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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 과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히 12:14-29)
이 본문 말씀을 살피면 세 가지 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① 14-17절에서 “교회 생활에 대한 말씀”이고,
② 18-24절로 “율법에 비교한 복음의 탁월성”을 말씀하셨으며,
③ 25-29절까지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체의 제목을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순서대로 살펴보시면
1.교회 생활에 대한 교훈(14-17절)으로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14절)”는 것입니다.
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하심은 모든 사람과 화목하며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이요,
② “거룩함을 좇으라”하심은 하나님만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예수님을 잘 닮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인격을 잘 알아서 예수님을 닮아 순결을 도모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거룩해지려면 죄사함 받는 믿음을 갖고 깊이 회개하며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③ 14절에서 “이것이 없이는 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주를 볼 수 없다”는 뜻은 “하나님과의 친교적 관계를 갖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마 5:8에서 말씀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으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하신 말씀과도 뜻이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친교적 관계는 믿음과 이웃에 대한 화평의 방법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으면 제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이 없을 만큼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2)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쓴 뿌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도록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면 참 불행한 형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악담이 “은혜 없는 성도 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은혜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① 은혜의 방편은 말씀이니까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그런 뜻이요,
② 믿음 있는 것이 은혜인데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되니까 말씀 실천을 잘하는 것이 은혜에 이르는 것이며,
③ 최고의 은혜는 내세의 상급에 있으니까 충성을 잘하는 것이 “은혜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에 이른다”는 것은 말씀을 잘 깨닫고 잘 실행하면서 또 충성을 잘하는 생활인데 성도가 여기에 이르지 못하면 쓴 뿌리 같은 존재가 되어 거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필자는 벌초할 때마다 잔디 풀만 있어야 할 장소에 가시나무, 참나무뿌리가 번창하여 어려움 주는 것을 경험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은혜에 이르지 못하면 기쁨과 감사가 없고 불평과 원망하는 말만 하면서 협력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성도이면 이웃을 유익하게 못하는 쓴 뿌리 같은 형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뿌리가 쓰면 열매도 쓸 것이요, 은혜아닌 것은 은혜아닌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서의 기자는 그런 상태를 두려워하고 그런 자가 없도록 서로 노력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음행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16절). 음행은 계명의 위반은 물론 부정의 씨앗까지 발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중하고 교회의 순결을 해치는 등 죄악의 후유증도 오래가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음행의 씨를 뿌리고(삼하 11:5,27) 그 아이가 죽는 시련을 당하였으며(삼하 12:15-18) 집안에 불상사까지 일어난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삼하 13:22,30). 이렇게 음행은 개인과 교회의 순결을 파괴하는 죄악이므로 두렵게 여기라고 하신 것이요
4)“에서”처럼 “한 그릇 식물을 인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것처럼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하셨으니(16절) 이 말씀은 현실축복을 타산하여 신령한 복을 포기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에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팥죽에만 마음이 있고 장자의 명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는 비택자였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나타냈지만(출 9:13, 창 25:32) 성도에게서 그런 비택자의 행동이 나타나서는 안되겠기로 이런 경계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일의 타산으로 신령한 복을 멀리하는 성도가 이 세대에 얼마나 많습니까? 또 그런 일을 감행하였을 때 회개할 기회가 반드시 있다는 보장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교회 생활의 발전을 위하여 이 네 가지 경계의 말씀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2.복음적 은혜는 율법의 사역에 비할 때 엄청나게 탁월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8-24절).
그 탁월한 이유는 율법과 복음이 주어진 상태와 제물의 성격 차이에서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1)율법은 시내 산에서 주셨고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주셨습니다.
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장소는 사람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불붙는 시내 산이었으며 그때에 영광스런 나팔소리가 들린 것이 아니고(19절) 정죄와 심판을 예표하는 흑운과 흑암과 폭풍이 있었으며(출 19:16-19) “짐승이라도 그 곳에 이르면 돌로 친다(출 29:12-13)”는 경고를 하시므로, 모세도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여(20절)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신 18:16의 의미상 표현인듯 함)”하였으니 율법의 사역은 이렇게 정죄하는 것이기 때문에(롬 3:20,4:15, 갈 3:13) 그 상황도 두렵게 나타난 것입니다.
