>, 부산: 1953, 169-266참고).
2) 정 훈택 교수의 견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총신대 정 훈택 교수는 위 박윤선 박사의 견해에 대해 " 이러한 (박윤선 박사의) 관점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복음적 성격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행위가 제자 된 믿음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불가결한 요소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실패하게 만들었다"고 정면 반박합니다(이 한수, 신약의 성령 론, 총신대출판부, 1994, 17-18쪽,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정 훈택, "시발점에서 조명해 본 교회론" 신학지남, 가을 호, 1991년 169쪽과 정 훈택, <열매로 알리라>, 총신대학출판부, 1993년, 1장 서론 참조).
이러한 두 견해를 함께 소개한 총신대 이 한수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위 주장을 "자신의 기본적인 신학적인 구도를 가지고 성경 본문들을 거기에다 꿰맞추려는 위험성"에 대한 예로 소개했습니다(이 한수, 신약의 성령 론, 16, 18쪽). 즉 그는 박윤선 박사가 한국 신학계의 원로임은 인정하지만 적어도 위 주장만큼은 잘못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바일까요?
저는 박윤선 박사를 1971년부터 알아왔습니다. 다른 분들은 차영배박사를 이름 정도로 들어온 정도입니다. 저는 한마디로 이런 견해들이 산상수훈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제가 쓴 산상수훈의 해석 글을 나중에 보시면 차이를 느끼실 것입니다. 원수를 실제적으로 사랑하려 해본 사람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주님 앞에 진지하게 탄식합니다. 그리하면 주님은 길을 열어주십니다. 반대로 언뜻 시도하려 하는 사람은 위선으로 흐르거나, 불가능하다고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새생명을 좇는 사람은 차츰 그 말씀을 이루어갑니다.
2. 천국 (천년왕국) 은 이미 시작되었는가, 앞으로 시작될 것인가?
이 주제는 조금 복합적입니다. 마태복음 5-7장에서 언급되는 천국이 양면성을 다 가지기 때문입니다. 즉 마5:3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현재(is) 천국을 소유한다고 말하나, 마5:20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나은 의를 가진 자가 장차 (shall not enter) 천국에 들어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동사 시재 참조). 장로교 신학자 중 하나인 이 남종 목사님은 <천국의 현재성>(새순출판사, 1987년)이란 자신의 책에서 현재 우리가 체험하는 천국을 강조하되 천년왕국 개념으로서의 미래적인 천국 개념을 함께 인정하고 있습니다(위 책, 서문 참조).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들여 다 보면, 소위 미래적 천국개념을 현재 진행형으로 볼 것인지(무 천년설), 아니면 장차 주님 재림 이후 도래할 것으로 볼 것인지(전 천년설)에 대해서 한국 교계 내에 첨예한 대립이 있습니다. 소위 무 천년 주의자들에겐 마5;20 해석에 있어서 주관적인 의를 향후 도래 할 천년왕국에 참여하는 전제 조건으로 보는 논의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계 20장이 말하는 천년왕국에 대해 다음 두 견해가 대립됩니다. 물론 둘 중 하나만 진리입니다.
