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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년 5월 25일 석존성탄절 법회
> 제목: 팔정도(八正道) II ; 대산1집 진리는 하나, 1. 불교
> 김제원 교무님 설법
> 타이핑: 백도원
1. 석존성탄절(釋尊聖誕節)
반갑습니다. 오늘이 참 기쁜 날이지요. 경축일입니다. 원불교의 사축이제(四祝二齋) 중에 석존성탄절 (釋尊聖誕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원불교의 차이가 뭐냐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대종사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성중성 (聖中聖)이다. 성인중의 최고 성인이다. 그리고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연원불로 모시겠다.” 고 분명히 말씀해주셨고, 아까 우리가 예찬했다시피, “시아본사 (是我本師) 석가모니불”, 우리들의 참 스승, 나의 본 스승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그래서 대종사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타종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유불선을 통합했다. 사실은 우리 교리 내용에 보면 유불선의 내용이 참 많습니다. 돌아가신 양산 법사님 같은 경우는 법문 하실 때 유교경전을 줄줄줄 외우세요. 그래서 주로 대종경 설명할 때 유교로 설명을 많이 하셨구요. 또 우리 의두요목이나 또는 우리 수양 부분에 보면 도교 부분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불교는,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기도 하고, 또 교법의 총설에 보면 “모든 종교의 교지를 통합 활용한다.” 모든 종교의 교지, 핵심강령, 핵심 교의를 통합 활용한다는 이야기는 뭐냐면, 사실은 어떤 종교이던지 간에, 과거의 종교, 과거의 사상을 종합해온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출가하시고 나서 극단적 고행주의, 극단적 쾌락주의가 양변을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것을 중도로 제시하셨습니다. 또, 대종사님 같은 경우는 삼학이 난립되어 있다던가, 출가 재가의 문제, 경전의 문제, 또는 공부할 수 있는 장소의 문제, 제도의 문제들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새 불교로서 내놓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식순 보세요. 삼귀의 (三歸依) 하고, 사홍서원 (四弘誓願)은 안했나요? 금강경 (金剛經)을 하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연원 때문에 그렇다. 다음 주에 대제 할 때는 선성 (先聖)으로 다 받들어 모십니다. 예수님도, 공자님도 성인으로서 받들어 모신다.
2. 팔정도 (八正道)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간 구도 고행을 하시고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교진여 등 5인에게 찾아가서 첫 법문을 하셨는데, 그 법문이 사제법문 (四諦法門)입니다. 사제법문은 네 가지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고통이 있는데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행할 것이냐 하는 것이, 고집멸도 (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방식입니다. 고(苦)에는 자연적 고통, 다른 하나는 인위적 고통이 있다. 각각 네 가지씩 해서 사고팔고 (四苦八苦)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다음에 집 (集)은 업이 뭉친 것을 말합니다. 무슨 업이 뭉쳤냐. 욕심과 갈애, 갈증, 무명으로 인하여 똘똘 뭉쳐진 것을 집이라고 합니다. 욕심과 갈망이 집착이 되어 우리가 본래 갖춰져 있는 맑고 밝은 우리 마음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래서 이 집착에 뭉쳐진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서 고를 극복해 볼까 하는 것이 멸 (滅)입니다. 멸이라는 것은 일원상 자리에 합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 일원상 자리에 합일하면 그것이 멸입니다. 저 일원상 자리는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그랬고, 유무초월의 생사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두 가지를 하면 일원상 자리에요. 그 자리가 바로 멸제입니다. 그 두 자리로 들어가려면 여덟까지 바른 방법(道)이 필요하더라.
