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석탄박물관 #1
2005.6.29. 해군동지회 동해지회 태백산 산행후
제1전시실(지질관)
제1전시실 도입부에 들어서면, 약45억년 지구 역사를 슬라이드화 하여
효과음 및 발브레이팅 장치를 이용하여 체감효과를 극대화 하였으며
실내 전시관 관람에 앞서 실내 전시관의 낮은 조도에 시각을 맞추는 역할을 겸하고 있는 관람시설을 지나게 된다.
146.3평의 규모에 600여점의 암석, 광물, 화석을 시대별 또는 성인별로 회전식 전시대 및 고정식 전시대,
허공입체 영상, 형광 등 다양한 전시보조기에 전시되어 있으며,
전시실 내에서는 왼쪽으로 암석류가전시되어 있는데 기본적인 암석의 분류체계를 따라서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의 순으로 여러종의 암석이 전시되어 있으며, 다음으로는 광물류가 이어진다.
광물은 암석 및 토양 및 지각구성의 기본단위로서 수 많은 종이 있지만 편의상 성분별로 분류하였으며
가공을 거치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도서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희귀 광물을 직접 눈으로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으며,
가공이전의 보석원석 및 운석 또한 또 다른 묘미라 할 수 있다.
제1전시실 마지막 부분에는 지질시대 중요자료인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의 순으로
삼엽층, 공룡알 등을 비롯하여 갖가지의 화석이 과거로의 여행을 안내하고 있다.
화산폭발과정
제2전시실 : 석탄의 생성발견관
주로 고생대 석탄기에 만들어진 석탄은 크게 유연탄과 무연탄으로 나누어 지는데
석탄화의 진행정도에 따른 분류를 따르고 있으며,
생성시기는 세계의 전탄전(全炭田)의 약 1/3이 고생대(5억~2억년 전)로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및
아시아 대륙의 석탄이 대부분 이에 속합니다.
이 밖의 석탄은 중생대(2억 년~5000만년 전)와
신생대(5000만년 전 이내)에 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가장 석탄이 많이 생성된 시기는 석탄기(고생대 말엽)로 알려져 있습니다.
2천3백년쯤(BC 315년경) 철학자 테오프라스터스가 남긴 기록에
그리스 지방의 대장간에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였다는 문헌상의 최초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석탄은 인류문화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기적 퇴적암의 일종으로
비단 세계의 경우가 아닐지라도 광복이후에 전후(戰後)의 결과로
서민들의 연료원이던 산림자원의 황폐화로인한 생활고(生活苦)는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국내 유일의 연료자원인 석탄은 산림의 황폐화의 방지와 국민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는 커다란 돌파구였습니다.
평남, 화순, 장성순으로 국내탄전의 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국내 에너지원의 중심에서 석탄은
화력발전 및 민생연료로서 검은황금이라 불리우며 어려웠던 시절을 이겨낼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석탄산업도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채탄막장의 심부화로
생산원가의 증가와 청정연료의 등장으로 인해 국내의 석탄산업은 사양화로 접어들면서
많은 석탄광이 페광을 하게 되고 현재 몇 개의 광업소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3전시실 : 석탄의 채굴 이용관
석탄채굴의 초기에는 암반에 불을 피워 온도를 높인 뒤 물을 끼얹어
급격한 온도차로 인한 균열을 이용하여 채탄하던 화흉법에서
정과 망치를 이용한 채탄, 근래의 기계장비를 이용한 채탄으로 이어지면서 더 많은 석탄을 채탄하게 되고
채탄장비의 발달과 더불어 망태기를 이용한 운반에서 레일을 이용한 광차의 활용,
지하 채탄막장까지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운반까지 다양해지며
채굴장비 등에서도 석탄생산에 관련된 많은 부분에 기계화가 실현되었습니다.
