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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봉상시정 죽창 이시직 행장
(通訓大夫 奉常寺正 竹窓 李時稷 行狀
선부군(先府君)의 휘는 시직(時稷)이고 자는 성유(聖兪)이며 성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唐)나라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가 소정방(蘇定邦)의 부장(副將)으로 백제를 평정한 뒤에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신라에 벼슬하여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드디어 연안인(延安人)이 되었다고 한다.
연안 이씨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관작(官爵)을 세습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는 석형(石亨)이고 호는 저헌(樗軒)인 분이 나와 연달아 생원, 진사, 대과(大科) 등 세 시장(試場)에 장원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冊錄)되어 작위가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이르고 시호는 문강(文康)인데, 문장과 훈업(勳業)이 일세를 압도하였다.
이분이 휘 혼(渾)을 낳았는데 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공이 휘 수장(壽長)을 낳았는데 대호군을 지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바로 부군의 고조이시다. 증조 휘 기(巙)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성대한 명망이 있었고, 홍문관 정자를 거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별세하였는데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祖) 휘(諱) 정현(廷顯)은 군수로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는데, 계부(季父) 감찰공 의(嶬)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고 휘 빈(賓)은 기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동년배들의 추중(推重)을 받았고, 성균관의 추천으로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전원으로 돌아와서 한가로이 지내다가 별세하셨는데,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목사 이공 응기(李公應麒)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셨는데, 바로 계양군(桂陽君) 증(璔)의 후손으로 세종대왕의 6대손이시다. 부군께서는 융경(隆慶) 임신년(壬申年,1572, 선조 5) 8월 18일에 서울 반송리(盤松里)의 외가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릴 때부터 이미 두각을 드러내어, 총명하고 민첩하며 기억력이 뛰어나서 말을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당시 동년배들이 모두 미칠 수 없다고 떠받들었다.
겨우 10세 때에 강동(江東)으로 부임하는 군수공을 따라갔다. 이때 조공 호익(曺公好益)이 그곳에 귀양 와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산 선생(芝山先生)이라 호칭하였다. 수학(受學)하기 위해 찾아오는 자들이 매우 많자, 조 선생은 조사(造士: 학문에 통달한 사람)의 규칙을 게시하고서 진퇴읍양(進退揖讓)의 예절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가르쳤다. 부군께서도 가서 배우기를 청하니, 조 선생은 부군을 한 번 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겨 두려운 후생(後生)이라고 칭찬하며 허락하였다.
군수공의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오려 하자, 조 선생이 부군에게 “이곳에 몇 년을 더 머문다면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부군은 오랫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있게 될 것을 곤란하게 여겨 사절하셨다. 그러나 부군께서는 이 일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셨다.
조 선생이 별세한 뒤에는 제문을 지어 그의 무덤에 가서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고, 기일(忌日)을 당하면 소찬(素餐)을 드시며 사모하셨다. 얼마 뒤에 다시 사계 선생에게 가서 공부하셨는데, 이때부터 화려한 명성(名聲)이 날로 드러났다. 임진년(壬辰年,1592, 선조 25)에 왜란이 일어나자, 온 가족을 이끌고 회덕(懷德)으로 낙향(落鄕)하셨다가 다시 옮겨 영서(嶺西)로 들어가셨다.
무술년(戊戌年, 1598)에 모친상을 당하셨는데, 이때는 난리 중이라 염(殮)과 빈(殯)을 제때에 할 수 없어서 5, 6일이 늦어졌고, 날씨마저 혹독히 추워서 사람들은 견뎌 내지 못했으나 부군께서는 홀로 쌓인 눈 위에 거처하며 끊임없이 통곡하셨다. 부형과 종족이 모두 말렸으나 조금도 늦추지 않으셨고, 영구(靈柩)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정성을 다해 장사 지내셨다.
병오년(1606년 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기유년(己酉年,1609, 광해군 1)에 회덕의 선비들과 함께 정문익『鄭文翼: 정광필(鄭光弼)』. 김충암『金冲庵: 김정(金淨)』. 송규암『宋圭庵: 송인수(宋麟壽)』 등 삼현(三賢)의 사당을 중수하고서 상소하여 조정에 편액(扁額)을 청하니, 숭현(崇賢)이란 액호(額號)를 내렸다.
계축년(1613년 광해 5)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상사와 제사를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라 행하였다. 집안에 마마를 앓는 사람이 있으면 제사 지내고 곡(哭)하는 것을 금기하는 것이 일반의 풍속이었으나, 부군께서는 자식과 동생이 마마에 걸려 증세가 매우 위독한데도 한결같이 예제대로 행하셨다. 광해군 말년에 사람의 도리가 날로 무너지니, 부군께서는 드디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셨다.
이때 요직에 있는 동향 사람 황덕부(黃德符)가 부군을 끌어들이려고 하루는 찾아와서 온갖 말로 혹은 꾀기도 하고 혹은 위협하기도 하면서, 생사를 함께하기를 원한다고 하자, 부군께서 웃으시며 “사는 것은 좋지만 죽는 것은 괴롭다.”라고 하니, 황덕부는 실망하는 기색을 지으며 돌아갔다. 사람들은 모두 부군을 위태롭게 여겼으나, 부군께서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으셨다.
세 그루의 소나무 밑에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창문 앞에 대나무를 심고는 삼송(三松)이라 자호(自號)하고, 또 죽창(竹窓)이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좌우에 도서를 비치하고 그 사이에서 시문을 읊조리며 지내셨다. 이때 표숙(表叔) 송공 이창(宋公爾昌)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서로 지기(知己)로 여겨 항상 서로 방문하여 마주 보며 하루가 다하도록 함께 지내면서도 싫증을 느끼지 않으셨다.
혹은 수석(水石) 사이를 거닐며 마음을 세상 밖에 던지고 다시 당세에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그런 지 10여 년 만인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여 조정이 다시 깨끗해지니, 즉시 부군을 천거하여 사축서 별제에 제수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1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니, 성상께서 공주(公州)로 거둥하셨는데, 부군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扈從)하셨다. 여름에 종묘서 직장으로 승진하시자, 어떤 한 관료가 멸시당한 원한을 품고서 부군을 정공 엽(鄭公曄)에게 무고하니, 정공은 당시 사헌부 대사헌으로 부군을 탄핵해 논죄하였는데, 뒤에 잘못을 크게 깨닫고는 연석(筵席)에서 스스로 사과하고서 부군께 친분을 맺자고 강요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10월에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셨으나, 당시에 ‘괴원(槐院)에 뽑히는 사람 중에는 연줄로 뽑히는 자가 많다’라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부군께서는 마음속으로 더럽게 여겨, 문을 닫고 들어앉아 조용히 지내셨다. 마침내 성균관에 보임(補任)되시니, 물의(物議)가 불만으로 여겼다. 얼마 되지 않아 호종한 공로로 6품에 올라 전적에 제수되셨다가, 사헌부 감찰을 거처 병조 좌랑으로 옮기셨다.
이듬해 겨울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셨는데, 목성선(睦性善) 등이 상소하여 불안을 야기하니, 부군께서 동료들과 협의하여 그 소(疏)를 불사르기를 청하셨다. 성상께서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니, 즉시 사퇴하고서 반년 넘게 산관(散官)으로 지내셨다. 병인년(1626) 여름에 비로소 공조 좌랑에 제수되셨다가 이내 병조로 옮기셨다. 가을에 명을 받고 영남(嶺南)으로 가서 시사(試士)하셨다.
