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 프릿츠 헬멧을 쓴 중국군 -_-;;
2차대전참전국중 이탈리아, 중국, 폴란드 이 삼국은 흔히 당나라 트리오로 통칭됩니다만 개인적으로 역사 왜곡의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제로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야말로 노통의 최근 어록 '잘한 점은 다 빠지고 못한 점만 집중적으로 부각'된 점도 있습니다. 또 이 나라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한 추측이나 잘못된 정보를 기초로 한 편견이 상당히 작용하는 것도 있죠.
흔히 '군기빠진 군대'를 '당나라군대'라고 하는데 이 당이 7세기에 잘 나가던 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당=중국 이라는 거죠.
이것은 중일전쟁당시 일본군이 패주만 하던 중국군들을 당나라군대라며 멸시하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당시 일본군(사실 관동군)은 중국군을 나약하고 군기빠지고 형편없는 군대라는 경멸의 대상쯤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머리 장총통이 이끄는 중화민국(국민당)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계속 내륙으로 밀려났던 것은 어쨌든 사실입니다.
그럼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국민당군은 손 놓은채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나, 오히려 팔로군들이 유격전을 벌리며 더 주된 역할을 했는가. 제가 전에(오래되었죠) 한국사 수업을 받을때 교수님도 국민당군은 아무 쓸모가 없었고 팔로군들이 더 열심히 싸웠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예전에 디코에 '허윤'이라는 분이 장작림 암살사건부터 일본의 남방침략에 이르는 중일전쟁사를 연재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좋은 자료인데(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일전쟁은 우리 근대사에서도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님에도(항일독립투쟁과 직결되어 있으므로) 제대로 연구되거나 관련 서적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습니다.
사실 중일전쟁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2차대전사는 그야말로 불모지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독소전조차도 제대로 알려진 것이 극히 최근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영향탓도 있겠지만 러시아와 수교한지 15년이 넘은 지금조차도 독소전 관련 서적은 거의 손에 꼽을 수준입니다. 서부전선이나 태평양전은 좀 낫은 상황이라고 하지만 이 조차도 상세하게 다룬 서적이 과연 몇 권이나 될까요? 비단 2차대전만이 아니라 역사라는 분야 전반적으로 그러하죠.
'허윤'님이 연재하신 글은 정성스럽게 캡쳐해서 하드에 보관중입니다. 따라서 마음같아서는 게시판에 올리고 싶지만 저작권문제도 있고 허락없이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후 일본군은 만주에서 화북으로 침략을 거듭합니다. 장개석은 초반에는 가급적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섬서방면의 공산군 토벌에 전력을 다합니다만 서안사건으로 제 2차 국공합작이 일어나고 대일전쟁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처럼 일본전체가 하나로 거국일치하여 벌인 전쟁이 아니라 한낱 일개 중국 파견군 즉, 관동군이 제멋대로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그것이 자꾸 자꾸 확전이 되어서 큰 전쟁으로 번져버렸습니다. 즉 처음에는 관동군내의 소장파 장교들의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이 점점 확전됨에 따라 일본 전체가 이끌려 가게되고 이것이 국력에 부치고 자원이 부족하자 남방으로 침략하고 이것에 대해 미국이 경제제재를 하자 태평양전쟁을 벌리게 됩니다. 즉 전쟁이 전쟁을 낳는 도미노효과를 부른 거죠.
서안사건이전의 중국의 대일투쟁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장개석이 대일투쟁을 약속한 이후 일본의 침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섭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즉 국민당이 중경으로 이사갈때까지 중일전쟁은 아주 처절하게 벌어집니다.
물론 중국군이 결과적으로 패배를 거듭한 것은 사실이나 결코 무저항으로 도주만 거듭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일본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가합니다. 이는 장개석의 기본 전략으로 일단 대규모 결전은 회피하고 후퇴하되,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적을 내륙으로 유인한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점령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기회 있을때마다 일대 반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일본군 사상자 16000명을 낸 태아장전투는 중국군 단독으로 해낸 전투중에서는 최대의 승리였습니다. 또 30만명을 동원하여 일대 반격을 가했던 남녕전투는 비록 일본의 증원병력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로 인해 일본군의 진격은 멈추고 전선이 교착화되어 조기종결의 가능성을 없앱니다.
이로 인해 일본도 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름으로 해서 남방침략에 나서게 되죠.(일일 전비만 500만$ 참고로 이라크전에서 미국의 일일 전비는 5억$라는...--;;)
1938년까지 중국군의 투쟁은 한치의 땅조차 피를 피로서 씻는 처절한 싸움이었으나한구가 함락되고 중경으로 옮겨가면서 중국 역시 한계에 이르릅니다.
외국으로 유입되는 원조물자는 해안지대가 모조리 함락됨으로서 막혀 버리고 또 공업지대도 대부분 화북과 해안지대에 있었으므로 일본군에게 넘어갑니다.
