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우 스님의 계율칼럼] 불살생 ②
살생·과보, 수 억겁 지나도 반드시 돌아와
작은 생명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게 ‘자비’
부처님은 행이 가득하고 과(果)가 원만하여 과거 숙세(宿世)에 이미 살생업을 멸하셨으니
인천마왕(人天魔王)들이라도 능히 해치지 못한다고 했다.
사미십계(沙彌十戒)에서 말한 성인을 헤치는 이야기는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헤치려고 돌을 밀어 발가락을 상하게 하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낸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상, 아사리, 스승, 부모를 말한 것은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는 것이 스승과 화상과 아사리다.
그리고 이런 분들은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분들이다.
나무의 근본과 물의 근원 같은 것을 부모라 하는데,
부모는 처음 자신을 낳아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율에 이르되, ‘마땅히 부모와 스승과 벗의 은혜를 생각하며 정진하고
도를 행하는 것은 부모를 제도코자 함이다’고 했다.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보잘 것 없는 생명을 말한 것은
먼저 예를 들었던 고슴도치 이야기처럼 죽이려는 고의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호기심에 가지고 놀다가 죽이는 줄 모르고 죽이는 잘못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조야첨(朝野僉)이라는 책에 쓰여 있다.
양무제가 평소 합두대사(頭大師)를 공경하고 믿었다.
무제는 사람을 보내 뵙기를 청하고 나서 신하와 같이 바둑을 두었다.
바둑 한 점을 죽이려고 큰 소리로 “죽여라”고 하니,
대사를 모시고 왔던 사람이 합두대사의 목을 베라는 줄 알고 베어 버렸다.
무제가 바둑을 두고 나서, 스님을 찾았는데 모시고 왔던 사람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폐하께서 ‘죽여라’ 하여 대사의 목을 베었습니다.”고 했다.
양무제가 매우 슬퍼하며 기절하였다가 물었다.
“스님이 죽음에 임하여 무슨 말을 남기던고?”라고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스님이 이르시되, 빈도(貧道)가 전생에 사미로 있을 때,
가래로 땅을 파다가 잘못하여 지렁이 한 마리를 해쳤더니,
그 때 그 지렁이가 지금의 양무제라 하더이다”고 했다.
과보가 참으로 분명하다.
설사 백 천겁 세월이 지나도 지은 바 업은 없어지지 아니하여
인연이 만날 때에 다시 과보로 이렇게 받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가 또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가끔씩 양지 밖 마루 끝에 앉아서 엄지와 엄지를 맞대며
‘이’라는 생물과 한 몸 속에서 살면서 가끔 소탕전을 벌이곤 했다.
‘이’에 대해서 경에는
“겨울에 이가 생기거든 대통에 넣어 솜으로 덮고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나를 괴롭히는 생물이지만 겨울에 잡아 버리면 얼거나 굶어 죽을 것을 염려한 말씀이다.
‘이’를 담는 통을 슬통(筒)이라 하는데, 슬(蝨)은 이에 본 이름이다.
은어(隱語)로는 반풍(半風)이라고도 한다. 대나무 통 속에서 기르다가
봄이 될 때를 기다렸다가 푸른 풀잎 위에 놓으면 벌레로 화생(化生)하는데,
봄·여름에는 제 맘대로 화(化)하지만 겨울은 그렇지 못하므로
겨울을 지나 여름이 되면 자연히 화하여 태어난다고 했다.
또 물을 걸러먹고 등불을 덮고 고양이를 기르지 말라고도 했다.
물속에는 얼지 못하는 생명들이 살고 있기에
마실 때 헤치지 않도록 하려고 마실 물을 걸러서 먹는 것이다.
그리고 밤이면 등불을 찾는 곤충들이 상할까 염려함이다.
지금도 남방에서는 수행자들이 물을 마실 때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비(慈悲)의 자(慈)는 즐거움을 주고 솜으로 따뜻하게 해주며
젖과 맛난 음식을 먹여서 기르는 것을 말하고,
비(悲)는 고통을 여의게 해주려고 물을 걸러 먹고, 등불을 덮고,
고양이를 기르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보잘 것 없는 것에도 이렇게 하거든 사람과 같은 큰 것은 말할 것 있겠는가?
지금 우리에게 자비는 꿈이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2009. 06. 29
철우 스님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