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3.(월)
사사기 21:1-12 말씀 묵상과 하나님의 인도
“경솔한 맹세와 경솔한 방책”
샬롬! 에이레네. 평안. 안식. 쉼. 힐링
주일은 잘 보내셨나요? 12월의 둘째 주일을 지나며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오늘도 주의 은혜아래 의와 희락과 평강을 누리고 나누기를 원하며,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 되고 내 길의 빛이 되기를 구하며 또 하루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오늘도 함께 하여 주셔서 삶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나로도는 요 몇 일사이에 연일 코로나 확진자들이 나와서 많은 분들이 불안해 하고 여러가지로 어수선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학부모와 학생이 확진되어 모두가 검사를 받고 수업 및 활동이 제한되어 안타깝습니다. 하루속히 코로나가 종식되어 일상의 삶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20장에서 이스라엘은 레위인이 보낸 토막난 여인의 몸을 보고 소스라쳐 그를 소환해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증언은 교묘한 자기중심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온 총회가 미스바에 모여 베냐민과 전쟁을 준비하고 베냐민을 칩니다. 그러나 베냐민에게 두 번이나 패하고 세 번째 가서야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다시 묻습니다. “올라갈까요? 말까요?”(28절).
이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올라가라고 하시며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세 번째 전투에서 베냐민은 패하고 겨우 600명만 남아서 림몬 바위에서 4개월을 숨어 지내게 됩니다. 20장의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의 반응도, 베냐민 지파의 모습도 그 시대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불신앙과 불순종을 고발하고 폭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성도는 어떠한지? 목회자로써 저는 어떠한지? 과연 “레위인처럼” 문제의 근원이 되지 않고, 복의 근원이 되고 있는지 점검해 봅니다.
오늘 묵상 본문은 자기 동족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의 승리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후속 조치를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 지파 기브아의 망령된 행실을 전해 듣고 미스바에 일제히 모였을 때에 ‘맹세’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1절).
이러한 경솔한 맹세가 베냐민과의 전쟁 후에 그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마치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 앞서 경솔한 서원을 하고 그 발목이 잡혔던 것처럼(11장), 이제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주지 않으리라’는 서원이 언약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백성은 당시 언약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벧엘’로 올라와서 저녁까지 큰 소리로 울며 하나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2절).
이러한 “우는” 모습은 보김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삿2:4-5).
그들은 ‘보김 때처럼’ 이렇게 크게 울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3절).
이스라엘은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처럼 크게 울며 원망하였지만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소” 여러 번의 선지자의 권면을 듣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의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잠언 19:3). 마치 자기들이 왕을 원해서 세워진 사울 왕을 인해 나중에는 그를 '허용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주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신나게 행하다가 두 눈을 뽑힌 삼손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일들은 오늘날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후 ‘베냐민 지파가 없어지게 된 일’을 수습하는 이스라엘의 모습도 역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곳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4절). 그리고 갑자기 “그 때 미스바에 모일 때에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들이 누구냐?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고 맹세하며 희생제물을 찾습니다(5절).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여 낳은 이 참람한 결과에, 자신들을 돌아보기보다, 문제의 해결책으로 희생제물을 찾고 있습니다. 뉘우치는 척은 하는 것 같지만(6절), 그들의 다음 해결책과 잔인한 길르앗 야베스 족속을 살인하는 것을 볼 때 결코 올바른 뉘우침으로 볼 수 없습니다. 동기가 올바르면 과정도 방법도 올바르게 나옵니다. “첫 단추”(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를 잘못 끼었으니 계속해서 잘못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길은 “다윗처럼” 철저한 회개 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미스바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들을 찾아보니 요단 동쪽의 길르앗 북쪽 야베스 족속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그들은 한 사람도 미스바 총회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8-9절). 그런데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용사 12,000명을 뽑아서 길르앗의 야베스 주민들과 부녀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칼날로 치게 합니다(10절). 다만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한 여자만 살려두게 합니다(11절). 이건 또 무엇인가? 베냐민 남은 자손 600명과 혼인관계를 맺어 주겠다는 자기의 소견입니다. 그래서 그 잔인한 동족상잔의 일을 또 다시 시행하고 길르앗 야베스의 처녀 400명을 가나안 땅 ‘실로’로 데리고 옵니다(12절).
한번 잘못 형성된 습관은 좀처럼 바꾸기 어렵습니다. 한번 형성된 신앙의 스타일은 웬만해서는 안 바뀝니다. 지난 오랜 목회를 통해서 배우는 ‘팩트’입니다. ‘일 중심’의 마르다 형은 좀처럼 ‘말씀 중심’의 마리아 형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처음부터 말씀 훈련과 기도 훈련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청소년과 청년들을 주의 말씀으로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삶의 방식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로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행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루를 시작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의 방식으로 바뀔 때, 교회와 성도가 사사 시대와 같은 경솔한 맹세와 경솔한 방책으로 살지 않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을 것을 믿습니다. 아멘.
*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
나로도 제일교회, 섬김이
복음과 사랑에 빚진 자, 문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