먼저, 원불교에서는 이 팔정도를 뭐라고 했느냐를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팔정도는 거기 나와 있다시피, 정견 (正見), 정사유 (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렇게 여덟 가지 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삼학 (三學)입니다. 계정혜(戒定慧) 라고도 할 수 있고, 수양, 연구, 취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수행의 방법이지요. 원불교는 삼학을 뭐라고 했습니까? 동정간 삼학병진하라고 그랬지요. 그리고 삼학공부는 진공묘유의 수행문이라고 그랬으며, 동정간 분리선을 하다 보면 무시선이 된다. 팔정도가 무시선과 연결되어 동정간에 수행이 되어야지 비로소 팔정도요, 그 팔정도는 바로 삼학의 병진으로써 진공묘유이다. 팔정도에 나타난 형식 속에, 그 형식 이면의 진공묘유를 항상 근간에 두고서 팔정도를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의 노예가 됩니다. 진공묘유는 법이라는 자리도 떠난 자리입니다.
(1) 정견 (正見) : 바르게 보는 것이요.
첫째, 정견(正見)이라고 했습니다. 정견은 볼견(見)자지요. 정견은 바르게 보는 것이요,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저께 말씀 드렸다시피, 보통사람은 색안경을 끼어버려. 바르게 안 봐. 자기라는 색안경, 자기 이해라는 색안경, 자기 친소, 이런 자기(我)라는 것에 딱 걸려 버린다. 나가 없는 진공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유아(有我)로서 보게 된다. 그래 이것이 정견이 안되는 거지요. 여기서 정견은 바르게 본다는 것뿐 만 아니라, 조화롭게 함께 더불어서 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나(我)가 없는 나요, 그러기 때문에 더불어 함께 보는 것도 되는 거에요. 자칫 잘못하면, 지만 마음 편해, 다른 사람은 성질 나 죽겠는데. 그것은 정(正)자를 자기 내면에서만 생각한다. 정(正)이라는 것은 우주의 진리여. 그래서 우리가 유아 (有我)를 놓고 또는 사견 (邪見)을 놓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보통 범부들은 어떤 것이 사견(邪見)이냐. 어제는 제가 상락아정 (常樂我淨)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기의 육신이 항상하고, 또는 인간락이 최고 낙이며, 자기 몸이 자긴줄 알며, 육신이 정말 깨끗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사견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시대성에 맞게 한 두 가지만 더 말씀 드려보면, 어떤 것이 사견이냐? 첫째, “인생 뭐 별거 있어? 돈이면 최고지~” 황금만능주의. 두 번째, “육체적 쾌락이 최고의 행복이다.” 세 번째, “남이야 잘 살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 요새는 기업도 그렇지 않아요. 상생을 얘기하죠. 하물며 기업도 그렇지 않은데 지만 잘 살면 된데. 천하의 바보여. 네 번째,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 본다.” 이것이 사견이지요. 과거 없이 어떻게 현재가 존재하며, 현재는 앞으로 미래로 계속 전개될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현재만 존재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정견(正見)이라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인데, 제대로 보려면 선결요건이 있습니다. 제대로 본 사람의 타력이 필요합니다. 그게 뭐에요? 정법회상의 스승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른 믿음입니다. 정견에 대한 믿음이며, 정견을 하신 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법에 대한 믿음입니다. 즉 인과와 영생에 대한 믿음이지요. 인과와 영생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해서, 그것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이 고통스럽다고 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모르는 것도 정견(正見)을 못하는 것이고, 고통의 원인이 집착이라고 하면서도 그 집착을 놓지 못하고 사는 것도 정견(正見)을 못하는 것이고, 또 그거 집착인데 놓아봐야겠다고 며칠 하다가 말아버리는 것도 정견(正見)을 못하는 것이고. 하다가 말아버려 중생들은. 몇 일 하다가 말아버려. 그러고는 괴롭다고 그래. 놔버리면 될 놈의 것을 못 놓고 괴롭다 괴롭다 한다. 이것이 중생이다.
