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생동』展에 부쳐 ● 『기운생동』展은 젊은 한국화 작가들을 선별한 전시다. 여기서 젊다는 것은 다분히 생물학적 나이에 근거한다. 25세에서 35세 사이의 작가 군이 그렇다. 나이와 세대 차에 의해 미술이 구분되고 그에 따라 작업 경향 자체가 차이를 지니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특징이다. 미술에 있어 ‘시간’이란 개념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근대 이전에 이미지란 시간의 변화와 무관하게 한 사회의 관습, 종교, 이데올로기의 주술화에 기여해왔다. 이 주술성에서 풀려난 이후 미술은 미술 자체의 생물학적 삶을 살게 되면서 그것 자체로서의 독립된 생을 영위하고 한정되고 일시적 삶을 살게 되었다. 이즘의 대체와 논리의 차이를 통해 매번 새롭게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거듭 하는 것이 미술의 운명이 된 셈이다. 아울러 이미지를 시간에 따라 구분 짓고 이름 지은 것이 이른바 미술사이며 사람들은 그 시간대에 따란 이미지의 변천(양식과 형식의 변화)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고 그 변별성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진화론적, 직선적 시간관에 의한 이미지 파악이란 방법론이 자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에 따라 당대의 화가들은 이제 전시대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새롭고 발전적인 것으로 대체하거나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를 스스로 짊어졌다. 그래서 서구의 현대미술은 항상 최근의 새로운 흐름과 기류를 보여주는 젊은(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놓고 전개된다. 한국화 역시 그런 시간관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양식과 이념의 대체가 그간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보여준 한국화의 궤적이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1920년대 동연사 멤버들, 60년대 묵림회, 80년대 수묵운동의 주역들, 90년대 새로운 한국화의 주창자들이 당시로서는 모두 젊은 세대들이었음을 떠올려본다.
노동목_박병일 박종갑_송인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항상 나이와 세대 차에 의한 작가들 간의 갈등과 틈이 존재해왔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급격한 대체와 변화의 과정에서 원로, 중진 작가들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 자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거나 그 의미 자체를 정확히 읽어내지 못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 역시 한편으로는 자신의 작업이 매번 새롭게 갱신되고 또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스스로를 옭죄다가도 이내 젊은 작가들의 작업 자체가 뿌리 없고, 근거 없는, 전통에 대한 몰이해와 기본기가 갖춰있지 않는 그런 허접한 것으로 짐짓 내치면서 잘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근자에 이전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집중적으로 미술계가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본다. 젊은 작가들이 주요 기획전시에 빈번하게 이름이 오르고 미술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실을 보는 기성 작가들의 마음이 편치 않다. 미술평론가나 큐레이터, 기자 들이 너무 젊은 작가들 위주로 이루어지다 보니까 매번 젊은 작가들만 대접받고 논의되고 있다는 볼 맨 소리도 크다. 중진 혹은 원로작가들이 미술계에서 푸대접받거나 외면당하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여기에는 최근 젊은, 자신들보다 어린 작가들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불만과 불안 등이 착잡하게 노정되어 있음과 아울러 오늘날 젊은 평론가나 이론가, 큐레이터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고 그 발언과 권력적 측면이 강화되고 있다는데 대해 느끼는 피로감등이 착잡하게 섞여있다. 결론적으로 한국화 작가들이 보여주는 이 세대간, 나이 차에 의한 갈등과 대립은 좀 더 강렬해지는 것 같다.
서은애_성태훈 우종택_이길우
심사나 이런 저런 심의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5,60대 작가들 이상은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 심지어는 자기 장르에서 논의되고 중요하게 이야기되는 작품에 대해서도 놀라울 정도로 무지한 편이다. 자신의 작업에 열중하느라 다른 작가들 작업을 볼 여유도 기회도 없을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최소한 다른 작품을 정확하게 보려는 태도나 이해는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미술의 흐름이나 경향, 여러 정황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내지는 안목이 없이 작업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견내지 나이든 작가들도 부지런히 자기 작업의 갱신과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렇다. 그만큼 한국화 작가들의 세대 간 간극과 괴리가 다른 장르보다 더욱 크고 멀고 깊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울러 한국화에서 젊은 세대와 그 이전 세대의 차이와 다른 징후가 무엇이며 왜 그것들이 서로 존중되거나 이해되기 보다는 매우 배타적이거나 서로 다른 영역으로 치닫고 있는지도 해명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 그렇게 살펴보면 현재 한국화 관련 전시는 크게 3가지로 확연히 구분된다. 20대 중, 후반에서 30대 초, 중반의 젊은 작가군의 이러저런 다양한 기획전과 개인전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비교적 한국화의 재료나 그 전통적 사유체계, 그림을 이루는 조건들을 가지고 발랄하고 유희적인 모색을 하기도 하고 이미 기존의 다른 영역에서 전개한 방법론의 확장을 끌어들여 동양화 영역을 해체하거나 흔드는 작업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 참조의 언어, 도구가 외부 장르의 조건들을 가지고 들어와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한국화 장르의 자발적이고 내적 파괴나 혁신인 것처럼 주장할 때 곤혹스러워진다는 사실이다. 그런가하면 전통적인 도상의 파괴나 색다른 번안이 흥미위주로만 번지고 있음도 본다. ● 그러나 적지 않은 수가 한국화 재료나 그 방법론을 가지고 자기 언어를 개발하고 자신의 사유나 삶의 체험, 동시대의 감정과 삶의 패턴, 사회와 현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풍경을 그리는 의미 있는 태도 등을 보여준다. 동시에 전통에 대한 해석과 작업행위 자체의 유연함과 일상적인 수행으로서의 그리기, 스터디로서의 개념적 그리기 등이 혼재된 뛰어난 여러 사례들을 만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전통회화, 이미지에 대한 다양한 학습과 분석, 재료체험 등을 매 번 새롭게 자기 식으로 해석/재해석되고 극복되어야 하며 바로 이 점이 중요하 다고 보여 진다.
