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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쾌활하게 지내면 안 되는가? - 니체
우리는 한 번 더 '어린 왕자', '시간 도둑', '잘못된 인생'과 대면한다.
어린 왕자가 만난 장사꾼은 갈증을 풀어주는 알약을 비싸게 파는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한 알씩 먹으면 다시는 목마름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약은 시간을 굉장히 절약해 주거든. 전문가들이 계산을 해 봤는데, 매주 53분씩 절약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야."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갈망과 중독 상태에 놓인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잠을 줄이기 위해, 능률 향상을 위해,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약을 지나치게 남용한다. 잠을 자고, 작업 능력을 개발하며, 살면서 경험하는 삶의 기쁨을 발견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대용물에 집착하는 것이다. 약으로 인해 시간이 절약된다는 장사꾼의 말에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만일 나에게 마음대로 사용할 53분이 있다면, 샘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텐데….'
비행조종사에게 샘물은 지금 당장 절실히 필요한 대산이기에, 발견하지 못할 경우엔 갈증으로 인해 죽을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서 조종사와 어린 왕자는 우물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너도 목이 마르느냐는 조종사의 물음에 어린 왕자가 말했다.
"물은 마음에도 좋은 것일 수 있는데…."
도대체 얼마나 특이한 물일까? 여기에서 말하는 물은 분명히 수돗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여기서의 물은 바로 생명수이다. 이 두 사람이 드디어 샘물을 찾았을 때 조종사는 어린 왕자에게 먼저 물을 건네며 그 순간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두레박을 그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는 눈을 감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아는 축제 분위기처럼 즐거워졌다. 그 물은 분명 음료와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별빛 아래서의 행진과, 도르래의 노래와, 내 두 팔의 노력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마음을 기쁘게 했다.
생텍쥐베리는 <인간의 대지>라는 작품에서 자신이 리비아 사막에서 구조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 너는 맛은 고사하고 빛깔도 향기도 없다.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다.
물, 너는 생명에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생명 바로 그 자체이다. 너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준다. 나와 함께 단념했던 모든 권리가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너로 인해 말라붙었던 마음의 샘물이 다시 솟아난다.
물, 너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귀중한 보물이고, 땅 속에서 가장 순결하며 가장 맑고 섬세하다. 너는 어떤 변절이나 혼합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한하고 소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웰더린(Hoelderlin)은 이렇게 말했다. '위험이 존재하는 곳에서도 반드시 구조의 손길은 나타난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위기는 보물이 되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위기는 곧 발전을 불러온다. 위기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의 'krinein'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단어는 '판단하다, 결정을 내리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긍정적인 의미로 위기의 순간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도록 결정내리게 한다. 사물은 쌓아올려진 물건 속에서가 아닌, 변화와 새로운 시작 혹은 갈망함에 대한 열의 가운데서 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생과 사를 갈라놓는 위기의 순간에 비행 조종사는 마침내 억압되어 있던 어린아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어린 왕자를 마치 갓 태너난 어린 새처럼 다루었다.
부서지기 쉬운 어떤 보물을 안고 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이 지구에는 그보다 더 부서지기 쉬운 게 없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창백한 이마, 감겨 있는 눈, 바람결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달빛 아레에서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여기 보이는 건 껍질뿐이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나는 심리 치료 과정을 통해 어린아이의 모습을 되찾았거나, 어릴적 모습의 유일함을 소중히 여기게 된 환자들에게 항상 조언한다. "큼직한 어린 시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자랑스럽게 벽에다 걸고, 그와 매일 사랑의 대화를 하십시오…."
우리는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따라서 죽음은 자아에게 찌르는 듯한 아픔의 상처를 남긴다. 죽음은 바로 내가 죽더라도 이 세앙의 다른 모든 삶은 이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이렇게 지적했다. '인생은 내가 태어나기 수억 년 전부터 생겨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왜 이 사실에 대해서 나는 화를 내지 않는가?'
조종사는 겁이 난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두려움을 가지지 말아야 할 이유란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죽음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조종사는 독사를 보자마자 권총을 꺼냈다. 이것은 조종사가 죽음을 거부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만 그런 게 아니다. 어쩜 우리 자신도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갖가지 무기를 사용할 지도 모른다. 주위의 누군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잇다. "그(그녀)는 암과의 싸움에서 졌습니다." 이처럼 군인들이 무기를 손에 들고 적들과 대항하듯이 우리도 죽음과 대항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린 왕자의 얼굴빛은 눈처럼 창백하고, 카빈총에 맞아 죽어가는 새처럼 그의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듯 생텍쥐페리가 생과 사의 길을 '길고, 어려운 길'로 표현하고 있다. 죽음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었던 것이다. 그 조종사는 간신히 어린 왕자를 품에 받아 안았다.
