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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톨스토이, Lev Nikolaevich Tolstoy
예술의 신 여든에 가출하다
출생 : 1829년 ~ 사망 : 1910년
목차
1854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 1829~1910)는 크림전쟁이 한창이던 루마니아에 있었다. 삶을 좀먹는 욕망에서 탈출하려는 극단적 결심으로 택한 입대가 그를 전쟁의 한복판으로 내몬 것이다. 전쟁은 톨스토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르포기사를 잡지에 연재하면서 전쟁의 보다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전투현장을 누비는 동안 자주 죽음의 그림자와 만났다. 그런 가운데 그는 신비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1855년 3월 5일 자 일기엔 적나라한 당시의 심정이 담겨있다.
나는 위대한 이념을 발견했다. 이는 교리가 아닌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을 화합시키는 새로운 종교이다. 이 이념의 실현에 내 전 생애를 바쳐야겠다.
사람마다 양심대로 살고 화합해 세상을 만들려면 교육만 한 것이 없다는 확신을 하게 되고, 그 일에 생애를 걸겠다는 다짐도 그 무렵 하게 된다.
군대를 제대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자신의 다짐을 현실화시킨다. 학교를 세우고 직접 농노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학비를 받지 않는 이 학교는 공책과 교과서는 물론 숙제도 없었다. 온종일 숲 속으로 나가 자연을 배웠다. 수업시간엔 문학과 역사, 인간의 삶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의 가르침은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에게 단비 같았다.
톨스토이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자연 속으로 뛰어들었다. 농노들의 몫이었던 농사에도 직접 참여한 것이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무렵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 1844~1919)를 만나게 된다. 서른네 살 톨스토이의 눈에 열여섯 살 앳된 소녀가 사랑의 대상으로 다가온 것이다. 자기 삶의 딱 절반을 산 풋풋한 소녀를 향한 톨스토이의 구애는 절실했다. 결국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6개월간 미친 듯이 사랑했다.
1862년 봄에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6개월 만에 결혼으로 이어진다. 결혼일정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결혼 전날 톨스토이가 내민 일기장으로 인해 위기를 맞는다.
지나온 내 34년의 발자취요.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소.
그가 내민 일기장 속에는 젊은 시절의 고민과 성장통, 그동안 만난 사람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소피야를 충격에 빠뜨릴만한 이야기들이 다수 등장했다. 특히 수많은 여성과 맺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묘사는 적나라해서 어린 신부가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깊은 고민에 빠져 결혼 자체를 망설이던 소피야는 결혼 후에도 서로의 일기를 공개하는 조건으로 그간의 일들을 모두 눈감아 주기로 한다.
이후 소피야는 톨스토이에게 더없이 좋은 아내가 된다. 15년 동안 13명의 자녀를 낳을 만큼 금슬이 좋았고, 작가의 아내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거의 매해 아이를 낳으면서도 묵묵히 톨스토이 곁을 지켰다.
결혼 2년 차에 접어들던 1864년, 드디어 대하소설 《전쟁과 평화》의 집필이 시작되었다. 서른여섯 살에 시작된 집필은 마흔한 살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섯 해를 보내는 동안 소피야는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독자의 입장에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까다로운 성격을 일일이 받아주면서 그의 원고를 읽는 첫 독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도 그녀였다.
악필이었던 톨스토이의 원고는 소피야에 의해 정리되었다. 알아볼 수 없는 원고를 손보고 무려 58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엄청난 분량을 일곱 번이나 필사하는 고통스러운 작업도 그녀의 몫이었다. 톨스토이에게 소피야는 진정한 작가의 아내였으며 특별한 여성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출간되자마자 《일리아드》를 능가하는 유럽 문학의 최대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러시아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인들의 저항을 4부작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는 책 속에는 실제 인물과 가공의 인물들이 서로 교묘하게 뒤섞여있다.
책은 애욕으로 가득한 안드레이 공작, 순진한 공상가 피에르, 생명력 넘치고 사랑스러운 나타샤를 중심으로 3대에 걸친 세 가문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달빛 창가에서 몽상에 빠진 나타샤의 모습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진선미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어떤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가?”라는 무거운 주제에 답을 구하고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정의한다. 《일리아드》가 영웅의 대서사시라면 《전쟁과 평화》는 민중의 이야기였다. 소설 속에서 영웅은 명성뿐인 공허한 꼭두각시로 묘사되고 있다. 나폴레옹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과 평화》 이후 그는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한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대 서사극에서 본격적인 장편소설로 방향전환을 시도한 작품이다. 아내 소피야와 좋았던 시절의 소소한 기억들을 알뜰히 녹여낸 것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구로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150여 명의 인물은 그 문구에 걸맞게 다양한 삶의 무늬를 보여 준다. 톨스토이는 관능적이거나 헌신적인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그려낸다.
