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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1-3
▣ 네가 본 것-요한계시록 1장-
▣ 서론:1장 1-3절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의 특징들을 보며 이 책이 어떻게 씌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 책의 내용을 그리스도께 주셨으며, 주님은 이것을 그의 천사에게 주어 사도 요한에게 주도록 하셨다. “그의 천사“는 “그의 사자“라고 번역되어도 된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앙겔로스(천사)가 “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22장 16절을 읽고서 22장 8-9절은 이 특별한 사자가 구약 예언자들 중의 하나일 수도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데에 유의하자.
“지시하다“는 말은 이 책이 신령한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징표나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사실상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책의 내용을 실제로 보았다. 육체적으로 그는 밧모섬에 있었으나(1:9)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이런 사건들을 목격하고 우리를 위해 그것들을 기록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를 하늘로(4:1), 광야로(17:3), 산으로(21:10) 옮기셨다.
이 책을 소리내어 크게 읽는 자들과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 그러나, 3절은 요한계시록이 공연한 호기심으로 연구할 책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 말씀들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순종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가까움“과 “속히 될“이란 말은 이러한 예언들이 요한의 시대에 당장 성취되어야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이 성취되는 때의 신속함을 나타낸다. 오늘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이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들이 임할 날이 올 것이며, 더이상 연기되지 않을 것이다."
계 1:4-8
1. 요한이 아는 그리스도(1:4-8)
요한은 11절에서 명령을 받은 대로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그의 안부를 보낸다. 그는 삼위일체의 위(位)를 각각 언급하면서 신성의 경이로움을 개관한다.
성부-“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란 뜻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뜻한다(1:8/4:8).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하여 계시며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성령-“일곱“이란 완전을 나타내는 수로서, 성령의 충만함을 뜻한다. 4장 5절에서 우리는 일곱 영이 일곱 등불로 상징되는 것을 본다. 또한 5장 6절에서는 일곱 눈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일곱 영을 가지고 계시며(3:1) 영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성자-그리스도는 선지자(충성된 증인), 제사장(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나신 자, 즉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난 자 중 가장 높은 자), 왕(땅의 임금들의 머리)이라는 삼중 인격으로 제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삼중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도다 ! 아담에게서 잃었던 통치권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획득하였다 !“
7절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일곱 구절들 가운데 첫번째 것이다(2:25/3:3/3:11/22:7/22:12 /22:29 참조). 이 재림은 공개적이며(단 7:13/행 1:8- ) 교회의 은밀한 휴거는 아니다(살전 4:13-). 이방인들은 그로 인해 애곡할 것이며 유대인들은 그들이 찌른 자를 볼 것이다(슥 12:10-12/마 24:27-30)."
계 1:9-11
2.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1:9-11)
요한은 그가 소아시아 교회들을 보살피고 있었던 에베소에서 약 110 km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마가복음 10장 33-35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보좌에 대해 질문하였었는데, 그 수년 후에 이들 둘에게 환란이 닥쳐왔다.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으며(행 12 장), 요한은 유배되는 고난을 겪었다. 요한은 그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배되었다.
요한이 바다를 25회나 언급하고 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섬에... 성령에“, 참으로 경이로운 국면이다! 우리의 지리적인 위치가 우리의 신령한 축복들을 결코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요한은 나팔 소리 같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팔은 중요하다. 4장 1절에서 나팔 소리가 요한을 하늘로 불러 올렸는데, 이는 휴거를 표상한다. 또한 8장 2절 이하에서는 나팔을 불자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쏟아졌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총회로 모이는 때, 전쟁을 알리는 때, 특별한 날을 선포하는 데에 나팔을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나팔은 교회를 본향으로 불러갈 것이며(살전 4:16), 이스라엘을 모을 것이고(마 24:31), 세상에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계 8:2-).음성은 요한에게 이 책을 기록하라고 말했고, 그것을 그와는 떨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라고 했다. 지도에서 이 교회들의 위치들 확인해 보라. 이 지역에는 일곱 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영적인 필요를 묘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장차 올 교회들의 신령한 역사를 개관하기 위하여 이 일곱 교회들을 선택하셨다."
