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AI시대 에너지정책의 올바른 길 —중소산단에서 피지컬AI와 분산에너지를 함께 설계하자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두 개의 공장
같은 AI 시대에 두 개의 공장이 있다.
하나는 대기업의 공장이다. 수천억 원을 들여 로봇을 들이고, 자체 데이터센터에서 공정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공장 문 앞까지 초고압 송전선이 들어온다. 그 송전선은 국가가 놓았고, 송전탑이 지나간 마을의 갈등은 주민이 떠안았다.
다른 하나는 지방 농공단지의 중소공장이다. 일할 사람이 없어 라인을 다 돌리지 못한다. 로봇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장도 안다. 그러나 어떤 공정부터 들여야 할지 판단할 사람이 없고, 시험해 볼 여유가 없고, 라인을 하루 멈추면 그날 납기가 무너진다. 원청은 재생에너지로 만든 부품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지붕에 태양광을 올릴 목돈도 없다.
국제로봇연맹의 2025년 보고서 기준으로 한국의 제조업 로봇 밀도는 근로자 1만 명당 1,220대로 세계 1위다. 그러나 이 숫자는 첫 번째 공장의 숫자다. 두 번째 공장의 숫자는 다르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스마트제조혁신 실태조사에서 제조 AI를 도입한 중소기업은 0.1퍼센트였다. 한 설문에서는 제조 데이터를 모으는 중소기업이 60퍼센트를 넘었다. 데이터는 쌓이는데, 그것을 쓸 힘이 없다.
필요는 크지만, 힘은 약하다
피지컬AI를 도입했거나 도입하겠다는 제조기업이 84퍼센트라는 조사가 자주 인용된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종사자 500인 이상 제조기업 100곳을 조사한 결과이고, 기업이 클수록 도입 의향이 높았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그 숫자에 들어 있지 않다.
인력난은 작은 공장일수록 심하다. 탄소 규제의 압력도 수출 대기업의 협력사로 일하는 중소기업에 먼저 닿는다. 그런데 그 문제를 풀 기술을 스스로 들일 힘은 작은 공장일수록 약하다. 필요가 가장 큰 곳에서 수요가 가장 적게 나타난다. 시장에 맡겨두면 이 간극은 저절로 메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벌어진다.
대기업은 정부가 돕지 않아도 스스로 길을 찾는다. 자본이 있고, 사람이 있고, 데이터가 있다. 중소기업은 그렇지 않다. 공공정책의 본령은 스스로 할 수 없는 쪽을 받치는 데 있다.
거꾸로 선 에너지정책
그런데 지금의 에너지정책은 거꾸로 서 있다.
대기업도 전기요금과 망 이용료를 낸다. 그러나 대규모 수요를 위해 새로 놓는 송전망의 입지 갈등과 지역의 피해까지 그 값에 담긴 적은 없다. 공공의 땅과 송전탑 아래 사는 사람들의 삶이 가장 힘센 쪽을 떠받쳐 왔다. 반면 중소공장이 에너지를 바꾸는 일은 각자도생에 맡겨져 있다. 도움이 덜 필요한 쪽을 받치고, 도움이 필요한 쪽을 비워 두고 있는 셈이다.
원칙을 바로 세우면 이렇다. 대기업에는 수혜자 부담을, 중소기업에는 공공의 설계를. 에너지를 쓰는 자가 스스로 조달하고 책임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게 하고, 그럴 수 없는 곳에 공공의 힘을 모아야 한다.
피지컬AI와 분산에너지가 만나는 자리
여기서 두 개의 전환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피지컬AI와 분산에너지다.
흔히 로봇이 전기를 많이 먹는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로봇 한 대가 쓰는 전기는 크지 않다. 두 전환이 만나는 진짜 자리는 로봇의 배터리가 아니다. AI와 로봇이 공정을 움직이게 되면 공장이 유연한 부하가 된다는 데 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전기에 맞춰 공장을 멈추자는 말이 아니다. 고온을 유지해야 하는 공정, 원청의 생산계획에 묶인 공정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 사이의 틈이다. 운반차의 충전, 부품의 이송, 대기와 검사, 재고를 미리 쌓아둘 수 있는 가공 공정. 납기와 품질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런 일의 시간을 몇 시간씩 당기고 미루는 것이다. 사람이 짜는 작업표로는 그 틈을 매일 찾아내기 어렵지만, AI가 공정을 짜면 그 틈이 보인다.