이여운_임만혁 임태규_전가영
그 다음은 일정하게 틀 잡힌 자기 스타일을 좀더 형식적 완결미 속에서 치장하고 보존하는 유형의 4,50대 작가군의 반복적이고 정례화 된 전시들을 만난다. 이 작가들은 전통적인 요소를 늘 내재화하면서 젊은 작가 군에 의해 알게 모르게 자극을 받아 그런 신선한 스타일이나 방법론의 요소를 적절히 가미, 가공하는 순발력을 보이기도 한다. 비교적 미술시장이나 상업성에 노출되고 그를 부단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세대로서의 절충과 피로감 등도 엿보인다. 이들 상당수가 자신의 작업스타일을 한국적, 동양적, 전통성 등의 카테고리 속에서 자기 합리화하는 장치들을 개발하고 이를 인테리어화 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편이다. ● 6,70대 작가들의 드문 개인전이나 초대전은 이제 기념적이거나 회고적으로 보여 진다. 일전에 동산방에서 열린 김동수 전은 중요해보였는데 언론이나 미술계에서 논의가 부족한 것은 아쉽다. 여전히 그런 어른이 필요하고 그렇게 일관된 세계를 가면서도 완숙하고 밀어 올리는 힘이 느껴지면 그런 원로는 존경받을 것이다. 그것인 산수화라서, 여전히 전통적 재료체험을 존중한다고 해서 무시되거나 폄하되는 게 절대 아니다. 정형화 된 산수, 형식적 그림의 소재를 변함없이 유지하거나 그림에서 작가의 힘이자 정신이 느껴지니 않으니 원로들이 외면당하는 것이지 단지 나이가 들었다고, 시대가 변했다고, 새파랗게 젊은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이 설쳐대니까 자신들이 무시당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 물론 젊은 평론가, 큐레이터들도 자신들이 보고 아는 작가로만 묶여서 자기 스펙트럼을 확장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들이 기획한 전시를 보면 늘 요즈음 여기저기서 반복해서 불려 다니는 작가들만을 고집하고 전시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자신의 안목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별하지 못하기에 다른 힘에 의존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학연이나 인연에 휘둘리는 것에서 비롯된다.
전수민_정재호 정진룡_홍지윤
한국미술계 전체의 지평에서 최대한 많은 작가들을 떠올리고 그들 각각의 특성과 의미를 좀더 섬세하게 읽어내면서 전시를 기획하고 종횡으로 연결하고 나이 차를 넘어서고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화전시에서 새로움이나 신선해 보인다거나 실험적이란 특징만으로 젊은 작가들이 우대받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그들이 한국화(전통 회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한국화(전통회화)란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자기 삶과 함께 맞물려서 풀어내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단지 새로움의 외피를 뒤집어쓴 제스처인지, 이미 다른 장르에서 고민한 것을 마치 자기의 자생적 고민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지, 스타일이나 패션에만 휘둘리고 있는지,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따라서 전시기획용의 작품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을 꼼꼼하게 살펴 읽어야 한다. 그저 미처 못 본 것 같아 그래서 새로워보여서 그것이 좋은 한국화작업이고 처음 보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받아서는 안 된다. 근자에 젊은 작가들의 작업이 다소 기발하고 신기하고 재미있고 발랄한 것만으로 밀어붙이는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런 것이 유행하고 의미를 부여받는 상황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은 진정성을 가리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진정성을 확인하고 헤아리는 일이 가장 절실하다. ● 이번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기획한 『기운생동』展은 앞서 언급했듯이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젊은 한국화작가들을 비교적 대규모로 초대한 전시다. 20명의 작가들이 선정되었는데 근래 활발한 작업 활동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상당수 망라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생물학적 나이를 기준으로 줄을 세운다는 것이 위험하지만 이제 막 화단에 나와서 열정적으로 작업 활동을 하는 대표 작가들을 일별해서 그들의 동양화 작업이 무엇이며 어떤 고민의 흔적을 어떠한 방법론으로 풀어내고 있는지를 한 눈에 살펴보는 기회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일 것이다. 사실 이들의 작업을 관통하는 성격을 단일한 이즘이나 이름으로 명명할 수 는 없다. 분류하고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고 이름 짓는 일이 비평은 아니다. 전시 역시 마찬가지다. 전시는 수많은 작가들이 작업을 통해 그 개별성의 징후를 읽어보려고 애쓸 뿐이다. 집단화하기 어렵고 카테고리화 하기 힘든 개별성의 작가들을 어떻게 한 자리에 모아 보여주느냐는 모순이지만 그 모순 속에서 비로소 개별성/공유성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전시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측에서 자신들이 시선에 의해 걸러낸 작가들의 여러 초상이다. 우리는 그 초상을 일별함으로써 동시대 한국화의 여러 징후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 비로소 한국화 영역의 젊은 작가들의 미술에 대한 고민, 전통에 대한 해석, 재료와 방법론의 모색, 기존 한국화에 대한 입장 등을 엿듣게 될 것이다. 그들이 수런대는 소리는 이미 물길이 되고 어디론가 끝없이 퍼져나가 문득 거스를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떠있을 것이다. ■ 박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