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인각학,새로운 시의 길
서림 (시인, 대구대학교 교수)
시학이란 결국
인간학에 다름 아니다. 인간학이란 또한 인간 삶의 방식, 존재방식에 대한 탐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방식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과의
관계 맺는 형식에서 출발한다. 태초에 인간이 인간 아닌 사물들과의 관계 맺는 방식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것은 곧 이름 붙이기에서였다. 역사의
출발점에서 인간이 이름 붙이기로 다른 사물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동서양을 통해 공히 발견된다. 먼저 동양에서 문화의 시작이란 관점 자체가 이러한
이름 붙이기에서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옛날에 포희씨가 천하를 통치했다. 고개를 들어서 하늘에 있는 모습을 관찰하고 굽혀서 땅의
법칙을 관찰하고 새와 짐승의 무늬(文)와 땅의 마땅함을 살폈다. 가까이서는 자신의 몸에서 멀리서는 사물에서 취하였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8괘를
만들었다.(古者敍犧氏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觀
鳥獸之文, 與地地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이처럼 고대 중국에서는
언어 문자의 기원이 우주의 시작부터 있어왔고, 그 언어 문자는 바로 우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사상이 지배적인 것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언어철학을 배경으로 하여 공자의 소위 정명사상이 나오는 것이다. 정명사상이란 결국 인간이 원래의 본질적 언어,
복희시대의 언어를 회복하여 문화와 문명을 바로 세
우겠다는 의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서양에서는 어떠한가?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동물들에다 이름을 붙였다. 모든 동물들의 이름은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타락 이전 아담의 언어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언어로 그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최초의 인간 아담과 사물들은 그렇게 본질적인 만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언어로써 사물들을 파악하고 그 사물들을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에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시란 곧 사물에다 이름 붙이기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인간이 사물과 행복하게 만나는가가 시의 출발인 셈이었다. 이처럼 시는 인간 문화의
출발과 발걸음을 같이한다. 아담에게는 모든 사물들의 이름을 붙일 만한 지적, 정서적 능력, 즉 인격적 능력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겐 엄청난
문화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언어능력은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시학이 인간학인 만큼 그것은 또한
윤리학이다. 각 시대에 대응하여 인간이 어떻게 삶의
방향을 가늠하는가의 문제에서 시학은 출발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모든
동물들에게다 이름을 부여하고 그리하여 땅을 정복하고 그것들을 다스리는 적극적 문화행위를 보여주었다면, 그것은 그 시대 아담이 짊어져야 하는
윤리였다. 인간이 타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가 곧
윤리학이요, 그것이 곧 시학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모든 시학은 결코 윤리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절대 없다.
이와 같이 시학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사물 인식에서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배제하자는
주장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예컨대 오규원의 창작방법론은 곧 그의 세계관이다. '날 이미지'라는 관념 자체가 그의 언어철학의 산물인
셈이다. 사물에 대한 해석,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간적 해석을 배제하겠다는 것은 인간중심주의 이데
올로기, 즉 근대
이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미학적 의지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간의 민주적 관계, 평등적 조건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것은 근대문명, 나아가 인간중심주의 문화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즉 도구화된 이성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다. 그런데 이런
도구화된 이성에 대한 비판이 왕왕 이성 자체, 또는 의미의 근원과 중심에 대한 회의와 부정으로 연결되는 데 이들의 문제점이 있다. 사물 인식에
있어서 인간적 관점의 배제라는 것은 민주적 관계의 모색이 아니라, 지적 상대주의, 나아가 허무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과연 다른
동식물들과 무기물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적 관점을 배제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 이들은 인간에게 주도적인 리더쉽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창조시 아담에게 보였던 바람직한 문화능력의 회
복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물 인식에 있어서 인간적 관점의 배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이 땅의 해체주의자들은 어떠한가? 인간 이성에 대한 그들의 철저한 불만은 반문명의 또 다른 모습이다. 병리적 문명을 병적인
방법으로 부정하고 해체하는 그로테스크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인간이란 어디까지 타락할지 알 수 없다는 위기감을 절감한다. 인간이 바위나
나무와 꼭 같다는 사상보다 한 술 더 떠서 인간이 그만 벌레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게되는 것이다. 아니 벌레보다 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물에다 이름 붙이기를 두려워하는 시인. 언어 앞에서 절망하는 시인. 어쩌면 그는 어느 정도
정직한 시인일 수는 있다. 오늘날과 같이 혼돈스러운 시대, 기의와는 따로 노는 기표들이 반란하는 시대에 언어를 불신하는 시인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야 어디 용감한 시인, 창조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는가. 결국 시인이라면 사물에다 바른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담이 지닌 능력 중 일부라도 회복하려 애써야 되지 않겠는가.
