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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산(彌勒山) 산행기
우리 나라에는 미륵산이나 미륵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도처에 있다. 그 중에 이름난 산만하더라도 경남 통영시 봉평동의 미륵산(461m)과 전북 익산시 금마면의 미륵산(430m)이 있고, 그리고 여기 소개하고자 하는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서북쪽에 위치한 미륵산(689m)이 있다.
이처럼 미륵산이나 미륵봉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많이 있는 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걸쳐 미륵신앙이 크게 흥성하여 도처에 미륵불이 조성되거나 마애불로 새겨짐으로써 그 미륵불이 있는 산이나 봉우리를 미륵산 혹은 미륵봉이라 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륵불은 미래세계를 다스리는 부처이기에 불교를 독실하게 믿던 우리 민족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부처였다. 지금에 이르러 해석한다면 당시의 민중들에겐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라 할 수 있었겠다. 때문에 역사적 전환기나 사회적 혼란기에 그 혼미한 사회상을 극복하고 보다 밝은 미래를 희구한 데에서 미륵신앙이 흥성하였던 것이다.
신라 말 고려 초의 견훤과 궁예의 개혁사상이라든가 고려시대의 묘청, 신돈의 개혁사상, 그리고 구한말에 등장한 천도교나 증산교 등을 비롯한 신흥종교들도 따지고 보면 미륵신앙의 실천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미륵부처님의 코를 만지면 득남을 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게 해 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마애불의 키가 너무 커서 높이 있는 부처님의 코를 만지려면 15m 높이의 사다리가 있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그런 전설에 현혹되지 말고 오히려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에 감응을 받아 산행을 온 등산객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산행도 하고 부처님의 감응도 받는다면 일석이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산대사께서 읊은 선시에,
「산은 무심히 푸르고
구름 또한 무심히 희도다
그 가운데 한 사람 앉았으니
그 또한 무심한 길손이로다
山自無心碧 雲自無心白
其中一上人 亦是無心客」
라고 말했듯이 마음을 비우고 산을 오르는 경지가 곧 산행의 묘미가 아닐까 하다.
그리고 미륵불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공주가 아버지를 위해 부왕의 모습을 조각케 하여 미륵불을 조성하였다는 것이고, 경순왕이 몸소 이 곳에 와서 이 미륵불에 참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을 대왕산(大王山)이라 부르게 하고, 귀한 분이 오신 곳이라 해서 지명도 '귀래(貴來)'라 하였다는 것인데, 귀래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미륵불을 감상하고 다시 미륵바위 오른쪽으로 나오면 암벽 사이에 밧줄이 늘어져 있고, 그 밧줄을 잡고 암벽을 올라가면 배낭을 맨 채로는 통과할 수 없는 홈통이 기다리고 있다. 배낭을 벗어 앞으로 밀어 올리면서 겨우 한 사람씩 통과할 수 있는 그런 곳을 통과하여 바위 위에 올라서면 거기가 바로 미륵불이 조성되어 있는 미륵바위의 상단부에 해당된다.
그리고 역사적 전환기나 사회적 혼란기에는 민초들의 생활이 고달팠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럴수록 메시아를 희구하는 열망은 더했을 것이다. 즉 민초들은 그들의 어려운 삶을 극복하고 미래세계에 구원을 얻고자 하는 기원에서 미륵신앙에 의지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미륵불은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부처님으로 비추어져서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따라서 민중의 두터운 신앙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러한 미륵불이 과거 후백제 지역이었던 호남지방과 후고구려 지역이었던 중부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신라 말 고려 초에 이 지역의 사회질서가 어지러워 서민의 삶이 그만큼 고달팠던 때문이고, 또 국가기강의 혼란을 틈타서 이 지역에 미륵신앙에 의지한 신흥 토호들의 세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초들의 소망에 의하여, 그리고 토호들의 재력이 뒷받침되어 미륵불이 많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에 남아 있는 미륵불이 대개 이 시기에 조성된 것이듯이 미륵산 정상 부위에 조성된 마애불도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보여진다.
미륵산은 비록 높은 산은 안이지만 정상 부위에 암봉과 암릉으로 이루어진 미륵봉을 비롯하여 주능선 일대에는 장군봉, 신선대 등의 암봉이 있어서 자못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암릉과 부드러운 능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산줄기는 치악산(1,288m)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즉 오대산의 두로봉(1,422m)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한강기맥이 다시 가지를 쳐서 횡성의 태기산(1,261m)을 거쳐 치악산에 이르고, 이 치악산의 줄기가 백운산(1,087m)을 거쳐 미륵산에 닿아 있다.
