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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4. 10. 07
기산 김준근(箕山 金俊根)의 풍속화[1]
[생졸년] 1853년 전후 - 미상
▲기산 김준근의 <Games of Orient Korea-China-Japan>
▲독일에서 발행한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첩>1958
Alte Koreanische Bilder/ Landschaften und Volksleben /
1958년 독일초판. 독일에 소장되어 있는 기산의 회화도록.1쪽에 한장씩 큰 그림으로
44 점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음.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그림등으로 구성된 것으로 판단됨.
저 자 : Heinrich F.J.Junker
출판사 : Veb Otto Harrassowitz,Leipzig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첩중<공기놀이>
기산 선생의 풍속화첩중의 한그림으로 당시의 복색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
하지만 화가의 취향에 맞는 그림색을 입혔는지 당시의 유행에 맞는 복색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림으로 보아 당시의 유행하는 저고리류를 입은것은 확실하다.
기산 선생의 많은 놀이그림중에 하나인 어린이들의 공기놀이가 전한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첩중 <팽이돌리기>
기산 선생의 그림들은 국내는 몇곳(숭실대학기독교박물관.명지대학박물관등)만 소장하고
있고 거의 독일이나 그밖의 유럽에 퍼져있다 구한말 서민들의 민속적학적인 사료나 복식
사사료 그밖의 풍속사에서는 귀중한 자료가 돼고 있다..
하지만 많은 그림들이 외국의 박물관에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그림을 감상하기엔 역부
족이다. 이렇게 복색이 확연한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거의 흑백이나 아니면 그림을 만나
기 힘든 경우가 태반이다..
위의 그림은 어린이들이 팽이치기를 하는 모습으로 선생께서 아니들의 놀이에 많은 관심
이 있었는지 놀이에 관한 그림들이 유난히 믾은것을 알수 있다.....
▲김준근(金俊根), 말기, 풍속, 종이에 담채, 28.5 × 35㎝, 독일함부르크인류학박물관
<솟대장이>는 간단한 반주에 맞추어 곡예를 하는 광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긴 막대 끝에 매달려 재주를 부리는 사람, 나무컵처럼 생긴 그릇으로 공을 올리고 내리며
재주를 부리는 사람 등 광대들의 여러 모습을 담았다.
그의 풍속화는 민속적인 내용의 다양한 소재를 특징으로 하며 선염(渲染) 기법을 사용한
다채로운 색을 썼다.
그러나 표현된 인물의 모습은 얼굴윤곽을 뚜렷하게 표현하긴 하였으나 무표정한 얼굴에
모두 비슷한 형태를 지녀 김홍도 풍속화가 주는 생생함을 느낄 수 없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첩중 <농부 밥 먹고>
'농부 밥 먹고' 김준근(기산풍속화첩) - 함부르크 인류박물관 소장
지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은 보통이다.
그런데 의학자들은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을 살을
빼기 위해서 밥을 굶기도 한다.
그러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루 몇 끼를 먹었을까?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펴낸 책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보면 조선시대
에는 두 끼가 기본이었다고 한다.
점심은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 계절에 따라 달랐는데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달 동안은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달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되어있다.
즉 해가 긴 여름, 그리고 농사철에는 활동량이 많았으므로 세 끼를, 해가 짧은 겨울,
농한기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것이다.
우리 겨레는 이미 운동 정도에 따라 열량을 조절하는 슬기로움이 있었다.
▲기산김준근의 풍속도첩중 "시각장애인의 모습"
19세기 후반 화가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에 실린 시각장애인의 모습.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옮겼다. - 독일 함부르크 박물관 소장.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첩중 <주조도>
주물솥의 제조방법은 통상의 생형법에 의하여 기계부품을 제조하는 방법과 조형방법에
있어서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일반기계 주물은 조형한 주형을 한번 밖에 사용할 수 없으나 가마솥(주물솥)의 주형은
여러번 반복 사용하여 최고 70회까지 반영구 주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조하고져 하
는 주물솥은 솥의 본체 부분과 뚜껑 부분으로 구분하여 만들고 있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첩중<두부 짜는 모양>
나는 이 연재의 처음 여섯 번째 원고에서 19세기말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에게 우리 풍속을 그림으로 그려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다시 그 기억을 되살려보면 기산은 비록 조선적인 풍속을 조선의 필묵을 사용하여 그렸지만, 그 기법은 서양식이었다.
그의 그림은 당시 조선을 찾았던 서양인들에 의해 세계 각 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국내보다는 독일·덴마크·오스트리아·미국 등지에 그림이 흩어져 있다.
이번에 볼 기산의 그림은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림 오른쪽 위 귀퉁이에 ‘기산(箕山)’이란 낙관이 음각으로 찍혔고, 그 위에 한글로 ‘두부 짜는 모양’이란 제목이 붙었다.
왼쪽 위 귀퉁이에는 누군가가 손으로 ‘Fabrication du tubu’라는 독일어 제목을 달았다. 즉 ‘두부 제조’라고 했다.
이 자료를 직접 정리한 적이 있는 한양대학교 조흥윤 교수에 의하면,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에는 총 79점의 기산 그림이 있다고 한다.