‘안나 카레리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귀족 부인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했지만, 그녀에겐 비루한 결혼생활이었다. 삶은 지루했고 남편 카레린은 고루했다. 결혼생활에 지쳐가던 그녀에게 그나마 숨 쉴 여유를 준 것은 사교계였다. 화사한 미모는 그녀를 사교계의 꽃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사교계의 화려한 삶에 도취되어 있던 그녀 앞에 브론스키가 나타난다. 젊고 매력적인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안나가 외면해도 저돌적인 애정공세를 폈다. 남편과의 삶에 염증을 느끼던 안나도 그의 지속적인 구애에 결국 무너졌다. 안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브론스키와 함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하지만 그후 브론스키의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브론스키는 이전에도 키티라는 여인을 버린 적이 있었다. 키티 역시 브론스키의 매력에 푹 빠져 자신을 사랑해주는 레빈을 버렸었다. 그러다가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빠져들자 레빈에게 돌아간다.
톨스토이가 안나를 통해 도시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불행한 삶을 그렸다면 키티와 레빈은 시골살이의 행복함이 담겨있다. 바로 그들의 이야기가 톨스토이 자신과 소피야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부부는 시골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 바람에 러시아 전역에서 집 없는 사람들, 병자와 농민들이 도움을 바라고 톨스토이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러시아 제정 말기 화려한 관능을 추구하는 귀족들의 도회적인 일상과 소박한 시골살이라는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안나 카레리나》는 톨스토이와 소피야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던 시절의 소소한 기억들이 깃들어 있다.
행복했던 부부의 삶도 말년으로 가면서 파경을 맞는다. 소설 속의 키티와 레빈이 말년으로 가면서 행복해지던 것과 달리 현실의 톨스토이 부부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사이로 변해 있었다.
《안나 카레리나》가 크게 성공하자 1870년대 후반, 톨스토이는 돌연 ‘회심(回心)’을 선언한다. 모든 예술은 위선이며 자신이 써온 그간의 작품들도 사악하다고 규정하며 위선적인 글쓰기는 중단하겠다는 절필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톨스토이의 내면은 ‘삶의 무상’에 대한 고뇌로 요동치고 있었다. 어려서 부모의 죽음을 보았고 청년 시절 참전했던 크림전쟁에선 참혹한 죽음의 현장들을 목격하면서 그의 삶은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삶을 변화시킨 죽음의 현장들과 만나게 된다.
프랑스에 머물던 1857년 교수형을 직접 목격했고 3년 뒤 친형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한 죽음의 장면들을 목도한 톨스토이는 허무해졌다. 세상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문학이 별 의미가 없다고 느끼고 깊은 회의에 빠져든다. 이후 평화주의를 선언하면서 기존방식의 글쓰기를 중단했다.
대신 미국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 불복종》에 자신의 평화사상을 결합한,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어느 정도인가?》,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 등과 같은 교훈적 동화만 펴낸다.
또한 러시아 주류 정교회를 비판하면서 자기만의 종교를 창립했다. 여러 종교를 혼합하여 창립된 보편 종교였으며 그는 사실상 교주였다. 그의 교리는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해냈다. 심지어 다른 나라에도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다. 그들은 톨스토이주의자를 자처하거나 톨스토이를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했다.
영국 식민통치에 저항하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도 톨스토이와 주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 일로 톨스토이는 러시아 국교회에서 파문당한다.
1882년 1월 시행된 인구조사에 참여하면서 톨스토이는 삶과 예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눈 앞에 펼쳐진 빈민들의 비참한 삶이 오랫동안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몇 달 동안 말을 잃고 울기만 했다. 그러더니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예술이란 인생의 거울인데, 인생이 이토록 비참하다면 거울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톨스토이의 모습에 당혹해 하던 소피야는 톨스토이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이가 완전히 변했어요. 눈도 입도 닫아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아요. 그토록 강력했던 지성적인 힘을 이제 장작 패고 벽 바르는 일에만 소모하고 있어서 너무 슬퍼요.
이 편지를 읽고 친구들이 달려와 톨스토이에게 권면했다.
“러시아 대지에서 태어난 위대한 친구여.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게.”
그러나 톨스토이는 강경했다.
“특권화된 성직자처럼 자칭 지도층 인사들에게 포섭된 학자나 예술가들을 예술의 신전(神殿)에서 쫓아내고 싶다. 그들이 쳐놓은 거대한 속임수와 미신에서 해방되어야만 한다.”