무인운반차는 태양광이 넘칠 때 충전하고 흐릴 때 기다릴 수 있다. 자동화 항만의 운반차를 재생에너지 발전량에 맞춰 충전하고 운행하도록 짠 모의실험에서는, 재생에너지를 고려하지 않는 방식에 비해 청정에너지 자급률이 평균 53.9퍼센트 높아졌다.
태양광의 가장 큰 약점은 전기가 나는 시간을 사람이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봄철 한낮이면 남는 전기를 버리려고 발전기를 강제로 멈춘다. 그 시간에 기다려 줄 수 있는 공장이 곁에 있다면, 버려지던 전기가 쓰이는 전기가 된다.
게다가 중소공장은 거대 산단에 모여 있지 않다. 전국의 일반산단과 농공단지에 흩어져 있다. 공장 지붕은 넓고 수요는 산단 안에 모여 있다. 중소 산단은 분산에너지가 뿌리내리기에 가장 알맞은 자리다.
중국은 산단으로, 독일은 유연성으로
중국은 이 문제를 산단의 단위로 풀기 시작했다.
2025년 6월, 중국 정부의 세 부처가 공동으로 '영탄소 산업단지' 조성에 나섰다. 산단 안에서 재생에너지를 직접 끌어 쓰고, 배전망에 지역 청정에너지를 통합하고, 저장장치를 현장에 두게 한다. 왜 산단인가. 미국 로키마운틴연구소(RMI)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1만 5천여 개 산단에 산업기업의 80퍼센트가 모여 있고, 이들이 국가 에너지의 약 3분의 1을 쓴다. 장쑤성 창저우 한 곳에서만 산단 마이크로그리드 39개가 완공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풍력과 태양광을 공공망을 거치지 않고 전용선으로 공장에 바로 공급하는 '녹색전력 직접연결' 제도를 만들었다.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이렇게 직접 전기를 받는 기업도 송배전비와 계통 운영비를 규정대로 내야 하고, 지방정부가 임의로 깎아줄 수 없다. 망에 기대는 만큼 값을 치르라는 것이다. 수혜자 부담의 원칙이 제도에 적혀 있다. 처음에는 한 기업에 한 줄이었지만, 최근 산둥과 장시 같은 지방정부가 한 산단의 여러 기업이 함께 받는 방식으로 넓히고 있다.
디지털 전환에서도 중국은 기업 하나하나를 돕지 않는다. 도시를 시범 단위로 뽑아 중앙재정을 주고, 도시가 업종을 정해 중소기업들을 한꺼번에 바꾸게 한다. 그 전환 항목 안에 에너지 소비 관리가 들어 있다.
독일은 공장을 재생에너지의 짝으로 만드는 일을 10년 가까이 해왔다. 'SynErgie'라는 국가 연구사업이다. 그 결과 독일 산업은 전기가 남을 때 15분 동안 최대 9기가와트를 더 쓰고, 모자랄 때 10.7기가와트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육상 풍력발전기 5,600여 기의 출력에 해당한다. 이 사업은 아우크스부르크를 모델 지역으로 삼아 실증했고, 기업이 자기 공장의 유연성을 따져볼 수 있는 진단 도구를 만들었으며, 여러 제조기업이 전력 수요를 함께 맞추는 공동 플랫폼을 연구했다.
그러나 중국의 정책은 산단과 재생에너지, 저장장치와 전용망을 묶는 데 초점을 두었고, 독일은 산업공정의 유연성을 쌓았다. 로봇을 재생에너지에 맞춰 돌리는 기술은 연구실에서 검증되었지만 아직 정책이 되지 못했다. 이 조각들을 중소 산단의 피지컬AI 보급과 소유 구조까지 하나로 묶은 사례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그 빈자리가 한국의 기회다.