그중 61점은 대한제국의 독일 영사를 지낸 에드워드 마이어(K. H. C. Eduard Meyer)가 수집한 것이고, 나머지 18점은 독일 민족학자 단첼(W. Danzel) 교수가 수집한 것이다. 이번에 볼 그림은 바로 단첼 교수가 수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의 중앙에는 머릿 수건을 동여맨 부인이 큰 함지박 위의 판때기 위에 올라앉았다.
그녀가 깔고 앉은 판때기 두 장 사이에는 무언가 들어 있는 무명 주머니가 끼여 있다.
함지박 옆에는 옹기로 만든 단지 뚜껑인 자배기가 놓였다. 판때기 위에 앉은 아낙의 자세로 보아 자신의 몸을 실어 아래에 있는 것에 힘을 주고 있다.
더욱이 자신의 몸무게로 아래의 것을 누르는 것도 부족하여 돌 하나를 손에 들고 막 내려놓으려 한다.
오른편에 선 젊은 아낙은 저고리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돌 하나를 들고 있다.
아마도 판때기 위에 올려놓을 요량인 것 같다. 왼편에 서 있는 아낙은 오른손에 사기로 만든 사발을 들고 있다.
그 들고 있는 모양이 사발 속에 무엇인가 들어 있었는데,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이미 ‘두부 짜는 모양’이라고 적어두었으니, 판때기 사이의 무명주머니에는 두부가 들어 있을 게다. 사실 요사이 사람들은 대부분 식료품점에서 완성된 두부를 사먹고 있기 때문에 두부 만드는 과정의 전모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심지어 이 그림을 보았을 19세기말 혹은 20세기 초반의 독일인은 ‘두부(豆腐)’라는 음식을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보았다 치더라도 그 과정을 모르기는 지금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자! 이제 이 그림의 전후 사정을 살펴보자. 우선 두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콩이 필요하다.
먼저 모내기를 다 끝낸 후 5월쯤에 논두렁에 콩을 심는다. 그러면 벼 수확이 다 끝나는 10월쯤에 콩깍지가 노란색을 띠면서 머리를 숙인다.
가지째 낫으로 잘라 마당에 펼쳐놓고 2, 3일 동안 잘 말린다.
도리깨를 들고서 콩깍지를 탁탁 치면 깍지 안에 있던 노란색의 대두(大豆)가 얼굴을 내민다.
이것을 키에 담아서 콩알만 골라낸다. 콩알을 큰 함지박에 담아서 햇볕이 드는 곳에서 다시 말린다.
갓 수확한 것은 메주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광에 잘 보관해둔다.
이제 두부를 만들 차례다. 우선 광에서 콩을 꺼내 물에 불려둔다. 겨울에는 하루종일, 여름에는 반나절만 담가두면 된다. 콩이 불었으면, 맷돌을 꺼내서 콩을 탈 준비를 한다. 맷방석을 깔고 그 위에 삼발이처럼 생긴 맷돌 틀을 세운다.
맷돌 틀 위에 맷돌을 올려놓은 다음 그 밑에는 맷돌 사이로 나올 콩비지를 받을 함지박을 놓는다.
한 사람은 한 손으로 맷돌 틀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맷돌 입에 물과 함께 불린 콩알을 넣는다.
다른 한 사람은 맷돌 위짝에 붙은 손잡이인 맷손을 돌려서 맷돌질을 한다. 그러면 두 짝의 맷돌 사이로 하얀색의 콩비지가 거품처럼 새어나온다.
함지박에 가득 담긴 콩비지를 솥에 담는다. 잘 말린 짚을 불 붙여 아궁이에 넣고, 약한 불로 콩비지가 담긴 솥을 끓인다.
사실 맷돌에서 갓 갈린 콩비지에는 묘한 비린내가 난다. 그러나 솥에서 끓인 콩비지에는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이 비린내는 콩 속에 있는 식물성 단백질에서 나는 것인데, 익히면 그 냄새가 사라진다.
이렇게 끓이는 과정에서 단백질이 분리되어 콩비지 속에 녹는다. 이것을 베로 만든 주머니에 넣고서 함지박 안에 놓는다.
콩비지가 식기 전에 주머니의 입에 있는 천을 양쪽으로 묶고, 그 사이에 나무막대를 꽂아 돌린다.
콩비지가 식어버리면 콩물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뜨거울 때 해야 한다.
다른 나무막대로 주머니의 배를 꾹꾹 눌러준다. 그러면 콩물이 주머니 바깥으로 배어나온다.
이 콩물이 바로 두유(豆乳)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유에 ‘간수(艮水)’를 한 사발 넣고 주걱으로 잘 저어준다.
고염(苦鹽) 혹은 노수(露水)라고도 하는 간수는 소금에서 흘러내린 짜고 쓴 소금물이다.
짚으로 짠 섬(일본말로 가마니)에 염전에서 만든 소금을 넣고 삼발이에 받쳐두면 물이 흘러내리는데, 이것이 바로 간수다.
간수의 주성분은 염화마그네슘이다. 이것이 물에 잘 녹는 식물성 단백질을 응고시켜 준다.
간수를 넣은 함지박의 두유에는 점차 변화가 생긴다. 즉 아래로는 응고된 덩어리가 가라앉고, 위로는 물이 떠오른다.
그 물을 사발로 떠서 버린다.
아래에 제법 덩어리가 생겼으면 이것을 무명으로 만든 주머니에 옮겨 담는다.
아직도 응고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물이 줄줄 흐른다.