넓은 의미의 천국은 예수님 초림때에 이미 시작되어 교회시대와 천년왕국을 거쳐 천국(좁은 의미의 천국)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마 5:20에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상의 의입니다. 그것보다 나은 의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보다 나은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서, 거듭남으로서만 가능해집니다. 거듭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년왕국은 계시록 20장 4절에 나오는 세부류의 사람들과, 예수님 강림하실 당시에 지구상에 생존해 있던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20장 4절의 세부류는, 첫째 보좌에 앉아 재판할 재판관 성도, 둘째 순교 성도, 셋째 종말에 짐승에 경배하지 않은 성도 들(십사만4천으로 추정)들을 말합니다. 재판관성도가 가장 먼저 나오고 보좌에 앉는 점들을 감안할 때 최상의 믿음을 가진 분들로 보입니다. 예컨대 노아 모세 이사야 엘리야 다니엘 바울 요한 베드로 등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포함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순교자들은 자명하겠으며, 종말의 십사만사천의 자격요건은 계시록 14장 1-5절에 잘 나와 있고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진, 어린양의 인도하심대로 살고 믿음의 정절을 지킨 사람들로 분별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재림 당시 생존자들은 계시록 2장 26-27에 언급된 두아디라 교회의 사람처럼 다스리는 자들을 포함하며, 또 그외의 수많은 생존 그리스도인들, 환난 통과자들이 참가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으로 참여할 것은 즈카랴 12-14장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불신자들 중 영유아나, 생존자들(스카랴 14:16) 이 참여할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따라서 천년왕국 문제와 천국가는 문제를 혼합하여 분별하면 그 분별이 매우 복잡해지고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천국은 진정으로 거듭났으면 들어갑니다. 십자가 상의 한 강도는 특별한 일을 행한 적이 없지만 그는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부활하여 낙원에서 나와 나중에 천국에 못들어가리라고 생각되지 않고 그는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1) 최 갑종 교수의 견해- 예수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장로교 고신교단 출신 신학자인 최 갑종 교수는 계시록 20장이 말하는 천년은 진짜 1천년이 아니라 <상징>이며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 초림 시부터 성취되었고, 현재 이 지상에 천년왕국이 건설되고 있고, 재림 시 이 천국이 완성된다고 주장합니다(최 갑종, 이 광복, 종말론 논쟁-천년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 1996, 생명의 말씀 사, 1, 3, 5, 7장 특히 7쪽 참조).
2) 차 영배 박사의 견해 -주님 재림 후에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차 박사의 견해는 그의 책 <성령 론>(도서출판 엠마오, 1997년) 12쪽에 아래와 같이 반어법적으로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 한때 시한부 종말론까지 등장하여 교회를 불안하게 하더니, 이젠 정 반대로, 아니 이미 있었지만, <무 천년설>이 득세하여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전 천년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가? 만약에 바빙크를 그토록 좋아하던 사람이 바빙크의 무 천년설을 비평한다면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교부들은 역사적 전 천년설자들이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이 교부들의 전통을 부인하고 주님의 승천부터 재림까지를 천년왕국 시대로 보았다. 과연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같은 생각이 옳은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결점이 많지 않은가? 이러한 것은 이미 구라파에서는 다 알려진 일이 아닌가?"
어거스틴의 무천년설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그는 사탄이 이미 묶이었으며 무저갱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주장하고, 연옥설의 기초를 제공하며, 유아세례, 중생침례주의, 은혜는 성례를 통해 얻어질수 있다, 마리아의 무죄, 믿음을 강요할수 있다, 외경인정 등 허탄한 카톨릭 교리들을 내세웠습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견해는 참조할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연구할 대상은 되어도, 배울 가치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안에 자명하게 예수님이 강림하시고, 천년간 지상왕국을 통치하신 후 자신의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는 것이(고전 15:24)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 전천년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 천년주의>는 위 최 갑종 교수의 토론 상대방인 이 광복 목사의 반론내용에도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특히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이미 천국이 이뤄졌다는 무 천년주의 주장을 신봉하는 한국 교계의 현실은 성도들의 신앙 열정이 식어지고, 인수가 매년 3-4 % 씩 감소되고, 세속화 요소가 교회에 침투하는 문을 열어 주었고, 심지어 성경의 영감 설을 부인하는 근대자유주의 신학 태동에도 빌미를 주었다'는 지적입니다(위 책 203쪽 참조).
물론 한국 교회의 하락이 꼭 이 문제에만 원인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무 천년주의 신봉자가 장차 올 천년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힘을 다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를 좆는 삶을 추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여기서 잠시 몇 가지 오해들이 나오는 원인을 저 나름대로 분석해보면 성경이 어느 정도 오해하게 용어들을 중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열 처녀의 비유(마 25:1-)에서도 그 비유가 천년왕국에 초점을 맞추었을지라도, 천국은 마치 무엇 무엇과 같으니, 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예수님 초림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하나님의 영역으로서 예수님의 사역, 교회시대, 천년왕국, 천국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처녀의 비유에서 그것이 비록 혼인잔치와 천년왕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할지라도 천년왕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하시지 않고 천국은 이와같으니, 라는 말씀으로 비유하셨다 하여 천년왕국에 관한 비유 말씀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의미의 천국은 예수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천년왕국은 그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천국은 그분이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심판하신 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3. 천국에 들어감의 의로운 행위를 언급하면 다 행위구원론자인가?