다만 이 시멘트 포장길은 좁아서 대형 버스가 진입하지는 못하고 승용차만 갈 수 있다. 승용차는 산행기점인 황산사 입구에 가면 작은 주차장이 있고, 그 부근 도로변에 주차해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이 부근의 도로 안내 표지판에는 미륵산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황룡사, 황산사(黃山寺)로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미륵산이든 황룡사나 황산사이든 결국엔 같은 길이므로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 그 황산사가 바로 미륵산 초입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 기점으로 접근할 경우에는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원주 쪽으로 가다가 문막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42번 국도를 따라 여주 쪽으로 되돌아 나와서 문막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섬강 제방의 둑길로 남진해야 한다. 그리하여 2km 정도 남진하여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꺾어져 귀래로 가는 404번 지방도로 진입하여 그 길로 16km 정도 동남쪽으로 가면, 중간에 비두네미 마을을 지나 아홉사리 고개(일명 서낭고개)에 이른다. 거기 이정표의 지시대로 우회전하여 2.1km 정도 들어가면, 아홉사리 마을을 지나고 새터를 지나 황산사 입구, 즉 미륵산 산행기점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이 바로 미륵산 남쪽의 황산골 마을 부근에서 미륵산 산행기점으로가는 시멘트 포장길과 이어져 있다.
그런데 요사체 위쪽의 '황산사 쉼터'라는 휴식장소는 절의 규모에 비해 과분하게 잘 정돈이 되어 있다. 아마 절에서 지은 것이 아니고, 지자체에서 지은 것 같다. 원래는 그 쉼터 위쪽에 산행안내판이 서 있었으나 지금은 바로 그 위쪽의 경순왕 사당(경천묘) 뒤로 옮겨져 있다. 거기에 '미륵봉 1.3km, 50분'이라고 적혀 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바친 후 이 지방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귀한 분이 오신 곳이란 뜻의 귀래란 지명도 생겼고, 미륵산의 미륵불과 황산사도 경순왕에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 꽤 큰 규모로 경순왕 사당인 경천묘가 이곳에 세워졌다. 경천묘 앞 마당에도 주차 공간이 있고, 화장실이 있으며, 깨끗한 음룡수가 흘러 수통에 물 채우기도 좋다.
그리하여 부도 밭에서 400∼500m, 10여분 정도 더 올라가면 오래 된 삼층석탑이 한 기가 있어 이 부근이 황산사 옛터임을 짐작케 한다. 삼층석탑은 높이 2.8m 가량 되며, 지붕 돌이 지나치게 두꺼워 불안정한 모습이어서 세련된 조각미는 없다. 그저 소박하기만 한 이 탑은 고려시대 이 지역주민의 정성으로 조성된 민간신앙의 대상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삼층석탑 바로 위쪽에 불사를 집행하는 가건물 상태의 절(황산사)이 있다. 지금은 말만 절이지 아직 절집다운 본격적인 전각은 아니고 천막으로 된 가건물이다. 그러나 미륵산 정상에 있는 미륵불을 섬기고자 하는 신도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당초의 황산사도 바로 미륵봉의 마애불과 조응을 하여 세워졌던 절인 만큼, 지금에 와서 다시 신도들의 시주와 보탬이 쌓여서 머지않아 제대로 격식을 갖춘 사찰로 커 갈 것으로 보여진다.
산행기점의 샤만계통의 황산사 입구에서 천막 절간의 황산사까지는 완만한 경사길이나 절간에서부터 마애불까지 1km 구간은 상당한 경사 길이다. 그리고 마지막 마애불이 있는 바위지대를 오르려면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곳도 두어 군데 있다. 그러나 울창한 숲길이어서 맑은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도시의 환경오염에 찌든 찌꺼기를 뱉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올라간다면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갈 수 있다.