함지박 위에 판때기를 올리고, 그 위에 입을 잘 묶은 주머니를 올려놓는다.
다시 판때기를 주머니 위에 올리고, 사람이 그 위에 올라앉는다.
그래도 물기가 빠져나오기 때문에 함지박 옆에는 자배기를 두어 그 물을 받아야 한다.
이 정도 설명을 하면, 독자들은 이 그림의 장면이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더욱이 기산 김준근이 이 장면을 두고 ‘두부 짜는 모양’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도 분명해지리라.
즉 두유에 간수를 넣어 응고된 식물성 단백질이 바로 두부이고, 이것을 짜면 물기가 빠져나온다.
따라서 판때기 위에 올라앉은 사람은 두부 짜는 일뿐만 아니라, 두부 만드는 전체 공정의 책임자이다.
콩을 맷돌에 타고, 콩비지를 끓이고 하는 일 대부분을 그녀가 했을 것이다.
양옆에 서 있는 사람은 이웃이든지 딸이든지 며느리쯤 되어보인다.
두부 짜는 일이 혼자서 하기에 벅차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판때기의 안쪽에는 칼로 줄을 그어놓았다.
두부에 자국이 가게 만들어 칼로 썰 때 줄을 잘 맞추도록 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우물에서 갓 길어온 차가운 물이 담긴 다른 함지박에 아직도 김이 피어오르는 두부 주머니를 넣는다.
두부는 잘 부서지기 때문에 물 속에 넣고 주머니를 벗겨내야 한다.
주머니를 벗기면 마치 아이의 속살처럼 하얀색의 두부가 등장한다.
이것을 칼로 네모나게 잘라 접시에 담으면 두부 제작은 모두 완성된다.
두부는 서기전 2세기 중국 서한(西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 두부에 대한 기록은 명나라 이후 것에서만 등장할 뿐, 실제로 유안은 두
부를 먹어보지도 못했다.
중국인들이 북방의 유목민족과 본격적인 교류를 하기 시작한 때는 남북조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북방 유목민족이 말이나 양의 젖으로 ‘유부(乳腐)’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본 중국인들이, 기왕에 먹고 있던 두유에 간수나 신맛이 나는 산수(酸水)를 넣으면 두부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비로소 두부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두부는 송나라에 들어와서 겨우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졌다.
우리에게 두부 제조기술이 전해진 때도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다.
두부를 처음 맛본 고려 후기 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은 “채소 국에 입맛을 잃은 지 오래 된 지라, 두부를 저며보니 기름진 비계 같이 새롭구나.
더욱이 다시 보니 치아가 드물어도 좋은 듯하니, 참말로 노신(老身)을 보양하는 데 좋겠구나”라고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회갑 잔치나 제사 때 두부를 특별히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간혹 두부를 과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 두고 허준(許浚, 1546~1615)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두부에는 독(毒)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 처방으로 “만약 그런 사람이 술을 마시면 즉사(卽死)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찬물을 마시면 곧 소화가 된다”고 적었다.
두부는 ‘밭에서 나는 쇠고기’인 콩으로 만들었다. 그 콩 중에서도 물에 잘 녹는 단백질만을 뽑아내서 응고시킨 것이 두부다.
조선 사람들은 두부를 다른 말로 황포(黃泡)라고 부르기도 했다. 노란 콩에서 생긴 포말(泡沫)이 두부로 변하기 때문이다.
비록 물거품같이 보이지만, 그 속에서 위대한 발명품, 두부가 나온다.
그러나 아무리 노신(老身)에 좋은 두부라고 해도 과하면 독이 된다.
최근 우리 국민들은 정치적 혼란의 포말 속에서 응고된 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덕에 웃은 자들이여, 너무 자만하면 두부 독에 빠진 사람처럼 즉사할 수 있음을 상기하자!
주영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조교수.
1962년 경남 마산 출생. 서강대 사학과,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중국 중앙민족대학 대학원등에서 공부했다.
『김치, 한국인의 먹거리』『한국의 시장』『음식전쟁과 문화전쟁』『중국, 중국인, 중국음식』등의 책을 펴냈다.
▲김준근 <대장간 그림>
김준근은 호는 기산(箕山)이며 출신배경과 사승관계(師承關係)는 미상이다.19세기 후반 서민들의 생활모습과 민속을 다룬 300점이 넘는 그의 풍속화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1889년 경 부산에서 살 때 선교사 J.S.게일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92년 게일을 따라 원산에 가서 한역 《텬로역뎡(天路歷程)》의 삽화를 맡아 그렸다.
그 외에도 19세기 후반 생업·놀이·형벌·의례 등 서민들의 생활모습과 민속을 담은 300여점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한국을 다녀간 학자나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에 전해졌다.
한국보다는 해외에서 더 잘 알려졌으며, 95년에는 독일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서 그림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국내에는 숭실대학박물관의 풍속첩이 있고, 독일의 함부르크민속박물관 소장 《기산풍속도첩》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명지대학교 박물관에도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바있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 중에는 대장간을 비롯한 일간(工房)의 모습들이 그려진 작품들이 여럿 있다.
대장간 그림에선 대장장이가 집게로 쇳덩이를 잡고 두명의 메질꾼과 함께 작업을 하고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영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예공방(工藝工房)' 작품은 풀무화덕에 각종 집게와 모루, 다듬목을 갖추고 있으며, 주문자인 듯한 여인이 두 장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다.