시는 인간의 것이다. 언어를 가지고 있는 인간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문화의 정수인 것이다. 언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을 어찌 다른 동식물과 같다고 비하시킬 수 있는가. 다른 동식물들도 귀하다. 모두 다
원래 선하고 아름답고 귀하게 창조되었으니까. 그러나 언어를 지닌, 이성을 지닌 인간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원래 아름답고 귀하게 창조되었던
자연의 본 모습의 회복 역시 인간 회복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회복되면 자연 환경도 따라 회복되는 것이다. 아담이 지녔던 창조적인
문화능력이 회복될 때 자연도 복구되는 것이다.
도구화된 이성에 대한 비판의 다른 하나인 오늘날의 생태주의 시학에도 문제점이 많다. 이들이
지닌 반문명적 태도는 인간이 원래 지녔던 건전하고 창조적인 문화능력을 무시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로 동강까지 가서 반문명적인 시를
써야 하는 이들의 아이러니도 우습지만, 이들의 반문명적 태도가 반문화로 이어지는 게 더 걱정되는 일이다. 여기서 말
하는 '반문화'란
인간이 리더쉽을 지니고 창조적인 문화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태도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인간이 너구리, 오소리와 같고, 밤나무,
상수리나무와 동일하다는 말인가. 그들에게는 언어가 없고 문화도 없다. 그들처럼 언어도 문화도 포기하자는 말인가. 이런 반문화적인 시들이
생태주의란 이름 하에 만연되고 있다는 것 또한 우려를 금치
못할 일이다.
동양에서도 문화란 원래 인간의 고유하고 적극적이면서도
창조적인 몫이다. 유가들은 인간의 문화를 너무도 중시하고 있다. 우주에 있어서 인간의 문화적 역할과 그 중요성에 대한 유가적 견해는 이러하다.
易의 <계사전>에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는 헛되이 행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易道의 관건이 인간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계속해서 <계사전>에는
"신명하게 됨은 사람에 의해서이고, 묵묵히 이루어지면서 말하지 않아도 믿게 되는 것은
덕행 때문”이라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 구절에 대해 주자는 "괘효를 변동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람이며, 사람이 신명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그 덕행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논어>에도 나오는 바, 공자는 "인간이 능히 도를 크게 하는 것이지 도가
인간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정자에 오면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사람은 그 가운데 자리한다. 사람이 아니면
천지를 볼 수 없다"라는 경지에까지 나아간다. 이만큼 유가들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주체적, 주도적인 면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간의
조화된 삶을 이상시하고 꿈꾸면서 유가들은 그 주도권을 인간에게서 발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동서양을 물론하고 인간의 주도적인 면이
강조되는 데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시란 인간학이다. 언어를 지닌 인간만의 몫이다. 인간은 언어로써
자연만물과의 바른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원래 아담이 지녔던 문화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적인 이상적 모습을 과거 아담에게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동식물도, 무기물들도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자연환경에 대
한 인간의
책임이고, 인간의 윤리적 몫이다. 도구화된 이성을 비판하는 것은 옳다. 그렇다고 이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위험한 것이다.
인간에겐 선험적인 이성이 부여되어 있고, 그 선험적인 이성이 보편적인 윤리학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윤리학은 보편적인 시학에 다름
아니다. 윤리적 공동선을 위한 노력을 포기한 시학은 시학으로서 가치가 없다.
윤리적 공동선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의 본질적
관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본질적 관계는 대화적 관계이다. 그래서 본질적 언어, 시적 언어를 부인하는 시인은 참 시인일 수가 없다. 우리는
타락한 언어를 타락한 방식으로 저주하며 비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원래의 것으로 회복해야 한다. 언어가 원래의 완전한 것으로 회복될 때 창조적인
인간학이 가능하고, 그때 새로운 차원의 시가 열릴 것이다. 그때 이성은 도구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적 이성, 인간적 이성, 창조적 이성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야 우리는 자연과 도시와 공장이 시와 더불어 공존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반문명, 반문화의 시적 태도는 결코 건강하고 창조적인 활기찬 시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건전하고 창조적인 문화능력을 회복해서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데 있어서 주도적 위치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밀잠자리, 물
잠자리도 원하고 붉은 꼭지 버섯, 갈색 먹물
버섯도 간절히 바라는 바일 것이다. 동강의 노루궁뎅이는 인간이 자기처럼 되어주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소망스런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창조적 리더쉽을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 창조적인 관계 속에서 소망스럽게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올바른 근대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근대성 비판의 참된 양상은 창조적 인간학을 정립하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할 때 시의
위기, 문학의 위기가 타개되는 것이다. 시의 위기는 단지 뉴미디어 문제나, 자본의 전략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학을 정립할 때 그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2003.07.16. 1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