그러면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자신부터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한 사람에게 거부당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삶과 문학의 동반자임을 자처했던 소피야였다.
그녀는 톨스토이가 일체의 형식과 권위를 부정하는 무저항주의자가 되는 것은 이해했다. 또한 빈자들을 도와주는 것도 좋아했다. ‘청빈한 삶’까지는 좋았으나 전 재산을 버리고 극빈자가 되려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부유한 백작 부인의 삶을 포기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자식과 손자 손녀들의 삶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둘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이혼 직전까지 가게 된다. 배수의 진을 친 소피야의 전술 앞에 톨스토이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토지와 평생 업적인 저작권 관리를 맡기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그는 가까스로 이혼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소피야의 삶에도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진다. 톨스토이의 항복을 받아내기 2년 전인 1889년 저택에서 음악회를 열면서였다. 무정부주의와 무산주의에 심취한 톨스토이에 실망하고 있던 소피야가 사교계에 첫발을 디디며 음악회를 열었다. 간만에 숨 쉴 공간을 찾은 그녀는 그 자리에서 젊은 음악가를 만난다.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Kreutzer Sonata)〉를 연주하던 음악가 중 한 명이었던 젊은 음악가는 이후 소피야와 밀애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둘의 관계는 톨스토이의 의심을 산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대놓고 따질 수는 없었다. 톨스토이의 의심과 질투는 극에 달하게 된다. 결국 그 질투는 불륜을 의심해 아내를 죽이는 남편의 이야기를 다룬 중편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를 탄생시킨다.
〈크로이처 소나타〉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9번 A장조의 제목으로 소피야가 젊은 음악가를 처음 만났을 때 연주된 곡이자 소설 속의 아내가 애인인 바이올리니스트와 합주한 곡이다. 소설은 남편이 기차로 여행하는 도중 만난 사내에게 아내를 살해한 과정을 늘어놓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치명적 사랑을 야기하는 음악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와 꾸며낸 이야기를 적절히 뒤섞어 한 편의 소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소설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다.
그런데도 톨스토이는 막대한 재산을 아내에게 맡기고 평소 소신대로 명목상 빈자(貧者)가 된다. 소피야는 그런 톨스토이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면서 감시를 멈추지 않는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돌출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청빈을 강조하고 이상을 추구했던 톨스토이와 현실을 중시하고 자녀들의 삶을 걱정한 소피야의 숨바꼭질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소피야는 히스테리가 심해진다. 결국 둘의 힘든 결혼생활은 소피야의 자살시도와 톨스토이의 가출로 이어지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허무주의자였던 톨스토이에게 소피야는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관능적이며 카리스마와 애교를 동시에 갖춘 매력적인 여인이었던 소피야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이상 속에 살던 톨스토이에게 현실적인 소피야의 삶이 신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상을 억누르고 현실감각을 유지하며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곁을 지킨 것도 소피야였다. 하지만 처음 느낀 청량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압박감으로 바뀌었다. 사랑과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쳐놓은 소피야의 원안에 자신이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늘 견디기 힘들어했다. 조금씩 톨스토이의 허무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억누르려는 소피야와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톨스토이 이상주의 사이의 괴리감은 위대한 걸작 《부활》을 만들어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귀족 청년 네플류도프는 친척 집에서 일하는 처녀 카추샤를 임신시킨다. 불장난으로 시작한 사랑이 임신으로 이어지자 네플류도프는 돈 몇 푼을 쥐어 준 후 사라져버린다. 네플류도프에게 버림받은 카추샤는 절망하며 7년 동안 창녀생활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살인 및 절도 혐의로 서게 된 법정에서 배심원으로 나타난 네플류도프와 만나게 된다. 그날 법정에서 카추샤는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에 4년간 복역하라는 선고를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네플류도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기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카추샤를 따라간다. 네플류도프라는 귀족의 양심이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에서 속죄의 정신으로 부활한 것이다.
《부활》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동시에 예술적 유서다. 전편에 걸쳐 인간 연민의 시적 무드가 깔리며 각자 마음속의 신을 보게 된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눈에 비교적 소박하고 비교적 검소한 소피야마저도 사치스럽게 보였다.
《부활》이 세계적 반향을 일으킬 무렵인 1905년 러시아에선 공포정치가 시작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강제노역과 강제구금을 당했다. 톨스토이 역시 그 대상이었다. 하지만 국민적 신망이 워낙 높았던 톨스토이였기에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장관에게 편지를 보낸다.
당신들이 싫어하는 모든 악의 근원이 나입니다. 왜 나를 감옥에 넣지 않는 겁니까? 더럽고 춥고 배고픈 진짜 감옥에 갇혀 살게 하는 것이 나를 만족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일이오.