덴마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라이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질간'이란 작품은 가질틀에 놋그릇을 걸고 칼대를 대어 가질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중에는 '공예공방', '가질간', '동의제련장면', '채광장면'등 대장간(일간)의 모습과 장이들의 작업모습과 현장을 현실감 있게 화폭에 담고 있다.
[참고문헌]
이동주, 『우리나라의 옛그림』, 학고재, 1996.ㆍ홍정실, 『한국의 연장』, 주식회사 한국야금,
1996.ㆍ유홍준, 『조선시대화론연구』, 학고재, 1998.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첩중 <쌍륙>,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시대 : 19세기 후반 작품
채색 : 종이에 담채
크기 : 18cm x 25.5cm
소장처 : 독일 함부르크 인류학박물관 소장
한말의 풍속화가. 김준근(金俊根)의 호는 기산(箕山)이고. 성장 배경은 알 수 없다.
1889년 경 부산에서 살 때 선교사 J.S.게일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1892년 게일을 따라 원산에 가서 한역 《텬로역뎡(天路歷程)》의 삽화를 맡아 그렸다.
그 외에도 19세기 후반 생업·놀이·형벌·의례 등 서민들의 생활모습과 민속을 담은 300여점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한국을 다녀간 학자나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에 전해졌다. 한국보다는 해외에서 더 잘 알려졌으며, 1995년에는 독일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서 그림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국내에는 숭실대학박물관의 풍속첩이 있고, 독일의 함부르크민속박물관 소장 《기산풍속도첩》이 있다. 쌍륙놀이는 장기와 윷놀이의 특성이 혼합된 놀이다.
쌍륙은 중국 한나라의 서역 개척후에 전래된 서역의 유희로 동생이 죄를 지어 옥에 갇혀 참형에 처하게 되자 이때 홀로 여러 무리를 치는 것을 쌍륙(악삭)놀이로 보아 왕에게 풍자한 것이 그 기원이다.
백제시대 때부터 즐겼던 놀이로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민속화에서도 그 놀이모습을 볼 수 있다.인도지방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쌍륙은 동쪽으론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고,서쪽으론 중동지방을 거쳐 유럽, 아프리카지 역까지 전파됐다.
나라별로 놀이방법이 약간 차이가 있으나 지금은 통일된 놀이방법으로 세계선수권까지 개최될 정도이다. 우리의 전통 놀이방법과 비슷한 국제규칙에 따르면 두 사람이 각각 주사위 2개와 자기 말 15개씩을 일정한 방법으로 판 위에 배열한 후 주사위 2개씩을 던져 나온 숫자만큼 자기 말을 이동시켜 판을 돌아 나간다.
상대보다 먼저 자신의 말을 모두 판 밖으로 나가게 해야 이기게 되는데 도중에 상대방의 말을 잡거나 못 가게 막는 등 서로 견제하는 것이 재미있다.
▲기산 김준근의 옛그림중<장기하는 모습> 입니다....
위의그림은 기산풍속도첩중 독일의 박물관에서 발행한 도록에 있는 그림이다.
장기는 전쟁을 본 딴 놀이이다.그 전략과 전술의 구사가 마치 전장 같다.
장기의 기원은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 발생지가 인도와 중국이라는 설이다.
인도에서 장기는 기원전 200년 무렵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떤 왕이 바라문의 고승에게 '생각을 깊이하고 앞을 내다보는 슬기를 갖추되 끝을 미리 알 수 없는 놀이'를 만들라고 명했다. 고승은 이 조건에 알맞는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장기를 창안했다고 한다.
중국 발생설은 춘추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시대는 말 그대로 크고 작은 나라들끼리 뺏고 뺏기는 전쟁의 소용돌이 였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요구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것이 후주의 무제때에 오늘날의 장기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전래되었는데, 조선 중기 이전에는 장기를 상희라고 불렀고 상희는 중국에서 나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기의 종류는 대,중,소 세가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소장기만이 남아 있다.
장기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바둑과 쌍벽을 이루며 대중오락으로 인기를 누려왔다.
바둑이 조용하고 점잖은 놀이라면 장기는 활발하고 서민적인 놀이라 할 수 있다.
바둑은 주로 실내에서 많이 두지만 장기는 밖에서 많이 둔다.
<장기의 기원과 역사>
장기는 약 3천여년전 인도에서 비롯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인도의 불교도(佛敎徒), 즉 승려들이 전쟁이나 살생을 금기(禁忌)로 하는 그들의 계율 때문에 인간 본연의 어떤 파괴 본능을 달래고,수도(修道)를 하는시간외에 잠시라도 세속에 흐르기 쉬운 잡념을 떨어버리기 위해 전쟁을 모의 (模擬)로 한 소재(素材)로 장기가 발명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 따르면 버마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대국(古代國)이었던 “타이링”의 한왕비가 발명 한 것이라 주장한다.
왕을 지극히 사랑한 왕비가 전쟁만을 일삼아 싸움터에만 나다니는 왕을 궁중에 머물게 하기 위해 궁리 끝에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장기라는 것이다.
