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동해안에 갔다가 들린 건봉사는 일제때의 행정구역으로 고성군 오대면 냉천리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거진읍 냉천리로 되어 있으며 세칭 한국 4대사찰이라 이르던 대찰(大刹)이었으나 6.25동란 전후로 수백칸의 가람이 다 불타 버리고 지금은 당시 건조물미불이문 한칸과 능파교와 석계(石階), 초석(礎石), 부도(浮屠)등이 남아 있었으나 1990년도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지표조사를 마치고 사지정비와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동지전, 명부전 등의 건물을 새롭게 복원했다.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末事)를 거느렸던 한국 4대 사찰중 한 곳으로 신라 법흥왕(520년)때 지어진 오랜 사찰이다. 임진왜란때 사명대사에 의한 승병 봉기 처이기도 했던 호국 사적지로, 융성기에는 3,183칸의 대가람이었다고 하나 6.25전쟁 때 거의 소실되었으며,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7년 (520년)에 아도화상이 고성현(古城縣) 금강산 남록에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고 그후 서봉사(西鳳寺)라 개칭하였다. 신라 법흥왕20년(560년)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菴)을 창건했다. 신라경덕왕 17년(578년)에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원각사를 중건하고 정신(貞信), 양순(良順)등과 함께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되었다.
신라시대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唐)에서 가지고 온 부처님의 치아(齒牙) 사리(舍利)를 통도사(通度寺), 월정사(月情寺)에 봉안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병이 통도사의 사리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선조 38년에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일본에 사행(使行)하였다가 다시 찾아와 이곳 건봉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신라 말엽에 도선국사가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형의 돌이 있다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7년(1353년)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서봉사를 중수하고 건봉사(乾鳳寺)라 개명하였으며 이후 오늘까지 그 이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최근 건봉사를 창건한 아도화상과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와의 동일인 여부와 함께 고구려 불교전례 시기가 신라의 불교 공인시기보다 무려 154년 전인 것으로 추정되는 설이 대두되어 건봉사 창건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다.
1464년 세조가 건봉사에 와서 이곳을 원당(願堂)으로 삼고 어실각(御室閣)을 건립하였으며 논과 밭을 하사했다. 또 어제어필(御製御筆)의 동참문(同參文)을 내려 왕실의 보호를 받는 큰 사찰이 되었다. 1878년 4월3일 큰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소실되었으나 이후 여러차례의 복원 작업을 했다.
현종 14년 수흡도율(修洽道律)이 화주(化主)가 되어 1,200근(斤) 무게의 대종(大鐘)을 만들었고, 숙종 34년 능파교(凌波矯)를 만들었으며, 순조4년에 왕비 김씨가 금천량(金千兩)과 오동향로(烏銅香爐), 오동화준(烏銅花樽), 양산(陽傘)등을 보내와서 보장(寶藏)하였으나 해방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일제시대에 이르러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에 의해 건봉사는 선교양종대본산(禪敎兩宗大本山)이 되었고, 말사(末寺)로 백담사(百潭寺), 신흥사(神興寺), 낙산사(洛山寺), 화암사(禾岩寺), 영혈사(靈穴寺), 명주사(明珠寺), 수타사(壽陀寺), 조제암(鳥啼菴), 심곡사(深谷寺)를 거느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