스스로 감옥행을 원했으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런 톨스토이를 소피야는 사랑하긴 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친척들도 톨스토이가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톨스토이는 결국 가출을 시도한다. 소피야는 가출하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지만 그를 막지 못했다.
톨스토이는 집을 떠난다. 1910년 10월 어느 날, 여든 살을 훌쩍 넘은 나이에 가출을 결행한 것이다. 늦은 밤,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긴다.
사랑하는 소피야. 떠나게 되어 미안하오. 신념과 생활의 불일치로 너무 괴롭소. 나는 더 이상 지금처럼 호사스럽게 살 수 없을 것 같구려. 당신에게 불만이 있어서 떠나는 것은 아니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오. 내 남은 세월을 고독과 침묵 속에 보내고 싶소. 나도 당신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하여 나무라지는 않겠소. 내게 준 당신의 모든 것을 늘 감사한 마음으로 추억하리다. 잘 있어요, 내 사랑 소피야.
50년 넘게 살아온 아내를 남겨 두고 톨스토이는 주치의와 막내딸만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으로 가서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3등 열차에 올라탔다. 가다가 지치면 쉬었다가 다시 떠나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여정이었다. 여행 중에 딸과 주치의에게 잠언 같은 이야기도 남겼다.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라.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는 그 일이다.
살을 에는 러시아의 추위가 열차 안에 가득했지만, 톨스토이는 행복했다. 따뜻한 집보다 더 평온했다. 하지만 고령의 몸은 추위를 견디기엔 너무 연약했다. 결국 독감에 걸려 랴잔 역과 우랄 역 사이에 있는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 역)라는 자그만 시골 역에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역장이 집을 빌려줘 하룻밤을 보냈다. 그곳에서 쉬고 날이 밝으면 누이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1월 7일 새벽, 주치의가 톨스토이를 깨웠으나 이미 생을 마감한 후였다. 전 세계 언론이 그의 죽음을 톱뉴스로 보도했다. 그의 마지막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역장 집으로 모여들었다. 눈발이 날리는 매서운 겨울 날씨에도 시신을 운구하는 열차가 잠시 멈추는 역 앞 광장에는 캠프를 친 사람들로 넘쳐났다.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모든 활동이 조문으로 정지되어 버렸다. 고향에 도착한 톨스토이의 시신은 소피야와 엄청난 인파의 흐느낌 속에 땅에 묻혔다.
생전에 자주 토로하던 남편의 말이 떠올라 소피야는 오열했다.
“내가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날마다 재산이 늘어나는 이 큰 농장, 그런데도 나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존경과 칭송을 받는 이 순간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베토벤과 브리지타워는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였다. 바이올리니스트인 브리지타워는 베토벤의 음악을 누구보다 아꼈다. 둘의 우정은 베토벤에게 친구를 위한 곡을 만들게 했다. 〈크로이처 소나타〉는 처음부터 브리지타워를 위해 작곡된 곡이었다. 하지만 ‘절친’이었던 둘의 관계는 한 여인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다. 결국 브리지타워를 위해 쓰인 곡은 크로이처에게 헌정된다.
사랑은 영원한 테마다. 남과 여, 두 사람이 만드는 이야기는 모두가 다르며, 또 항상 새롭다. 애정전선의 목적지가 하나다. 평행선을 그리며 모두가 한 곳으로 나간다. 하지만 제삼자가 들어오는 순간 균형은 깨져 버린다. 가장 안정적이라는 삼각형이 사랑에 대입되는 순간 균열을 보인다.
균열은 역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음악가에겐 새로운 곡을 탄생할 수 있게 하고, 작가에겐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낼 에너지가 된다.
사랑했던 아내가 다른 사내에게 관심이 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자, 톨스토이의 질투심은 폭발한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속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복수의 방법은 글로 그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총 3악장으로 구성된 곡은 처절하다. 독일의 음악학자 아놀드 셰링에 따르면 사랑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눌 만큼 비극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 여인을 사랑한 두 남자, 또는 두 남자를 사랑한 한 여자. 그 불안한 삼각형이 베토벤을 통해 〈크로이처 소나타〉를 탄생시켰고, 톨스토이를 통해 《크로이처 소나타》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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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대화의 연금술》을 비롯해 《통하는 대화법》, 《소비 트렌드》, 《리더십 불변의 법칙》, 《최고 마케팅 경영자 예수》, 《CEO형 인재》, 《해체냐 해탈이냐》,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두 개의 길 하나의 생각》, 《바루나-포용의 신화를 찾아서》, 《강화도 미래신화의 원형》과 중국에 수출된 《행복한 수면법》 등이 있다.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