무엇을 할 것인가 ㅡ원칙 셋
첫째, 단위를 바꾸자. 지금 정부의 '모두의 AI 공장장'은 기업 하나하나를 컨설팅한다. 그러나 중소기업 하나는 데이터도, 전기도, 로봇도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산단을 단위로 삼아야 한다. 이미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에 특화지역 제도가 있다. 그 첫 적용지를 중소 산단으로 삼자.
둘째, 두 사업을 하나로 설계하자. 피지컬AI 보급은 중기부와 과기정통부가, 분산에너지는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따로 한다. 따로 하면 로봇은 로봇대로, 태양광은 태양광대로 들어온다. 처음부터 한 사업으로 짜면 로봇이 태양광의 짝이 된다. 독일이 배운 대로, 유연성은 나중에 붙이면 비싸고 처음부터 넣으면 싸다.
셋째, 공동으로 갖게 하자. 산단 에너지협동조합이 발전설비를 함께 소유하고, 로봇은 공공형 임대로 여러 공장이 나눠 쓰고, 데이터는 공동 플랫폼에 모으자. 정부가 만들겠다는 '제조AI 24' 플랫폼이 그 그릇이 될 수 있다.
다만 그릇을 만들기 전에 규칙부터 정해야 한다. 물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모인 데이터를 누가 쓸 수 있는가. 그 데이터로 만든 모델이 낸 수익을 누가 나누는가. 원청이나 플랫폼이 협력사의 데이터를 일방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가. 이 규칙이 없으면 수천 개 중소공장의 데이터는 모이는 순간 플랫폼 위에서 모델을 만드는 몇몇 기업의 자산이 된다. 그 데이터에는 수십 년 동안 현장 노동자들이 몸에 쌓아온 숙련이 기록되어 있다. 대기업의 데이터는 이미 그 쓰임과 몫이 정해졌다. 중소기업의 데이터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 모이기 시작하는 단계다. 지금이 공유부로 설계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때다.
원칙을 가능하게 할 두 조건
하나는 돈이다. 은행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아파트는 담보로 잡으면서, 전기를 만들어 파는 태양광 설비는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산단의 태양광과 공장의 로봇처럼 수익을 내는 생산설비를 담보로 인정하고, 지역공공은행이 그 신용을 열어야 목돈 없는 작은 공장이 전환을 시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재원이다. 대규모 수요를 위해 새로 놓는 송전망의 비용을 수혜자 부담의 원칙대로 제자리에 돌리면, 그 몫이 중소 산단 전환의 재원이 된다. 새로 만드는 돈이 아니다. 흘러가는 방향을 바꾸는 돈이다.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신규 대규모 수요부터 원인자 부담을 적용하는 식으로 단계를 밟으면 된다.
중국은 단위를 바꿨다, 우리는 소유까지
이것은 시혜가 아니다. 수출 공급망의 가장 약한 고리를 메우는 산업정책이다. 원청의 재생에너지 요구와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은 협력사부터 조인다. 중소 산단이 무너지면 대기업의 공급망도 함께 흔들린다.
그리고 이것은 에너지정책의 방향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원전 한 기에 드는 수조 원을 수도권 데이터센터와 대기업 산단을 위해 동해안에 쌓을 것인가, 전국에 흩어진 중소 산단 수백 곳을 에너지 자립과 피지컬AI 전환의 거점으로 만드는 데 쓸 것인가. 같은 돈이 어느 쪽을 받치는가의 물음이다.
중국은 지원의 단위를 기업에서 산단과 도시로 바꿨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는 그 모델은 산단의 전기와 데이터와 로봇이 낳은 열매가 누구에게 가는가라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갈 수 있다. 단위를 바꾸고, 소유까지 바꾸는 것이다.
옛 마을의 물레방아는 마을 것이었다. 물도 마을 것이고, 돌리는 사람도 마을 사람이고, 찧은 곡식도 마을로 돌아왔다. 이제 산단의 지붕 위 태양광과 공장 안의 로봇이 그 물레방아가 될 수 있다. 공공정책이 받쳐야 할 것은 이미 힘을 가진 쪽이 아니라, 그 물레방아를 함께 돌릴 작은 공장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