계 1:12-20
3. 요한이 본 그리스도(1:12-20)
요한은 더이상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 수 없었다(고후 5:16). 그리스도는 이제 부활하시고 높이 올리우신 왕인 제사장이시다 ! 요한은 일곱 촛대 사이에서 계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하였다(1:20). 우리는 세상의 빛이며 교회는 그 빛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붙들고서 그것을 비치게 한다. 우리는 거대한 등불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있는 일곱 촛대를 갖는다.
여기서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상징들을 연구하려면 관주를 이용하면 된다. 그의 옷은 제사장으로서 왕의 옷이다. 흰 머리는 그의 영원성을 말한다(단 7:9). 그의 눈은 빠짐없이 두루보며 그 본 대로 심판한다(단 10:6/히 4:12/계 19:12). 교회들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는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보며 심판하신다. 주석으로 된 발은 심판을 나타내는데, 죄가 심판받았던 장소가 놋제단이었다.
“많은 물소리와 같은“ 그의 음성은 두 가지 것을 암시했는데, 곧 바다와 같은 주의 말씀의 능력과, 그리스도 안에 모여진 신적 계시의 “시냇물“인 것이다(시 29편/ 겔 43:2 참조). 그는 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시는데, 이 별들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 또는 사자들(목회자들)이다. 이 교회들로부터 요한에게로 온 사자들이 이 계시록을 그에게서 개인적으로 받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별들은 사자들이다(1:20). 그리스도는 자기의 종들을 그의 장중에 붙드신다(단 12:3).
이 입에서 나오는 검은 심판하는 그의 말씀이다(사 11:4/사 49:2/계 2:12/계 2:16/계 19:19-21). 해같이 비취는 그의 얼굴빛은 그의 영광을 말한다(말 4:2 참조). 22장 16절에서 그는 광명한 새벽별로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직전인 가장 어두운 때에 교회를 위하여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요한은 그의 가슴에 기대었으나(요 13:23)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린다(단 8:17/계 22:8 참조). 오늘날 성도들은 그들의 언어와 태도에서 그리스도와 “격이 없는“ 것처럼 된 듯한 것을 삼가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권위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을 안심시키시고 그의 두려움을 평온케 하신다.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다(1:8/22:13). 따라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는 음부, 곧 죽은 자의 영역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음부는 어느 날 잃어버린 영혼들을 내놓고 텅비게 될 것이다(20:13-14).
그리스도는 1장 19절에서 우리를 위하여 요한계시록을 개관하신다(개요 참조). 다른 개요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보다도 이 책에 관하여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2-3장에서 그리스도는 일곱 교회들을 다루신다. 그는 그 한복판에 서서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살피신다. 주님은 오늘날도 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사람들이나 교파들이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당신은 13-16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묘사에 대한 각기 다른 부분들이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반복되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교회에 적용시킬 그리스도의 속성이 언급된다. 교회들에 대한 위험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증거를 옮기시는 것이다!(2:5) 그는 그의 신적 의지를 벗어나 있는 촛대를 가지시기보다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한 성읍을 가지려 하실 것이다 !
본 장에 나오는 많은 상징들이 이 책의 후반부에 반복되어 나온다. 연구할 때 관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는 없다."
<<<<<<2장과 3장은 요한계시록 22장 강독후에 나누기로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완성을 목표로 진행중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복음으로 받는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 뒷부분으로 미루어 두었습니다. 1장 다음에 4장부터 강독합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만일 요한계시록 1장 19절이 영감된 이 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면 2-3장은 “이제 있는 일“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특정한 멧세지를 전하기 위하여 소아시아의 많은 교회들 중에서 일곱교회를 선택하셨던 것이다. 확실히 다른 교회들에게 죄들이 있었지만 이 일곱편지들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은 가능한 모든 상황을 망라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이 일곱 교회들을 택하여 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있을 수 있는 교회의 형편들을 예증하며, 사도 시대로부터 세상 마지막까지의 예언적 교회사를 예증한다. 일곱은 그저 아무렇게나 정한 숫자가 아니다. 교회들이 관련된 한에 있어서 일곱이란 역사의 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예언적 교회사에 나타난 일곱 단계를 보게 된다.