서양학자들애 따르면 고대 인도에서 지금의 장기의 시조(始祖)인 것이 발명되었는데, 그 최초에 명칭은 챠툴앙가(chaturanga)로서 고대 인도어, 즉 산스크리트어(sanskrit : 楚語)이다. 챠툴(chatur)은 넷(四),앙가(anga)는 원(員)을 뜻하므로 이는 군대의 네가지 구성원인 차(車), 마(馬), 상(象) 보졸(步卒)이니 전군(全軍)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상의 몇 가지 설이 그런데로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두고 있는장기는 역시 중국을 발상지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장기 조각 자체가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을 상징하는 초한(楚漢)으로 새겨져 있는 것만 보아도 짐작 할 수 있다.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년 전인 삼국 시대 이후 인 것을 알 수 있다.
장기는 인도를 발생지로 서양으로 건너간 것은 체스(chess)로 통일되었고, 동양으로 넘어온 것은 중국을 거켜 우리나라와 일본 등지로 전파되어 각기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천 했다. 중국에서는 원래 장기를 “상희(象戱)”라고 하였는데 장기가 지금의 비슷한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육조(六朝) 시대 이후 인 것으로 추측한다.
육조 시대 이전의 것은 중국 학자 유신의 상희(象戱)에 나타난 문헌으로 미루어 지금의 장기와는 다름을 알 수 있고, 그 이후 당(唐)의 증증유 (中憎儒)의 《현경록(玄經錄)》에 나타난 것을 보면, 상희에는 금상(金象). 사장(士將). 천마(天馬). 보졸(步卒) 등이 있고 그 행마법(行馬法)도 지금과 비슷하며, 송대(宋代) 유쥰촌(劉俊村)의 상혁시(象奕詩)에는 포(包), 상(象). 마(馬) .차(車). 사(士). 졸(卒) 등 지금과 같은 말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가장 흡사함을 알 수 있어, 장기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송대 이전일 것이라 추측한다.
또《잠확유서(潛確類書)》에는 기원전 1천8백년경 하(夏)의 폭군 걸왕(桀王)의신하였던 오증(烏曾)이 장기와 바둑을 만들었다고전하며, 《유원총보(類苑叢寶)》에는 진대(晋代) 사람인 도간(陶侃)의 고사가 적혀 있는데 은(殷) 나라의 폭군주왕(紂王)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중국 장기, 곧 동양 장기는 고대 중국 시대인 하(夏)나라나 은(殷)나라 말에 고안된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삼국 시대 초기인 한사군(漢四郡) 시대에 수 많은 한인(漢人)들이 이주해 오면서 장기를 퍼뜨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8년 동안 계속되었던 초(楚)와의 패권 다툼에서 승리하고 난 뒤, 조선에 한사군을 설치하고 자기들의 치열했던 초한전(楚漢戰)의 이야기를 피지배인들인 조선인(韓人)들에게 들려줌으로써 그네 민족들의 우월감을 자랑 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 초한전을 가상하여 우리 체질에 맞는 장기로 연구하고 개량하여 지금 우리가 두고 있는 장기로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의 장기에 관한 문헌으로는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세조실록(世祖實錄)》 등에 상희(象戱)라는 이름 아래 장기에 얽힌 이야기가소개되어 있고 중종대(中宗代)의 문신 심수경(沈守慶)의《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면 비로서 “장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설명하기를 “象棋 用車包馬象士卒 以木磨造 而刻字진彩...皆是消日之戱也”란 기록이 있다.
이밖에 선조 때 장유(장유)의 《상희지(象戱志)》가 있고 장기의명수(名手로는 《식소록(識小錄)》에 전하는 금강산 백전암(白田庵)의 지암대사(智巖大師가있고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소개된 종실 서천령西川令이 특히 유명하여 서천령 수법이라는 장기의묘법을 남겼다고 한다.
▲기산의 풍속도첩중의 춤추는 모양이라는 그림입니다..
복색이나 즐기는 모습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기산김준근의 풍속도첩중 <제기차기>
제기는 엽전이나 구멍이 뚫린 주화를 얇고 질긴 한지나 비단에 접엇 싼 다음 양끝을 구멍에 꿰고 그 끝을 여러 갈래로 찢어서 너풀거리게 한 것인데, 주로 설날에 즐기는 놀이기구이다. 엽전을 종이에 싸거나 실로 꿰어 장식하여 발로 차면서 노는 놀이를 제기차기라 한다.
제기차기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700년 무렵 중국에서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고안된 '축국놀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주로 겨울철에 많이 하며 한 발로 몸을 지탱하면서 다른 발로 제기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차야 하기 때문에 매우 활동적인 놀이라 할 수 있다.
신체 단련이나 인내심과 지구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된다.
이 놀이는 <축구>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축국은 고대 중국에서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행하던 것으로, 넓은 마당에 높은 장대를 여러 개 세워 그 위에 망을 치고, 털로 싼 가죽공을 여러 사람이 다투어 차서 공을 망 위에 얹는 결과로 승패를 짓던 것이었다. 뒷날 공에 바람을 넣어 사용하게 되어 이름도 축구 또는 타구로 바뀌었다.
<구당서>에 고구려 사람들이 축국을 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의 김유신이 축국을 빙자하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어 누이인 문희에게 달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인연을 맺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또한 <수서> <동이전 백제조>를 보면 백제에서도 축국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같이 이 놀이가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행해져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자어 <축국>에 우리말 음을 넣어 <적이>라 했다.
그후 <적이>란 말은 <제기>로 바뀌게 되고, 놀이방법도 공을 차올리는 것에서 오늘에 보이는 소년들의 <제기차기>로 변했으리라는 설도 있다.