② 그러나 복음을 주신 것은 시온 산이 있는 “예루살렘”인데 이 곳은 하늘의 예루살렘인 내세 천국을 모형하는 아름다운 장소요(22절) 또 천국을 비유하는 곳으로서 천국에는 천만 천사들(많은 천사;23절)과 하늘 생명록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남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예수님까지 계신 완전하고 영원한 처소”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뜻은 생명록에 기록된 구원받은 백성을 뜻함이요(계 20:12) “장자들의 총회”란 하늘의 특권을 풍성하게 누릴 모범 성도를 칭찬하는 뜻으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장자가 갑절의 기업을 받고(신 21:17) 가문의 기둥이 되는 것처럼 하늘 기업을 누림에 있어서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모범 성도들의 단체가 명예롭기 때문입니다. 또 그 곳에는 하나님만 인정하시는 즉,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로 구성된 전체적 무형교회가 있고,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까지 영원히 함께 계신 곳입니다. 이렇게 율법과 복음을 주실 때 그 상황에서의 격차가 있듯이 율법은 정죄와 심판을 전달한 것이고 복음은 영원한 은혜로서 하늘의 자리에 앉혀 주신 것입니다(엡 2:6). 본문 18절과 22절의 “너희의 이른 곳”이란 말씀이 바로 천국을 모형 하는 예루살렘을 지칭한 것입니다.
2)제물의 차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세 당시에는 짐승의 피로 모형적 제물을 삼았으나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은 아벨의 피보다도 더 나은 자신의 피로 속죄제를 드린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 앞에 호소력을 가졌지만(창 4:10) 그것도 죄인된 인간의 피일 따름이요. 예수님의 피는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생명의 피요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무한한 것입니다(24절).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의 사역보다 복음의 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각각 은혜를 받은 장소와 상태의 차이와 제물의 차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섬기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25-29절).
1)그 방법은 28절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건하고 두렵게(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임) 섬겨야 할 이유는,
① 그 하나님이 진동치 않는 영원한 나라를 주셨기 때문이요,
② 장차 보이는 세상을 진동시켜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시절에 모세를 거역한 백성들을 땅을 진동시켜서 심판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민 6:30-35). 그런데 하나님이 또 한번 “하늘도 진동하리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으니(학 2:6-7,21) 이 “또 한번 하늘이 진동된다”는 뜻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진동시켜 변동되어 없어지게 하시고(벧후 3:10-13) 그 대신 진동치 않는 영원한 천국을 건설하실 것을 예고해 주신 것입니다(27절).
③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같으시기 때문입니다(29절). 소멸하는 불이란 불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니 얼마나 두렵습니까?
2)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은 은혜를 받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① 28절에서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믿음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없습니다(히 11:6). 또 성도가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터득할 수 없고 또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만 능력있는 충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방법은 순종이 제일입니다(25절). 제사 의식이나 제물보다 나은 것이 순종이니까요(삼상 15:22). 하나님은 땅에서 경고를 받은 모세에게도 “거역하지 말라”하셨고, 또 그를 거역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였거든(민 14:26-35) 하물며 하늘로 좇아(위에서 보내심 받은 뜻) 오셔서 경고하신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대인들(우리일까보냐)이 어찌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25절). 그런고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신 말씀에서,
① 율법의 정죄 사역과 복음의 구원 사역에 대한 차이를 아셔야 하고,
② 성경은 이에 대한 차이를 시내 산에서 무서운 표현을 나타내신 것과 예루살렘을 천국 모형으로 나타내신 것으로 알 수 있게 하셨으며,
③ 예수 님의 속죄의 피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④ 진동치 않을 영원한 천국을 주신 하나님, 또 소멸하는 불같으신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야 할 것과,
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기 위하여서는 모든 성도가 은혜를 받고 오직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순종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방법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다음과 같은 기도의 제목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① 모든 이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룩하기 위한 기도,
②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기를 위한 기도,
③ 음행의 유혹이 없기를 위한 기도,
④ 현실욕에 대한 타산으로 신령한 복을 포기하는 잘못이 없기를 위한 기도,
⑤ 복음의 은혜가 율법 선포의 은혜보다 귀한 것을 감사하는 기도,
⑥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
⑦ 믿음의 은혜, 말씀의 은혜, 성령 충만의 은혜를 많이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
⑧ 제사보다 나은 순종을 잘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
⑨ 은혜를 받지 못하여 기쁨과 감사와 만족이 없이 모든 이와 교회 앞에 쓴 뿌리처럼 되는 자가 없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 등입니다.