에베소:사도시대-그리스도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기 시작함.
서머나:초기의 박해받는 교회(주후 100-300년)
버가모:교회가 로마와 결탁함-국가 교회가 됨(주후 312년).
두아디라:로마 카톨릭 시대-간음과 우상 숭배
사데:개신교회-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 있음.
빌라델비아:“형제 사랑“-이 마지막 시대의 선교하는 교회
라오디게아:마지막 시대의 배교하는 교회-미지근한 교회이며, 그리스도는 밖에 있음.
이 일곱 교회들은 교회사를 요약하고 있으며, 고백의 2대 주류인 로마 교회와 개신교의 발전을 요약한다.
에베소-사도적교회
서머나-로마가 교회를 박해함 사데-교회들이 로마에서 이탈함
버가모-로마가 교회를 받아들임 빌라델피아-현대의 선교운동
두아디라-로마가 교회를 조정함 라오디게아-미지근한 거대한 교회
결과-로마 카톨릭 결과-무기력한 개신교회각 교회의 “이기는 자“에 대해 특별한 말씀을 하고 계심에 유의하자(2:7/2:11/2:17/2:26/3:5/3:12/3:21). 이 “이기는 자“들은 각 교회에 있는 “초월적인 성도들“로서 그리스도로부터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특별한 부류인가? 아니다. “이기는 자“란 이러한 각 교회들에 있는 참된 신자들이다. 우리는 역사의 매 시대의 각 지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이라고 섣불리 믿을수는 없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이기는 자들“이다(요일 5:4-5).
역사의 매 시대에서 고백 교회 내에 참된 성도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 주의를 나타내는 두아디라 교회 내에서조차 그러했다 ! 그리스도께서는 각시대에 사는 그들에게 격려하는 특별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며, 또한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이 말씀을 적용할 수도 있다.
사단도 네 교회와 연관되어 언급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는 서머나 교회를 박해하는 배후에 있으며(2:9), 버가모에 그의 “보좌“(거하는 곳)를 두고 있고(2:13), 두아디라에서 그의 “깊은 교훈“을 가르치며(2:24), 그리고 빌라델비아에서 구령 사업에 전력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회“(회당)를 사용한다(3:9).
그리스도는 이런 교회들에게 몇 가지 위험을 지적하신다.
니골라당(2:6/2:15)-이 말은 “하층 계급을 정복하다“란 뜻이며, 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리를 암시한다. 이것은 에베소에서 “행위“로 시작하여 버가모에서 교훈으로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사람들이 교회에 거짓 활동들을 소개하고 오래지 않아 이러한 활동들은 용납되고 즐거워하게 된다.
사단의 회(2:9/3:9)-이것은 아마도 신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마귀의 자녀들인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총회를 말하는 듯하다(요 8:44). 회(회당)라는 단어는 단순히 “함께 모이다“란 뜻이며, 그것이 사람들의 총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도 교회를 소유한다 !
발람의 교훈(2:14 /민 22-25 장)-발람은 이스라엘이 이교도와 혼합되어도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민이므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죄 가운데로 인도해 갔다. 그는 그들을 저주할 수는 없었으나, 육으로 유혹할 수는 있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교회가 세상과 짝할 수 있다는 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로마의 황제가 박해를 중단하고 기독교 신앙을 공식적인 로마의 종교로 받아 들인 시기에 나타난 것임에 유의하자 ! 교회와 세상이 결합했고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발람의 교훈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세벨(2:20)-이 구절은 우리를 열왕기상 16장에서 열왕기하 10장까지를 회고케 한다. 이세벨은 아합왕의 이교도 아내였으며 이스라엘을 사악한 바알숭배로 인도해간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거짓 가르침으로 이스라엘을 타락시켰다. 신약에서는 이세벨이라고 하면 거짓 가르침을 소개하는 여인을 말한다. 이세벨은 로마 카톨릭 주의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에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그리고 우상들에 관하여 강조함으로써 나타난다.