▲기산 김준근을 생각하며
일찍이 조흥윤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에 의해 이 땅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기산(箕 山)'이란 낙관이 찍힌 풍속도에는 19세기 말 조선 땅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이 일정한 주제에묶여 도판에 등장한다. 한 장 한 장의 그림을 보면 너무나 정겹기까지 하다.
김준근으로 알려진 기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조흥윤 교수의 『기산풍속도첩(箕山風俗圖帖)』 (범양사 출판부, 1984년)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러나 조교수 역시 그가 원산 사람이며 1886년과 1889년, 그리고 1890년 사이에 부산 초량에 살았으며, 1892년 6월부터 1897년 초까지 원산에 머물었다는 정도를 아는 데 거쳤다.
그 후 기산 김준근에 대한 인물 탐구는 여전히 안개 속에 갇혀 있다.
나는 풍속화가 지닌 사회·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다. 앞으로 이 칼럼에서는 조선후기의 풍속화는 물론이고 20세기 초반의 사진자료, 그리고 고대의 고분벽화 그림에 이르기까지 영상물이 지닌 역사·문화 자료로서의 특성에 대한 많은 사람들과 논의의 장을만들려 한다.
▲죄인 회술레
죄인을 끌고 다니며 우세를 주던 일. 죄인의 팔을 결박하고 등에다 북을 매달아 치면서 동네나 장터를 돈다.
김준근 그림. 『기산풍속도첩』,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
기산 김준근이 조선말에 그린 풍속화 중 죄인에게 북을 짊어지게 하고 거리를 돌게 하는 그림의 일부입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죄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형벌을 내렸습니다.
심지어 죄질이 나쁠 경우 효시(梟示)라 하여 목을 잘라 저잣거리에 걸어 놓기도 했습니다.
▲단오추천, '기산풍속화첩(箕山風俗畵帖)' 중에서,
시대 : 19세기 작품,
재질 : 종이에 채색,
크기 : 31.0cm x 38.7cm
소장 : 개인 소장
기산(箕山)의 성장 배경은 알 수 없다. 1889년경 부산에서 살 때 선교사 J.S.게일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1892년 게일을 따라 원산에 가서 한역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삽화를 맡아 그렸다.
그 외에도 19세기 후반 생업 ·놀이 ·형벌 ·의례 등 서민들의 생활모습과 민속을 담은 300여점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한국을 다녀간 학자나 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에 전해졌다.
한국보다는 해외에서 더 잘 알려졌으며, 1895년에는 독일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서 그림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국내에는 숭실대학교 박물관 에 풍속첩이 있고, 독일의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 《기산풍속도첩》이 있다.
▲신부연석 (新婦宴席), '기산풍속화첩(箕山風俗畵帖)' 중에서,
시대 :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재질 : 종이에 채색,
크기 : 31.0cm x 38.7cm,
소장 : 개인 소장
<시집온 새색시 "큰상" 을 받다>
8폭과 10폭 병풍을 둘러친 대청마루에 여인 셋이 각각 사각 모양을 한 음식상을 받고 앉았다.
병풍 너머에는 댕기머리를 한 소녀들과 사내 아이를 엎고 머릿수건을 한 부인, 그리고 비녀도 없이 머리를 묶어 올린 부인들이 상을 앞에 둔 한 여인을 구경한다.
시종으로 보이는 여자 둘은 사각상을 마주 들고 아직 음식상을 받지 않은 여인을 향해 간다.
네 명의 여인 중에서 오른쪽에 자리를 잡은 이는 나머지 세 사람에 비해 화려한 상을 받았다.
상의 크기도 클 뿐더러 앞쪽 양 모퉁이에는 갖은 꽃이 꽂힌 화병이 놓였다.
생각건대 이 연회에서 주빈(主賓)에 드는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인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19세기 말에 제물포·동래·원산 등지에서 화가로 활동했던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연대 미상)의 그림이다.
그가 그린 이른바 『기산풍속도첩』에는 한문이나 한글로 표제어가 붙어 있는데, 이 그림에도 「신부연석(新婦宴席)」이란 제목이 붙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그림에서 주빈은 초례(醮禮)를 치르고, 신행(新行)을 온 신부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받은 음식상은 다른 말로 ‘큰상’이라 부른다.
보통 신부 집에서 혼례를 마친 신랑·신부는 3일이 지난 후 친정을 떠나 신랑 집으로 간다.
신부는 시가에 오자마자 신랑의 친척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현구고례(見舅姑禮)를 한다.
우선 신부 집에서 장만해온 음식들을 간단하게 차려놓고 시부모부터 시조부모, 백숙부모, 고모 내외에게 절을 올린다.
이때 차려진 음식을 폐백(幣帛)이라 부른다. 현구고례가 끝나면 신부는 시가로부터 ‘큰상’을 받는다.
‘큰상’에는 시집 온다고 고생했다는 치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
보통 신부가 받는 큰상에는 생실과(生實果)·조과(造果)·견과(堅果)·떡·편육·전·포 등이 올라간다.
이들 음식들은 대개 30~60cm 높이로 고여서 고배(高杯)에 담긴다.
만약 식사를 겸하도록 차려질 경우 큰상에는 고배에 담긴 음식이 바깥쪽에 놓여 장식을 이루고, 안쪽에는 김치·찜·신선로·갈랍·식혜·약식 등과 함께 국수장국이 놓여 연회와 더불어 실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구성하기도 한다.