설교보충 31. 신앙의 보호 대책 (히 12:4-13)
지금 읽어드린 본문 말씀에는 “신앙(信仰)의 보호대책(保護對策)” 세 가지가 나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4절 말씀에 근거하여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방식”이고, 둘째는 5-11절까지에 근거하여 “권면과 징계를 받으며 연단하는 것”이며, 셋째는 12-13절에 근거하여 “어그러지지 않은 바탕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의 역사가 많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마치 전쟁과도 같은 것이고 또 달음질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비상한 각오와 보호책(保護策)을 쓰지 않으면 신앙을 사수해 나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1.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의 보호 대책 중 첫째로,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하셨으니, 피는 곧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는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죄와 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도가 성결한 신앙을 보존하려면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많은 성도들이 육정과 인정에 끌려서 죄인 줄을 알면서도 따라가고, 때로는 핍박으로 인한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죄와 담대히 싸우지 못하고 연약하게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룻의 동서 오르바가 인정과 생활 염려에 끌려서 신앙을 버렸고,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끌려서 망령된 일을 하였으며, 베드로도 죽음이 무서워서 주님을 부인했었고, 데마도 세상을 사랑하여 선교 일선에서 떠난 사실을(딤후4:9)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옳게 보존하려면 자기를 세상에 물들이지 말고 가난과 비천과 고난만 각오하면 어지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런 사실들을 다 종합하여 “피흘릴 각오”, “죽을 각오” 즉, 순교(殉敎)의 정신을 갖고 모든 일을 행한다면 넉넉히 죄를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죄와 싸워서 피흘려 죽기까지 싸우신 분이시고,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시기 위하여 죽음의 고난까지 당하신 것입니다(히2:14-15).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피흘릴 각오를 하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 6.25 동란 때도 많은 신자가 정치적인 반동자로 몰려서 끌려가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순교도 당했지만 초대 교회 당시의 핍박의 역사나 구한말 당시 천주교에 대한 핍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는 말씀을 구상하면서 성경과 기독교 역사 안에서 순교한 사실들을 대충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순교자의 역사가 그리 많이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창4:8에서 아벨이 순교의 첫 제물이 되었고, 대하24:20에서 제사장 여호야다(혹,바라갸;마23:35,눅11:51)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사가랴)가 범죄한 요아스 왕에게 이로운 예언을 하지 않았다 하여 성전에서 살해당하니 그가 죽을 때에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해 달라”는 내용으로 호소를 하고 죽은 사실이 있고, 그후에 신약에서 보면 세례 요한이 선두로 순교를 하였고, 그 다음에 스데반과 야고보가 순교를 했으며, 히11:35-에 보면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과 핍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과 돌로 치며, 톱으로 켜고, 칼에 죽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일들은 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일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숱한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다 하늘의 상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세상에 알리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또 베드로나 바울이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장렬한 순교를 했다고 ‘클레멘트’(알렉산드리아 人)의 글과 ‘유세비어스’의 역사(로마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후 2,3세기 경에 있었던 로마 황제의 10대 박해는 역사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구상하면서 한국의 기독교 전래와 순교사를 잠시 살펴 보았습니다. 천주교의 역사는 개신교보다 약 100년이 앞서는데, 1777년에 중국 대륙을 통한 선교 영향으로 처음 한국인 신자의 결실이 몇 사람 있었고, 1845년에 김대건 신부가 처음 임직되었으나 그는 이듬해인 1846년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사건 때부터(1866) 대동강에서 개신교 목사 토마스가 순교할 때까지 계속 ‘을사박해’(1785),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 등의 박해가 수없이 많아서 많은 신자들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순교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주교는 영조 말 정조 대왕 초에 들어와서 순종, 철종 때를 거쳐서 대원군이 치세하던 시대까지 박해가 있었는데, 한국 역사에 보시면 1881-1890년까지 9년동안 대원군이 청나라로 가서 감금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간인 1885년에 장로교 목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목사 아펜젤러가 들어와서 개신교 포교를 시작하였고, 그때에 황해도 장연군 송천면에 송천(松川, 소래) 교회가 최초로 설립이 되어 한일합방(1910,8,22) 시대까지 오는 동안 많은 부흥이 있어 오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에 최초 신교 목사인 한경희 목사가 북만주 선교 도중에 순교를 하였고, 1938년에 본격적인 신사참배 강요 문제로 많은 신자들이 검속된 중 1944년에 주기철, 최봉석 목사님이 옥중에서 순교를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순교사화집”을 