▣ 개인적인 멧세지
우리는 이 일곱 편지들에서 교회의 예언적인 모습을 보는 것도 중요하고 우리의 지교회들이 거짓 교훈의 희생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 서신들에서 개인적인 멧세지를 보아야만 한다. 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되므로, 회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이런 교회들에 있었던 영적인 문제들을 살펴보자.
에베소-주님을 위하여 분주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진지한 사랑은 없다. 열정이 없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 이런 교회는 통계는 훌륭하지만 그리스도로부터 표류하는 분주한 교회이다.
서머나-주님으로부터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았으나 위험은 역시 존재한다. 이 교회는 가난하고 고난받는 교회였다. 타협하며 부요하게 되며 박해를 피하게 되기란 참으로 쉽다 ! 라오디게아 교회 만큼 “부자“가 아니어서 얼마나 용기를 잃었겠는가 !
버가모-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고백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죄의 삶을 살기에도 쉽게 했던 거짓 교훈을 붙든 회원들이 있는 교회였다! 또한 이 사람들은 주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선전하고 있었던 영적인 독재자들의 수중에서 견디기 힘든 상태에 있었다.
두아디라-한 여인이 교훈하는 과정에서 자기 위치를 떠났다. 그녀의 교훈은 백성의 죄 가운데로 이끌었다.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로마에 강조를 두고 있으나 어떤 지교회라도 이러한 오류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이다.
사데-생명이 없는 명성 ! 그 교회의 미래는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명성을 떨쳤으나 오늘에는 아무런 사역도 없는 “시대에 뒤진“ 교회에 불과하다. 사멸되는 것만 남아있는 것이다 !
빌라델비아-문호를 개방하고서 복음을 세상에 가져가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말씀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교회이다. 그러나, 사단의 회가멀리 있지 않아서 언제나 타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라오디게아-예산은 많지만 어떠한 복도 가지지 않은 미지근하고 변절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나 영적으로는 가난된 교회로서, 그리스도는 교회 밖에 계시며 그에게 순복할 단 한 사람이라도 초청하시고 계신다."
계 2:1-7
▣ 교회들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멧세지-요한계시록 2장-
1. 에베소 교회-타락하는 교회(2:1-7)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여기서 강조되고 있다. 그는 별들(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계시며 교회들(촛대들)을 심판하시러 다니신다. 그는 밧모섬에서 가장 가까운 에베소 교회로부터 시작하신다. 이곳은 거대한 상업 중심지로서 수로 및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다. 로마는 에베소를 자유 도시로 만들었으며, “아시아 제일의 대도시“라는 말을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대한 다이아나 신전이 있었던 것인데, 이것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길이 약 120미터, 너비 66미터, 높이 18미터쯤 되는 신전으로, 대문들과 127개의 대리석 기둥들이 있었고 이들 중의 더러는 금으로 싸여 있었다. 다이아나(아데미)숭배는 최악에 달해 있는 “종교적인 부도덕“ 그것이었다(행 19-20장 참조).
에베소 교회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는 있었지만 사랑은 없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칭찬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라 그 배후의 동기인 것이다.
이 교회는 분주한 교회였으며 표준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였다. 그 표준이 “무가치한 사람들“(악)을 용납할 수 없었고, 거짓 선생들을 경청치 못하게 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모든 면에 있어서 성공적인 교회였다. 오늘날, 줄잇는 각종 행사와 지친 일꾼들로 가득찬 분주한 교회들은 아마도 이 설명에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들 가운데 계시는 이는 무엇이 잘못인지를 보셨다. 이들은 첫사랑에서 떠났다(렘 2:2). “잃은 것“이 아니었다. 지교회는 그리스도와 결혼한 것이며(고후 11:2) 사랑이 점점 식어갈 위험도 항상 있는 법이다. 마르다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분주하게 일하다가 주님을 사랑할 시간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눅 10:38-42).
그리스도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수고가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일반에게는 에베소 교회가 성공적으로 보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패한 교회였다.그들에게 주는 주님의 권고는 세 마디였다.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우리가 처음 사랑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처음 행위를 반복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가 그리스도와의 처음 만남을 생각나게 하였다. 만일 교회가 그 중심을 바른 상태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촛대가 옮겨지게 될 것이다 ! 지교회는 세상에서 빛을 비춰야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사랑이 없이는 그 빛은 꺼지고 말 것이다.