이때 선비들의 풍습이 들뜨고 경박하여 대체로 과장(科場)이 소란하였으나, 부군께서 온화하게 진정시키고 공정하게 사람을 뽑으시니, 식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정묘년(1627년 인조 5) 1월에 금(金)나라 오랑캐의 침입으로 인해 성상께서는 강도(江都)로 거동하셨는데, 이때 부군이 또 호종하셨다. 다시 정언(正言)에 옮겨 제수되고, 적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자고 위협하며 성상께서 직접 나와 맹약에 입회(立會)하기를 강요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려 하자, 부군께서는 여러 동료들과 합문(閤門) 밖에 엎드려 항론하였는데, 그 대략에, “백 년 동안 예의를 지켜온 나라와 당당한 천승(千乘)의 임금으로 어찌 견양(犬羊) 같은 오랑캐와 맹약을 맺을 수 있습니까. 더구나 이 적은 명(明)나라와 원수이니, 이는 바로 부모의 원수입니다. 자식이 비록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부모의 원수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까. 나라가 망할지언정 화친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고, 교체하여 전적에 제수하였다. 4월에 화의(和議)가 성립되어 성상께서는 환도하셨다. 5월에 병조 정랑에 제수되셨으나,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오셨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여산 군수(礪山郡守)에 제수되셨다. 여산군은 남쪽 변방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 위치하여 부역이 번거롭고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였다. 부군이 부임하셔서는 많은 폐습(弊習)을 혁파하고 선정을 많이 행하셨다.
강유(剛柔)를 겸용해 다스려 백성을 집안 식구처럼 사랑하니, 1년도 되기 전에 정치가 깨끗해지고 일이 잘 거행되어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고, 산사(山寺)의 승려까지도 모두 부군을 사랑하고 추대하였으나, 무진년(1628년 인조 6) 가을에 병으로 벼슬을 내어놓고 돌아오셨다.
여산 백성들은 차류(借留)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로 가에 큰 비석을 세워 부군을 추모하였다. 그리고 후에 부군의 상사 소식을 듣고는 모두 탄식하며 조상(弔喪)하였는데, 비록 난리 중이었지만 각각 쌀과 베를 가지고 와서 부조하였다.
부군께서는 회덕의 향리로 돌아오신 뒤에 부로(父老)들과 상의하기를, “일명지사(一命之士 하급 관리)라도 애물(愛物)에 마음을 둔다면 반드시 사람을 구제할 것인데, 더구나 본래부터 사부(士夫)의 고장으로 이름난 이곳에 의약(醫藥)의 방문(方文)이 없어서 요사(夭死)하는 자가 많으니, 동포들이 편안히 살도록 구제할 방법을 꾀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서, 함께 재물을 내어 국(局 관리하는 사무소)을 설치하여, 서제(庶弟) 등에게 그 일을 맡아서 처리하도록 하셨는데, 이 고장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기사년(1629년 인조 7) 겨울에 성균관 직장에 제수되셨다가 이내 사예(司藝)로 승진하셨고, 경오년(1630년 인조 8) 봄에 정언에 제수되셨다가 이내 체직되셨으며, 가을에 도로 정언에 제수되셨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셨다. 겨울에 내자시 정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셨고, 신미년(1631) 여름에 체직되어 상의원 정에 제수되셨다.
임신년(1632년 인조 10) 여름에 시강원 필선으로 승진하셨으나 이내 병으로 사직하셨다. 체직되어 장악원정에 제수되셨는데, 갑술년(1634) 가을에 정해진 달수가 되어 제용감으로 옮기셨다. 을해년(1635) 여름에 장령에 제수되셨는데, 체직되어 사예에 제수되셨다가 이내 장령으로 복귀하셨다.
이때 태학생(太學生)들이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채진후(蔡振後) 등이 앞장서서 현인을 모욕하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상소하였다. 그러자 태학이 시끄러워서, 증광시가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관시(館試)를 열지 못하니, 성상께서 관시의 폐지를 명하셨다.
그러자 조정의 의론이 두 갈래로 갈려 대각(臺閣)이 텅 비니, 부군께서 홀로 아뢰기를, “증광시에 앞서 관시가 있는 것은 고칠 수 없는 조종의 법인데, 관시의 액수는 줄이고 증광시의 액수는 그대로 두었으므로 전국 선비의 절반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였으니, 인재를 널리 취한다는 뜻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다만 요행의 길이 열려 염치의 풍속을 손상시킬 뿐이니, 모두 합격을 취소하고 다시 시취(試取)하소서.”라고 하셨다. 이 건의가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논하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이에 앞서 정승 윤방(尹昉)의 증손자 세창(世昌)이 숙모(叔母)가 죽어 염(殮)도 하기 전에 감히 아내를 맞아들인 일이 있었다. 부군께서는 항상 이 일을 분개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창의 아비를 수령에 임명해 부임시키려 하니, 부군께서는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숨김없이 말하여 서경(署經)의 기한을 넘기도록 하셨다.
그리고 또 호남(湖南)의 토호(土豪) 송흥길(宋興吉)이란 자가 제 고장에서 권세로 백성을 억압하니, 부군께서는 또 그의 죄를 논하여 사변(徙邊)시키셨다. 이내 체직되셨다가 다시 임명되셨다. 이런 경우가 모두 여섯 번이었는데, 그 사이에 내자시와 사복시 정(正), 성균관 사예에 제수되기도 하셨다.
병자년(1636년 인조 14) 여름에 봉상시 정에 제수되셔서는 인재를 천거하라는 성상의 명을 받들어 권시(權諰)의 재학(才學)과 조완배(趙完培)의 모용(謀勇)이 세상의 쓰임에 이바지할 만하다고 천거하셨다. 어떤 동료가 간교한 아전에게 무함당한 것을 부군께서 적발하여 그 아전의 죄를 다스리셨는데, 그 아전의 날조로 인해 제조(提調)가 부군의 고과(考課)를 중(中)으로 매기자, 부군께서는 즉시 벼슬을 버리고 출사(出仕)하지 않으셨다.
10월에 정공 온(鄭公蘊)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그 내용을 살펴 알고는 도로 본직(本職)에 제수하여 전일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12월에 오랑캐가 대군을 이끌고 갑자기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온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京畿)에 박두하였다. 대전(大殿)과 중전(中殿)이 강도로 피란하기 위해 길을 떠나 남문(南門)에 이르렀을 때 적정(賊情)에 대한 보고가 더욱 급박하니, 길을 돌아 동문(東門)을 경유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서 백료(百僚)들은 허둥대느라 이때에 미쳐 온 사람이 드물었다.
이때 부군께서는 서문(西門) 밖에 거처하고 계셨는데, 변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서 남문을 들어서자, 성상께서는 이미 나가시고 문도 이내 닫혔으므로 부군께서는 나오실 수 없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동문이 잠시 열리므로 부군께서는 즉시 달려 동교(東郊)에 도착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이날이 14일 갑신이었다. 이튿날 새벽에 광나루를 건너 행재소(行在所)로 가려 하셨는데, 이때 적이 화친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꾀니 조정은 그 말을 믿고 호조 참의 남선(南銑)을 보내어 뇌물을 주고서 화친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는 남공(南公)이 도중에서 부군을 만나 말해 준 것이다. 남공은 또 성상께서 강도로 옮기려고 이미 남한산성을 떠났다고 하였다.
부군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길목에서 성상을 기다릴 생각으로 즉시 말 머리를 돌려 과천(果川)을 향해 떠나셨는데, 노량진(露梁津)에 도착하니 뒤쳐진 재상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곳에서 비로소 성상께서 강도로 옮길 계획을 중지하였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부군께서 제공(諸公)에게 “어디로 가겠는가. 죽음을 무릅쓰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니, 제공이 모두 “종묘ㆍ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 및 여러 대군(大君)이 다 강도로 들어갔으니, 강도로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군께서는 몹시 분개하며 “지금 임금님이 어디에 계신데,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는가.”라고 하고는 홀로 말을 몰아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길을 떠나셨는데, 적군이 이미 사방에 널려 있었다. 도중에서 갑자기 적군을 만나 거의 위험에 빠졌다가 겨우 탈출하여, 사이 길로 용인(龍仁) 경계에 이르러 뜻밖에 가족들과 만나셨다.