(2) 정사유 (正思惟) :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을 하는 것. 여기서 생각이란 여러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른 생각이라는 것은 생각이 바르다는 것인데, 일단 마음가짐이 바르다는 것입니다. 그 바르다는 것은 의지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의 첫 째는 서원입니다. ‘내가 도를 이루겠다. 내가 진짜 영생의 행복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 중의 정사유(正思惟)가 아니냐.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니까요.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뭐냐.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까.’ 맨날 번뇌의 생각이지요. 천념만념의 생각이에요. 그 마음을 세 개로 딱 묶어 버리면 뭐에요? 탐진치의 마음이에요. 생각들이 딱 탐진치여. 자, 생각 중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생각에 뭐 때문에 번뇌가 많냐? 욕망 때문에 번뇌가 많습니다. 따라서, 첫째 좋은 생각은 뭐냐. 욕망을 놓아버리는 생각입니다. 놓아버릴 줄 아는 생각입니다. 근데 그게 놓아집니까? 두 번째 생각은 우리가 왜 괴롭냐? 안 좋은 생각, 악한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겁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것은 자비로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와 비. 잘하는 사람에게는 박수 쳐 주고, 못 한 사람에게는 안타까워해주는 마음이죠.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그래요. 그런데 어느덧 때가 타고나면 냉정해져 버립니다. 지 코가 석자야.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그 것은 서원에도 맞지 않는 마음이다. 그 다음 세 번째 생각. 살다 보면 오염이 돼서 거칠어지고 또는 잔인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생각이 과연 정사유냐. 정사유라는 것은 그런 거친 마음이 아니고 순진한 생각이다. 난 사람이 아니라 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다.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천록 (天祿)이 떨어져요. 기도를 해도 위력이 생깁니다. 순진한 이 생각이야 말로 정말로 자기가 이루고 싶은걸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그 생각을 조롱하죠.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대 성자들은 그 참마음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천지의 위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3) 정어 (正語): 바른 말을 하는 것이요.
정어(正語)는 바른말이지요. 바른말은 바른 말도 되지만, 주위와 더불어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말입니다. 그게 정(正)이지요. 불교에서는 계문 중에 신삼구사 (身三口四) 라고 표현해요. 구사(口四)라는 것은 말로 망어(妄語), 기어(奇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를 말합니다. 망어는 뭐냐, 망령된 말을 말해요, 장난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요. 두 번째가 기어. 욕심이 들어서면 속이지요. 속일기(寄)자입니다. 보통 범부들은 하루에 수십 번 거짓말 한다고 합니다. 세 번째 양설, 양설이라는 것은 이간질하는 말이에요. 아부하고 아첨하고, 이 사람한테 이 말하고, 저 사람한테 저 말하고. 이런 사람이 단체에 있으면 단체 망합니다. 네 번째, 악구. 악한말. 우리 송종원 교우가 저한테 감정 노동자들에 대한 영상을 보내줬어요. 우리나라에 한 4-50만이 아르바이트 하는 젊은이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만 할거 아니잖아요. 그 중에 사장도 나올거고, 그 중에 우리나라를 견인해갈 사람들이 나올텐데.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약자라고 해서 함부로 대한다. 백화점에서 또는 어디서 알바하는 학생들한테 함부로 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뺨도 때리고, 물건이 맘에 안 드니까 뭐 묻혀와서는 뭘 묻혔다고 뭐라고 하고. 그 사람도 사람이고, 말이라는 것은 가슴에 박히잖아요. 감정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든가 몰라. 그게 다 뭐냐 악한 말이다. 자기가 악한 말 한 줄도 모르고, 그 악한 말 받은 사람은 상처가 있는데, 나중에 인과로 갚아나가면 그 악한 말 한 사람은 억울하다고 이야기 하더라.
그래서 이 세 번째 정어(正語)를 해주셨는데요. 집착은 업이 뭉친거라고 했는데, 무슨 업이 제일 많이 뭉쳤냐하면 바로 구업(口業) 입니다. 젊은이들은 신업(身業)이 많지요. 나이가 들다 보면 구업(口業) 이 제일 많습니다. 말로 제일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웃긴 것이, 신업(身業)은 자기가 지었다고 누가 뭐라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인정을 합니다. 구업(口業)은 자기가 지은 줄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큰 상처를 준 지도 모릅니다. 그래 놓고 구업(口業)을 인과로서 받을 때는 억울하고 분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냐 하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말에 대한 계문이 저희들도 참 많죠. 저도 말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만은, 꼭 필요한 말, 은혜가 되는 말, 희망을 주는 말, 도심(道心)이 증장되는 말을 해야 하는데, 이게 만나면 망녕된 마음이 딱 들어서 보통 장난부터 시작하지요. 불리하면 거짓말 해버리고, 이익 보면은 아부해버리고.