그림에서 신부가 받은 큰상에는 형형색색의 음식들이 백자에 담겼다.
얼핏 보아 자세한 음식의 내용은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각종 음식이 화려하게 차려진 큰상임은 틀림없다.
<축하연에 빠지지 않던 두텁떡>
우선 신부의 큰상 맨 앞줄에는 여섯 가지의 음식이 백자 고배에 담겼다.
보는 쪽에서부터 배·갖은편·두텁떡·약과·송편·인절미 등이 차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서 두텁떡은 조선 후기 소론 계열의 집안에서 많이 해먹던 떡으로 축하 연회가 있을 때 빠지지 않았던 고급 떡이다.
일반적으로 봉우리떡·두텁단자·두텁편의 세 가지 형태로 만들 수 있지만, 봉우리떡이 큰상에 가장 자주 올랐다.
‘봉우리떡’이란 이름은 떡을 쪄낸 모양이 마치 산봉우리처럼 볼록하게 생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찹쌀 한 되, 소금 한 숟가락이 주재료이며, 팥고물 재료로는 회색팥 한 되 반, 재료가 마련되었으면 두텁떡을 한번 만들어 보자.
우선 찹쌀을 깨끗이 씻어서 하룻밤 담갔다가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빼고 소금을 넣어 곱게 빻는다.
다음에 붉은팥을 물에 담가 불린 후 껍질을 벗겨낸다. 이것을 시루에 보자기를 깔고 푹 쪄서 식힌 후 빻아 가루로 만든다.
이것을 다시 솥에 넣고 볶는다. 이러면 팥가루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물기가 완전히 제거된다.
볶은 팥가루에 엷은 계피색이 나도록 계핏가루와 여러 해 묵힌 집진간장을 조금 넣는다.
이것을 골고루 섞어서 중체 정도의 굵기로 된 체에 한 번 내린다. 이러면 팥가루가 완성된다.
이제 소로 쓰일 재료를 장만하면 된다. 호두·밤·대추·유자청의 속을 서로 엉키게 버무린다.
여기에 잣과 계핏가루, 그리고 꿀을 조금 넣고 곱게 반죽을 하면 소도 마련된다.
이렇게 모든 재료가 마련되었으면 시루에 안쳐서 두텁떡을 만들어낸다.
먼저 시루 밑에 보자기를 깔고 준비한 팥가루를 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넉넉히 뿌린다.
그 위에 찹쌀가루 한 숟가락을 떠서 놓고, 다시 그 가운데에 작은 숟가락으로 소를 한 번 떠서 놓은 다음, 다시 찹쌀가루 한 숟가락을 떠서 소를 덮어 봉우리처럼 볼록하게 만든다.
여기에 쌀가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시 팥가루로 위를 덮는다.
이렇게 ‘한 켜 한 켜’ 쌓아올린 다음 시루에 뚜껑을 덮어 푹 쪄서 뜸을 들인다. 이러면 황금색의 두텁떡이 완성된다.
이것을 백자 고배 위에 가지런히 쌓아올리면 그 모양이 먹음직하면서도 큰상을 빛나게 만든다.
큰상의 두 번째 줄에는 보시기가 아홉 개 놓였다.
아마도 이 그릇들에는 간장·초간장·무김치·나박김치·무나물·호박나물·죽순나물·동과선·다시마좌반 등이 놓이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 중 동과선은 박과에 속하는 동과(冬瓜)로 만든 음식이다.
동과의 껍질과 속을 벗겨내면 흰 박이 나오는데, 이것을 기름에 볶은 후 잣가루에 붙여서 만든다.
식사를 하는 데 이 음식들은 반찬으로 마련되기도 하지만, 연회에서 상의 색을 형형색색으로 꾸미는 데 일조를 하기도 한다.
세 번째 줄에는 백자 고배에 담긴 일곱 개의 음식이 그림에 보인다. 주로 조과와 다식, 그리고 유밀과 따위가 놓인 것 같다.
이 중에서 유밀과와 다식은 잔칫상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주지하듯이 유밀과는 밀가루를 꿀과 참기름으로 반죽하여 식물성 기름에 지져 꿀에 담가서 만든다.
모양에 따라 모가 지면서 크게 만든 모약과, 다식판에 박은 것은 다식과, 만두 모양으로 만든 만두과, 그리고 약과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다식은 쌀·밤·콩 등의 곡물을 가루내어 꿀이나 조청에 반죽을 한 후 다식판에 박아서 만든 음식이다.
다식판의 모양에 따라 글자나 꽃 혹은 기하 문양 등이 양각으로 드러난다.
이들 음식은 고려시대 이후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올랐다.
모두 어떤 일을 기념하거나 축하를 할 때 상징으로 쓰였던 음식이다.
밀가루·꿀·참기름 따위가 그 시대에는 무척 비싼 것이었고, 맛도 달콤하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신부가 앉은 제일 안쪽에도 백자 그릇이 여러 개 보인다.
그 모양이 보시기와 닮은 것도 있고, 고배에 잔이 올라 있는 것도 있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아볼 수 없다.
보통 큰상의 제일 안쪽에는 밥과 국 혹은 국수장국이 놓인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의 상을 살펴도 밥그릇이나 국수장국을 담은 그릇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의 음식상에는 이들 음식이 차려지지 않은 듯하다.
