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1. 자수사탑 높이 50m. 명시대 |
특히, 중국에서는 13층 불탑을 오랜 시대에 걸쳐 꾸준히 조성해 왔다. 우리나라의 국보에 해당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유물로 지정된 13층탑의 예를 들면, 북경의 자수사탑(慈壽寺塔)〈사진1〉과 천녕사탑, 감숙성의 탑아만조상탑(塔兒灣造像塔), 길림성의 농안요탑(農安遼塔)〈사진2〉, 사천성의 무량보탑(無量寶塔)〈사진3〉과 구주탑, 성덕사탑, 중경의 대족다보탑(大足多寶塔)〈사진4〉 등등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십기가 현존하고 있다.
▲ 사진2. 농안요탑. 높이33m 요시대 |
이처럼 중국에서의 13층탑은 중국전역에 걸쳐 조성되어 왔지만 사천성의 보광사13층탑 등 몇 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송나라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수적으로는 비교가 안 되지만 역사적 의미가 심중한 정혜사지13층탑〈사진5〉이 현존하고 있다.
▲ 사진3.무량보탑 높이 37m 송시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정혜사(淨惠寺) 터에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는 흔적은 13층의 석탑 한 기뿐이다. 하지만 이 탑은 정혜사의 옛 모습을 홀로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존재감을 자랑한다. 또,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에 국보 제 40호로 지정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정혜사지를 찾는 참배객의 이목을 가장 먼저 끄는 것은 바로 이 13층석탑이 보여주고 있는 독특한 외관일 것이다. 높이 5.9m로, 탑의 층수가 13층이나 되지만 다른 지역에 남아있는 다층탑에 비해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 이유는 1층 기단의 높이가 매우 높은 데 비해, 탑신부에 들어서서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여 표현하면, 몸돌이 거의 보이지 않고 지붕돌만 차곡차곡 쌓여 탑신부를 이루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사진4. 대족다보탑 |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이 탑은 당나라 백우경이 창건하였다는 정혜사와 그 역사를 함께한다. 정혜사와 13층석탑에 관한 기록은 현재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1933년에 최준(崔浚)이 〈동경잡기(東京雜記)〉를 수정, 보완하여 펴낸 동경통지 (東京通志)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경통지는 경주의 역사를 기록한 지지(地誌)인데, 정혜사의 정확한 창건연대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신라 선덕왕 때의 기록을 통해 그 시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제7권 불사편(佛寺篇)에 보면 『淨惠寺惠址 在紫玉 山下 新羅 宣德王庚申 唐朝僉議事白宇經 被讒來寓干紫玉山下 建迎月堂萬歲庵 宣德王幸行 改庵爲淨惠寺爲景春 云云』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백우경은 자옥산(紫玉山) 아래에 자리를 잡고 경치가 뛰어난 터를 골라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세웠다. 그러자 소식을 들은 선덕왕(宣德王)이 친히 찾아오기도 하였는데, 후에는 암자를 ‘정혜사’라 고치고 당은 ‘경춘’(景春)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가 자옥산 아래 영월당과 만세암을 지우니 선덕왕이 몸소 찾아와 만세암을 정혜사(淨惠寺)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라는 내용이다.
▲정혜사지 13층탑. 경주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해 있다. |
백우경은 중국 黃帝軒轅(황제헌원)의 후손으로 당나라 詩聖(시성) 白樂天(백낙천)과 사촌간이며, 우리나라 수원 백씨의 시조이다. 그는 중국 소주(蘇州)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첨의사 좌복야 사공 대사도 등을 지내다가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780년 (선덕왕 1)에 신라에 귀화하여 계림의 자옥산 아래 (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에 살면서 신라에 벼슬하여 대상에 이르렀다. 백우경과는 이러한 인연이 있는 정혜사는 세월이 흘러 모든 전각은 없어지고 현재는 13층 석탑만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기록을 통해 정혜사는 8세기 후반에 창건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고, 이곳에 남아있는 13층석탑 역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정혜사지 석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바로 탑의 양식이다. 당시 신라의 석탑에서 유행하던 이층기단이 아닌 하나의 단층기단으로 이루어졌으며 1층의 탑 몸돌이 매우 거대한 데 비해 2층부터는 지붕돌이 촘촘히 쌓아져, 전탑에서 나타나는 밀첨식 양식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6 |
밀첨식으로 탑을 조성하는 방식은 중국의 다층 밀첨식 목탑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정혜사지 13층석탑에서 이러한 양식이 나타나는 것은 정혜사를 조성한 백우경이 당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그와의 연관성을 추측해볼 수 있다. 또 지난 연재에서 알아 본 신라 망덕사 13층탑 역시 당나라와 큰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으로부터 전해진 이러한 13층 양식이 정혜사 13층탑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탑의 층수가 중국의 13층탑과 같을 뿐, 탑의 전체적인 형태나 모양에는 큰 차이가 있어, 정혜사의 13층탑은 신라의 예술성과 기술력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을 것이다. 타국의 문화 양식을 수용하여 자체적인 해석을 통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불탑을 완성도 있게 조성한 신라인들의 신앙심과 예술혼이 돋보인다.
조선시대까지 잘 보존되어 온 정혜사는 여러 문인들의 공부방으로 쓰이기도 하고 서원의 재산으로 편입되는 등 존립에 위기를 맞다가 결국 1834년에 발생한 화재를 끝으로 폐사되고 말았다. 또 정혜사지에 남아있는 13층탑 역시 1911년에 도굴될 큰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도굴꾼 여럿이 상륜부를 들어내고 탑의 위로부터 3층까지 해체했을 때,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도둑놈이야, 도둑놈!”이라고 소리를 질러 탑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2년에 탑이 다시 복원될 때까지 도굴꾼들이 땅에 버려둔 탑재를 되돌려 놓지 못해 그 때까지 정혜사 13층탑은 10층탑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굴될 위험에 처한 직후 바로 복원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탑상부는 영영 잃어버려 현재 탑에는 상륜부 없이 노반만이 남아있다.
이처럼 지금은 본래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지 못하고 있지만 13이라는 숫자에 담긴 불교적 세계관과 그 의미를 생각할 때, 정혜사지 13층탑이 갖는 종교적·문화적 가치의 중요성은 매우 큰 것이다. 더불어 정성스레 쌓은 13층탑의 모습에서 당시 신라인들이 탑 안에 담아낸 불심(佛心) 또한 얼마나 깊고 큰 것이었을지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