그래서 우리가 특히 말 중에 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도 큰 업이지만, 더 큰 업이 있어요. 단체의 융합과 화합을 깨는 말, 지도자를 비난하고, 부처님을 비난하는 말. 부처님의 비난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집니다. 중죄중의 중죄입니다. 방언 공사 할 때 대종사님을 비난한 사람이 갑자기 다리가 부러지고, 갑자기 목숨을 잃었어요. 그때 삼산종사님이 신심이 났습니다. 아, 저런 어른을 저렇게 뒷소리하면 큰일 나는 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말을 해도 공도자에게 험담을 하면 안됩니다. 문제가 있으면 정당하게 간하면 되요. 이야기 하면 되요. 그러나 뒷소리하고 이간질하고. 패거리 지고 하는 것은 업 중에 제일 큰 업 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당에서 패거리를 짓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자기가 일생 교당에서 지은 복보다 그것이 더 큰 업입니다. 우리 교당은 그런 거 없는 거 같아요. 저~어디 가면 패거리 져서 우끼고 있어. 제가 어디 근무할 때, 두 패거리가 되어가지고, 서로 밥도 안 먹고, 회의를 할 때 의견도 자기들끼리만 일치하고. 인간이라는게 신기하데, 능선능악이더만.
(4) 정업 (正業): 바른 일을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 정업(正業)입니다. 업(業)은 아시다시피 육근(六根)이 작용해서 하는 것을 업이라고 하고, 그 앞에 작을 붙여서 우리는 작업취사라고 하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義) 육근이 뭔가를 해. 그걸 업이라고 해요. 그 업의 성격이 어떤 것은 선업(善業)이 되고 어떤 것은 악업(惡業)이 되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뭔가를 하고 있잖아요. 이 법당에서 악업 짓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지금은 선업을 짓고 있어. 눈빛을 보니까 다 부처님 같어.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뭐라고 나올지 또 모르겠어. 업이라는 것은 일이요, 행이요, 행동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업을 주로 신삼 (身三) 그래요. 우리 계문에 신구의 (身口義) 그러잖아요.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여기서 주로 살도음 (殺盜淫)이 제일 큽니다. 살생보다는 방생, 도둑질 보다는 보시, 그리고 간음은 말려간다. 살도음의 악업을 지을 거냐. 방생, 보시, 말려가는 선업을 지을 거냐.
(5) 정명 (正命): 천명을 순수(順受)하여 안분의 도를 지키는 것이요.