마태복음은 천국이 주요 주제이며 그 천국 가는 조건으로서의 어떤 행위 내지는 삶을 요구하는 본문도 허다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의 행위와 관련하여 한국 교계 내에 깊은 오해와 이견이 있습니다. 즉 천국에 가는 조건으로서 행위도 필요하다 는 주장과 사람의 행위는 필요 없고 오직 오직 믿음 뿐 이다 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특히 천국과 관련하여 '사람의 행위'를 말하면 즉각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이단으로 내 몰리는 것이 현재 한국교계 분위기입니다. 소위 프로테스탄트들의 <오직 믿음>(객관적 칭의 개념)은 생략하고자 합니다. 대신에 그에 더하여 천국 가는 조건과 관련하여 삶속에서의 말씀의 이행을 함께 강조하는 세 분의 장로교 신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행위구원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대부분 해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올바른 해석을 가지면 행위 구원론은 없고 다만 그런 행위로 나타날수 있는 믿음, 그러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며, 오직 믿음으로 천국간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믿어집니다. 다만 훗날에 보상에 있어서는 행위 보상이 분명함은 루카 12:47-48에서도 그렇고, 계 20:11-14에서도 확인됩니다. 믿음에 의한 의한, 은혜에 의한 구원, 행위 보상의 원칙입니다.
1) 정 훈택 교수(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신약신학, 화란 Kampen 신학대학)
"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천국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환란과 핍박을 견디며 유혹과 염려를 극복하고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향한 믿음은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우리 삶 전체를 포함한다. 경건한 생활로 설명할 수도 있다. 만일 믿음을 순수한 정신적 작용이라고 분석한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믿음 + 행위'여야 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 전체에 흐르는 강령일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전체의 대 주제이기도 하다."(정 훈택, 천국은 어떻게 오는가? 도서출판 대장간, 1996, 112쪽).
위 정 교수의 주장을 마7:21 본문에 적용한다면 <천국 가는 조건으로서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은 소위 '정신작용으로서의 믿음'(관념적 믿음)에 더하여 실 생활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행위가 있어야 천국 간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지극히 균형 잡히고 성경적인 관점을 위험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바로 그 관점이 위험한 것이 될 것입니다.
행위로 나타날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믿음+행위로 구원얻는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배척해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북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카톨릭의 교리라고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5 Solas (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o Christo, Soli Deo Gloria) 를 주장했으며 그것은 개혁시대나 오늘날이나 매우 정당하며 유효함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는 전혀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문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닌 거짓 믿음이어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2) 이 남종 목사(아가페교회 담임, 국제 신학 원 강의, 총신대 합동신학 대학원)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아직 완전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더 하늘나라(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엡2:5-6, 골2:12, 3;10)...우리는 이미 의의 종이 되었지만, 그러나 완전한 의의 종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더 의의 종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롬6:12-23)...이러한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의 명령은 어떤 율법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얼마나 율법적인 행위를 반대했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율법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행위를 요구하고 있다. 율법적인 행위와 신앙적인 행위는 상반된다." (이 남종, 천국의 현재성, 새순출판사, 1987, 131-132쪽).
위 저자는 <율법적인 행위>와 <신앙적인 행위>를 구별한다는 전제 하에 <신앙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천주교식 행위구원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은 위에서 보듯이 천국과 관련하여 성경적인 의미를 따라서 사람이 '노력해야 한 다'든지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듯 한 문맥' 만으로도 경솔하게 이단시하거나 귀를 막고 배척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월간 교회와 이단 발행인인 이대복 목사가 그 한 예입니다.