역시 김준근이 그린 「신랑연석(新郞宴席)」이란 표제어가 붙은 그림에도 끼니가 될 만한 음식이 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림의 큰상은 오로지 신부의 시가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 음식만 차려진 듯하다.
<좌불안석할 수밖에 없는 신부>
그런데 큰상을 받은 신부는 그다지 기쁜 표정으로 앉아 있지 않다.
더욱이 신부의 오른쪽에 앉은 두 여인은 매서운 눈매로 신부를 겨냥하고 있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일까?
신부와 마찬가지로 저고리 위에 배자(褙子 : 추울 때에 부녀자들이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 조끼와 비슷하나 주머니와 소매가 없으며, 겉감은 흔히 양단을 쓰고 안에는 토끼, 너구리 따위의 털을 넣는다-편집자 주)를 걸쳤다.
얼굴의 형상으로 보아 신부와 비슷한 연령인 듯하다.
아마도 신랑의 형수, 즉 신부의 윗동서들이 아닐까?
이들은 도대체 자신들의 집에 들어온 새 식구의 품성이 어떠한지를 살피는 듯 마치 ‘입시면접관’의 자세로 신부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니 갓 ‘현구고례’ 과정을 통해 이미 지쳐버린 신부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화려한 큰상이 앞에 놓였지만, 이들의 따가운 시선으로 인해 몸 둘 바를 모를 뿐이다. 더욱이 신부의 맞은편에는 가장 어려운 상대인 시어머니도 앉아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익히 아는 얼굴이 없으니 비록 이 연회의 주빈이지만 신부는 그야말로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원래 현구고례(見舅姑禮)란 글자에서 구(舅)는 외숙부, 고(姑)는 고모를 뜻한다.
일가친척 중에서 비록 같은 집에 살지는 않지만,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외숙부와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고모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신부에게 친척 관계를 확인시키기 위해 이러한 관습이 생겼다.
그런데 신랑 집의 식구가 많으면 신부에게 현구고례는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시가의 모든 친척들에게 매번 절을 하여 ‘신고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구고례가 끝나고 신부에게 ‘큰상’을 내리는 이유 역시 이렇게 고역을 치른 신부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시집살이를 위로하기 위해서다.
사실 17세기까지만 해도 조선의 신부들은 혼인을 하자마자 시가로 신행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혼인을 해도 신부의 집에 그대로 머물러서 아이까지 낳았다. 오히려 신랑이 처가살이를 했다.
당연히 친정 부모의 유산 상속에서 딸들이 빠지지 않았다. 이런 탓에 친정 부모의 제사도 딸과 아들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그러나 가부장제를 가족 꾸리기의 신조로 삼았던 19세기 조선의 신랑들은 더 이상 장가를 가지 않았다.
그 결과 신부들은 ‘시집의 귀신’이 되어야 했고, 친정에서 발생하는 일에는 결코 끼어들 권한도 없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의 주된 경향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처가 근처에 사는 신랑들이 늘어나고, 친정의 재산이 시집 간 딸들에게 나누어진다.
이런 마당에 문중의 재산을 두고 시집 간 딸들을 서운하게 하면 되겠는가? 이제 시집은 물론이고 친정에서 ‘큰상’을 내려 한국의 어머니들이 치른 노고에 대해 치하할 때가 되었다.
<해설출처: 주영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조교수>
▲김준근의 <잡아딜이고(잡아들이고)>
구한말 때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남긴 ''잡아딜이고'(잡아들이고)라는 제하 형벌 풍속화.
법집행을 맡은 사령(使令)이 범인의 상투를 한 손으로 잡아 챈 채 끌고가는 모습이다.
구한말 때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스왈른 목사 수집본으로 지난해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기증됐다.
▲김준근 <태장치고 - 곤장치고>
구한말 때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남긴 '태장치고'(곤장치고)라는 제하 형벌 풍속화. 법집행을
맡은 사령(使令)이 어깨를 드러낸 채 십자형 형틀에 묶인 죄인의 볼기를 회초리로 친다.
구한말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스왈른 목사 수집본으로 2013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기
증됐다.
▲구한말 때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남긴 ''권장치고'(곤장치고)라는 제하의 형벌 풍속화이다.
법집행을 맡은 사령(使令) 두 명 중 한 명이 어깨를 드러낸 채 죄인의 볼기를 곤장으로 친다.
이 때 사용하는 곤장은 버드나무로 넓적하게 만 든 것으로 볼기 치는 숫자는 죄의 경중에 달려있다.
구한말 때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스왈른 목사 수집본으로 지난해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기증됐다.
▲김준근의 <주리 틀고>
구한말 때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남긴 '쥴이틀고'(주리틀고)라는 제하 형벌 풍속화이다.
죄인이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의 발목에다가 묶은 줄을 그 전면에 박아놓은 말뚝에다 다시 묶어 놓은 점이 조금은 이채롭다.
구한말 때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스왈른 목사 수집본으로 지난해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기증됐다.
▲구한말 때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남긴
'잡아딜이고'(잡아들이고)라는 제하의 형벌 풍속화.
법집행을 맡은 사령(使令)이 범인의 상투를 한 손으로 잡아 챈 채 끌고가는 모습이다.
구한말 때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스왈른 목사 수집본으로 지난해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기증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