정명(正命). 대상종사님께서 해 놓으신 거 한번 읽어보시지요. 정명(正命)하면 보통 올바른 생활 그러거든요. 그런데 대산종사님께서는 천명을 순수하여 안분의 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풀어 주셨습니다. 원불교는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이죠. 진짜 생활은 뭐냐면 자기의 현재가 극락생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입니다. 그게 정명(正命)이다. 그럴라면 인과를 믿고 안분 해야 한다는 거에요. 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냐. 여러 가지 중에 인과를 믿지 않고 억울하다고 그래. 그리고 더 욕심을 부려. 미국 가고 싶은데 비행기 값 없으면 못 가는 거 아니에요. 못 가면 저금하면 되지. 못 간다고 속이 타서 죽으려고 그래. 그건 정명(正命)이 아니다. 자기의 처지에 맞게 자기가 지은대로, 이 안에는 인과가 들어 있잖아요. 왜 안분 (安分)하라고 그러냐? 자기가 지은대로 받은 것이니까 그건 받을 수밖에 없잖냐. 안분(安分)은 뭐냐? 게으르고 나태하고 적당히 중간 따라가는 것이 안분(安分)이냐! 정산종사님께서 안분(安分)을 뭐라고 그랬어요? ‘순서를 잡아서 태연히 가는 거다’ ‘자기의 정도에 맞춰서 전진하는 것’이 안분(安分)이지. 의욕 없이 게으른 것이 안분(安分)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짜 안분하려면 마음에 고락을 초월한 수양의 힘이 있어야 할 것이고, 진짜 안분하려면 인과를 받아들이는 연구력이 있어야 할 것이며, 진짜 안분하려면 경계경계에 내 마음 작용을 챙겨서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삼학 (三學) 입니다. 미리 준비 안 한 사람이 어떻게 안분(安分)할 수 있으며, 인과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달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안분(安分)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저를 보세요. 행복하세요? 대답이 시원찮은 사람도 있어. 인과를 신앙하고, 이 법을 만난 걸 생각해보면 이 순간이 행복해야 정명(正命)이에요. 나는 나중에 행복하겠다. 그건 정명(正命) 아닙니다. 작업 취사 조목에 보면, “ 낙원을 맞이하자는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게 정명(正命)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 낙원을 맞이하는 거여. 나는 내 미래에 희망이 있고, 원력이 있다. 꿈을 멋있게 디자인해 보리라. 그것을 이루어 나간다면 그것이 낙 생활 아니냐. 그것이 대단한 작업취사다. 정명(正命)은 취사에요. 그 생활이 불법시생활이 되고 영육쌍전의 생활이 된다.
(6) 정정진 (正精進):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간에 간단없이 일심으로 정진하는 것이요.
정진(精進) 그랬지요? 대산종사님은 “행중좌와 어묵동정간에 간단(間斷) 없이 일심으로 정진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게 이거 같아. 간단(間斷) 없다. 천지는 간단없이 해가 뜨고지고 하구 있구요. 천지는 응용무념한 가운데 정성된 도로서 돌고 있거든, 그런데 사람은 그리 안 해. 기분 좋으면 했다가 기분 나쁘면 안 해버리고. 날씨 탓, 건강 탓, 나이 탓, 조상 탓, 정치인 탓, 온갖 탓탓탓탓 하다가 결국은 끊어져 버려. 간단(間斷) 없다는 것은 끊어진 사이가 없다는 것이고 정성입니다. 그 정성이 나아갈 진(進)자요. 그 정진 중에 대정진(大正進)이 있다. 일반인은 그냥 정진이에요. 대정진은 진공묘유에 바탕한 정진이에요. 팁으로 알려드립니다.
진짜 정진은 똑같은 24시간에 시간이 달라요. 시간 죽이기 때리기 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이 정진하는 사람은 시간을 살리는 사람이에요. 따라하세요. “시간은 만드는 것이다.” 똑같이 24시간이지만 정진하는 사람은 시간을 만듭니다. 즉, 정정진이라는 것은 올바른 노력과 용기요 정진인 것입니다. 똑 같은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는 인류에 유산과 유익과 업적을 남기는 반면에, 누구는 시간 때리기 죽이기 해가지고 피해만 주고, 아니면 어디 도찐개찐 그렇게 살다 죽어요. 그것이 자존심이지~! 서원이라는 것은 진짜 자존심이야. 큰 도인이 되어보겠다. 성자가 되기 위한 정진을 하겠다 하는 것이 정정진(正精進) 이여.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래요. 이게 뭐에요. 경계 따라 포기해 버릴래요. 그리고 뒷 구녕으로는 제 욕심 다 챙길래요. 그것이 무명 중에 무명이라. 원불교 다니지 않는 사람 중에 조금 착한 것 같은 사람이 중생이거든요. 악한 놈도 중생이지만, 착한 것 같으면서 무명 중생이 있어요. 종교 필요 있나? 내가 착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안주면 되지. 그거 같이 무식한 소리가 없는데 본인은 무식한지 몰라요. 정진하는 사람과 그 사람을 비교해 보세요. 천지 차이입니다. 그 사람은 게으르고 안일하고 나태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정진이라는 것은, 돈이 있어도 절약하는 사람이요, 직업이 있어도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요. 자기가 어느 정도 수행을 해서 원불교 오래 다녔어도 더 구도심 나는 것이 정진입니다. 그러나 서원이 크지 않은 사람은, 조금 공부하다 이 정도면 됐지. 돈을 벌어도 이 정도면 됐지. 그래요. 그 사람은 정진심이 아니고, 시간을 만들어가고 시간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정체시키거나 죽이는 사람이다. 그것은 노력도 아니고 용기도 아니다. 올바른 노력과 용기가 정진인 것이다.