그는 내가 붙잡을 사이도 없이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조종사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서 멀어질 때면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조차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갱각에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던 것이다.
그 웃음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일임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나에게는 사막의 샘물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우리의 부모, 형제, 친구, 동료, 이웃들은 우리에게 삶을 나누어 주는 생명수와 같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자기가 마음이 내키는 대로 돌려서 혹은 뒤집어서 생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은 단지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남을 뿐이다. 신교도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죽음에 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라고 정의 내렸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글에서 나타나는 죽음은 위안, 구원의 손길이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톨릭 신자로 살아온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예수회 원생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린 영혼의 손으로 기숙사 안에 있는 벽에 정죄의 불길, 지옥이라는 극도의 고통스러움을 그려 넣었다. 우리 머릿 속에 반복해서 주입시켰던 것 대부분은 국가의 통제 아래 있는 교회가 전하는 위협적인 설교 내용, 즉 예수 재림이 닥칠 때 직면하게 되는 죽음의 심판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에 대해 니체는 '죽음, 그것은 해괴한 약사의 영혼이 만들어 놓은 메스꺼운 독약이다'라고 비판했다. 또 <권력 의지>라는 책에서는 '교회가 이를 남용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의미는 퇴색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죽음을 의미하는 작별을 할 때 조종사에게 위안을 주는 말을 했다.
"밤이면 별들을 보세요.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 있는지 보여 줄 수가 없어요. 그게 더 나아요. 내 별은 아저씨에게는 여러 별들 중의 하나가 될 테니까요. 그러면 아저씨는 어느 별이든지 바라보는 일이 즐거워질 테니까… 그 별들은 모두 아저씨 친구가 될 거예요."
그는 조종사에게 어린아이 마음 가운데서 나타나는 참된 선물, 즉 고귀한 죽음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사람들에 따라 별들은 서로 다른 존재예요. 여행하는 사람에겐 별은 길잡이구요, 어떤 사람에겐 그저 조그만 빛일 뿐이고, 또 학자에게는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내가 만난 사업가에겐 금이죠. 하지만 정박 별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어요. 아저씬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별들을 가지게 될 거예요… 밤에 하늘을바라볼 때면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모든 별들이 다 아저씨에겐 웃고 있는 듯 보일 서예요. 아저씬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저씨의 슬픔이 가셨을 때는(슬픔은 언제나 가시게 마련이니까) 나를 알게 된 걸 기뻐하게 될 거예요. 아저씨는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로 있을 거에요. 나와 함께 웃고 싶을 거고. 그래서 이따금 그저 괜히 창문을 열게 되겠죠… 그럼 아저씨 친구들은 아저씨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을 보고 꽤나 놀날 테죠. 그러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줘요. '별들을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나오거든!'하고 말예요."
단지 심장이 멎고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고인(고인)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기억 속에 여전히 살고 있다. 생텍쥐페리는 형이상학적인 사고로 본 죽음 뒤의 세상을 거부하면서, 인간 개개인에게 조금이나마 불멸의 능력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세상에 온정을 베풀며 인간답게 살았을 때 우리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계속해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불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사랑만이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인들은 우리가 생존하는 동안 그들이 가져다준 가치와 함께 우리 옆에서 살아 숨쉰다. 때때로 우리는 산 사람들보다 오히려 고인들과 이야기를 더 편하게 나누게 되고 그들에게서 조언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어린 왕자는 한 발짝 걸어나가려 할 때 다음과 같이 힘없이 말했다.
"아저씨 … 내 꽃말이에요… 나는 그 꽃에 책임이 있어요!"
우리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즉 괴테가 말한 '죽음의 예술'이 뜻하는 바는 '생명 창조를 위한 자연이 표현하는 예술적인 기교'로써 북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 동물들의 생활 양식과 비교해 볼 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약육강식의 환경에서 일부일 수밖에 없다. 자연은 생테계에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공평하게 대한다. 속(屬)에 속하는 수많은 생물의 생명이 보존되기 위해 우리 개개인의 희생이 뒤따르게 된다. 우리가 가야 할 인생의 길을 마련해 놓고 목숨을 바친 백만 그리고 수억만의 동식물이 있었기에 우리는 인생에 경이로움을 표한다. 다른 생명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도 죽게 된다. 개인으로서 갖게 되는 비극적인 사실은 결국 앞으로 생존하게 될 속에 속한 동식물들에게 대승리를 거두어 주게 된다.