이용가치를 알게 되면서 인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석탄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비약적인 채굴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석탄채굴의 기계화로 공급에 활력이 생기면서
소비의 방법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 에너지연료(전기에너지, 재의 이용(Fly Ash, 정수용(淨水用), 경량골재, 연소 열에너지)와
석탄화학 원료 및 2차 에너지원으로 석탄을 이용한 다양한 연구와 개발이 이루어집니다.
에너지 연료인 연탄도 초기의 조개탄, 주먹탄의 형태에서 9공탄, 19공탄, 22공탄, 31공탄 등으로
시대 및 용도에 맞게 변화를 거듭하며 연탄의 사용이 증가하자
연탄공장에서도 많은 양의 소비에 맞추기 위해 연탄을 제조하는 윤전기의 종류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인력을 이용한 제조기에서부터 1장씩 찍어내는 단탄윤전기,
2장씩 찍어낸 쌍탄윤전기, 3장씩 찍어낼 수 있는 윤전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민생연료로서 초기의 석탄사용은 화덕에서 괴탄이나 조개탄을 피워 난방을 하는데 그쳤지만
경제발전과 국민소득의 증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난방기구도 1구1탄, 2구3탄, 3구3탄 등 열효율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종류로 발전하게 되고
가정의 난방에서도 아궁이식 난방에서 보일러의 등장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제4전시실 : 광산 안전관
국내의 석탄층은 외국의 탄층과 달리 지하에 매장되어 있고 탄층, 탄폭의 변화가 심하여
석탄을 채굴하는 작업은 타 산업의 작업장과 달리 많은 위험요소를 수반하고 있다.
석탄소비의 증가로 생산도 박차를 가하게 되면서, 채탄막장의 심부화로 위험요소도 증가하게 되었다.
광산의 사고의 유형은 운반, 가스, 낙반, 붕락, 갱내화재사고, 출수사고 등 몇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대부분의 광산사고가 좁은 지하채탄막장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대형사고로 확산될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어
사전예방이 최우선의 과제라 볼 수 있으며 광산의 모든 작업이 안전을 생각치 않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광산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업자 자신의 안전의식이 우선이며
이를 보완할 각종 검정장비의 활용과 수시점검이 필수적이다.
또 만일에 발생할 수 있는 광산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광산특수구호대와 일반구호대를 운영을 하며
특수구호대는 사고 발생시 사고현장에서 직접 구호활동을 하며
일반구호대는 의료 및 각종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광산사고를 대비한 장비로는 광부1인이 착용하는 안전화, 안전모, 전기안전등, 척추보호대, 자기구명기 등이 있고,
기계시설 검정장비, gas 검정장비 등 많은 기기들이 활용된다.
제5전시실 : 광산 정책과
종래 광산의 국유제도를 폐지하고 한국의 광산개발권을 출원자에게 주는 제도를
대한제국 말엽(1906. 6. 29/광무10년)에 최초의 광업법(법률 제3호)을 공포한 이래
석탄과 관련한 각종 정책이 나오면서 석탄의 개발도 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국민생활의 안정과 청정에너지인 석유가 수입되면서
석탄업계는 경쟁력의 약화로 소비가 침체되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석탄업체들도 폐업을 하는 곳이 많아졌으며
석탄산지 저탄장에는 석탄이 포화상태에 이른다.
1973년 중동전쟁, 1978년 호메이니의 회교혁명에 의한 석유파동으로 석탄업계는 재차 호기를 잡는 듯 하였지만
저탄장에서 소비자까지의 운송난으로 인해 연탄파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연료로서 초기의 석탄 사용은 화덕에서 조개탄을 피워 난방을 하는데 그쳤지만
경제발전과 국민소득의 증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난방기기도 1구1탄, 2구3탄, 3구3탄 등 열효율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종류로 발전하게 되고 가정의 난방에서도 아궁이식 난방에서 보일러의 등장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석탄의 사양화로 소비가 줄어들자 정부에서는 비경제성 탄광의 정리와 영세탄광 난립의 방지와
광산의 특수성으로 인한 재해자들의 증가, 정부보조로 석탄산업이 유지되고 있어
생산력 미흡 등의 원인으로 광산노동자들의 처우문제, 석탄광산의 폐광대책 마련, 광산노동자들의 후생복지,
석탄가공제품의 기술개발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석탄산업 합리화사업단을 1987. 4. 3일 발족하게 된다.
