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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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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스크랩 영상컨텐츠박물관대학-문화답사 1일차-조선시대 양반촌 良洞마을
西痴 추천 0 조회 111 09.04.25 09: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상컨텐츠박물관대학-문화답사 1일차-조선시대 양반촌 良洞마을

 

 

영상컨텐츠박물관대학 1기생들의 첫 문화답사지로 전형적인 양반촌인 경주양동마을과

불교 성지로 알려진 경주 남산을 찾았다.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이다.

양동마을은 씨족마을로서, 사돈 관계에 있는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 가문이 거주하여 왔다.

양동마을에는 큰 규모의 양반주택들이 잘 보전되어 내려오고 있는데, 그러한 집들은 대개 ㅁ자형의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양반주택들 중 많은 수가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서 양동마을은 하나의 살아있는 건축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 6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1933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양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랑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으나, 청동기 시대 묘제(墓制)의 하나인 석관묘(石棺墓)가

마을의 안산(案山)인 성주산 정사의 구릉지에 백여기나 있었다는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B.C 4세기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 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경북지방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고,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月城 孫氏)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安德)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다가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방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경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東方五賢)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뒷 배경이자 주산(主山) 인 설창산(雪蒼山) 의 문장봉(文章峰)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많다.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고 한다. 

  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 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渴求德)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이런 골짜기와 능선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하여 500여 년의 전통의 향기를 품은 총160여 호의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는 큰 마을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안락천(安樂川)을 끼고 마을 서쪽 10여리에 펼쳐진 광활한 안강평야가 마을을 지탱한 경제력의 바탕이었고,

勿자형 산곡이 경주에 흘러드는 형산강(兄山江)을 역수(逆水)로 안는 형태를 하고 있어서 이것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고 믿어지고 있으며 1930년대까지 이 마을에 1000석꾼 이상의 부자가 다섯집이나 있었다고 한다.

 

먼저 찾은 곳은 조선 성종 때 명신 우재 손중돈(1463-1529)선생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해서 살았던

관가정(觀稼亭)이다.

 

 

영상컨텐츠박물관대학 수강생인 어르신께선 영상촬영에 열중하시고...

 

 

 

때 마침 대구에서 여행을 온 초등학생들이 관광지임을 인식케 한다...

 

 

 

 

경상도 특유의 ㅁ자집의 구조를 설명하시는 해설사님...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라고 한다.

 

 양동의 전통문화 중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학문과 교육의 전통으로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왔다는 점이다.

 대유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언적(李彦迪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이황(李滉)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해동부자(海東夫子)라 불리어 지고 동방5현(東方五賢)의 한 분으로 추앙 받으면서

종묘배향(宗廟配享)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어 역대 임금 및 공자와 함께 위패가 모셔지는 영광을 누렸고 전국의 향교(鄕校)와

20여개 소의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문과급제 26명,무과급제 14명, 생진과(生進科)급제 76명으로 과거(科擧) 급제자가 총116명이나 되고, 음직(蔭職)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됨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상들의 학문에 대한 전통이 계속 이어져 일제시대에는 일본과 서울 유학생이 이 마을에만 20명이 넘었으며, 최근까지 장관 2명,

교수 60명, 판.검사가 30명에 이를 정도로 후손들이 번성하고 있다.

 

이 마을의 가장 중심적인 건물은 마을에 들어서면서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을 가진 아름다운 건물로

희재 이언적(1491-1553)선생이 1543년경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있도록

배려해서 중종임금이 하사해서 지은 향단이다. 

 

당시에는 흥(興)자 모양의 99칸이었으나 허물어져 1976년 보수하면서 56칸으로 줄었가고 한다.

이 건물은 희재선생이 1545년 중앙으로 이임하자 아우 이언괄 공이 물려받아 벼슬을 마다하고 평샌 노모를 모시고 집안을 

꾸려가 형의 출사를 도왔다. 그의 손자의 호가 향단(香檀)이다. 

 

 

 

 

  옛날에도 부잣집에서는 음식을 즐기며 먹을 수 있었다.

양동마을은 5백년 동안 양반으로서 부를 누려온 풍요로운 곳이므로 음식이 풍부하고 독특했다.