<시편>의 저자 다읫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세월은 마치 잡초와 같다. 왜냐하면, 잡초는 마치 광야의 꽃처럼 피어나서 바람이 불면 사라져 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초가 있었던 자라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죽음은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자연에서 평범한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짧고 긴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벙을 다하여 삶에 책임 의식을 갖고 살아왔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인생이 단지 얼렁뚱땅 살다가 지나가 버리는 것에 불과한 지를 판단하는 요소로 죽음을 보아야 한다. '참된 인생은 시간의 길이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실제로 정말 짧은 생을 살다 죽은 소수의 사람들도 실상은 오랫동안 생존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의 소중한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충분한 삶을 영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나온 세월의 횟수가 아닌 여러분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세네카는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왕자의 죽음은 가슴 아픈 사실이 아니다. 여러분들도 그를 소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발목에서 노란 한 줄기 빛이 반짝했을 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저 나무가 쓰러지듯 천천히 쓰러졌으며 모래 때문에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형제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다. 헤르만 헤세는 이것을 사랑이 가득 찬 시로 표현했다.
죽음이라는 형제
또 한번 너는 나에게로 다가오는 구나
너는 나를 잊지 않고
또 한번 너는 나에게로 다가오는 구나
고통은 끝나고
묶여 있던 쇠사슬도 끊어진다
나는 여전히 낯설어 하며 경계를 하고 있구나
사랑하는 죽음의 형제여
너는 하나의 차가운 별의 모습을 하고
나의 고난 위에 서 있구나
그러나 한 번 정도 너는 가까이 다가올 것이며
불길에 타오를 것이다
이리로 오라, 사랑하는 이여, 여기 내가 있다
너를 가져가라, 나는 너의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곧 나를 자유롭게 놓아 주는 것이다. 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끝까지 대항하려고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아도 된다. 결국 나는 우주 질서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고양이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모든 해양 동식물이 생기기도 하고 죽어서 사라지기도 한다. 아름답고 푸른 우리 지구도 우주 질서에 따라 태양의 생명이 다할 때쯤이면 기온이 떨어지면서 죽어갈 것이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약 80세 때 유머가 깃든 그의 소설 <펠릭스 크롤>에서 인생의 우한함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은 귀여운 허풍쟁이 소년이 파리의 리사본 행 기차의 식당 칸에서 선사시대 역사학자인 뻐꾸기 교수로부터 우주, 인생 그리고 인간의 생성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대목이다. 이에 계속해서 연결되는 부분은 토마스 만이 수정 보완했던 죽음 그리고 삶이라는 주제에 대해 열정적으로 과찬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식물학자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우기적인 생물체들의 수명을 약 55억만 해에 달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시기 동안에 일어나게 될 수많은 변화 가운데 세월은 인간, 즉 어린 시절 중에서 가장 영리했던 때를 지금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가 태어난 이래로 지나가 버린 시간만큼이나 긴 시산의 삶이 허락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에는 특정한 전제조건이 따른다는 것이다. 인생에는 시작이 있었듯 곧 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별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우주라는 실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의 삶과 같다.'
다른 별 위에서의 삶, 즉 우리의 자그마한 삶이 '우주의 일화'를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매력적인 발상인가! 여기서 바로 인생의 단축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품위를 드러내게 된다고 토마스 만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과연 이 무궁무진한 우주 안에서 방향을 잃은 채 은하계에 속하는 파리똥만한 별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이 우주를 제쳐두고 그 크기에 대해 너무 소홀히 생각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 크기에 대해 너무 소홀히 생각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토마스 만은 이렇게 대답했다. '거대한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인 천문학에서 우리는 지구라는 것이 혼잡스럽고, 거대한 우주 안에서 매우 작은 별이며, 자신이 속한 은하 주위를 맴돌고 있는 한 구석의 작은 별로 취급된다고 배웠다. 그것은 학문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한 방향으로 국한되어 적용된다면 문제가 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이 믿음을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지구는 우주라는 본질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다. 내가 마음 속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은, 무(無)에서 우주를 만든 모든 일, 그리고 무생물에서 인간이 탄생되었다는 증명에서 예측되는 일들, 또 신이 인간을 믿고 시도했던 일이다. 즉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실패를 결국 신의 창조물의 실패로 대등하게 견주고 있다. 그것은 정말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혹은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치 이러한 일이 사실인 것처럼 인간이 믿고 따라 행동한다 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신의 계시인 종교적인 긴념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가질 때, 우리는 마치 우주가 인간들을 그리고 나를 손에 넣고자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의 삶(실존)과 의무를 죽음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결국 마지막 조종사는 '외로움'이라는 시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 그의 '내 안에 숨어 있는 어린아이'가 비로소 숨쉬며 살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가졌던 어린아이의 모습은, 비록 실제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나의 마음 속에 그리고 문학 속에 살아 있다. 그곳에서 나는 언제든지 그를 찾을 수 있고, 그이 곁에서 머물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또한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도 있다. 별이 총총하게 떠 있는 밤하늘의 광경은 마치 강인하고 밝게 빛나는 나의 어린 시절 속 영혼의 우주를 항해하는 듯하다.
