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시문집 제12권 / 서(序)
우후(虞侯) 이중협(李重協)을 증별(贈別)하는 시첩(詩帖)의 서(序)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이란 즐거움의 뿌리이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이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낳는 이치는 동(動)과 정(靜), 음(陰)과 양(陽)이 서로 그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사리에 통달한 이는 그러한 이치를 알아서, 의복(倚伏)의 이치를 살피고 승제(乘除)의 운수를 헤아려, 어떤 상황에 대응하는 내 마음이 항상 대중의 마음과는 서로 반대되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그 취향을 나누고 기세를 줄이게 되는데, 이는 마치 흔하면 비싸게 사들이고 귀하면 싸게 팔아서 물가를 항상 고르게 하는 경수창(耿壽昌)의 상평법(常平法)처럼 하는 것이니, 이것이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내가 처음 성안에 있을 적에는 항상 답답하여 마음이 시원하지 않았는데, 다산(茶山)에 옮겨 살게 되어서는 안개와 놀을 마시고 꽃과 나무를 구경하니, 귀양살이하는 시름을 호연히 잊게 되었다. 이는 곧 즐거움이 괴로움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 뒤에 도강병마우후(道康兵馬虞侯) 이군 중협(李君重協)이 우거진 숲, 그윽한 시냇가로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돌아가고 나서는 편지를 날마다 보내오는가 하면, 조각배로 조수(潮水)를 타고 뱃놀이를 하거나 한 필의 말을 타고 봄놀이를 즐기기 위해 거르는 달이 없이 자주 찾아왔는데, 이와 같이 한 지가 지금 3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임기가 차서 교체되어 이곳을 떠나게 되자 술자리를 마련하여 나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 뒤부터는 내가 비록 종이나 먹 등 필기구가 있으나 누구와 함께 글을 써서 주고 받겠으며, 또다시 거마(車馬) 소리 울리면서 다산 골짜기를 찾아올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을 생각하니 서글프다. 이것은 또 괴로움이 즐거움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이란 즐거움의 뿌리이니, 가령 내가 살아서 열수(洌水)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군(李君)도 그때 휴직(休職)하게 되어, 남주(藍洲)ㆍ벽계(檗溪) 사이로 나를 다시 찾아와서 산나물ㆍ생선회로 즐겁게 밥상을 마주하게 된다면 이것은 또 즐거움이 괴로움에서 생기는 것이다.
나의 벗은 슬퍼하지 말게.
가령 우리 두 사람이 평소 바라던 바와 같이 말을 타고 서로 왕래하게 된다면 절제 없이 놀고 즐기다가 싫증이 나서 또한 즐거운 줄을 모르게 될 것이다. 거센 여울과 잔잔한 물결이 서로 뒤섞임으로써 물이 이것으로 무늬를 이루고, 느릿한 각성(角聲)과 급한 우성(羽聲)이 서로 어울림으로써 음악이 이것으로 문채를 이루는 것이니, 나의 벗은 슬퍼하지 말게.
이군(李君)이 작별의 사연을 써주기를 청하므로 절구(絶句) 10수를 지어 그 사실을 서술하고, 그 시권(詩卷)의 머리에 이와 같이 쓴다.
계유년(1813) 6월에 지음.
[주해]
[주-01] 의복(倚伏) : 화와 복이 서로 인연이 되어 생기고 없어지는 것.《노자(老子) 제58장》에 “화는 복이 의지해 있는 곳이고, 복은 화가 숨
어 있는 곳이다.” 하였음.
[주-02] 승제(乘除) : 성쇠(盛衰 성함과 쇠함)와 같은 뜻으로, 승(乘)은 성함에 해당하고, 제(除)는 쇠함에 해당함.
[주-03] 경수창(耿壽昌) :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 산수(算數)에 능하고 장사의 재간이 있었음. 대사농 중승(大司農中丞)이 되어 상평창의
제도를 창안하였음.《漢書 卷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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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협『李重協,1681년(숙종 7)~미상)』의 조선후기 대사간, 공조참판,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화중(和仲). 사간원정언 이익(李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인실(李仁實)이고, 아버지는 이병(李炳)이며, 어머니는 김진원(金振元)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15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1717년 사헌부지평에 오르고, 동지사 유명웅(兪命雄)을 따라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경종의 비 단의빈 심씨(端懿嬪 沈氏)가 죽자 대전(大殿)인 숙종의 며느리에 대한 복상이 부장기(不杖朞: 오복(五服)의 하나)로 결정되자, 대공복(大功服)으로 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719년 흉년을 당하여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에서 공명첩(空名帖)을 발행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상소하였다. 1722년(경종 2) 이후 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는데, 대간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 하여 의금부에 갇혔다가 석방되더니 해남으로 귀양가고 다시 경원(慶源)으로 이배되었다.
1728년(영조 4) 승지를 거쳐 1736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1745년 대사간·공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