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마음챙김을 위한 요가> 중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불교의 '심리학적' 가르침인 아비담마(abhidharma)에 따르면, 주의에 관한 마음의 요소(manaskara)는 보편적이며, 이는 우리가 항상 주의를 어떤 것에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현재 순간에 완전하고 순수한 주의를 둘 때 우리의 주의가 '적절'할 것인며, 지금-여기에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어떤 것에 주의를 둘 때 그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가르침들은 왜 현재 순간에 있는 것에 완전히 자각하라고 강조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유신론자가 말하듯이 '신은 사소한 것들에 깃들어 있다.' 혹은 타이잔 마에주미(Taizan Maezumi) 선사가 말한 것처럼 '사소한 것들이 전부다.'처럼 이것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친다. 우리가 삶과 맺은 약속은 상상 현재 순간에 있다. 당신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당신의 삶을 놓치는 셈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가? 당신은 과거 속에서 살 수 없다. 그것은 지나간 것이다. 당신은 미래 속에서 살 수 없다. 그것은 아직 여기에 있지 않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두지 않는다면 현재에 휩쓸려 가서 바로 지금-여기에 있는 당신의 삶을 잃게 될 것이다.
<일야현자경(一夜賢者經, Bhaddekaratta Sutta)>에서 붓다가 말하였다.
과거를 따라가지 마라.
미래 속에서 너 자신을 잃지 마라.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바로 지금-여기에 있는 삶을
있는 그대로 깊게 들여다볼 때,
수행자는 안정과 자유 안에 머문다.
우리는 오늘 부지런해야 한다.
내일까지 기다리는 것은 너무 늦다.
죽음은 뜻밖에 찾아온다.
어떻게 죽음을 가지고 흥정을 할 수 있겠는가?
현인은 밤낮으로 마음챙김에 머무를 수 있는
법을 아는 사람을
'홀로 사는 더 좋은 방법을 아는 이'라 부른다.
이런 맥락에서 '홀로 사는' 누군가는 산 속에 은둔한 수도승이 아니라 사회에 살면서 자기중심적 사고, 욕망, 투사 및 평가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안정과 자유의 특성에 주목하라. 이것은 안정되고 편안한 자세라는 아사나(asana)에 관한 파탄잘리의 정의를 상기시켜 준다.
'있는 그대로의 주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마음의 특성인 마음챙김은 선택하지 않고, 비교하고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일에 우리의 투사나 기대, 그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이것'을 보는 능력이다. 마음의 이런 특성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한 가지 이미지는 자각을 하늘처럼 상상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 느낌, 감각, 그리고 실로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우리의 모든 경험은 하늘을 통과해 가는 구름과 같다. 우리는 생각, 투사, 갈애 및 혐오를 우리와 동일시하고 하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훈련하는 것은 '커다란 하늘 같은 마음'을 길러서 모든 변화하는 현상이 자각을 통과하여 어떤 것에도 걸리거나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바와나(bhavana: 명상 또는 계발)는 이러한 본질적인 마음의 특성을 강하고, 안정되고 편안하고, 선택함이 없으며, 방해하지 않는 자각으로 수련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명상으로 가르치는 모든 기법과 수련은 사실, 모든 것을 포괄하고 열려 있으며, 이런 넓은 마음의 특성이 발달하도록 도움을 주는 기법들이다. 때문에 명상 '상태'란 사실 당신이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당신이 단순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정말 처음에는 이 '단순한' 수련이 꽤 어렵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일깨워야만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좀 더 자연스러워지고 쉬워질 것이다.
처음에는 대단한 노력이 요구되고, 자각을 하는 데 많은 공백이 있다. 결국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어떤 기술에서건 숙련을 위해 익히듯이 '마음챙김을 하고 있는 나'라는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마음챙김 자체만이 존재하는 어떤 시점이 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경우 자신과 자신의 연주 사이에서 어떤 분리도 없음을 아는 것처럼 수련하는 것과 연주하는 것은 하나가 되었고 같은 것이 되었으며, 손가락은 노력없는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으로 움직이고, 우리는 삶을 좀 더 단순하고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이 그저 존재하는, 노력 없는 광대한 자각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불교 명상 혹은 바와나(bhavana)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지만 불교 명상을 대부분의 다른 형태의 명상과 구별하며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두 번째 측면이다. 이 두가지 요소는 사마타(shamatha, 팔리어로는 samatha)와 위빠사나(vipashyana, 팔리어로는 vipassana)다. 그리고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두 번째 측면이기 때문에 서구에서 불교 명상은 일반적으로 위빠사나(통찰 혹은 마음챙김 명상)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선 수행에서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베트남 전통을 제외하고) 이 두 가지 정신적 수련을 구현하고 있다.
사마타는 글자 그대로 '고요함 속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며 때때로 집중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집중 혹은 마음이 단 하나의 것으로 향하는 것이 고요함, 평온함, 편안함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틱낫한 스님은 종종 사마타를 '멈춤'이라고 하면서 한 남자와 말에 관한 다음의 이야기와 연관시킨다.
말이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고 말 위에 탄 남자는 중요한 장소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가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어디로 가고 있소?"라고 소리치자 말에 탄 남자는 "나도 모르오! 말한테 물어보시오!"라고 답한다.
울론 이것은 우리의 상황이다.
계속 '쉴 새 없이 활동'하면서 우리의 습관 에너지는 한 경험에서 다른 경험으로 옮겨간다. 그래서 우리의 첫 번째 수련은 멈추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기 위해서 먼저 멈춰 서서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한다. 습관 에너지를 멈춰라, 잘 잊어버리는 것을 멈춰라, 끊임없이 계속 쫓아가는 것을 멈춰라.
