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에 한글로 "강림"이라고 되어 있는 말이 20회 정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어로 <파루시아> <엨크(..으로 부터)> <카타바이노(내려오다)> 등의 단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파루시아>라는 말을 헬라어 렉시콘에서 찾아보면 24회가 나오고, 어휘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뜻은 "도래" "임석" "출현" "오심" 등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임재라는 표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바울이나 디도나 동역자들이 함께 있는 경우를 <파루시아>라고 한 것을 보면 그것은 정신적으로나 마음만으로가 아닌 실재의 공존을 의미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이 <파루시아>는 신약 성경에 모두 24회가 쓰였는데,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요?
그 용례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쓰인 경우...17회.(마24:3, 27, 37, 39, 고전15:23, 살전2:19, 3:13, 4:15, 5:23, 살후 2:1, 8, 약5:7, 8, 벧후1:16, 3:4, 12, 요일2:28)
2.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대하여 쓰인 경우...6회. (고전16:17, 고후7:6,7, 10:10, 빌1:26, 2:12)
3. 불법자에게 쓰인 경우...1회. (살후2:9)
<설명>
<파루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많이 쓰인 단어이지만, 때로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일, 디도가 온 일, 바울이 빌립보교인들과 함께 있었던 일 , 심지어 불법한 자가 나타나는 일에도 쓰인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에 관련해서만 쓰인 용어는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파루시아가 언제 있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나타나심, 임재는 언제 있었나요?
이상하게도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건에 대하여는 쓰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벧후1:16의 "강림"은 변화산에서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므로 해석하기 난해하므로 예외로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직까지 예수님의 <파루시아>는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인자의 파루시아>는 번개와 같을 것(번개가 동편 하늘에서 나서 순식간에 서쪽 하늘에 까지 번쩍이듯이)이라고 말씀하셨고,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놀라운 현상을 동반한예수님의 파루시아도 아직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루시아가 있을 때에는 천사장의 소리(고함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등이 동반하고(살전4:16) 능력이 함께할 것을 말씀하셨고(벧후1:16), 부활한 성도들과 변화받아 올라간 성도들을 대동하여 나타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일도 아직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볼 것이라 하였는데(고13:12) 우리가 바울과 베드로의 얼굴은 고사하고 몇년전에 죽은 성도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바울 시대에도 없었기 때문에 "기다린다"(살전1:10)고 표현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날이 가까웠다고 동심하지 말라"고 주의까지 주었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 먼저 불법한 자의 임함(파루시아)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 <주님의 파루시아>는 아직 이 땅에서는 이루어진 사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은 이 <파루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생활이었지 이 파루시아를 누리면서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은 복스러운 소망이었던 것이고(딛2:13) 그래서 온갖 핍박중에서도 인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현재에도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120문도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였고, 아주사의 거리에서도, 1907년 평양에서도 그런 체험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파루시아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였던 것이며, 이로 인해서 회개하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심성이 변화되는 역사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심령의 변화이고, 회개와 성령의 열매를 맺은 것이고, 성화인 것이지 <주님의 파루시아>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파루시아>는 아직은 미래의 사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경고로 글을 마칩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파루시아)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 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벧후3:4)
주님의 다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이런 말로 조롱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