물론 소련이 그러했던 것처럼 중국도 공업시설을 내륙으로 계속 옮겨 갑니다만 애초에 공업력자체가 낙후되어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죠. 또 중경, 성도등 서부지역은 농업지대로 공장은 6%, 전력은 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재정수입은 2/3가 감소하게 되었고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 중국도 더이상 대규모 반격전을 벌릴 능력이 없어지고 일본도 같은 처지인지라 중국전선은 교착화되고 소규모 국지전만 반복됩니다. 1944년 4월 교착상태를 타계하기 위한 일본군 최후 대공세인 1호작전이 시작되어 초반에는 순식간에 중국군 제 일선 30만명이 완전히 '아작'이 났습니다만 이 공세도 곧 중국군의 저항으로 한계에 봉착하게 되죠. 중국군의 피해도 컸지만 일본군도 100만이상의 병력을 중국전역에 전개해야 했습니다.
장개석은 흔히 대머리에다 무능하고 고집쟁이, 부정부패한 인간쓰레기로 언급됩니다만(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1920~30년대에 걸쳐 그가 이룩한 업적은 결코 평가절하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군벌 토벌을 비롯해 중앙은행설립, 화폐개혁으로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구시대적인 통행세폐지, 공업육성, 농촌개혁등으로 사회를 안정시킵니다. 특히 관세 자주권을 찾아옴으로서 아편전쟁이래 민족의 자주권을 상당부분 회복시키죠. 또 헌법초안도 마련합니다.(개전후에는 전쟁을 빌미로 약속을 어겼지만) 국민당군은 독일, 소련 고문단의 지도아래 독일과 소련의 근대적 장비로 무장됩니다.(1938년까지 2억 5천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만 미국이 한국전이전 남한군에게 무상원조한 그 빈.약.한 군사장비가 1억$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별로 큰 돈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간 이룩해 놓은 것을 개전과 함께 순식간에 몽땅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렵게 육성한 직계 중앙군은 인명과 장비의 60%이상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로 인해 장개석의 위치자체가 흔들립니다. 따라서 장개석은 일본이 남방침략에 나서는 이후부터는 중앙군을 최대한 아끼고 장비와 사기가 빈약한 지방군을 내세우게 됩니다.
한편 스틸웰중장이 군사고문단장으로 오면서 일부 부대를 미국식으로 무장시키고 이 부대들은 버마-인도전선에 투입되어 영미군과 연합해 큰 전과를 올립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은 상당히 빈곤한데다(사실 미국자체가 전쟁준비가 너무 안되어 있었죠. 게다가 영국이나 소련에 대한 랜드앤리스에 비한다면 훨씬 왜소했습니다) 보급루트가 버마의 산악지대를 거쳐와야 했으므로 아주 제한되었습니다.
게릴라전은 팔로군의 대명사쯤으로 여깁니다만 국민당군도 대규모 결전을 회피하는 대신 게릴라전으로 맞섭니다. 일본군의 철도와 보급로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아 일본군의 공세능력을 한계에 다다르게 하고 전선을 교착화시킵니다.
팔로군도 이른바 '백단대전'(100개의 연대로 공격했다는)이라는 일대 반격전으로 일본군에게 25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합니다만 큰 전투는 이게 전부이고 항일투쟁보다는 농촌을 중심으로만 세력불리기와 계급투쟁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를 위협으로 여긴 장개석은 전선교착을 이용해 주력을 섬서방면에서 공산군과의 대결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련과의 다른 점입니다.
여래저래 분열된 중국의 상황상 장개석의 권위는 스탈린과 같을 수가 없었고 또 중국은 소련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 큰 차이였죠. 후퇴중인 부대를 멈추어서 전 장병들을 몇개의 횡대로 세운후 사단장이 발을 멈추는 열마다 사살해 버린다거나, 주민들의 도주를 막기위해 아파트 관리인 10명당 1명씩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그런 행위는 적어도 장개석 치하의 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죄수부대라던가 수백만명을 수용하는 강제수용소도 없었죠.
그러나 장개석이 중일전쟁당시 중국의 구심점인 것은 틀림없었고 일본도 국민당을 중국의 정통정권으로 봤지 팔로군따위를 대화의 상대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은 일본의 만주통치 승인, 화북과 화중을 공동의 통치구역화, 전비배상을 요구하며 중국에게 화평을 요구하지만 장개석은 거부합니다. 만약 그가 단지 자신의 권력안정만을 생각한다면 일본이 원하는대로 적당한 선에서의 강화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남송때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타협을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하면서 영-미의 참전을 호소함으로서 일본도 경제압박을 받아 결국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져 결국 일본은 패배하고 중국은 당당한 승전국이 되어 유엔의 상임이사국중의 하나가 될 정도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실이상으로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장개석은 전쟁중반이후에는 독선적, 아집을 보이고 개혁의 요구를 외면했고 항일전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바뀝니다. 그때문에 스틸웰이 편지와 일기에 장개석에 대한 욕으로 도배하도록 만들었죠. 탕은백, 손입인같은 명장들도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장교나 각료들은 무능하고 부정부패했습니다. 그걸 용인한 것도 장개석입니다.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해서 공과는 분명하게 구별해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기초로 하기보다 개인적인 편견이나 주관, 취향에 따라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으로 객관성없는 논리로 말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비단 이 건만 그런 것은 아니죠. 역사에서 특정한 사건을 두고 객관적으로 논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