가장 흔하게는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향한 '특별한 통찰' 혹은 '분명하게 봄'으로 번역되는 위빠사나는 깨달음과 자유 또는 해탈로 이끄는 통찰이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가 걸었던 요가 행로의 마지막 두 개 분지인 마음챙김과 집중이 불교 명상 수련에서 길러진 두 가지 측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수련을 단순히 멈춰 서서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련에 있어 모든 명상이 이들 두 가지 특성을 배양시키지만, 강조점에서, 그리고 집중이나 마음챙김 중 어느 쪽을 중요시하는가에 따라서 궁극적인 결과에 실제적인 차이가 있다. 명상을 할 때 주의를 두고 집중할 대상을 그저 자각하는 것이 마음챙김이다. 집중은 주의를 선택된 명상 대상에 고정시켜 붙잡아 두는 것이다. 또한 마음챙김은 집중이 흔들리고 주의가 산만해질 때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집중은 배타적이다. 집중은 주의의 대상이 아닌 모든 것을 배제하고, 명상 대상이 만트라, 시각적 이미지 혹은 호흡이든 전적으로 그 대상에만 초점을 둔다. 이것은 고도로 집중된, 그리고 강력한 레이저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마음을 하나에 집중시킨 상태'라고 부른다. 정말로 깊은 집중을 계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어날 수 있는 산만함으로부터 가능한 자유로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매우 깊이 집중된 정신 상태는 다양한 요가경전(불교와 더불어 힌두의 요가경전)에서 논의되는 여러 가지 선정(jhana) 혹은 사마디(samadhi)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붓다가 보았듯이 진정한 통찰에서 오는 완전한 해탈을 이루기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상태를 수련한다면 고도로 집중된 상태는 문제가 많을 수 있다. 이들 상태는 실로 더없이 행복한 것이지만 조건적이며 일시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집중하게 되면 그것은 고(苦)의 원인이 된다. 수련자가 초기에 훈련하는 동안 이런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서 나오게 될 경우 감각적인 접촉을 경험한 후 곧 성욕, 혐오, 망상의 씨앗이 다시 한 번 피어나게 된다고 붓다는 말하였다. 우리는 분명 이런 집중된 상태를 이용하여 휴식을 찾고 고요해질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우리는 일단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 고(苦)로 되돌아가서 그 고(苦)를 관찰하고 자유를 깨닫는 데 필요한 깊은 통찰과 이해를 발달시켜 가는 순서로 행동한다.
마음챙김은 포괄적이다.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선택 없는 순수한 주의의 특성을 갖는다. 보통, 당신은 집중 수련을 하는데 창 밖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리면 그것을 멈추려고 시도하고 나서 다시 명상 대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마음챙김의 순수한 주의를 수련하고 있다면 경적이 울리 때 일어나는 초조함이나 불쾌한 기색 모두와 더불어 그저 그 소리를 알아차릴 것이다. 마음챙김은 자동차 경적의 높낮이 변화, 정적감, 일어나는 모든 연결된 사고 같은 변화 그 자체를 관찰한다.
집중은 레이저 같지만 마음챙김은 투광 조명등 같아서 보고자 하는 모든 것을 비춘다. 마음챙김은 반응하거나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닦아야 할 두 가지 특성 중 더 어렵다. 어떤 것이 올라오더라도 관찰하며 해석이나 평가, 판단 및 거부 없이 수용한다. 마음챙김은 우리가 당면한 경험, 예를 들어 우리가 매우 무시하고 부정하는 보잘것 없고 악취가 나고 맛 없는 음식일지라도 그 모든 측면을 거부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비공격성의 수련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수용하라고 한다. 바꾸거나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단순히 보는 것, 그리고 죄책감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상당히 터무니없는 주문일 수 있다. 하지만 수련을 지속해 감에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자비, 불교의 두 기둥인 프라즈나(prajna)와 카루나(karuna)를 함께 기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명상은 집중과 마음챙김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한다. 집중을 아주 많이 하면 매우 고요하고 차분해질 수 있지만, 돌부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집중의 중심을 잡아주는 고요함이 없는 과도한 자각은 주위 환경에 대한 극도의 민감성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과 유사하게 지나치게 민감한 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심히 무력하고 몹시 피로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명상의 영역에서 그러한 과민증은 깊이 있게 꿰뚫는 통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불교 전통에서 처음 명상 수련을 시작할 때 집중을 계발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사마타를 지도 받는다. 많은 초심자는 종종 명상을 시작한 후 자신들이 '점점 나빠져 간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교사가 제시한 대상(대개는 호흡)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마음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매우 활동적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과 요가 우파니샤드 모두에서 뛰어 돌아다니는 마음의 이러한 경향성은 '원숭이의 마음'으로 비유되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원숭이 마음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원숭이의 마음을 바로 본다는 것이 수련의 첫 결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어느 정도의 집중을 계발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수련하려고 한다면 생각에 빠지지 않고서 일어나느 것들을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마음챙김의 기초를 자질 집중이 없이 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당신은 아마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고, 화에 사로잡히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보고 느끼는 대신 화와 동일시하고 그것에 바져서 실제로 화를 키울 것이다. 일단 집중을 어느 정도 계발하였다면 이제 주의와 마음챙김이 중요시될 수 있다. 그리고 해탈과 동의어인 실체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끄는 것이 마음챙김의 결실이다. '마음의 해탈'인 체토-위무티(ceto-vimutti)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