3) 권 성수 박사(전 총신대교수, 현 대구 동신교회 담임, 웨스터 민스터 신학대학)
"열 처녀 비유는 그 핵심을 놓치지 않고 붙잡으면서도 풍유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니 이제 본문을 풍유적으로 풀어보자. 신랑=재림하실 예수, 처녀들=믿는다는 자들, 더디 옴=재림의 지연, 혼인잔치=완성된 천국잔치, 문이 닫힘= 완성된 천국에서 제외됨(이상 129쪽)....산상보훈의 결론과 말세 훈화의 결론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선행이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전체에 나오는 이러한 말씀들은 인간의 언행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말씀이다(133쪽)...마태복음이 강조하는 선행은 인본주의적인 선행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선행이며(3:8), 예수님과의 밀착된 관계에서의 선행이다...이렇게 볼 때 인본주의적인 행위구원은 마태복음의 사상과는 정면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초점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선행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상의 모든 것을 전제한 상태에서 '열매'로서 선행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생활이 이렇게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134쪽)(권성수,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도서출판 횃불 1999, 129-134쪽).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심판의 기준이며, 행위 보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행위를 어떤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열매로 보았습니다. 이분의 견해가 여러분들 중에서 가장 나아보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아니라, 천년왕국,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이러한 행위로 드러날수 있는 믿음의
수준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행위구원처럼 보입니다. 천년왕국에의 참여는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보상과 상급의 문제로서 행위, 행실에 대한 보상이요 상급입니다.
위와 같이 소위 로마천주교식 행위(선행) 개념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또는 신앙적 행위)를 천국 들어가는 조건과 연관 짓는 장로교 신학자들은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만으로도 <믿음의 행위>가 천년왕국 가는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한국 장로교단 내에서도 균형 있는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있는 지극히 성경적인 가르침임이 입증되었다고 봅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위 정 훈택 교수, 이 남종 목사, 권 성수 박사는 벌써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어야 했습니다.
위에서 주목된 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천년왕국 참여, 추가적 보상의 문제로서 행위보상의 문제였지, 행위 구원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천년왕국 참여를 구원여부로 보는 것은 오해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마5:20, 7:21은 <현재의 천국>(교회)의 완성인 <다가올 천국 즉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믿음의 행위에서 난 의>를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의이신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살아 표현된 결과>로 재 정의할 수 있습니다(빌3:9).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엄중한 요구는 소위 로마천주교식 칭의 인 '하나님을 떠나 사람의 전적인 노력만으로 나타난 선행'으로는 결코 충족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사람 밖에서> 사람을 위해 하신 의로운 역사'(구속에 근거한 객관적인 칭의)만으로도 위 말씀의 요구엔 역부족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위에서 보았듯이 그에 더하여 우리가 생명으로 영접한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친히 우리 대신(함께)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들을 이루시는 삶' 이 있어야 마태복음에서의 천국 들어가는 조건으로서의 의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빌2: 12, 3:9). 그러므로 어떤 동기에서건 이러한 성경의 엄중한 요구를 희석시키거나 더 나아가 대적하는 가르침이나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 5:20, 7:21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못들어갑니다. 그들은 지옥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은 천년왕국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7장 21절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이며 이 말씀은 순복음이나 거대 교단, 모두의 신도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2:12, 3:12에서 말하는 구원을 이루라,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등의 말씀은 3장 14절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위에 있는 부름의 상을 좇아가는 상급의 문제입니다. 그런 상급에는 천년왕국에의 참여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려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마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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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한해중 최고의 더위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오늘날 거듭나지 아니하고 그냥 교회당 마당밟기 오래하면 구원얻는 줄로 아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1) 예배당 다니는 것 또는
2)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으며 예배당다니는 것
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태 7장 21-23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믿음을 말씀하는 것으로 분별됩니다.
결론적으로는 천국과 천년왕국에 관해서 혼동이 좀 있는데, 예수님 자신도 우리가 신학적으로 사용하는 천년왕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천국이라고 말씀하심으로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읽는 사람들이 잘 분별해야하는 문제로 생각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산상수훈에 대한 해석을 올리면 많은 의문들이 해소될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금 종말상황 게시판에 관한 부분에 공급이 더 필요하게 여겨져 저는 상황 보면서 천천히 올리며 나누겠습니다. 산상수훈 올려 주시면 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