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부부는 여러명의 이민 선배들을 만나 상담과 조언을 통해 어떤 분야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해야 할지를 상당히 신중히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중에 한분이 당시 시카고에 사시던 14회 신수천 서영란 선배님 부부였습니다. 수천 선배님은 RCA 라디오 만드는 회사에 다니시며 냉동 냉장 기술학원
(Refrigeration Vocational School) 에서 기술을 배우고 계셨고 영란 선배님은 간호사(RN)시험 준비를 하고 계셨는데 미국에서는 수입면에서 어떤 기술이 좋으니 저보고 무슨 전문 기술을 배워보라고 했었습니다.
우리부부는 7남매, 6남매 맏이라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빨리 초청해 오려면 미국 시민권을
빨리 받기 위해 미육군에 상병(E-3: 한국 군근무 3년 인정)으로 입대해서 한국에 나가 근무하며 가족들을 가능한 빨리초청해 올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free ride 를 해 주셨던 노부부께서 Army 가는 것은 가족을 빨리 초청해 해 올 수는 있지만 너희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하며 자기 며느리가 일하는 미국 담배회사에 들어가 일해 보라고 해서 간단한 영어 수확 기초 시험을 보고 합격해 담배회사
연구실 보조원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직장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당시 시간당 기본급이 $2.65 인가 할때인데 overtime
work 도 하고 했지만 우리가 살면서 한국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기엔 전혀 여유가 없었고 오후 5시에 담배회사 일이 끝나면 Holiday Inn 이라고 하는 호텔 식당에 접시 닦이도 하고 루이빌 공항 남자화장실 청소부도 part time 으로 해보고 했는데 수입이 생활하며 저축을
조금씩 하기는 했는데 희망적인 미래가 보이질 않았다
교인 중에 이민 선배되시는 태권도 사범님과 산부인과 닥터 되시는 두분이 “ 이웃 침례교 교인중에 시카고
술집에서 전자오르갠을 치시던분이 켄터키에 내려와 구두수선 가게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 십일조를 한달에 400~500불씩 한다고 하니 김집사도 그 구두수선 가게를 한번 찾아가보고 할 수 있다고 자신이 생기면 자기들에게 곧바로 얘기하라”고 하셨다. 우리부부는 직장을 둘다 full time and part time 해서 4가지 일을 하며 잠은 하루에 5시간 정도 자며 정말 죽도록 일해도 달러 저축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 런데 나는 그 비지니스를 구입할 자본이 없다고 하니 “몇명이서 돈을 마련해 줄테니 일단 가게를 한번 가보고 나서 얘기래 달라"고
하셨다
downtown 에서 흑인 상대로 가발, 옷,신발, 잡화 가게를 하시는 교인들의 크리스마스 시즌 바쁜 장사철에
부부가 도와주곤 했었다. 그런데 이분들은 교수나 의사보다 몇배의 수입을 벌고 집도 차도 비교되지 않게
잘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분들의 학력이나 영어 실력은 비교적 더 나은 편은 전혀 아니였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비지니스를 해야 돈을 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어떤 기회가 주어지길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분이 하는 구두수선 가게도 가서 2시간 정도 여러가지 물어보고 또 일하시는 것을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어 아내에게 도전해 보고 싶다고 하고 성공하면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고 만약 실패하면 한 5년 고생하며1.5~ 2만불 빚을 갚을 요량하고 도전하겠다고 하니 아내는 내 결정을 존중하며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장소가 아주 좋은 곳에 있는 구두수선 가게를 찾아가 Italian 주인에게 비지니스를 팔 의향이 있느냐고 하니 다행이 판다고 해 사범님과 의사 두분 선배님에게 보고하니 이분들이 주동이 되어 교회 사업하시는 분들 6분이 합해서 1만5천불을 만들어 주시며 사서 열심히 해보라고 하셨다. 1981년 31살인 그당시 우리는 총 1,800불인가를 저축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가게를 살 당시에 영어로 Sole (혼자) Soul(영혼) 의 단어만 알았지 구두밑창 Sole은 알지도 못했었습니다.
전주인 이태리 친구가 한달 Training을 해주기로 계약을 했는데 2주 지나니 나타나지 않아 손님이 신발을
가지고 고쳐 달라고하면 무엇을 어떻게 고쳐달라고 하는지 못 알아 들어 무지 고생했고 고치다 기계를 잘
못 다루어서 신발을 망가뜨린 일이 수없이 많았고 그 당시의 당혹감 절망감은 이루 말할수 없었습니다.
또 한국에 있는 부모나 아는분들이 지금 무슨 사업을 하냐고 물으면 구두수선 한다고 구체적으로 말도 못하고 뭐 그런게 있다고 적당히 얼머무리곤 했었습니다.
한 6개월 정도 지나며 많은 실수도 하고 했지만 기술은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수입도 직장생활보다는 3~4배 이상 되어 꿈에 그리던 내집도 사보고 새차도 처음으로 사기도 했습니다.
빌린돈도 1년 반만에 다 갚았고 계약도 없이 도와주신 그분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영원한 은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를 도와 주셨던 사범님의 아들이 시애틀로 이사를 왔을때 정착을 도우며 은혜를 갚았습니다.
아내는 한국에서 바느질을 해본 경험이 없지만 구두수선을 시작하며 카운트에서 손님을 받고 구두 실밥이
풀어지면 집는 재봉틀로 구두를 꾸매주고 또 여자들 핸드백 실밥을 꾸매주며 일을 했습니다.
한 6개월 지나니 일 잘한다고 입소문(Word Mouth)이 퍼지니 온갖 비싼 가죽제품 옷들과 권총 사냥총 집,
말 안장, 짚차 문짝, 대형 텐트등 가정용 재봉틀로 집을 수 없는 온갖 물건들을 꾸매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일론 실값은 몇전도 안되니 우리가 얼마를 차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손님에게 네가 주고 싶은대로 줘라 하면 5~ 50불을 주고 가고 손님이 다른 손님들을 연결해 주어 온갖 수선들을 했었답니다.
구두 수선은 재료를 한 Dozen (12컬레) 사면 한 컬레만 고치면 재료값이 다 빠지고 나머지는 남았습니다.
제가 I Hour Photo 도 해 봤는데 미국에서 서비스 비지니스는 대충 이와 비슷했습니다.
나는 기술이 어느정도 익숙해 졌는데 일감을 기다리며 있는 처지가 되어 밤낮으로 어디에 가야 고칠 신발이 있는지 늘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 어디에 고칠 신발이 많이 있는지 찾을 수 있도록 정보와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처음 시작한 사업을 하나님께 맡기오니 하나님이 경영해 주옵소서” 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New Shoe Store , Western boots shop, Trucking company,
Orthopedic Doctor(발 의사), Bowling Lane (볼링장) 등을 찾아 다니며 명함을 뿌리고 하니 비지니스가 점점 좋아지고 이탤리언 보다 거의 2~3배의 매상을 올리게
되었고 교인중 3명에게 기술을 가리켜 구두수선 가게를 살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3년 약간 넘게 운영하고 나보다 3~4 년 젊은 후배 교인에게 팔고 1984년 Seattle 로 이사를 왔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왜 하필 돈도 없는데 그 당시 주위 여러분의 도움을 받으며 사람이 발로 싣는 사업을 처음 비지니스로 구두수선을 하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부상조와 미국 사람들이 새것을 사기보다 헌것을 고쳐싣는 검소함을 배우게 하셨고 남을 섬기며 살려면 남의 발 아래 까지 내려갈 수 있는 겸손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전화 번호부(Yellow Page)에 광고한 문구가 무슨 뜻인지 몇년전 16회 방에 퀴즈로 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방장님이 너무 쉽게 퀴즈를 알아 맞추셨는데 늦게 선물을 드려 죄송했었습니다.
We heel you, fix your Sole, dye for You.
(우리는뒷축을 고치고 밑창을 갈아주고 신발 염색을 합니다.)
We heal you,
fix your soul, die for
you. ( 우리는 당신을 치료하고 영혼을 고치고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받치
겠습니다.)
그당시 사진들을 몇장 찾아 다시 찍어서 올려봅니다