광산노동자들은 작업장의 특수성으로 인해 타 산업에 비해 진폐증에 걸릴 확률이 높은데
우리나라에서는 1954년 당시 대한석탄공사 의무실장 최영태박사에 의해 최초 발견하였으며
정부에서는 1963년 광산보안법 및 산업재해보상 보험법을 제정 공포하고
1981년에는 산업안전보건법 제정, 1984년에는 진폐의 예방과 진폐 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
근로자의 건강관리와 보상, 복지 증진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였지만
밀폐된 공간에서의 작업과 미세한 분진의 의한 직업병의 발병으로
불치병이면서 폐결핵,결핵성 기관지, 속발성 기관지염, 속발성 기관지 확장증, 속발성 기흉 등의 합병증을
동반할 수가 있어 더욱 주의와 교육이 필요하다.
제6전시실 : 탄광생활관
대부분이 산간으로 이루어진 태백은 화전생활로 산에 불을 놓아 야초와 잡목을 태워버리고
그 곳에 농사를 짓는 것으로 처음에는 불태운 초목의 재가 비료가 되지만
후에는 일체의 거름을 주지 않으므로 몇 년 후에는 지력이 상실되어 더 이상 농사를 짖지 못하게 되므로
새로운 땅을 찾아 이동한다.
태백지역은 구릉지와 구릉성 산지, 고원성 산지가 많아 탄광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화전생활을 하였다.
토층이 깊고 자갈이 적어 토양이 좋을 뿐만 아니라 경사가 완만하고 햇볕을 잘 받아
화전민들이 생활하기에 알맞은 장소로 주로 콩, 옥수수, 감자 등의 밭작물과 약초를 재배하였다.
탄광이 개발되면서 생활의 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베를 짜고 경작을 하던 부녀자들은 다른 일거리를 하게 되고
집안의 가장은 광부라는 새로운 직업을 택하게 되면서 생활문화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양식이 나타난다.
도시락을 쌀때에는 네주걱을 담지않고, 부녀자가 길을 갈 때 광부를 앞질러 가지않으며
갱내에서는 쥐를 잡지않는 등 여러 가지의 금기시 되는 생활양식이 생겨나고,
주거환경에서도 너와집, 굴피집이 아닌 광산사택이 생겨난다.
광산개발 초기의 사택은 방1칸, 부엌1칸의 형태로 씻을 곳이 없어
작업을 마친 광부들은 마을의 우물에서 몸을 씻었으며,
온몸이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어 가족들조차 알아 보지 못하였다 한다.
제7전시실 : 태백지역관
태백을 중심으로 1천m 산들이 10여 개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 산들에 에워싸인 분지 속에
황지 연못을 중심으로 황지, 장성, 철암으로 나뉜다.
해발 650m의 고원 산악지역으로 겨울이 길고 추우며 여름은 짧고 서늘해 모기 등 유해 곤충이 거의 없다.
고원지대라 봄은 타지역에 비해 한달이 늦으며 겨울이 일찍오고
가을이 짧아 가을과 겨울이 잘 구분되어지지 않는다.
한때 태백은 640만톤의 석탄을 생산하여 전국 석탄생산량의 30%을 차지하면서
전국 제1의 광도로서 국가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으나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사업으로 인해 50여개나 되던 광산이 대부분 문을 닫고
소수의 광산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급격한 인구감소와 지역경제침체를 가져오게 되었다.
1995년 12월 29일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함께
탄광지역종합개발사업이 본격 추진됨에 따라 태백시는 [고원 관광, 휴양, 체육도시 신태백 건설]이라는 시정방침 아래
지역특성을 살린 관광도시 건설을 통한 새로운 태백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