주님은 그들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칭찬하신다. 니골라당의 헬라어 어의는 “하층 계급을 정복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교회 내의 제사장 특권 계급(성직자)의 발달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일반 신자들이 외면당한다는 말이 된다. 교회 내에서 목사의 지도력은 있어야 하지만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에베소는 교회가 늘 분주했던 때인 사도 시대를 방불케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처음 사랑은 쇠미해지고 있었다. 이 일이 다른 실패의 길을 걸을 여지를 남겨 놓았다."
계 2:8-11
2. 서머나 교회-고난당하는 교회(2:8-11)
그리스도에 대한 각각의 서술이 1장 13-16절의 묘사를 어떻게 회고케 하는지 살펴보고, 또한 각각의 서술이 그 교회의 특별한 필요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라. 서머나는 박해당하는 교회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고난, 죽음, 부활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계신다(2:8). 서머나는 “씁쓸한“이란 뜻이며 “몰약“이란 말과도 연관된다. 어떤 이는 짓밟는 박해로 인하여 향기를 생각해 낸다. 교회는 언제나 고난의 때를 통과하고 있었을 때 가장 순전하고 향기로웠다.
이 교회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말이 없다 ! 고난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충성스러웠다. 이들은 그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상은 부요하였다. 이는 실상은 가난하면서 부자라고 생각한 라오디게아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3:7) 성도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사단의 회, 마귀의 자녀들, 요 8:44/빌 3:2)로 말미암아 모독을 받고 있었다(중상을 받고 있었다). 사단은 모든 박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으며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에서조차 그렇다.
그리스도는 더 많은 박해가 오고 있음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는데, “십 일“이란 초기 교회에 있었던 열 가지의 큰 박해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서머나는 주후 100년으로부터 300년에 이르기까지 박해받는 교회를 나타낸다. 사단은 삼킬 자를 찾고 있는(벧전 5:8) 사자와 같이 달려왔으나 박해는 교회를 더 강하게 했을 뿐이다.사람들은 몸을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둘째 사망 곧 지옥(20:14/21:8)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은 한 번만 죽으면 된다. 그러나,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을 것이다!"
계 2:12-17
3. 버가모 교회-세속적인 교회(2:12-17)
버가모는 “결혼한“이란 뜻이며 이 교회는 국가와 결혼한, 곧 로마 제국과 결합했던 시기인 주후 312년 이후의 시기를 묘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 환상을 보고 기독교를 채택하였으며, 제국에 이 새로운 믿음을 받아 들이도록 강요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충성된 교회에 대한 파국의 시작이었다! 버가모에는 중대한 세 가지 잘못이 있었다.
사단의 보좌가 있었다-이것은 바벨론의 “비밀 종파“가 그 곳에 총본부를 두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또한 이런 이교 도시에서 핵심 역할을 한 황제숭배를 포함한다.
발람의 교훈이 있었다(민 22-25장)-발람을 그가 받은 부와 특권의 답례로 이스라엘 백성을 죄 가운데로 인도해간 삯군 선지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이 이방 우상들을 섬기게 하여 간음에 빠지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유익을 얻으려고 세상과 짝한 교회를 본다. 로마제국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와 세상의 권력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매수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 있었다(2:6)-“행위“에서 정착된 교훈에로 점차 나아간다. 우리는 이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로 분리된 교회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주의의 시작이다."
계 2:18-29
4. 두아디라 교회-회개하지 앉은 교회(2:18-29)
로마 카톨릭이 이제 완전한 성장을 보여 주는 때이다. 불꽃같은 눈과 주석으로 된 발이 보고서 심판하러 오신다. 그러나, 사악한 교회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교회는 사업과 섬김과 인내를 가지고 있었으나(병원과 학교 등 로마교의 활동을 잘 묘사하고 있다!), 죄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일곱 편지들 중 유일하게 언급되는 여자의 이름을 보게 되는데, 이는 아합왕의 아내인 사악한 왕비 이세벨을 가리키고 있다(왕상 16-왕하 10장). 그녀는 이방 여인으로 바알 제사장의 딸이었으며 이스라엘에게 바알숭배를 소개하였다. 그녀는 우상 숭배, 살인, 사기 사제술(司祭術)과 마찬가지로 매음과 마법의 죄를 지었다(왕하 9:22). 오늘날 로마의 모습이 아닐 수없다!