(7) 정념 (正念): 마음 가운데에 일호의 사심없이 일념 즉 정념(一念卽正念)을 갖는 것이요.
다음 정념 (正念). 정념이라는 것은 사실은 수양의 정념입니다. 아까 정사는 연구의 정사입니다. 여기서 정념이라는 것은 마음을 통일하는 것, 또는 마음을 챙기는 것, 다시 말하면 멍 때리지 않는 것입니다. 멍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맨날 실수하고. 보이지도 않고. 이것은 정념이 아니다. 그리고 ‘사심이 없이’ 그랬어요. 신기해요. 사심이 없으면요, 지혜가 안에서 솟아나오게 되어있어요. 그게 진공하면 묘유가 되는 것입니다. 공적이 되면 영지가 솟아 올라오고. 정이 되면 혜가 솟아 올라오고. 지가 되면 관이 올라오고. 지관쌍수, 정혜쌍수, 진공묘유 공적영지라는 말이 바로 그 소리입니다. 제대로 정념을 하면 참회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범부들은 삿된 생각이 많거든요. 그 삿된 생각을 텅 빈 마음으로 가져간다. 텅 빈 가운데 오직 교화를 하겠다. 중생을 제도하겠다. 성불제중 하겠다는 그 생각이냐. 아니면 오늘도 내일도 어떻게 저 여자하고 놀아볼까. 어떻게 저것을 취해볼까 하는 그 것하고는 다른 문제다.
정념(正念)은 네 가지로 이야기 하는데요, 신수심법 (身受心法) 이라고 그래요. 신 (身)은 몸에 대한 정념, 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에요. 수 (受)는 감정∙감각을 말해요. 지금 내 감정 상태가 어떤가. 여자분들은 특히 감정이 강하잖아요. 한번 감정 상하면 필요 없어. 그 상태를 제대로 관해야 한다는 것이 정념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혹시 내가 기쁜 것에 빠져있는가. 내가 괴로운 것에 빠져 있는가. 아니면 멍 때리고 있는가. 그런 감정을 알아차려라. 그 감정에 속지 마라. 그 다음에 심(心)은 내 마음의 습관을 제대로 보라는 거에요. 내 안의 어떤 마음이 주로 어디로 향하고, 어떤 습관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봐라. 그 다음에 법(法)은 내 마음에 집중해서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법은 대타적으로 전체를 한번 더 보라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성품의 법도 법이라고 하고, 이 세상 모든 대상을 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정념(正念)이라는 것은 그냥 맑은 마음 만이 아니라 깨어 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정념(正念)일까요. 맑은 마음으로 전체적인 흐름을 다 봐. 저 사람은 상태가 어떤가, 내 상태는 어떤가. 전체가 급한 상황인가 안 급한 상황인가 그걸 다 봐야지. 자기 혼자 단전호흡만 하고 있으면 그건 정념 아니에요. 동할 때는 그게 정념(正念) 아니에요. 동할 때는 상사가 성질 나 있는가 상사가 급한가. 어떤 회사 가면 상사는 급한데 부하 직원은 한가해. 그건 정념(正念) 아니여.
(8) 정정 (正定): 일심불란한 일정심(一定心)을 갖는 것이다.