읽어보시면 그 정황을 뼈아프게 느끼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전쟁은 없어야 하겠지만 혹이라도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져서 무신론적 정치가 득세를 한다면 우리 각자가 신앙의 사수를 위하여 피흘려야 된다는 문제가 우리 앞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교를 각오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할 저희들이 인정과 세속에 끌려서 유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또 어떤 성도는 진정 예수님과 그 말씀을 사랑하여 실천해 보지도 못하고 한 두 주일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예수 믿어 주었는데 왜 축복이 없느냐 ?” “믿을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말세의 유혹이 많은 이때에 피흘릴 각오를 하고 믿음의 순결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 권면과 징계를 달게 받으면서 늘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운동 선수가 경기에 나가기 전에 심한 책망을 받으면서 연습을 합니다. 권면을 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모르는 사람이요, 교만한 사람입니다. 본문 5절 말씀에서 “아비가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것을 잊지 말라” 하셨고, 또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할 이유는,
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며,
②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고,
③ 징계가 잠깐은 괴로우나 나중에는 연단을 받아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수도 있고,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수도 있지만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징계를 받는 단계에 오른 것은 권면의 단계에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여기에서 일반적 징계를 달게 받으면 좋거니와 만일 계속 완악해지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노여우심이 더 커질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징계를 받게 되었다면 회개하는 것이 가장 신앙적이 되는 것입니다.
3. 신앙 생활을 든든히 보호하는 바탕을 잘 구축하는 것입니다. 고속 버스를 타고 가면서 “목사의 목회는 차 운전수와 같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차의 손님은 교회와 교인이고, 운전수는 목사라면 운전수가 안전 운행을 하기 위하여 교통 규칙을 지킴은 물론 피곤함이 없이 운전에 몰두해야 되는 것처럼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도 목회자의 상당한 경성과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그리고 곧은 길”이란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길을 달리는 사람이 어그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신앙 생활을 달리는 것으로 표현하셨는가 하면, 그 위에 12:1에서 “신앙 생활을 운동 경기”로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휴식이 없으면 피곤합니다. 그러니까 휴식을 취하여 피곤한 손이 안되어야 하고, 또 운동 연습 같은 훈련이 부족하면 연약한 신체, 연약한 무릎이 되니까 역시 오래 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과 훈련으로 무릎에 힘을 쓰게 하고, 또 병적 연고로 “다리가 절면 운동을 못하니까 그 병적 요소도 고쳐야 하는데 역시 길도 좋아야 하기 때문에 곧은 길을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동차가 안전하게 가려면,
① 자동차가 좋아야 되고(정비가 잘된 차),
② 운전 기술도 좋아야 하며(숙달된 기술),
③ 길도 좋아야 합니다(곧은 길). 그러면 이것은 신앙을 보호하는 일에 어떤 의미를 주시는 교훈인가 할 때,
① ‘곧은 길’은 신앙 생활을 잘하는데 구애가 없을 만큼 좋은 생활 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은길도 닦아서 되는 것처럼 신앙 생활에 구애스러운 것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자유의 분위기를 갖는 환경을 의미하고,
② 손과 무릎과 다리는 다 자기 몸의 지체이니까 자기의 성품과 생활 태도의 저는 다리 같은 병적 요소를 제거하고, 연약한 무릎처럼 든든하지 못한 부분도 보충하고, 피곤한 손처럼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일들도 다 멀리하여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상하고 어그러지고 무질서한 부분이 없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좋은 신앙의 가정에서 삶으로 길은 좋은데 자기의 신앙 형편이 부족하여 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형편은 퍽 열심 있고 건전한데 환경의 곧은 길이 못되어 바른 생활을 못하는 경우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양면을 다 고르게 보충하셔야만 든든하게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의 보호 대책은,
①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순교적 결심과,
② 권면과 징계를 달게 받으면서 연단을 받는 생활,
③ 그리고 내적, 외적으로 곧은 길을 만드는 일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보충 3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 (히 12:14-17)
본문에서는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 것이 곧 은혜로운 생활임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1.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려면 우선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거룩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대인 관계에 원만함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이웃 사랑이 대단히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1) 계명의 강령이 이웃 사랑이고(마22:39-40), 이웃과의 화해가 하나님께 나가는 필수적 조건이며(마5:24), 형제의 죄를 용서함이 자기의 죄를 용서받음에 필요하고(마5:14-15),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요일4:20).