불초(不肖)한 내가 눈물을 흘리며 “사태가 매우 급박하여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민(士民)을 격려하고 의병을 고무하여 후일을 도모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아뢰자, 부군께서는 준엄한 말씀으로 거절하시고는 옷깃을 뿌리치고 가족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않으시고 떠나시어, 드디어 남한산성의 동문(東門)으로 향하셨다.
그러나 이미 도로가 막혀 들어갈 수 없자, 부군께서는 통곡하고서 부득이 발길을 돌려 수원(水原)을 경유해 장차 강도로 들어가서 참의 심지원(沈之源), 수찬 이일상(李一相), 풍덕 군수(豐德郡守) 이공 성연(李公聖淵) 등과 더불어 호서(湖西)ㆍ호남(湖南)에 격문(檄文)을 지어 보내어 그곳 사람들을 고무시키려 하셨다.
남양(南陽)에 당도하니 판서 조익(趙翼)과 교리 윤명은(尹鳴殷)이 이미 먼저 와서, 부백(府伯) 윤공 계(尹公棨)와 의병을 모아 임금의 위급함에 달려가기를 계획하고 있으므로 부군께서도 그곳에 머물면서 그 일을 함께 하기로 하셨다. 그런데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부백이 갑자기 적을 만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으니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부군만은 홀로 정색하고서 “옛말에 남아는 깨끗하게 죽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윤신백(尹信伯 윤계)이 그렇게 죽었다. 한 번 외로운 남한산성을 바라보라. 지금이 어찌 신하가 구차히 살기를 구할 때인가.”라고 하셨다. 정축년(1637년 인조 15) 정월 초하룻날에 조 판서(趙判書) 등 제공(諸公)과 함께 배 안에서 망궐례(望闕禮)를 거행하였는데, 부군께서는 북쪽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통곡하고 나서 “내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다.”라고 하셨다.
이때 마침 고향으로 가는 인편이 있으니, 어떤 이가 부군께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쓰라고 권하자, 부군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하시며 “집에는 자식 놈이 있어서 제 어머니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구구하게 그리워하는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내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다.” 하시고는 끝내 한 글자도 전하지 않으셨다.
부군께서 평소 조갈병(燥渴病 당뇨병(糖尿病)으로 고생하시니, 어떤 사람이 오미자차(五味子茶)를 보내오자, 부군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시며 “지금이 어찌 약을 먹으면서 병을 조리할 때이냐.”라고 하시고는 드디어 제공과 함께 강도로 들어가기 위해 길을 떠나셨다.
이때 부군께 병환이 있었는데 바람과 눈이 심하게 몰아쳤으므로 윤공 명은(尹公鳴殷)이 잠시 머물러 조리하기를 청하니, 부군께서는 일어나서 말하기를, “반드시 강도로 가려는 것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시고는 드디어 병을 참고 배에 오르셨다.
이때 김경징(金慶徵), 이민구(李敏求) 등이 검찰사(檢察使)로 강도의 일을 관장하고 있으면서, 군대를 징발하여 수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날마다 술에 취해 방자하고 사납게 날뛰며 원로대신까지도 능멸하니, 부군께서 탄식하기를, “사람의 계책이 좋지 못하여 장강(長江)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도 얼마 보존하지 못할 것이니,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를 탓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시고는 늠료(廩料)를 받지 않으시고 종자(從者)들에게 품을 팔아먹도록 하셨다. 21일 신유일에 적이 갑자기 병선(兵船)을 모아 갑곶 나루로 몰려오자, 이경징 등은 겁을 먹고 허둥대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제장(諸將)들은 적의 기세를 바라만 보고도 놀라 도망치고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이튿날 정오에 상국(相國) 김상용(金尙容)은 남루(南樓)에 불을 질러 스스로 분사(焚死)하였고, 성중 사람들은 손을 놓고서 적의 칼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원임 영상(原任領相) 윤방(尹昉)과 승지 한흥일(韓興一) 등이 두 대군(大君)을 모시고 나아가서 적을 영접하니, 적장이 무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와서는 대궐을 동서로 나누어 자신은 정전으로 들어가 거처하고, 빈궁(嬪宮)과 대군은 서쪽 궁궐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졸개를 시켜 궁문(宮門)을 지키게 하고, 또 군대를 풀어 사방을 둘러싸고서 우리 쪽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고서, 스스로 신표(信標)라는 것을 만들어 겨우 궁중의 명을 전하도록 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부군께서는 필선 윤전(尹烇), 주부 송시영(宋時榮) 등 두 공과 더불어 스스로 처신할 방법을 상의하셨는데, 송 주부가 “우리가 이런 꼴을 보리라고 어찌 짐작이나 했던가.
어제 죽지 않았다가 오늘 적의 핍박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은가.”라고 하자, 윤 필선이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가리키며 “이것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라고 하니, 부군께서 “우리는 평소 고인(古人)의 글을 읽은 사람으로 오늘과 같은 사태를 당하였으니, 신하로서 살기를 바라겠는가. 어젯밤에 소나무 사이에서 자결하려 하다가 하리(下吏)에게 들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라고 하셨다.
혹자가 말하기를, “적이 장차 빈궁과 대군의 행차에 종자(從者)를 선발해서 신표를 주려 한다.”라고 하자, 모든 사부(士夫)들이 앞 다투어 신표를 얻어 죽음을 면하고자 하니, 부군께서는 웃으시며 “종묘(宗廟)가 망하였는데 신표를 얻어 구차히 살기를 탐한다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나는 이미 결정하였다.”라고 하셨다. 심공 지원(沈公之源)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성 북쪽으로 나갈 수 있으니, 공과 함께 갔으면 한다.”라고 하자, 부군께서 대답하시기를, “공은 나이가 젊고 기력이 강성하니, 떠나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이 늙은이가 어디로 가겠는가. 길에서 엎어져 죽는 것보다 조용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심부름 온 사람이 돌아가 보니 심공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부군께서는 송공과 한날 자결하기로 약속하시고는 집으로 보내는 편지와 일기(日記) 등 제반 문자를 두 동복(僮僕)과 관인(館人)에게 나누어 주시며 “너희들이 다 죽지는 않을 것이니, 이 결서(訣書)를 우리 아이에게 전해 주면 좋겠다.”라고 하셨는데, 그 편지에, “국가의 불행이 끝이 없어 강도마저 함락되었다.
오늘 적이 이미 대궐을 점거하였으니, 내일이면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모욕이 있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 무선(茂先)과 함께 자결하기로 한 것은 이세(理勢)로 보아 당연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그런데 너희들이 만약 지나치게 슬퍼하여 건강을 해친다면 효도가 아니니, 내가 죽어서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다만 선인(先人)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이 한스러우니, 사변이 평정된 뒤에 너희들이 아무 묘소에 비석을 세우면 매우 다행이겠다.
형님을 뵙지 못한 지가 10년인데 지금 영결(永訣)을 고하게 되었으니 한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하겠느냐. 명보(明甫)가 전에 나에게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권할 때 나도 그럴 의사가 있었으나, 일찍이 결정하지 못하다가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말해 무엇 하겠느냐. 다시는 명보를 만날 수 없으니, 이런 나의 마음을 그에게 전하라. 두 서모(庶母)를 항상 염려해 잊지 못하였는데, 돌보아 드리지 못하고 이에 이른 것이 더욱 한스럽구나. 나머지는 다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무선(茂先)은 송공 시영(宋公時榮)의 자이고, 명보(明甫)는 송준길(宋浚吉)의 자이다.