교회의 이 거짓 여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기 위해(속이기 위해) 거짓 교훈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하자. 그녀는 그들에게 죄를 지어도 되는 면허를 주었다! 로마교 이상으로 거짓 교훈과 우상과 죄의 면허를 가진 종교 제도가 어디 있겠는가? 로마교 이상으로 여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제도가 어디 있겠는가 ? 이들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한다!
오늘날 로마는 배교자라 부른 신교 교회를 향해 우정의 손짓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21절에서 로마가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계신다. 예배에서의 몇 가지 것들을 고칠지는 모르지만 그 불경건한 제도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결과로 로마는 요한계시록 6-19장에 나오는 대환란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이 땅을 타락시킨 큰 음녀로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자기의 교훈을 “하나님의 깊은 것들“이라고 부르지만 그리스도는 “사단의 깊은 것“이라고 부르신다(24절). 하지만 24-29절은 카톨릭주의 안에서조차 참된 신자들(이긴 자)이 일을 것을 분명히 밝힌다. 로마의 자녀들(22-23절/ 이 제도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녀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교회의 참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굳게 잡을“ 것이다."
계 3:1-6
▣ 교회들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멧세지-요한계시록 3장-
1. 사데 교회-죽어가는 교회(3:1-6)
사데라는 이름은 “도피한 자들“이란 뜻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의 더러가 로마의 타락을 피하였던 때인 종교개혁 시대(1500-1700주후)의 교회를 묘사한다. 이 교회는 행위는 가지고 있으나 생명은 그리 대단치 않았으며,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였다! 이것은 거대한 교단적인 프로그램과 세계적인 지도자들, 그리고 눈길을 끄는 건물을 가진 “죽은 개신교주의“를 참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명성뿐이고 실제가 없는 교회이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경고하신다.
-깨어있으라, 경계하라.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네가 받고 들은 말씀을 생각하라.
-그것을 굳게 잡고 내가 올 때 준비가 되어 있도록 하라!
마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되돌려 놓았으나, 현대 개신교는 말씀에서 떠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기조차 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충실한) 결실을 맺은“ 개혁자들의 행위를 찾지 못하셨다. 이는 옳은 말이다! 루터는 사람들을 로마로부터 데리고 나왔으나 이들을 충분히 멀리 데리고 가지는 못하였다. 그는 여전히 정교의 연합, 촛대, 법의 등을 그대로 붙들고 있었다. 그의 행위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다.
5절은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불충성한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생명책“은 출생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졌고, 참된 신자들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13:8/21:27).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다(20:15). 물론 사람이 교회 명부에는 이름이 올라 있으나 구원은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적용해도 된다.
“책들이 펼쳐질“ 때(20:12)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오늘날의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질 수 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죽은 정통이상으로 더 악화될 수는 없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참 생명을 지니고 있지 못한가!"
계 3:7-13
2. 빌라델비아 교회-섬기는 교회(3:7-13)
이 이름은 “형제애“란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곧장 서로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는 과거 250년 간의 선교하는 교회를 나타내고 있다. 드물게 있던 선교 모험을 제외한다면 중세기의 교회들은 복음을 퍼뜨리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들은 종교전쟁을 하며 통치자들과 정치 유희를 하는 데에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이 필연적으로 크거나 강하지는 못하지만(9절) 이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열쇠로 열어 놓으신 봉사의 문을 지나가는 믿음과 사랑을 지닌 교회들이다. “다윗의 열쇠“란 다윗의 아들로서의 주님의 권위를 가리킨다. 이사야 22장 22절에 보면 열쇠는 권위를 상징한다. 세상 도처에서 문들을 닫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문이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문을 여시거나 닫을 때는 아무도 이를 방해할 수가 없다!