가게 건평이 600 sqft (17평 정도) 사이즈 이였다. 3살 짜리 두째와 함께 입구에서


구두 밑창을 새로 갈고 기계로 집는 모습이다.


난 생 처음으로 내집을 사본 것이다. 대지 600평 건평 50평 정도 구입가 2만8천불

신수천 선배님 부부하고 켄터키에 있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생가의 박물관 앞에서 (1979 년 정도)
800불 주고 처음으로 산 차인데 고치는 비용이 더 들어 갔었다.
첫댓글 지난날의 고생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으니, 내 마음이 그쁘기 한량없네. 지금 한국에는 일자리가 없다고
난리인 데 중소기업에는 대부분 외국의 노동자를 고용을 하고 있다. 모두들 고급스럽고 좋은 직장만 바라보니
대학4년까지 수고를 하신 부모님들이 불쌍하다는 생각. (화면 우측에 글자가 짤리게 보이는 데 너무 길게 쓰지
말고 좀 짧게 편집을 하면 잘 보이리라 생각함)
석산이 슈샤인 보이를 했다는 말이로구나. 이렇게 정겹게 들린다. 우리 나이가 이만큼 되어서 그래서 그럴거야. 나도 슈샤인 보이 한번 해 볼걸.. 별게 다 부럽다. 남의 일은 모두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일 거야. 저런 고난 잘 견뎌 낸 석산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