대인 관계의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볼 때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의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 ? 하는 것은 마치 병원에 있는 많은 환자들 앞에서 자신의 건강함을 비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얼마나 큰 행복을 느낄까요 ? 상상해 보십시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
① 우선 불화, 대립, 갈등의 대상이 있다면 이것을 하나하나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해 관계가 없이 싸운 일이 있다면 사과하고, 남을 억울하게 한 일이 있다면 상대방이 이해할만큼 변상하고, 송사 사건이 있으면 속히 끝내되 억울함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갚아 주실 줄을 믿고 맡기는 신앙으로 양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송사는 사람이 손을 뗄 때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시37:5).
② 대인 관계의 불화의 요소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상대방을 의심하거나 미워하거나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외면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고 모든 이를 상대하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많은 것이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 거래가 불화의 원인을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시고, 자기 책임을 잘하여 모든 이웃과의 화평과 거룩함을 쫓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한다” 하셨으니까 대인 관계의 화해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불가피 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려면 세 가지 부정한 일을 삼가야 하는데, 하나는 잘못된 사상이고, 또 하나는 음행이며 또 하나는 세속적인 요소입니다.
1) 본문에 보면 “쓴 뿌리가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쓴 뿌리”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잘못된 사상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관이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하나님 중심이 인간 중심으로 뒤집어 집니다. 모든 이단이나 우상주의나 불건전함이 다 이 쓴 뿌리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음행을 경계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의 육체의 정욕을 남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음행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자기의 몸을 더럽히고(고전6:19), 음행의 자손을 번성시켜 인간 사회에 불화를 조성하는 악이요, 자신과 모든 교회에 신령한 분위기를 손상시키는 악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3) 세속적인 욕구에 따라가는 것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에서가 팥죽 먹는 것으로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사실이 인간의 세속적 욕구로 신령한 복을 멀리한 뜻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셨으니까 육체의 떡보다 신령한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므로 신령한 은혜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① 제가 기성 교회를 목회하다가 사임한 것은 말씀 연구에 이끌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치리에 신경을 쓰고, 심방 등으로 교인 돌아보는 일이 말씀에 집착하는 것보다 못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연구하는 은사에 끌리는대로 살기 위하여 사임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홉 식구 생계 유지의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사임 결정을 끝내고 이삿짐을 꾸리는 기간이 약 10일쯤 있었는데, 그때에 말씀을 정리하는 은사에 끌려서 이삿짐을 꾸리면서 7분 설교 5집을 정리하였습니다.
② 제가 책을 출판하는데는 물질의 아무런 이득이 없고 오히려 천여만원 투자를 하였습니다. 5년쯤 지나면 출판비의 50% 정도 회복될까 말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 소비보다 말씀 기록과 보급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③ 제가 문정동 사거리 코너 3층 상가에 ‘새교회’ 간판을 붙이고 그 건물 벽과 유리창에 전도 성구 세 가지를 게시하였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이며, 또 한 구절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말씀입니다. 이 세 성구는 전도 성구로 사거리 대로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에도 전도지를 수천장 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 성구를 게시하는 데는 한 달에 집세가 70만원씩 소요됩니다. 70만원이면 작은 한 가족의 생활비입니다. 그런데 제가 부산에 작은 교회의 단체를 맡아 일하게 되면서 물질의 소득이 없는 문정동의 예배 처소를 문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구절로 전도하는 일이 큰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약 1년간 그대로 보존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에서처럼 물질주의에만 사로 잡혀 물질의 감소만 타산하고 영적 은사와 축복에 대한 가치를 모른다면 당연히 물질이 손해나는 일을 중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에서처럼 망령되게 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말씀을 드리는 것이며, 신령한 은혜나 복음 사역은 감히 물질을 계산할 것이 못됨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신령한 은혜로 세속의 것으로 바꾼 사람이 롯의 처와 에서였고, 신약에서는 가다라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찾아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그런 형편으로 따라갔으며, 또 한 부자 청년도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고 나를 좇으라” 하셨을 때 “그에게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여 돌아갔다” 하였으니 그도 역시 그런 인물에 속하였던 것입니다(막5:17,눅9:51-56,마19:21). 이런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잘하려면,
① 사랑의 실천으로 대인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②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부정한 일들을 삼가며,
③ 말씀 연구에 집착하며 묵상하는 일을 잘하셔야 할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