이날 밤에 송공이 먼저 자결하니, 부군과 윤공(尹公)은 서로 끌어안고 통곡한 다음 손수 염빈(殮殯)하셨다. 그런 뒤에 두 노복(奴僕)을 시켜 그 빈소 곁에 구덩이 하나를 파게 하시고는 “내가 죽거든 이곳에 임시로 묻어 우리 아이가 수습(收拾)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고, 또 옷 한 가지를 벗어 관인(館人)에게 주시며 “그대는 사리를 조금 아니, 내 노복을 시켜 내 시신을 염(殮)하도록 하라.” 하셨다.
이때 대군(大君)이 적의 의사에 따라 진원군(珍原君)을 행재소에 보내어 사정을 보고하게 하니, 윤생 선거(尹生宣擧)가 그 일행을 따라가서 어버이를 뵈려 하였다. 그러자 부군께서 윤생에게 “그대가 가서 만약 이공 시백(李公時白)을 만나거든 반드시 내가 이미 죽었다고 말하라.” 하셨다.
부군께서 적의 침입을 들으신 뒤부터 활시위 하나를 가지고 다니시며 앉으나 서나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윤공이 빈궁(嬪宮)께서 아직 무사하시다는 이유로 부군의 자결을 말리자, 부군께서는 변소에 간다고 속이고 나오셔서, 드디어 송공의 빈소로 들어가서 그 활시위로 자결하시니, 25일 을축일이고, 춘추가 66세셨다.
자결하실 때 두 노복이 울면서 부여잡고 말리니, 부군께서 뿌리치며 “오늘의 죽음은 영광이다. 너희들은 내가 잘 자고 잘 먹으며 편안히 거처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내가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 차라리 너희들 손에 죽는 것이 낫지 않느냐.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죽도록 버려두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이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셨으므로 두 노복도 감히 강력히 제지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관인도 이에 감동하여 필요한 물품을 다 갖추어 정성을 다해 염빈(殮殯)하였다. 적이 빈궁과 대군을 위협하여 떠나게 하고는 불을 질러 성안을 도륙(屠戮)하니, 두 노복과 관인도 모두 적에게 잡혔다. 잡힌 지 7일 만에 한 노복이 탈출하여 유서를 옷 동정 속에 숨기고 돌아와서 아들들에게 전하면서 그때의 전말을 이상과 같이 말하였다.
일기초(日記草)와 그 밖의 몇 장의 문자(文字)는 가지고 있던 노복이 적의 포로가 되었으므로 전해지지 못하였다. 또 세상 사람들이 부군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사(詞) 한 편(篇)도 원고가 없어졌는데, 아마도 포로로 잡힌 노복에게 맡겼던 것을 당시에 어떤 이가 보고서 전한 것인 듯하다. 그 사는 다음과 같다.
장강의 요새 지키지 못해 / 長江失險
오랑캐 군대 건너오자 / 北軍飛渡
취한 장군 겁을 먹고서 / 醉將惶怯
나라 저버리고 살길 찾으니 / 背國偸生
종묘사직 망하고 / 宗社淪沒
만백성 다 죽었네 / 萬姓魚肉
저 남한산성도 / 況彼南漢
머지않아 함락되리니 / 朝暮且陷
구차히 사는 것 의리 아니어 / 義不苟活
즐거운 마음으로 자결하련다 / 甘心自決
이 몸 죽어 인을 이룬다면 / 殺身成仁
천지에도 부끄럽지 않으니 / 俯仰無怍
아 아이들아 / 嗟爾吾兒
부디 상심하지 말라 / 愼勿傷生
유해를 가져다가 장사 지내고 / 歸葬遺骸
병든 어머니 잘 봉양하며 / 善養病母
종적을 고향에 감추고 / 縮跡鄕關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 / 隱而不起
간절한 나의 소원은 / 區區遺願
너희가 잘 따르는 것이다 / 在爾善述
그해 3월 병오일에 아들들이 영구를 모시고 회덕 향리로 돌아와서, 계족산(鷄足山) 유향(酉向)의 언덕에 임시로 모셨다가 이듬해 무인년(1638, 인조16) 겨울 10월 병진일에 문의현(文義縣) 형강(荊江) 동쪽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으로 천장(遷葬)하였으니, 새로 정한 자리이다.
부군께서는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훤칠하셨으며, 천성이 순수하고 착하시며 유순하고 진솔하셨다. 교사(巧詐)와 가식의 싹을 마음속으로부터 자르고, 사납고 비속한 기색을 몸에 베풀지 않으셨으며,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행동하시어 속과 겉이 순수하시니, 바라만 보아도 관대하고 후덕한 장자(長者)임을 알 수 있었다. 검약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겸손으로 자신을 기르셨는데, 포의(布衣) 때나 현관(顯官)이 되신 뒤나 한결같으시어 사람들은 다름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효성이 지극하셨다. 이 부인(李夫人)께는 본래부터 심양(心恙 정신 이상)이 있으셨는데, 중년 이후로는 하루도 편한 날 없이 때때로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셨다. 그럴 때면 곁에 있는 사람도 저지할 수가 없었는데, 유독 부군께서 밖에서 들어오시며 빙그레 웃으시면 이 부인은 바로 얼굴에 희색(喜色)이 돌고 마음이 안정되어 병을 모두 잊으셨다.
그러므로 부군께서는 항상 근심하고 두려워하시며 곁을 떠나지 않고, 온화한 낯빛과 유순한 용모로 뜻을 받들어 모시며 부축하는 일에 도리를 다하셨다. 잠자리를 펴고 음식을 올리는 일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시고, 변기 같은 더러운 기구까지도 반드시 몸소 씻으시며 오직 이 부인의 환심을 얻기만을 힘쓰셨다.
부군의 처가가 수십 리 밖에 있었으나, 특별한 음식이 하나라도 있으면 먼저 입에 넣지 않고 즉시 종에게 들려 보냈는데, 혹은 하루에 두 차례씩 보내기도 하였다. 아무리 큰비가 오고 큰물이 져도 중지하지 않았다.
정유년(1597, 선조30) 난리 때는 이 부인을 가마에 모시고 회덕에서 이천(伊川)까지 천여 리 길을 가는데, 가마꾼을 자주 교체하니, 처자들의 걸음이 따라오지 못하는데도 돌아보지 않으셨다. 이 부인을 매우 정성으로 모시는 종 하나가 있었는데, 후에 분재(分財)할 때 그 종이 다른 형제에게로 보내지자, 부군께서는 당신의 종과 바꾸어 집에서 기르며 지극한 은혜로 대우하셨다.
그 종이 죽자 부군께서는 매우 슬퍼하시며 제문을 지어 친히 제사까지 지내시니, 듣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 부인의 형제를 이 부인 섬기듯이 섬기셨다. 부인의 동생이 자식이 없어 부군을 양자(養子)로 삼으려 하자, 부군께서는 굳이 사양하시고서 그 일가의 아들을 구하여 후사를 세우고는 물려준 토지와 노비도 모두 취하지 않으셨다.
동기간에는 우애가 지극하셨다. 백씨(伯氏)가 멀리 영외(嶺外)에 계시니 매양 동거하지 못함을 한탄하셨고, 후사가 없이 돌아가신 누님 한 분이 계셨는데, 분재할 때 특별히 나누어 주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셨고, 서제(庶弟) 중에 몸소 나무하고 물 긷는 분이 있었는데, 그에게도 특별히 재물을 주어 그 가난을 구제하셨으며, 서제들에게 과오가 있어도 심하게 꾸짖지 않으시고 화목하게 지내셨다.