마지막입니다. 정정(正定). 일정심(一定心) 그랬어요. 여기서 정(定)은 선정(禪定)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무슨 선정이냐. 동정간 선정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직심(一直心)이라고 합니다. 뭐가 끼지 않고 그대로 나가는 마음. 요란하지 않는 마음이지요. 그래서 정시(精時)에는 그 진경에 들어가는 마음이 정정(正定)이지만, 우리가 평상시에 일할 때에는 정신이 깨어서 집중된 상태에서 몰입되어 일하는 것이 정정(正定)입니다. 불교를 잘못 이해하면 일은 안하고 맨날 선정(禪定) 만 할라고 합니다. 정정 자체를 이해를 못한 겁니다. 정정(正定)이라는 것은 그일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 맡은 일은 적당히 하고 좌선만 하려고 해. 이런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디. 여기서 더 나아가서는 좌선뿐만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정(正定)이다. 그것이 집중이거든요. 쉴 때는 딱 입정처 자리에 진경에 들어가 버리고, 일할 때는 그 일에 집중해가지고. 어디서 많이 들어보셨지요? 무시선 (無時禪)이지요. 생각을 비울 때는 확 비우고, 생각을 낼 때는 확 내고. 이게 무시선이여. 낼 때는 안내고, 내지 말아야 할 때는 내고 있고. 아침에 좌선 할 때는 생각내지 말라고 해도, 내고 앉았고, 일할 때는 생각 좀 하라는데 생각이 안난댜. 환장하겄어 참말로. 이것은 정정(正定)이 아니다 이거야. 왜 그러지 우리가? 어찌 그래? 내라고 할 때는 안내고, 안내라고 할 때는 내고. 나도 할라고 하는데 안되잖아요. 좌선할 때 생각 안 할라고 하지? 근데 나는걸 어떻게 해. 일할 때 생각할라고 하는데 생각이 안나. 어떻게 할 거야 이 놈의 거.
그래서 힘력 (力)자가 들어가요. 즉, 삼학의 삼대력(三大力)이라고 하지요. 힘이 한꺼번에 절대 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가운데 된다. 전체를 받쳐주는 것이 정진입니다. 정진이라는 것은 신분의성(信忿疑誠)의 성(誠)을 말해. 쭈욱 받쳐주는 힘. 마음이라는 것이 분명히 집으면 있고 놓으면 없지만, 그 안에 분명히 힘이 있고, 변화되는 마음이 있어. 없는 가운데 또 변화되는 것이 있어. 그것이 비로소 마음에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아까 집(集)은 마음이 뭉쳐버린 거야. 그래서 자유가 없어. 지혜광명을 가려버려. 그것이 나를 콱 묶어 버려. 그래 갖고 내가 맘대로 못해. 그런데 이 팔정도(八正道)를 잘 할 것 같으면, 즉 삼학공부 무시선을 잘 할 것 같으면, 서서히 내 마음이 새 깃털같이 자유롭게 된다. 그것이 힘이다. 힘이 없는 힘이여 마음은. 힘 없는 가운데, 한 마음 내면 되고, 놀자리 놓고, 들일 자리 들이고, 몰입할 때 몰입하고, 일 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딱 쉬고, 딱 집중해 버리고, 순간순간. 제가 아까 독경했지요. 그렇게 하셨어요? 아따 오늘 독경 기네~ 금강경까지 허고 있네~그런 사람 있었는가 몰라. 그것은 뭐냐, 그 순간 마음을 놓치고 있는 거에요. 그 순간 정념이 아니야. 그 자체를 받아 들여야 하는데, 그 자체를 거부하고 있거든. 왜그러냐. 무명과 업의 덩치가 딱 발휘해 버려. 자기도 모르게 그 생각이 나는 거에요.
팔정도(八正道)는 바르게 사는 것이고, 조화롭게 사는 것이고, 깨침을 얻어서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행복한 삶과 팔정도는 비례한다. 부처님은 이 삼학 공부를 통해서, 팔정도 공부를 통해서 깨침을 얻으셨고, 그 고를 멸하는, 고통과 집착을 다 해결해버리고 그 고통을 멸한 자리에, 그 진리 자리에 들어가셨다.