이 교회는 거짓 교회(사단의 회), 곧 거짓말 하는 자들로부터 반대를 받고 있다. 이 거짓 형제들은 교회임을 주장하나 하나님의 백성의 사역을 반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로 무릎을 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거짓 교회는 인기와 영향력과 돈을 가지고 있으나 이 세대의 어느 날 세상에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소수의 성도들 앞에 절을 해야만 한다.
10절은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참된 신자들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일원이며 이 땅에 임할 무서운 7년 심판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살전 5:8-9 참조).
요한계시록의 요약도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계시록 3장 이후부터 22장 13절까지에는 교회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2-3장은 교회 시대를 개괄하며, 4장은 환란기로 인도한다. 만일 우리가 휴거하기 전에 임박한 환란을 기다려야만 했었다면 22장 20절의 기도는 기도드리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계 3:14-22
3. 라오디게아 교회-변절하는 교회(3:14-22)
이 이름은 “사람들의 법“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속한 영적인 지도자들을 더이상 따르지 않는 민주적인 교회를 암시한다. 이 교회가 진리를 외면한 개신교이다. 교회는 미지근하다. 이는 뜨거운 것과 찬 것을 섞었을 때 일어나는 상태로서, 진리에 오류를 섞어 약화된 진리를 지니고 있는 혼합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부요하다고는 하나 실상은 가난하고 불쌍하며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교회이기에 참으로 비극이다! 오늘날 명성과 부와 정치적 권력을 쥐고 있는 신앙을 버린 세상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는 동안은 영적으로 가난할 뿐이다!
라오디게아 시는 양모와 부와 의술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18절에서 이러한 표상을 사용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의복과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의 참된 부요함을 그들에게 주고자 하셨다. 그들의 가치관, 의복, 그들의 환상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사랑으로 그들을 징계하셨을 것이다.
20절은 자주 복음에의 초청에 사용된다. 이러한 적용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변절한 교회 문 밖에서 계신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부와 권력은 있으나 그리스도는 없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 주님을 초청만 한다면 그 사람의 생활에 기꺼이 들어가려고 하신다.
교회가 대단히 미지근하고 교만하여져 그리스도께서 떠나 밖에 서 계셔야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이들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냉담한 자들이다! 이 변절한 교회들은 그들의 교단 지도자들을 높이며 경건치 못한 세상을 높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높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계획과 프로그램을 떠나 계시며 또한 그들의 마음에서도 떠나 계신다.
물론 이와 같은 모든 교회들이 요한의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모두 존재한다. 이러한 일곱 교회 전체는 요한의 시대로부터 세상 끝까지의 교회들의 역사를 나타낸다. 이와 같이 그것들 모두는 오늘날 존재하는 교회들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렸고(에베소)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향해 미지근한 교회로 끝마치는(라오디게아) 그런 분주한 교회를 갖는다. 거짓 교훈들은 미미하게 시작되나 장성한 후에는 교회에 전체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각 교회에는 참신자들(이기는 자들)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어서 그가 돌아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 충성스럽게 책임을 질 수 있다.
성경 학자들은 본 장에 나오는 이기는 자들에게 주는 약속들을 구약사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지적했다. 에덴의 생명나무(2:7), 사람이 동산에서 쫓겨나 죽게 된 것(2:11) 광야를 방황할 때의 만나(2:17), 이스라엘의 왕국 시대(2:26-27), 제사장 직분(3:5), 성전(3:12),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보좌(3:21) 등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데 모으셔서 오늘날 그의백성에게 적용하시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일곱 번이나 교회들에게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신다. 교회가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기를 멈추면 사람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며 진리로부터 돌아서기 시작한다.
우리가 비록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믿음을 부인해서는 안된다(2:23). 주의 말씀을 지켜야 하며(3:8/3:10) 주의 이름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서는 교회에 생명이나 소망이 없다."
<<<<<<2장과 3장은 요한계시록 22장 강독후에 나누기로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완성을 목표로 진행중입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복음으로 받는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 뒷부분으로 미루어 두었습니다. 1장 다음에 4장부터 강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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