집에서 지내실 때는 생계를 영위하지 않으시고 식량이 자주 떨어졌어도 태평이셨으며, 항상 집안 식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가난이고, 부끄러운 것은 평범한 시골 사람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행실이 남만 못한 것을 걱정하고 의식(衣食)이 남만 못한 것을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혼인에는 반드시 부유한 집을 버리고 가난한 집을 택하시며 “용문(龍門)의 경계와 온공(溫公)의 논의가 실로 만세의 격언이니 마음에 새겨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셨다. 불초한 나 경(憬)이 송씨(宋氏)의 집안과 재취(再娶) 말이 있을 때, 그 집은 본래부터 청빈하기로 이름난 집이므로 어떤 이가 말리자, 부군께서 웃으시며 “송모(宋某)는 나의 벗이다. 죽은 벗의 자식이 굶어서 죽게 되었으면 마땅히 내가 구휼해야 하니, 내 며느리로 삼아 양육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시고는 드디어 한마디로 결정하셨다.
관직에 계실 때는 경계하고 삼가시어, 너그럽고 까다롭지 않음을 정책으로 삼고, 청렴하여 곤궁을 견딤을 절조로 삼으셨다. 항상 어버이 생전에 녹봉을 받아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두 가지 이상의 고기반찬을 드시지 않으셨으며, 여러 아들을 모두 함께 겸상해 먹게 하고 상을 따로 차리지 못하게 하시어, 감히 호사스러운 생활에 젖지 못하게 하셨다.
평소 벼슬은 뜻밖에 오는 것이라고 여겨 되는대로 맡겨 두고, 좋은 관직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리고 항상 말씀하시기를, “벼슬이 정(正)에 이른 것으로 만족하고, 대각을 출입하는 것은 내가 꿈에도 생각한 바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부군께서는 권력자에게 빌붙어 아첨하는 자를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겨 멀리하셨으며, 명리(名利)의 마음을 버리고 담박하고 고요함으로 스스로를 지키셨고 명함을 들고서 남에게 찾아간 적이 없으셨다. 그러므로 서로 왕래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서 아는 자가 적었다.
항상 주장하는 논의는 공평하고 관대한 쪽을 따르시고, 편당을 가르는 각박한 논의를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마음을 어겨가며 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으셨다. 추숭대의(追崇大議)가 제기되었을 때, 이연평(李延平 이귀(李貴)이 실로 이 의논을 주장하였는데, 부군께서는 연평의 당질(堂姪)이었으나, 부형(父兄)이라 하여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으시고 매양 대전(大殿) 뜰에 엎드려 간쟁하는 대열에 참여하셨으며,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바른말로 인해 성상의 노여움을 사서 화(禍)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친지조차 위문하려 하지 않았고, 불행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기는커녕 도리어 해치고자 하는 자까지 더러 있었으나, 부군께서는 자주 방문하시고 음식물 보내는 것을 그치지 않으시니,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부군께서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천성이셔서, 진실로 현(賢)하면 비록 빈천한 사람일지라도 귀인처럼 대우하고, 어린 사람일지라도 동년배처럼 대접하셨으며, 남의 악행을 들으면 즉시 노여운 기색을 지으시며 비록 권귀(權貴)라 할지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시대에 대한 근심으로 비분이 복받쳐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셨는데,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근자에 보건대 서울 안에 급히 서두는 기상이 있으니, 아마도 나라가 망할 조짐인 듯하다.”라고 하시며, 항상 몸이 이미 노쇠하여 국은(國恩)에 보답할 수 없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셨다.
부군께서는 평소 산수를 매우 좋아하시는 고상한 취미가 있으시어, 아무 곳의 산수가 약간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홀로 가시거나 혹은 벗과 함께 유람하기도 하셨는데, 마음에 맞는 곳을 만나면 돌아오는 것도 잊고 그 경치를 즐기셨다. 비록 어지럽고 시끄러운 시조(市朝) 가운데에 사셨으나, 생각은 항상 산수 사이에 있지 않은 적이 없으셨다.
매양 풍악산(楓岳山)을 한 번 탐방하기를 원하시어 자나 깨나 잊지 못하셨고, 일찍이 회덕(懷德)의 선암천(船巖川) 가에 초가를 짓고 그곳에서 노년을 마치고자 하셨으나, 이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시자, 항상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벽에 걸어 놓고서 뜻을 붙이셨다.
필법이 맑고 아름다웠으며, 문장은 좌씨(左氏), 사마씨(司馬氏), 한유씨(韓愈氏)를 사모하셨다. 젊어서는 시로 명성을 날리셨으나, 만년에는 좋아하지 않으시고, 흥이 나면 읊으실 뿐이었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생 동안 학문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이제 늙었으니 마음을 다잡아 독서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유자(儒者)의 강설을 듣고서 이초평(李初平)처럼 얻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셨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지 않으시어 조금만 마셔도 이내 취하셨고, 취하시면 큰소리로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셨는데, 격조가 맑고 시원하며 담소가 온화하셨다. 향인(鄕人)을 대함에는 성심을 다해 차별을 두지 않고 화목으로 대하셨으며, 불선한 사람에게도 미워하지 않고 엄격히 대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부군을 아끼고 존경하였다. 부군이 별세하시자, 어진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선인(善人)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부군께서는 흉금이 화락하고 평탄하시어, 은원(恩怨)을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며, 비록 남이 침범하여도 따지지 않으셨으니, 이른바 “평생 동안 한 사람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산 적이 없다.”라는 옛말에 거의 가까우셨다.
평소에는 유순하시어 결단성이 없는 것 같았으나, 의리를 보시면 굳게 지켜 이해나 화복에 동요되지 않고 빼앗을 수 없는 의연한 기상이 있으셨다. 일찍이 불초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자식으로서 효도하고 신하로서 충성하는 도리는 천지 사이에 도망할 곳이 없으니, 어둡게 사는 것이 밝게 죽는 것만 못하다. 환난에 임하여 구차히 면하는 것을 나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남들은 모두 내가 유약하기 때문에 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칼자루가 내 손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일찍이 장중승전 후서(張中丞傳后敍)와 조중봉(趙重峯)의 신묘년 상소를 좋아하시어, 손수 베껴 읽으시면서 몹시 감격하고 흠모하셨다.
어떤 한 종실(宗室)이 판서 이시백(李時白)에게 말하기를, “강도(江都)의 경계를 엄중히 하던 밤에 내가 마침 성을 순찰하다가 홀로 성첩(城堞)을 지키고 있는 한 조관(朝官)을 만났는데, 바로 그가 이모(李某)였다. 그의 손을 잡았더니 손이 마치 얼음처럼 차므로 그에게 ‘여기에 앉아서 무엇을 하는가. 들어가서 잠시 쉬라.’라고 하자, ‘노신(老臣)이 오늘 죽을 곳을 얻었다.’라고 대답하고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성상께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셨는데, 그 제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태산처럼 중한 목숨 깃털처럼 가벼이 여겨 / 鴻毛泰山
조용하게 생명 버리고 의리 취하였네 / 取舍從容
목숨 끊을 때 글을 남겨 / 臨絶有文
충절의 마음 드러낸 것 / 抽肝瀝血
옛날 문산의 제찬과 / 文山題贊
너무나도 닮았으니 / 古今一轍
예의의 우리나라 / 禮義之邦
천하에 할 말 있게 되었네 / 有辭天下
이듬해 겨울에 나라의 명으로 정문(旌門)을 세웠다. 회덕의 선비들이 숭현사(崇賢祠) 곁에 사당(祠堂)을 세워 송공 시영(宋公時榮)과 함께 향사(享祀)하였는데, 향사하는 날에 원근에서 와서 참여한 사람이 많았다.