그리하여 천막 절간인 황산사에서 20분이면 마애불에 이른다. 마애불은 등산로 왼편으로 약간 비켜서서 있는 큰 암릉에 반신상의 미륵불이 돋을 새김으로 조성되어 있고, 높이 약 15m 크기의 미륵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몸체의 길이가 10m 정도 된다. 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으며, 두상의 길이는 2m, 안면의 폭은 1.5m 정도 되고, 몸통은 가로 3m, 목에서 좌대까지 5m 정도이다. 두상은 입체적으로 양각하여 눈·코·입·귀가 뚜렷한데, 특히 폭이 넓은 큰 코에 눈과 입이 투박하여, 전체적인 얼굴 모양이 토속적이어서 이 무렵 조성된 미륵불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할 서민적이고 친근미가 있는 모습이다.
마애불 앞은 조그마한 마당을 이룬 너럭바위이고, 그 아래는 높은 단애인데 잘 생긴 노송 몇 그루가 주변환경과 잘 어울려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마애불은 동남향으로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마애불 앞에 서서 내려다보면 저 멀리 19번 국도변이 잘 보이고, 황산마을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더구나 미륵불 주변을 황산사 스님이 말끔하게 정돈해 놓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해 준다.
그리고 미륵바위를 내려서면 안부의 이정표에 '왼편(남쪽) 황산마을, 오른편(북쪽) 헬기장'이라 표기되어 있다. 헬기장이 바로 미륵산 정상이고, 안부에서 바로 앞(서쪽)에 있는 바위 위가 미륵봉이다. 바위틈에 늘어진 밧줄을 잡고 올라가면 넓은 마당바위가 있고, 바위틈을 비집고 서 있는 노송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황산사 입구에서 암릉으로 이루어진 미륵봉까지 산행기점의 안내판에는 50분 걸린다고 되어 있으나 올라가면서 부도도 살피고, 3층 석탑도 보고, 마애불에 치성도 드리고, 그렇게 하다가보면 1시간 조금 더 걸린다.
미륵봉의 마당바위는 꽤 넓어서 여러 사람이 안전하게 올라갈 수 있고 전망도 시원하다. 북동쪽으로 백운산(1,087m), 동남쪽으로는 십자봉(985m)과 삼봉산(907m)이 보이며, 남쪽으로는 멀리 남한강의 물길도 보인다.
산행은 대개 이 미륵봉을 끝으로 하산하게 된다. 그러나 미륵봉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이나 정상에서 북동쪽 내리막길로 새터로 하산하는 길이 모두 호젓해서 산행에 감칠맛이 나는 곳이므로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정상은 미륵봉 북동쪽으로 빤히 보이는 봉우리이다. 정상으로 가려면 미륵봉에서 도로 안부로 내려와서 북동쪽을 향해 내려가는 듯하다가 다시 올라간다. 그리고 오르막내리막이 계속되는 능선길을 500m, 20분 정도 가면 정상이다. 정상은 널따란 헬기장이어서 사방이 트여 있으나 바라보이는 전망에 특별히 볼만한 게 없다. 그저 평범한 우리네 강산과 농촌의 들판이 보일 뿐이다. 이처럼 아무 특징이 없어서 사람들이 미륵봉에서 그냥 하산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내려서면 중간에 묘가 1기 있는 하산 길이 편안하게 계속되며, 암릉도 없고 짙은 숲 속에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길이어서 오붓한 산행을 하기에 안성맞춤의 곳이다.
그리고 그 길로 계속 내려가면 바로 아홉사리 고개에서 들어오는 시멘트포장 길을 만나면서 새터라는 곳으로 내려선다. 지형도에는 새터마을로 표시되어 있으나 지금은 농경지만 있고 집은 띄엄띄엄 있는 한산한 곳이다. 도로에 내려서서 남서쪽의 산행기점인 황산사 입구 쪽으로 걸어가면 중간에 민가가 두세 집이 있고, 10분이면 산행기점에 닿아서 원점회귀 산행을 마감할 수 있다.
그런데 미륵산 정상이라 해 봐야 높이도 별 차이가 없고, 별다른 의미도 없는 민둥봉이어서 그냥 미륵봉에서 마감하고 하산하려고 한다면, 하산은 신선대 쪽으로 해서 능선을 타고 황산마을로 내려가는 것이 가장 좋으나 이 길은 위험한 곳이 있어서 안내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올라갔던 길로 도로 내려갈 수도 있으나, 안부에서 양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어느 쪽으로 내려가도 되지만, 북동쪽 정상 쪽으로 가다가 길이 갈라지면서 우측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올라갔던 길과 만난다. 그리고 반대편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30m 정도 내려가서 왼편 급경사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역시 미륵불 바위 아래쪽에서 올라갔던 길과 만난다. 그리고 편안하게 50분 정도면 하산을 할 수 있다.