과거에는 안강평야의 농산물과 인접한 동해안의 풍부한 해산물을 재료로 하여 만든 음식을 즐겼고 손님을 접대 할때는

격식을 갖춘 7첩반상을 차렸다고 한다.

  

복계탕(伏鷄湯), 문어챗국, 육포, 독특한 칼국수, 다양한 종류의 지 반찬(장아찌 종류와 유사한 반찬)등 양반집의 가정마다

다양한 음식을 해 먹었는데 상업화를 꺼려서 일반에 잘 알려지지 못하고 사라져 가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상차림에는 반찬의 종류, 그릇의 크기와 모양, 음식을 놓는 위치 등에 엄격한 기풍보다 정성어린 환대와 인정이 넘친다.

아울러 찾아오는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마을의 오랜 전통이어서 최근에 관광객이 급격히 늘어나 생활에 불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기며 예절에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양동마을에는 예로부터 멋진 술이 전해오는데 양동청주가 바로 그 술이다.

단맛과 함께 아련히 느껴지는 향이 일품이며 맛이 순하고 취하게 마셔도 두어시간 정도 지나면 깨끗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찹쌀로 빚으며 지금도 제삿술은 반드시 직접 빚은 전통술만 쓴다. (맛을 보지 못해서 아쉽다.)

 

 

  양반기풍이 아직도 아주 강한 곳이라서 마을 안에서 하는 상업활동을 마을 사람들이 매우 싫어하므로

전통식당은 두 곳 뿐이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마을의 전통보존에는 옳은 일이며 우후죽순 식으로 식당이 생겨난다면

마을의 전통과 분위기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내려오는 풍속으로는 과거에는 줄당기기를 매년 해왔으나 근래에는 동회의 결의로 격년 또는 격 3년제로 한다.

 이 놀이는 특히 마을에 우환이 많을 때는 반드시 행하는 것인데 줄을 한번 당기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날짜를 택하는 것은 그 해마다 정한다. 줄당기기는 마을의 중간지점을 기준으로 아랫말과 웃말로 편을 가르고 전가구가 모이면 3~4가구가 1조를 이루어 '종줄'을 1주일 전이나 10일 전부터 꼬기 시작한다. 이 종줄들이 모여 '큰줄'을 만드는데 대략 전날까지는 마친다.

그동안 양편은 상대방 줄에 대해 염탐을 계속한다. 행사 당일 오전에는 줄을 마지막으로 보수하고 주민들을 동원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아랫말(관가정 밑의 은행나무)과 웃말(손씨 대종가 뒤쪽)에서는 각기 고사를 지낸다.

오후 2~3시가 되면 양편에서 남녀노소, 양반. 상민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모여 줄을 당기는데 우선 '고'를 끼우는 데만 서너시간 걸린다.

막상 줄당기기는 해가 넘어갈 저녁에 시작하여 닭이 울기 전에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대략 밤 12시면 끝난다.

줄의 굵기는 60여년전에는 9.10세 되는 아동의 키를 넘을 정도로 굵었으나 요즈음은 짚을 구하기 어려워 점점 가늘어지는 형편이다.

 

  삼복이 지나고 세벌 논을 다 맨 뒤 마을의 머슴들을 위한 행사로 호미씻기가 있다.

그동안 농사를 제일 잘 지은 집의 머슴을 뽑아 황소의 등에 거꾸로 태우고 주인집에 농악을 치며 간다.

주인은 이에 응답하여 떡과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 주고 온 마을의 머슴들은 장소를 정해 하루를 즐긴다.

 이때 대농가(지주)의 지신밟기를 해주기도 하는데 동사-안골-물봉골-동사의 순으로 돌아온다.

 지신밟기는 원해서 하는 수도 있으며, 주인은 적당한 음식이나 현금을 준다. 이것은 머슴들의 행사이지만

그 동안의 어려움을 상호이해. 격려하며 주인과 머슴이 일체감을 갖는 기회이기도 하다.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양동마을도 세계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신청해 놓고 있다.

 

 

 

마실가는 할머니가 객들에게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에 안동에서 왔다고 하니 양반동네에서 왔다며 반겼다.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희재선생의 아우 농재 이언괄 공을 추모하여

1560년경에 건립한 심수정(心水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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