선비(先妣)는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고(考) 인수(仁壽)는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고, 조는 부열(傅說)이고, 증조는 창무(昌茂)인데, 구성부원군(駒城府院君) 중인(中仁)의 후예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하여 사리에 밝으셨으므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드는 데 각각 그 도리를 다하셨고, 동서나 친척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환심을 얻으셨고, 아들들을 교육함에는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으셨다.
부군께서 평소 생업에 마음을 두지 않으셨으나, 선비께서 부지런히 일하시며 살림을 계획하시어, 위로 어른을 섬기고 아래로 자녀를 기르는 데 부족함 없이 주식(酒食)이 풍부하고 의복이 깨끗하니, 남들은 우리 집이 가난한 줄을 몰랐다. 선비께서는 부군께서 비명에 가신 것을 원통하게 여겨,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야위었으며 항상 미망인으로 자처하셨다.
만력(萬曆) 정축년(1577, 선조 10) 10월 8일에 출생하시어 무인년(1638, 인조 16) 4월 5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62세셨다. 부군을 천장(遷葬)할 때 모셔다가 합폄하였다. 아들 셋을 두셨는데, 장남 경(憬)은 학생 송전(宋銓)의 딸을 초취(初娶)로 맞이하였으나 자식도 없이 죽었고, 봉사 송갑조(宋甲祚)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차남 엄(㤿)은 재주가 뛰어나서 생원시에 2등으로 뽑혔는데 불행하게도 부군보다 앞서 요절하였고, 사인(士人) 성하정(成夏挺)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손을 두지 못하였다. 삼남 후(忄+厚)는 군수 김근(金瑾)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측실에서도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불초고(不肖孤) 등은 부군의 시신을 잡고 통곡도 하지 못하였고, 이미 지하로 따라가지도 못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선부군의 의열(義烈)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고 사람들의 입에 전송(傳誦)되고 있으니, 구구한 서술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덤 앞에 명(銘)을 새겨 놓아 내세(來世)에 알리는 것은 근고 이래로 바뀐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감히 피눈물을 흘리며 이상과 같이 그 대개를 찬술하였으니, 당세의 대군자(大君子)가 비문을 지어 주어 묘도(墓道)에 표석(表石)을 세우게 한다면 어찌 다만 저승과 이승에 있는 부자(父子)의 다행일 뿐이겠는가. 아마도 풍속과 교화에도 조금은 도움이 있을 것이니, 부디 가엾게 여겨 이 행장 중에서 골라 비문을 지어 주기 바란다. 어버이 은혜 하늘처럼 넓고 커서 가이없어라. 아, 애통하다.
「註 : 竹窓의 子 李憬을 대신하여 同春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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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訓大夫奉常寺正竹窓李公行狀 代作 (同春堂先生文集卷之二十 / 行狀)
先府君諱時稷。字聖兪。姓李氏。系出延安。世傳唐中郞將李茂。以蘇定邦副將。平百濟留仕新羅。封延安君。遂爲延安人。延安之李始此。世襲冠冕。入我朝。有諱石亨號樗軒。連捷生員進士及第三場壯元。錄佐理功。位延城府院君。諡文康。文章勳業伏一世。寔生諱渾。司憲府掌令贈吏曹判書。判書生諱壽長。大護軍贈兵曹判書。乃府君高祖也。曾祖諱巙。早登第有盛名。由弘文館正字。卒官楊州牧使。贈議政府左贊成。祖諱廷顯。郡守階通政。出爲季父監察公嶬之後。考諱賓。己卯司馬。爲儕流所推重。用館薦拜靑嚴道察訪。不起。歸田園優游以終。沙溪金先生實銘其墓。娶牧使李公應麒之女。桂陽君璔之後。世宗大王六代孫也。府君以隆慶壬申八月十八日。降于漢城之盤松里外氏第。自爲兒童時。已嶄然見頭角。聰敏強記。出語輒驚人。一時行輩。皆推爲不能及。甫十歲。從郡守公宦遊江東。時曹公好益謫其地。世號芝山先生。從游者甚盛。大揭造士之規。諄諄以進退揖讓之節。孝弟忠信之道。府君亦往請業。曹先生一見大奇之。許以可畏。郡守公瓜滿將歸。曹先生謂府君曰。更留數年。必成大儒。府君重久違親。辭焉。以此爲沒身之恨。後曹先生卒。操文累祭其墓。値諱日食素以致慕。旣又從沙溪先生游。自是華問日暢。壬辰之亂。盡室落於懷德鄕。轉入嶺西。戊戌。丁內艱。時當搶攘。斂殯不克時。至於五六日之久。且値嚴沍。人不能堪。而府君獨露居積雪上。號哭不絶聲。父兄宗族。皆以爲言而不少怠。奉櫬歸窆。克誠克信。丙午。中司馬。己酉。與懷之士子。復修鄭文翼,金沖庵,宋圭庵三賢祠。拜疏請額於朝。賜以崇賢號。癸丑。丁外艱。喪祭式遵禮制。子與弟患痘證甚㞃。俗以祀事哭泣爲忌。府君行之不輟。光海末年。彝倫日斁。