어린 왕자처럼 작가 생텍쥐페리도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세상을 등진 채 여행을 했다. 생텍쥐페리가 사망하기 일주일 전에 마지막 연인이었던 마담 B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외로움과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한 인생의 무심함을 드러냈다. 그 전에 그는 콘수엘로에게 '독일인들이 나를 쏴 죽이려고 한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내 아내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썼다.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그의 친구 달로츠(Dalloz)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총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해도 나는 죽음 뒤에 벌어질 일이 두렵다. 내 주검 주위로 몰려들 흰개미 떼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인조 인간과 같은 그들이 가지는 가치에 염증을 느낀다.
바로 그날 'X장군'은 코르시카 섬에서부터 그의 마지막 정찰 지역에 이르는 거리를 횡단한 그의 최신 미 추격기 라이트닝 P38호와 함께 나타났다. 이 비행은 예전에 생텍쥐페리가 지적했듯이 가슴이 메이도록 아픈 혼란을 가지고 왔다.
프랑스 상공을 비행하는 내내 가득 찼던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게 될 줄이야! 저 밑에 놓인 땅으로부터 마치 10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느껴졌다. 삶의 가치를 가져다주는 갖가지 애정, 기억, 삶의 근거들이 저 3만5천 피트 아래 양지 바른 곳에 놓여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박물관의 진열장 뒤에 놓인 이집트 파라오들의 보물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
예정대로라면 1944년 7월 31일 12시 3분에 생텍쥐페리는 소속 비행중대 2/33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건에 대해 스테이시 시프(Stacy Schiff)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주가 지나자 2/33 부대에 남아 있던 비행사들은 연합군 상륙작전에 들어갔다. 그들은 연합군 준비 태세에 협력한 적이 있던 조종사들이었다. 8월 25일 파리는 해방되었고, 그 다음날 찰스 드 골(Charles de Gaulle)은 샹제리제 거리를 따라 개선행진을 했다.'
세상은 전쟁이 끝남과 더불어 비로소 한숨 돌리게 되었다. 용감한 남자 생텍쥐페리는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대가를 치른 것이다.
생텍쥐페리 소설 속의 '어린 왕자'는 우리의 마음에 희망을 남겨주었다. 더불어 작가가 어린 왕자에게 굴레를 그려줄 때 가죽끈을 붙이는 걸 잊어버린 일에 대한 불안도 남겨 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텍쥐페리가 언급한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어린 왕자와 함께 가지고 가도 괜찮다. <우정>이라는 저서에 그의 유언이 담겨 있다.
인간에 대한 경외심! 경외심의 감정이 우리 마음 속에 뿌리내리게 된다면 인간들은 언제나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경외심을 유지시킬 사회적ㆍ정치적ㆍ생태학적 체계를 정립할 것이다. 문명은 우선 핵심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분명 온정에 대한 맹목적인 갈망이 들어선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오류 속에서 결국 온전에 대한 뜨거운 불길을 발견하게 된다.
문명은 개인의 본질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갖는다. 바로 그 본질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어린 왕자이다. 생의 기쁨, 천진무구함 그리고 '내 안에 숨어 있는 어린아이'. 위대한 스페인 출신 첼레스트인 파블로 카살스(Pablo Casals)는 우리 내면에 감춰져 있는 '어린 왕자'의 신비로움을 다음과 같은 글로 표현했다.
왜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가? 이 모든 아이들에게 말해 주어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너는 알고 있니? 너는 놀라운 존재란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란다. 이 세상에서 정말 너랑 똑같은 또다른 아이는 존재하지 않아. 수백 년이 지나도, 그 사이에 너와 같은 아이는 없었을 것이란다. 너의 몸을 봐, 어떤 기적이 또 있겠니! 너의 머리, 너의 팔, 너의 숙련된 손가락, 너의 걸음걸이, 너는 세익스피어도, 미켈란젤로도, 베토벤도 될 수 잇단다. 네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그래, 너는 기적과 같은 존재란다. 하지만 네가 어른이 된다면, 아마 너는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될 거야. 그런데 바로 그 삶도 너 자신과 같은, 놀라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단다.'
어린 왕자의 모습을 내 안에서 발견했을 때 죽음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나의 삶은 장미의 빨간 색깔처럼 사랑으로 뜨겁게 타오르리라.
마티아스 융 「우리 마음 속의 어린 왕자」, 해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