한적한 농촌 길이기는 하나 시멘트 포장길이어서 정취도 없고 피곤하기만 하다. 따라서 미륵산을 갈 때는 승용차를 가지고 가서 황산사 입구에 주차해두고 거기를 산행기점으로 삼아 올라가는 것이 좋다.
그런데 한 가지 미륵산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일은 우리 나라의 산 이름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아마 우리 민족정서에는 종교적인 심성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그 중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이름들이 많다. 아마 불교적인 전통이 오래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명산대찰이라 하여 대부분의 사찰이 산 속에 들어앉아 있어서 그만큼 산과 깊은 인연이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하면 절을 산사(山寺)라고 하겠는가. 이처럼 불교와 산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산 이름에도 불교적인 것이 많은 것이다.
미륵산은 미륵부처가 있으니 미륵산이라 했겠지마는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산이나 산봉우리에 붙여진 불교와 관련된 이름에는 청량산, 두륜산, 보현산, 신불산, 영취산, 조계산, 천태산, 법화산, 두타산, 가야산, 무등산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수없이 많다. 그리고 큰스님의 이름을 따서 무학산, 원효산 원효봉, 의상봉이라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큰산의 경우에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흔히 비로봉이라 한다. 금강산의 비로봉과 소백산의 비로봉, 그리고 속리산, 오대산, 치악산, 황악산 등의 비로봉 등이 그것인데, 이 또한 불교적인 것이다.
또 불교에서는 연꽃을 숭상하고 있어서 연꽃을 일컫는 '연화'라는 산이나 봉우리 이름도 많이 있다. 그 중에는 소백산의 연화봉이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경남 고성에는 도립공원인 연화산이 있고 태백산에는 1,171m의 연화산과 1,053m의 연화봉이 있다.
그리고 향로봉이라는 이름도 많이 있다. 진부령, 북한산, 치악산, 덕유산, 적상산, 내연산, 청량산의 향로봉 등이 그것이다. 또 문수봉이라는 이름도 곳곳에 있고, 관음봉, 나한봉, 달마봉, 반야봉이라는 이름도 있으며, 심지어 팔공산에는 염불봉까지도 있다.
그리고 도교의 신성사상의 영향도 많이 받아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산을 신성시하고 믿음의 대상으로 숭배하는가 하면, 이에 따라 도교에 관련된 산 이름이나 봉우리 이름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도락산, 삼성산, 수락산, 아미산, 용문산, 용화산, 천관산, 칠성산, 태백산, 계룡산과 같은 것들이 도교적인 이름이다. 그 외에도 천왕봉, 영봉, 만수봉, 신선봉, 영신봉, 옥녀봉, 칠선봉, 제석봉 … 등이 있고, 장군봉 같은 것은 이 산 저 산에 많이 있는데, 이 또한 도교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라 오악(5岳)처럼 국가 수호산으로 동악, 서악,… 등의 오악을 정하던 것도 도교적 영향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인 동인 외에도 우리의 민족정서의 영향을 받은 산 이름도 있다. 예로부터 가족주의의 혈연관계를 중시한 우리 민족이었으므로 이에 영향을 받아 형제봉이라는 이름이 유별나게 많다. 지리산, 소백산, 북한산, 속리산, 태백산, 황악산 등에 형제봉이 있는가 하면, 이곳 저곳에 삼형제봉도 있다.
이처럼 산은 종교적 혹은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듯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산을 대하는 우리민족의 정서에는 남다른 데가 있다고 보여진다. 산이 그 지역의 수호 역을 담당해준다고 여겨서 고장마다 진산(鎭山)이 있는가 하면, 산신제를 지내는 등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리풍수설의 영향이기는 하겠지마는 산을 단순히 자연현상으로의 산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유기체로 인식되어서 지맥이 곧 민족의 혈맥으로 여겨지기까지 해서 실제로 우리 나라의 산들에는 민족역사의 골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첫댓글 회장님! 미륵산 등정을 축하드리며 산행기 잘 보고 갑니다.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멋진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이런 조은 내용을 진작 못봤네요. 글구 내 사진도 잇는 것을 암튼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