府君遂抛擧子業。作詩以見志。時鄕人黃德符在要路。欲汲引府君。一日來說萬端。或誘或怵。願與同生死。府君笑曰。生雖好。死則苦。黃色沮而去。人皆危之。府君不以爲意。結數椽於三松之下。窓前植以竹。自號曰三松。又號曰竹窓。左圖右書。嘯詠其間。時表叔宋公爾昌亦歸鄕。隔溪而居。相謂知己。杖屨過從。悠然共對。窮日夜不厭。或倘佯水石間。放懷於塵垢之外。無復有當世念者餘十年。癸亥改紀。朝廷再肅。卽薦府君拜司畜署別提。甲子正月。賊適叛。上幸公州。府君終始扈隨。夏。陞宗廟署直長。有一僚積憾見鄙。誣府君於鄭公曄。鄭公時長憲府。劾論之。後大悔悟。至欲自謝於筵席。強要府君結交云。十月。擢增廣及第丙科。世以槐院爲選。多有扳援而得之者。府君心鄙之。杜門靜居。遂補成均館。物議歉焉。尋以扈從功。陞六品。授典籍。由司憲府監察。轉兵曹佐郞。明年冬。拜司諫院正言。睦性善等進疏。惹不靖之兆。府君協僚議。請焚其疏。上有嚴批。卽辭褫。居散秩強半年。丙寅夏。始除工曹佐郞。俄移兵曹。秋。受命試士于嶺南。時士習浮澆。場屋例不靖。府君和以鎭之。公以取之。識者多之。丁卯正月。金虜入寇。上幸江都。府君又扈隨。移拜正言。賊遣使劫和。要上莅盟。朝廷將許之。府君共諸僚伏閤抗論。其略曰。百年禮義之邦。堂堂千乘之君。豈可與犬羊盟。況此賊與中朝爲讎。寔父母之讎也。子雖死。忍與父讎好哉。國可亡。和不可許。不省。褫授典籍。四月。和議成。車駕還都。五月。拜兵曹正郞。棄歸懷鄕。俄拜礪山郡守。郡在南藩孔道。役煩民瘵。府君至。多所罷行。治出柔剛。愛民猶家人。歲未周。政淸事擧。民胥悅。以至山寺緇流。亦皆愛戴之。戊辰秋。以病投紱歸。礪民旣借留不得。則豎穹碑大逵中。以追思之。後聞府君喪。莫不齎咨相弔。雖在亂離之中。而各歸米布以賻之。府君旣歸鄕。與諸父老謀曰。一命之士。苟存心於愛物。於人必有所濟。況此邦素稱士夫之窟。而醫藥無方。夭扎多矣。盍謀所以康濟同胞耶。於是共出財以設局。命庶弟輩幹其事。一方至今賴之。己巳冬。除成均館直講。俄陞司藝。庚午春。拜正言尋褫。秋。還正言。辭不就。冬。由內資寺正。拜司憲府掌令。辛未夏。褫授尙衣院正。壬申夏。遷侍講院弼善。俄以病辭。褫拜掌樂院正。甲戌秋。以准朔換濟用監。乙亥夏。拜掌令。褫授司藝。俄還掌令。時太學生請以栗谷,牛溪兩先生從祀文廟。蔡振後等倡爲誣賢之論。至於陳章。黌舍紛紜。增廣入彀有期。而館試不得設。上命仍廢館試。朝論携貳。臺閣爲空。府君獨啓曰。增廣之有館試。乃祖宗三尺。不可改也。況鐫館試之額。仍增廣之數。不赴者半。一國烏在其廣取耶。適啓僥倖之途。傷廉恥之風。請並罷一榜。改爲試取。事雖未行。論者快之。先是。尹相昉有曾孫世昌。敢娶婦於叔母喪未殮之前。府君常憤之。至是。世昌之父差守宰將赴。府君昌言於諸僚。越其署。湖南有土豪宋興吉者。武斷於鄕。府君亦論之。徙諸邊。尋褫復拜如是者六。間拜內資寺,司僕寺正,成均館司藝。丙子夏。拜奉常寺正。承命薦權諰才學。趙完培謀勇。可需世用。同僚有爲奸吏所誣者。府君摘治之。其吏捏之。提調書考以中。府君卽棄不仕。十月。鄭公蘊在銓。察其狀。還授本職。爲復前日之踦云。十二月。虜大擧猝入。渡鴨江數日。已迫畿輔。兩殿將幸江都。到南門而賊報益急。迺回從東門。向南漢城。變出急卒。百僚蒼黃。鮮有及者。府君居第在西門外。聞變馳赴。纔入南門。則上已出旋閉門。府君不得出。薄暮東門乍啓。府君卽馳到東郊。夜已深矣。實十四日甲申也。翌曉渡廣津。將赴行在。時賊啗以和。朝廷信之。遣戶曹參議南銑。俾賂貨以成好。南公路逢府君以是說。且言上將移駐江都。已發南漢。府君卽旋馬向果川。要候於路。行到露梁津。落後諸宰多有會者。始聞上輟移駐計。府君謂諸公曰。尙何歸耶。願冒死入山城云。則諸公皆以爲廟社主嬪宮及諸大君。皆入江都。向江都亦計也。府君憤然曰。君父安在。忍爲便身圖耶。獨策馬更向山城路。則賊已散漫。途中猝遇賊。幾危僅脫。間道至龍仁境。與家屬邂逅。不肖孤泣白事已急矣。不奈何。請歸南鄕。激勵士民。鼓義師圖後效未晩也。府君嚴辭峻拒。拂衣去。不與家人別。遂轉向山城東門。則路塞不得入。府君乃痛哭。不獲已回取水原路。將趨江都。與沈參議之源,李修撰一相,豐德守李公聖淵。草檄兩湖。以鼓舞之。行到南陽。趙判書翼,尹校理鳴殷已先往。與府伯尹公棨。謀聚義旅。誓赴主危。府君亦留與共事。未就緖而府伯猝遇賊。不屈而死。人莫不哀之。府君獨正色曰。古語有之。男兒明白而死。尹信伯今得之矣。試望南漢孤城。此豈人臣苟活之日耶。丁丑元日。與趙判書諸公。行望闕禮于舟中。府君北望痛哭。良久乃已曰。吾方寸少豁然矣。時適有鄕便。或勸府君作家問。府君仰天長吁曰。吾兒在。足以護其母。何必爲區區眷戀語。徒亂我心曲耳。終不寄一字。府君素病渴。或饋五味茶。府君輒不悅曰。此豈飮藥調病時耶。遂與諸公入江都。時府君方有患。風雪甚。尹公鳴殷請少留調。府君起而言曰。必以江都爲歸者。是吾死所故也。遂力疾登舟。時金慶徵,李敏求等。以檢察使。管江都事。無復調兵備守計。惟日醉酒恣睢。雖元老大臣。亦加陵轢。府君歎曰。人謀不臧。長江天塹。朝夕不保矣。惟有一死。謂之何哉。不受廩。使從者行傭以食。至廿一日辛酉。賊忽聚船。到甲串津。慶徵等惶怯失措。諸將士望風奔潰。無敢攖者。翌午。金相國尙容放火於南樓。自焚死。城中束手待刃。原任領相尹昉,承旨韓興一等奉兩大君出迎賊。於是賊將率衆入城。分闕東西。自入於正殿。處嬪宮大君於西偏。令其卒據守宮門。環兵四圍。禁我人之出入。自爲信標。僅通宮中命。府君與尹弼善烇,宋主簿時榮兩公相聚。謀所以自處者。宋曰。吾輩豈料見此氣象。昨日不死。爲賊所逼。豈不痛哉。尹指視所佩劍帶曰。此物在。何憂焉。府君曰。吾輩平日讀古人書。見有今日之事。臣子尙可生乎。昨夜欲決於松間。爲下吏所持。甚可恨也。或言賊且以嬪宮及大君行。閱從者以授標。於是諸士夫爭欲得標以幸免。府君笑曰。宗廟亡矣。得標偸生。寧無愧乎。我則已定矣。沈公之源使來曰。從城北可出。請與公偕。府君答謂公年力富強。去爲後事地。或一道。老夫安往。與其顚仆於路側。莫若靜坐以竢死。將命者反。則沈已去矣。乃與宋公約同日就決。作家書倂與日記諸文字。分授兩僮僕及館人。謂之曰。汝等未必皆死。傳此訣於吾兒足矣。其書曰。國事罔極。江都又陷。今日賊已據大闕。明間必有不測之辱。今夕。與茂先將自決。理勢當然。心事泰然。汝等若過哀傷生則非孝也。我死豈瞑目乎。但先人墓碣未立。事定後汝等某條立之。幸甚。兄主不相見十年。今當永訣。爲恨如何。明甫曾勸我棄官而歸。我亦有意。不早決以至於此。尙何言哉。明甫不得更見。此意言之。兩庶母常常未忘。不得顧卹而至此。此又恨也。餘不盡云云。茂先。宋公時榮字也。明甫。宋浚吉字也。是夜宋公先自決。府君與尹公抱持大哭。親自斂殯之。仍令兩僕掘一坎於其殯側。謂之曰。我死殯於是。俾吾兒得以收。又解一衣贈館人曰。爾稍解事。敎吾僕斂吾屍。時大君以賊意。遣珍原君。報於行在。尹生宣擧將隨其行以省親。府君謂之曰。君行若見李公時白。必以我已死爲言。府君自聞賊入。卽以一弓弦自隨。起居不離手。尹公累以嬪宮尙全沮之。府君詒起旋。遂入宋公殯。用其弦以自決。廿五日乙丑也。春秋六十有六。臨決。兩僕泣而扶止之。府君揮斥之曰。今日之死。榮也。爾輩獨不見我眠食自如。安而處之乎。且吾死於賊虜之手。無寧死於爾輩之手。爾愛我乎。則令我死。乃所以愛也。辭氣晏晏若治日。兩僕遂不敢強。泣而待盡。館人亦感動。爲備物斂殯。曲致其誠。賊旣逼嬪宮大君行。放火屠城中。兩僕及館人俱被擄。第七日而一僕脫身逃。以遺書藏衣領中。歸傳諸孤。且道其時顚末如右。日記草及其他數紙。一僕受之而被擄。故不得傳。又有一詞。世傳以爲府君之作。而本稿見逸。意者。並付於被擄者。而當時或有見而傳之者歟。其詞云長江失險。北軍飛渡。醉將惶怯。背國偸生。宗社淪沒。萬姓魚肉。況彼南漢。朝暮且陷。義不苟活。甘心自決。殺身成仁。俯仰無怍。嗟爾吾兒。愼勿傷生。歸葬遺骸。善養病母。縮跡鄕關。隱而不起。區區遺願。在爾善述。其年三月丙午。諸孤等奉柩歸懷鄕。權厝于縣之鷄足山酉向之原。明年戊寅冬十月丙辰。遷奉于文義縣荊江之東艮坐坤向之原。新卜也。府君長身美髥。風采軒昂。天賦醇善。柔和坦率。機變之巧。矯僞之心。絶萌於中。暴慢之容。鄙倍之氣。不設於身。任眞無飾。表裏純然。望之可知其爲寬厚長者也。儉以自律。卑以自牧。自布衣至顯官。人不見其有異也。事父母至孝。李夫人素有心恙。中歲以後。殆無一日安。時或驚惑不常。傍人莫能止。獨府君從外入。怡然而笑。則李夫人輒色喜意降。頓失所病。以是府君常憂懼不離側。和顏婉容。承奉扶持。曲盡其宜。枕席之設。滫瀡之供。不假他人手。以至廁牏溷具。亦必親自浣滌。惟以得其歡心爲務。府君婦家在數十里外。見一美味。未嘗入口。立一蒼頭送付之。或日再至。雖大雨水。不廢也。丁酉之亂。奉李夫人轎。自懷德至伊川千有餘里。而不曾片時以僕夫替。妻孥徒步不能及。亦不顧也。有一婢侍李夫人甚勤。後分歸他兄弟。府君換以己婢。育之家。恩遇備至。及死府君甚傷之。爲文親自祭。聞者感歎。事李夫人兄弟。如事夫人。夫人之弟無子。欲以府君爲養。府君固辭。求其族子立爲後。所贈土田臧獲。悉不取。友同氣以至情。伯氏遠在嶺外。每以不得同居爲恨。有一姊無嗣而歿。臨財別有所歸。俾奉其祀。庶弟有薪水自給者。亦別有所與。以賑其窮。庶弟輩雖有過誤。不切責怡怡也。居家不營生。屢空而晏如。常謂家人曰。不愧者貧。所愧者未免爲鄕人。汝等惟患行不若人。勿患衣食之不若人也。婚媾必捨富取貧曰。龍門之戒。溫公之論。實萬世格言。當服膺而勿失也。不肖孤憬議再娶宋氏家。素以淸寒名。或有止之者。府君笑曰。宋某吾友也。亡友之子如餓死。吾當卹之。作吾婦以育之。不亦可乎。遂一言以定。居官謹飭畏愼。以寬簡爲政。淸苦爲操。常以祿不及養爲至痛。肉不重味。諸子皆兼案而食不別設。使不敢習豪侈。平生仕宦。一任倘來。不以好官爲榮。常曰。宦而至於正。足矣。出入臺閣。非吾夢思所及也。其視夸毗詡儛者。若將浼。恬靜自守。未嘗持刺詣人。以是交往絶罕。知者鮮矣。持議務從平恕。不爲偏黨刻核之論。亦不違心詭隨於人。方追崇大議。李延平實主張之。府君於延平爲堂子。不以父兄之故而變己見。每參庭爭之列。姜掌令鶴年以言觸忤。禍將不測。知舊莫肯顧問。或從而下石。府君屢往訪。饋訊不絶。人以爲難。好善嫉惡。出於天性。苟賢矣。雖貧賤。待之如貴人。幼少接之如輩行。聞人之惡。則輒怒於色。雖權貴不少撓。憂時感慨。或歔欷不能寐。嘗曰。近見都中多急促氣象。意者。國家將亡之兆乎。恒以血氣旣衰。未有以報國恩爲恥。雅有高趣。酷愛山水。聞某水丘稍佳。輒飄然獨往。或命侶俱遊。遇會心處。樂而忘返。雖在市朝膠擾中。意未嘗不在山水間。每欲一訪楓岳。寤寐不忘。嘗卜懷之船巖川上。欲縳茅以終老。亦未就。常揭淵明歸去來圖於壁上以寓懷。筆法淸麗。爲文。慕左,馬,韓氏。少以詩鳴。晩又不屑爲也。惟遇興則吟之。嘗謂我半生失學。今老矣。難可刻意讀書。欲聽儒者講說。或能如李初平之有得耳。性不能飮。飮少輒醉。醉或高哦放歌。調韻淸爽。談笑藹然也。與鄕人處。恂恂去畛域。飮以和穆。至待不善者。又不惡而嚴。以是咸愛而敬之。及府君歿。無賢愚貴賤。皆曰善人亡矣。襟懷樂易。不以恩怨介于心。人雖犯。不校也。蓋所謂平生無怨惡於一人者。府君庶幾焉。平居粥粥若不斷。及見義固執。不以利害禍福動。毅然有不可奪者。嘗謂不肖曰。子孝臣忠。無所逃於天地之間。黮闇而生。不如明白而死。臨難苟免。我所深恥。人皆謂我柔不以伏節死義期之。然不知我欛柄在手耳。嘗喜張中丞傳后敍。趙重峯辛卯疏。手自寫以讀。激昂感慕焉。有一宗室。謂李判書時白曰。江都戒嚴之夜。我適巡城。見朝官獨守城堞。乃李某也。撫其手。凍如氷雪。謂之曰。坐此何爲。請入少憩云。則答言老臣今日得死所矣。終不起云。戊寅秋。上遣禮官賜祭。其文略曰。鴻毛泰山。取舍從容。臨絶有文。抽肝瀝血。文山題贊。古今一轍。禮義之邦。有辭天下云云。翌年冬。命旌門閭。懷之士子立廟于崇賢祠之傍。與宋公時榮並享焉。享之日。遠近多來會。先妣龍仁李氏。考曰仁壽。階通政。祖曰傅說。曾祖曰昌茂。駒城府院君。中仁之後。寬裕惠哲。通達事理。事舅姑奉君子。各盡其道。自妯娌族黨。下逮僮御。無不得其歡心。敎諸子嚴而有法。府君素不以生產經心。先妣能拮据規畫。事育無缺。酒食衣服。皆豐潔鮮盛。人不知其貧也。府君之歿。痛其非命。哀毀踰禮。常以未亡人自處。戊寅四月初五日。不淑。萬曆丁丑十月初八日。卽其生歲月日也。得年六十二。府君之遷厝也。奉以合窆焉。育三男。長曰憬。娶學生宋銓女。無后。再娶奉事宋甲祚女。次曰㤿。有雋才。擢生員第二名。不幸先府君夭。娶士人成夏挺女。無後。次曰。후(忄+厚)娶郡守金瑾女。生一男幼。側出有一男二女。皆幼。不肖孤等攀號莫及。旣不得從於地下。仍竊伏念先府君義烈。書諸國乘。在於口碑。區區敍述。固無所事。然揭銘幽堂。以詔來世。近古以來。未之有改用。敢泣血撰次大槩如右。倘蒙當世大君子一言之賜。以表墓道。豈但爲幽明父子之幸。或有補於風化之萬一矣。伏惟哀憐而財擇焉。昊天罔極。嗚呼痛哉。<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